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7_20세기100선

052.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 – The Order of Things by Michel Foucault, 1966

忍齋 黃薔 李相遠 2023. 12. 7.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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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Ds-yVbHozgw

052.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 – The Order of Things by Michel Foucault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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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근대화 논의의 ‘난해한 철학자’라는 오명과 더불어 1984년 6월 25일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AIDS로 프랑스 저명인사로는 처음으로 파리에서 사망한 미셀 푸코는 그 죽음만으로도 많은 이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습니다. 하지만 탈근대에 관한 난해한 논의는 미셀 푸코의 독특한 역사 분석의 방법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파생적으로 등장하게 된 영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미셀 푸코 후기의 계보학적 방법에 근거한 ‘권력과 지식’의 연계문제에만 피상적으로 초점을 맞춤으로써, 미셀 푸코의 철학적 배경과 초기의 고고학적 방법에 의해 마련된 역사이해의 방법 및 인식론적 기반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오해일 뿐입니다. 푸코가 자신의 논의 기반인 역사적 실증성의 영역들을 어떻게 분석함으로써, 기존의 역사적 성과물들을 재평가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인식틀 속에서 분석하고 있는지는 바로 미셸 푸코의 1966년 작 이 ‘말과 사물’을 읽어보면 그 오해는 일거에 사라집니다. 또, 1950년 푸코가 교수자격 시험에 낙방했을 때 필기시험에 대한 심사위원장의 코멘트가 이책의 성격을 이야기 합니다. “주어진 주제를 다루기보다는 자신의 박학을 과시하는 데 치우쳤음”입니다. 이 말마따나 '말과 사물'은 독자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만큼 난해하기 짝이 없는 책입니다. 어려운 문자써가며 뻔한 이야기 어렵게만 이야기 하는 사람에게 박학다식한 잘난체는 바로 이렇게 하는 거라고 권하고 픈 책입니다. ‘말과 사물’을 미셸 푸코의 생애와 그 업적을 살펴보면서 파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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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의 생애와 업적 – Life and Achievements of Michel Foucault

