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후암동 관북학사 신우학사, 캐나다 선교회, 그리고 한국기독교장로회와 한신대학교

忍齋 黃薔 李相遠 2023. 6. 22.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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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동 적산가옥

1950년 후암동 언덕에 캐나다 선교사들이 경영하는 관북학사 초대사감을 한신대 3회 졸업생 난곡 조향록 (1920~2010) 목사가 맡아서 했었다. 김형숙 (1893~1961) 목사는 일제말기 함흥에서 캐나다 선교사들을 도와서 협력하셨던 분이고 또 일제말기 캐나다 선교사가 한국에서 일본인들에게 추방되어 간 이후 그 선교부의 모든 재산과 선교사들의 가재도구까지 책임져서 보관하고 지켜 주었던 분이다. 8·15해방이 된 이후 캐나다 선교사들이 북한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고, 김목사도 고당 조만식 (1883~1950) 선생이 이끄셨던 조선민주당 함경남도 도당위원장까지 맡아 반공투쟁을 하다가 결국 남하하고 만 것이다. 서울에서 옛 친구들인 캐나다 선교사들을 맞아 이북에서 남하한 학생들을 도와주려고 캐나다 선교부의 지원을 얻어 관북학사를 세우고 그 관리를 책임진 총무 일을 보았다. 위원장은 캐나다 선교사인 서고로 목사였다. 1950년 6.25전쟁통에 캐나다 선교부는 관북학사를 그대로 놔둔체 온다간다 말도 없이 피난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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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선교부는 함경남북도, 만주에 간 우리민족과 독립군들을 중심으로 시베리아에 있는 우리민족, 일본에 가 있는 우리 교포, 이 3군데 사람들을 캐나다 선교부에서 전도를 맞아서 담당했다. 캐나다 선교회는 교회를 짖는대신 북한지역에서 공부하러 나온 학생들을 위해 숙소를 제공하고 먹을 것을 준비하여 뒷바라지를 해주는 것이 좋겠다해서 관북학사라는 것이 생겼다. 그 관북학사를 남여학사를 따로 해서 후암동에다 일본 적산집 2채를 사서 열었다. 초대 학감이 바로 신사동교회 목사로 있던 조향록 목사다. 6.25 후에 이영민 (1925~2014) 목사가 주관하여 다시 재건했다. 1953년부터 기장과 예장으로 분열되자 캐나다 선교회는 기장을 도와 캐나다에서 보낸 10만 불로 수유리에 한신 대학에 1회 졸업생 장희진 목사가 주관이 되어 한신대학 건물을 건축했다. 그외에도 캐나다 선교부에서 가지고 있던 건물들을 기장이 이양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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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선교부와의 인연으로 기장은 관북지방과 긴밀한 관계가 있고, 또 선교초기에 그 곳에 복음의 씨를 심은 사람은 선교사가 아니고, 성재 이동휘 (1873~1935) 선생이다. 이동휘는 독립운동가로서, 상해파 고려공산당 당수도 지냈지만 기독교 정신을 간직한 분이다. 그가 레닌(1870~1924)을 만난 다음에 러시아 공산당 기관지나 신문기자들이 묻자, 레닌이 “그 사람(이동휘)은 공산당의 공자도 모르지만, 원동에서 온 정치지도자들 중에서 최고의 지도자다”라고 했다. 패권쟁취에 빠진 한국계가 만든 이레츠크파 고려공산당이 이동휘 선생파를 모함해서 이동휘 선생이 9개월 동안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레닌이 죽지 않았다면 절대로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이동휘는 초기에 한국 공산당의 시작인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만든 사람이지만, 1917년부터 레닌 사망때인 1924년까지 조선 주변국 중에 조선이라는 약소국가를 돕겠다고 깃발이라도 들고 나왔던 나라는 소련 말고는 없었다. 당시의 열강들은 다 제국주의로 흘러서 아시아의 땅을 자기들이 나눠먹으려고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독립운동은 이동휘 선생파만이 가장 효율적이고 가시적으로 했다. 캐나다 선교부의 지원으로 인한 이동휘 선생을 주축으로 한 관북학파의 생성과 그 영향이 기장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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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부터 일제가 군인이 아닌 민간인을 총독으로 세워 조선에 문화정책을 펴면서 생활개선과 경제개발을 하고, 나름 조선인을 존중하는 자세를 보였다. 조선인들이 혹했고 또 조선 지도자와 교회도 같이 협력을 했다. 미국은 자기들과 비밀 동맹을 맺었던 일본이 조선을 무력으로 침공하는 데는 불만을 가졌지만 조선을 키우는 것은 좋아했다. 미국의 정책이 그러면 조선에 온 미국 선교사들은 그 정책을 충실히 따랐다. 미국 선교사들은 자기 본국의 정치적인 향배에 대해서 거부감을 표시하는 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3.1 운동 때 조선을 도운 미국 선교사는 거의 없었다. 거의 캐나다 선교사들이거나 미국 선교사들 가운데서도 아일랜드 출신 선교사들이 도왔다. 미국의 앵글로 색슨 피를 받은 미국 건국의 기초를 쌓은 사람들은 미국 정부의 정책을 충실히 따른다. 그래서 미국 선교사들에게서 독립이니 민족의 자존이니 하는 말은 들을 수 없게 되고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기복적인 부흥 운동으로 전환한다. 그런 기복적 부흥 운동으로 인해 1935년에 한 사람의 저항도 없이, 기독교총회가 만장일치로 신사참배를 결정했다. 3.1 운동에서 피 흘리고 싸웠는데, 20년도 채 안 지나서 신사참배를 기독교총회가 결정한 것이다. 그러면서 조선 기독교는 정치 사회 문제에 불간섭주의로 나가게 되었다. 예수 믿고 천당 가자는 기복적인 구호가 전면에 나왔다. 결국 민족의 고민을 안고 함께 눈물을 흘리는 일이 교회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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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속에서 만우 송창근 (1898~1951) 박사, 장공 김재준 (1901~1987) 목사, 추양 한경직 (1902~2000) 목사는 달랐다. 송창근은 이동휘 선생 밑에서 어려서부터 민족정신의 훈육을 받았고, 또 조선의 민족 지도자 조만식 선생이 계시던 교회를 맡기도 했고, 송창근과 함께 그들은 선교사 지배에서 벗어나서 자주 민족의 자립교회를 추구했다. 그런 의식을 가진 사람들하고는 선교사들이 딱 관계를 끊었고 아주 인색했다. 그러고 또 선교사 밑에서 지도받은 이들이 교계의 교권을 가지고 정치적인 야망을 대리 충족시켰다. 그렇게 기독교와 일제의 야합이 시작 되어 해방이후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939년 승동교회 장로 김대현이 50만원을 기부하여 조선신학교의 설립인가를 받고 승동교회에서 김재준 목사와 송창근 박사 등을 교수로 하여 현대적 신정통주의 신학교육을 시작하였다. 1949년 한경직은 17세기 복고적 개혁주의 신학교육을 요구하며 별도의 장로회신학교를 개교하였다. 조선신학교는 1953년에 이름이 한국신학대학으로 바뀌어 현재 한신대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은 신학교 교육에 조선의 미래를 걸었고 그것이 조선신학교와 한국신학대학으로 이어져 온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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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학사 학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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