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한국기독교장로교 공로목사 장희진 선생의 흔적을 찾아서

忍齋 黃薔 李相遠 2023. 2. 28.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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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에 발간된 한신대학 50년사 106 페이지 제3편 수유리 캠퍼스 시절의 신장(1958-1980)에 "1957년 2월의 이회 실행위원회는 본관 건물의 설계와 시공책임자로서 본교 제1회 졸업생인 정희진 목사를 임명하였다."고 나옵니다. 한국민주화의 선봉에 섰던 한국기독교장로교의 요람 한국신학대학의 본관신축을 평양 조산신학교 1회 졸업생인 장희진 목사님이 총책임을 맡아 캐나다 장로교단의 지원을 받아 건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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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진 목사님은 1904년 7월 18일 함경북도 부령군 형제리에서 아버지 장윤식 선생과 어머니 이임칠 여사 사이에서 9남매중 다섯째로 출생하셨습니다. 어린시절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만주 용정중학교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공부한 후 동생과 함께 만주를 오가며 무역업을 하였으나 적성에 맞지 않았습니다. 1929년경 원산 루시 성경학교를 졸업한 같은 부령출신 김숙정 (1910년~2000년) 여사와 혼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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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같은 부령출신으로 후일 연극배우가 된 친구 윤봉춘 선생과 함께 1935년 서울로 와서 피어선 성경학원을 다니며 신학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목사가 되고자 1939년 장공 김재준 목사가 설립을 주도한 서울 조선신학교에 입학하여 1941년 1회 졸업생이 되었습니다. 첫 부임지는 함경북도 길주군 길주교회였습니다. 1944년에는 함경남도 북청군 북청중앙교회로 옮겨 사역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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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13일 4째이자 장남 장소암이 태어났습니다. 아들 장소암이 소아마비에 젖도 부족하여 염소를 길러 염소젖을 공급하였습니다. 그때 남는 염소젖을 영양이 부족한 일본아이들도 마시게 했습니다.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고 일본인들이 수용소에 감금되었습니다. 감금된 일본아이에게 염소젖을 공급해 주었는데 북청 공산당 인민위원회는 그런 장희진 목사를 반동으로 몰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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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공산치하를 견디지 못하고 1947년 장희진 목사는 온가족을 이끌고 월남하였습니다. 월남하여 1948년 서울 신촌 신암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신자중에는 현재 최고령 철학자로 알려진 김형석 교수가 그당시 집사로 신암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1948년 10월 7일 신촌에서 5째이자 둘째아들인 장주암이 출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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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선교지역인 함경남북도로 가지못한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는 김형숙 목사의 권고에 따라 함경도출신 유학생을 위해 기숙사를 후암동에 적산가옥 두체를 마련하여 남여학생 기숙사 관북학사란 이름으로 열었습니다. 이때 초대 사감으로는 신사동 교회 목사이자 조선신학교 3회 졸업생인 조향록 목사가 맏았고 그 이후는 장희진 목사가 맏아 운영을 하였습니다. 6.25로 문을 닫았다가 6.25이후 이영민 목사가 재건하였습니다. 그 이후 신우학사로 이름을 바꾸어 한신대학교 기숙사로 흡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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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명진교회를 퇴계로에 개척하여 1952년 유락교회로 개명하고 조선전업땅 500여평을 불하받고 주한 미군의 원조를 받아 명실상부 한국기독교장로교 최대의 교회인 한일교회로 부흥시켰습니다. 그런 장희진 목사의 교회건축 능력을 인정한 한국기독교 장로교단은 1957년 그에게 한국신학대 수유리 캠퍼스 건설의 진두지휘를 위탁하였습니다. 장희진 목사는 캐나다 장로교단의 10만불 지원을 유치하여 현재의 한신대학의 발판을 다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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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커지고 신도수가 늘면 주도권을 쟁취하려는 사람들이 생기는 법입니다. 1930년생인 장희진 목사의 장녀 장정자는 광희국민학교 동명여고 숙명여대를 나와 미국백인분과 결혼하였습니다. 교회패권을 잡으려는 자들이 당회에 장희진 목사의 장녀가 미국인과 결혼한 것을 목회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진정을 냈습니다. 그리고 따님이 흑인을 낳았다고 소문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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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문을 고지듣고 따님집까지 찾아가 행패를 부리는 사람까지 생겼습니다. 장희진 목사는 1961년 자신이 일구어 반석을 다진 한일교회를 조향록 목사에게 넘기고 은퇴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양봉업으로 생업을 바꾸어 서울 변두리인 한남동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장희진 목사의 인품과 신앙심에 따라온 교인들을 위해서 한남교회를 만들어 무보수로 사역하여 1975년 온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할때까지 봉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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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주, 북청, 서울 등지에서 목회를 했으며 자비를 드려 건축한 교회들을 교단에 헌납하고 평생 목회자로 수고비 한푼 받지 않고 양봉과 양계 등으로 가족을 부양 한 고귀한 목회자였으며 본회퍼 목사의 고백교회의 정신을 이어온 분이었습니다. 1991년 5월 13일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노회에서는 장희진 목사를 공로목사로 추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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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진 목사의 부인 김숙정여사는 2000년 90세를 일기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작교하셨습니다. 장희진 목사는 이민지 샌프란시스코 연합장로교회의 설교목사로 봉사하다 3남3녀를 남기고 2010년 106세를 일기로 작고하셨습니다. 그분의 둘째 아드님이자 다섯째가 바로 전두환이 카퍼레이드를 버리던 엘에이 올림픽 블로바드에서 몽둥이로 카퍼레이드차의 앞유리창을 내리친 샌프란시스코 민주인사 장주암 선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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