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여행스케치

004. 장주암 선생님의 San Francisco 안내 설명 4

忍齋 黃薔 李相遠 2023. 2. 25.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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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TonFxztG0oM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에 가면 12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는 수고를 하지 않고 순간이동을 통해 중국에 온 듯한 착각이 듭니다. 사무적이고 질서정연한 금융가를 벗어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비아시아 지역 최대 규모이자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차이나타운을 만날 수 있으며, 곳곳에서 들리는 광둥어와 만다린어, 수많은 음식 가판대, 딤섬 식당, 신비로운 매력의 상점들이 가득한 거리가 펼쳐집니다. 이곳에 오면 마치 다른 나라에 와 있는 것 같으며 실제로 중국에 가지 않고도 진정한 중국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차이나타운의 중심지이자 상점과 장신구 및 비취 가게(특히 남쪽의 차이나타운 게이트웨이 주변에 밀집해 있음)가 줄지어 있는 쇼핑 도로인 그랜트 스트리트(Grant Street)만 둘러보는 것도 좋지만 더 깊이 들어갈수록 더 놀라운 경험을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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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에 온 최초의 중국인 이민자들은 1848년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남자 두 명에 여자 한명 꼴로 미국에 왔습니다. 대부분 중국의 타이산과 중산 지역에서 온 샌프란시스코 이민자들은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 기간 동안 광산에서 일했습니다. 그리고 1853년 북미 최초의 아시아 교회는 차이나타운에 있는 장로교회였습니다. "중국 학교"는 1859 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중국 어린이들은이 '중국 전용'학교에 배정되었습니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의 다른 공립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중국인 인구에 대한 많은 불행하고 차별적 인 법률 이후, 결실을 맺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 만 긍정적 인 순간이있었습니다. 1908년에 설립된 중국 상공회의소와 1911년에 설립된 차이나타운 YMCA가 생겨났습니다. 1965 년 이민 및 귀화법은 진정으로 중국인을 위해 상황을 바꾸는 데 도움이되었습니다. 그것은 "이민에 대한 제한을 더욱 완화하고 1954 년 엘리스 아일랜드 폐쇄 이후 또 다른 이민의 물결을 촉진했습니다. 많은 중국인과 다른 아시아인들에게 이것은 국내에서의 정치적 억압에서 벗어날 수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으며 미국 전역의 차이나 타운 인구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2011 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최초의 중국계 미국인 시장으로 지명 된 에드윈 리 (Edwin Lee) 시장 선거를 포함하여 지역 사회를위한 주요 긍정적 인 단계로 빠르게 나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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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재팬타운에는 포스트 스트리트 (Post Street) 도로를 따라 근처에 위치하며 많은 수의 일본 식당, 슈퍼 마켓, 쇼핑 몰, 호텔, 은행 등이 있습니다. 재팬타운에는 한국 식당도 꽤 많이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재팬타운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웨스턴 애디션 (Western Addition) 지역의 일부로 조성되었고 1906년 지진 전에는 샌프란시스코에 2개의 재팬타운이 있었는데 지진 후에 일본인 이민자들이 이 지역으로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세계 제 2차 대전까지 샌프란시스코 재팬타운은 일본 본토를 재외한 가장 큰 일본인 거주지가 되었고 당신 동경의 긴자 지역과 흡사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이후 재팬타운의 일본인들은 크리스탈나하트 (kristallnacht: 나찌에 의한 유대인의 수난) 같이 길로이 쪽 수용소에 수용되는 수난을 받았습니다. 1942년 루즈밸트 대통령은 모든 재미 일본인들을 구금하는 법령에 사인했고 1943년의 재팬타운의 일본은 거의 비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은 흑인들로 채워졌습니다. 전쟁 후 일부 재미 일본인들은 샌프란시스코로 돌아 왔지만 재팬타운으로 돌아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새로 오는 이민자와 일본 정부/회사의 투자도 재팬타운으로 많이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 1957년 샌프란시스코는 오사카와 자매결연을 맺었고 2007년 재팬타운 근처의 도로는 오사카 웨이 라는 길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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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4월 18일 대지진과 뒤따른 대화재로 도시가 초토화된 적이 있으며, 1989년 10월 17일 오후 5시 4분 또다시 규모 7.1의 강진이 발생한 미국 최고의 지진 위험 지대입니다. 특히 1989년 지진이 유명한 것은, TV로 생중계된 지진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당시의 메이저리그 월드 시리즈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간의 일명 베이 브리지 시리즈(혹은 Battle of the Bay)였는데, 팀이 서부 끝에 있는 관계로 동부 지역 야구 시청자의 배려를 위해 3차전을 오후 5시 30분(동부 기준 오후 8시 30분)이라는 이른 시각에 경기를 진행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경기 시작 30분 전에 규모 7.1의 강진이 덮쳤습니다. 당시 프리 게임을 중계하던 ABC의 화면이 갑자기 끊어지고, 경기장은 강진으로 인한 엄청난 혼란에 빠졌습니다. 당시 ABC 방송 결국 이 지진으로 인해 3차전 경기는 취소되었고, 월드 시리즈가 무기한 연기되었습니다. 그래도 내진 설계가 잘 되어 있어서, 베이 브리지는 교각 일부만 무너지는 피해를 입고 지진 발생 1개월 가량 지난 후 다시 차량 통행이 재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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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형태 자체도 좀 특이합니다. 샌프란시스코 앞에서 바다가 육지 안으로 세 갈래로 갈라지는데 샌프란시스코가 그 한가운데로 쑥 들어간 형태입니다. 때문에 그 옆에있는 오클랜드와 티뷰론으로 오가려면 배를 타거나 빙 돌아서 가는 수밖에 없기에, 1900년대 초에 '다리를 놓으면 어떨까'라고 생각은 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돌 무렵,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베이 브리지(San Francisco–Oakland Bay Bridge)가 건설된 데 이어, 세기의 건축물 중 하나인 골든게이트 브리지(Golden Gate Bridge, 한자로 금문교)가 건설되면서 결국 외부 지역과 쉽게 연결되었습니다. 골든 게이트 브리지는 샌프란시스코의 상징 중 하나입니다. 다만 이곳은 샌프란시스코 자체의 바람이 제일 심하게 부는 곳 중 하나이니, 관광을 할 때는 두꺼운 옷이 필수이고 한여름에도 자켓이 필요합니다. 거기에다 안개가 매우 짙게 낍니다. 짙은 안개가 거의 하루종일 낍니다. 해가 쨍쨍 비치는 12시가 돼서도 기세는 살짝 줄어들어도 여전히 짙게 깔려 있습니다. 물론 멀리서 보면 안개 위로 금문교 꼭대기가 살짝 솟아 있어 신비로우면서도 매우 멋진 경관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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