‘말과 사물’ 저작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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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Michel Foucault, 1926년 10월 15일 ~ 1984년 6월 25일)는 1926년 10월 15일 프랑스 중서부 프와티의 유복한 외과의사 집안의 폴 푸코(1893-1959)와 앤 말라퍼트의 2남 1녀 세자녀 중 둘째 겸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4살에 누나를 따라 앙리 4세 초등학교에 들어가 앙리4세 고등학교를 거쳐17세에 바칼로레아 시험에 합격한 뒤 다시 생 스타니슬라스 고등사범학교 준비반 과정에 들어가 공부하지만 가업을 이어 외과의사가 되길 원하는 부친과의 갈등으로 낙방합니다. 푸코가 고등사범학교 시험에 합격한 것은 동생 드니가 외과의사된 뒤인 1947년, 21살로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4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합격했을 때의 기쁨과는 반대로, 고등사범학교에서의 기숙사 생활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푸코는 고독했고 날카로웠습니다. 그는 격렬하게 남들을 조롱했고, 누구하고나 논쟁을 벌였고, 불같이 화를 냈으며, 온 사방에 공격성을 들이댔는데, 이 때문에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마음이 불안정했던 푸코는 이시기에 푸코 자신의 동성애적 취향을 확인하고는 심한 수치심과 자괴감을 느껴 몇 번의 자살 시도를 했습니다. 하루는 교실 바닥에 누워 면도칼로 가슴을 그으려는 순간 어떤 선생님이 이를 보고 제지한 적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아버지와 함께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가는 날도 있었습니다. 당시는 동성애자로 살기가 쉽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푸코는 이러한 상처를 보상받기 위해 악착같이 공부했습니다. 고전주의 철학, 칸트, 헤겔, 마르크스 등등 모든 것을 읽었고 후설과 하이데거 원전을 읽기 위해서 독일어 공부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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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23살에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의 역사적 초월성 구성”이라는 제목으로 석사논문을 썼습니다. 그리고 고등사범학교에서 진행하는 메를로퐁티와 알튀세르의 강의도 놓치지 않고 빠짐없이 들었습니다. 푸코는 1948년에 철학학사학위를, 1949년에 심리학 학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특히 25세 때인 1951년에 교수자격 시험에 합격한 뒤 알튀세르 밑에서 심리학 조교를 하며 강의도 했습니다. 푸코는 알튀세르의 영향 때문에 보수적인 성향과 다르게 공산당에 입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탓인지 푸코는 공산당 내부에서 열렬한 투사도 아니었고 1년 뒤인 1952년엔 공산당을 탈당했습니다. 생트 안 병원에서 연수생 자격으로 임상실습을 하며 학생들을 꽤나 열정적으로 가르쳤습니다. 1년 뒤인 1952년엔 파리 심리학연구원에서 정신병리학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릴 대학 심리학 조교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러면서 이때 프리드리히 니체와 조르주 바타유에 빠져들었습니다. 심리학적 연구는 더욱 진행되어 이를 바탕으로 푸코는 1954년에 첫번째 저서 “정신병과 인격”을 출간했습니다. 이렇게 심리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푸코의 공부는 깊어지고 있었지만, 푸코는 항상 프랑스의 억압된 사회와 보수 문화적 삶을 견디기 어려워했고, 프랑스를 탈출하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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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스웨덴 웁살라 대학에서 프랑스어 강의와 프랑스 문화원을 맡아줄 사람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이 문화원의 기능은 다른 모든 문화원과 마찬가지로 강연, 토론, 오락 활동 등을 통해 프랑스의 문화와 언어를 현지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푸코는 인도-유럽 신화학의 대가인 조르주 뒤메질을 통해서 이 자리를 추천받았습니다. 답답했던 프랑스를 벗어나고 싶었던 푸코는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1955년 29세의 나이로 스웨덴 프랑스 문화원장 자리에 부임했습니다. 하지만 푸코의 기대와는 다르게 1958년까지 스웨덴에서 보내게 될 3년간은 푸코에게 매우 어려운 시간이었습니다. 푸코는 스칸디나비아의 살을 에는 겨울 추위를 견디기 힘들어했습니다. 심지어 푸코는 겨울에는 오후 2~3시만 되면 해가 지는 웁살라 도시는 너무 우울해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점차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 갔고 그럭저럭 생활을 즐길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차를 한 대 구입하기 위해 스톡홀름으로 나서서, 베이지색의 멋진 재규어 차를 한 대 사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일은 검약에 익숙해 있는 웁살라 대학 사회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엄격한 대학사회의 말단 강사가 이처럼 부를 과시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물론 푸코는 할아버지 아버지 동생이 외과의사인 집안으로 제법 잘 살았고 집에서 계속 푸코를 경제적으로 도와주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풍족했습니다. 그리고 푸코는 금욕주의자거나 절약주의자도 아니었습니다. 푸코는 스피드를 즐겼고 미친듯 운전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푸코의 재규어는 푸코를 아는 모든 웁살라 사람들에게 하나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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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푸코는 자신의 일에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푸코는 문화원장의 일에 온 정력을 바쳐 일했습니다. 푸코는 문화원에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도입했으며, 강연과 영화상연, 그리고 연극을 했습니다. 연극에서는 직접 해설과 배우로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카뮈가 1957년 노벨문학상을 받으러 스웨덴에 왔을 때, 푸코는 문화원장으로서 카뮈를 맞이했습니다. 문화담당 참사관은 보고서에서 "푸코는 일반 문화강좌에서 훌륭한 강연회를 개최하는 것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으나, 그 모든 일을 혼자서 성공적으로 수행하느라 일에 짓눌려 그의 건강이 글자 그대로 죽어 가고 있지 않는가 걱정이 된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동시에 푸코는 웁살라 대학에서 그 유명한 ‘광기의 역사’로 알려진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했습니다. 논문이 거의 완성되었을 때, 박사논문을 제출하기 위해 푸코는 웁살라 대학에서 논문심사를 해줄수 있는 린드로트 교수에게 자신의 논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린드로트 교수는 실증주의자로 난해한 사변과 문학적 문체를 좋아하지 않아서 푸코의 논문을 부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래서 푸코는 결국 웁살라  대학에서 박사논문을 제출하지 않고 스웨덴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나중에 린드로트 교수는 다른 교수들과 학자들에게 그 논문의 가치와 푸코의 천재적 징후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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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프랑스 정부는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 내에 프랑스 문화원을 설치할 계획을 세웠고 프랑스어 강사겸 문화원장을 구했습니다. 푸코는 여기에 신청했고, 그 전 업무평가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푸코가 선정되었습니다. 여기서도 그는 폴란드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문화행사에 참석하는 등 헌신적으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 첩보전에 휘발려 미소년계에 당해 푸코는 급히 폴란드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푸코는 한 미소년을 만나 이 숨 막히고 우울한 나라에서 잠시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이 소년은 동구권 사찰기관의 끄나풀로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아침 푸코는 프랑스 대사로부터 폴란드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언제요?"라고 푸코가 물었고 "지금 당장"이라고 대사가 말했습니다. 그렇게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명석하고 빈틈없고 날카로운 두뇌와 깊은 학식을 가진 푸코는 행정 감각마저 가지고 있다"며 푸코를 격찬하는 보고서가 작성되었습니다. 이후 독일의 함부르크 대학의 프랑스 문화원을 잠시 운영했고, 그곳에서 마침내 박사학위논문 ‘광기의 역사’를 완성한 푸코는 1960년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프랑스에서 국가박사학위를 취득하려면 두 편의 논문을 체출해야 했고, 그 중 한 편은 반드시 책으로 출판해야 했습니다. 출판할 주논문은 ‘광기의 역사’였고, 보조논문은 칸트의 ‘인간학’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었습니다. 푸코는 당시 고등사범 학장이었고 헤겔전문가로 유명한 장 이폴리트에게 논문지도교수를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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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을 받아 든 이폴리트는 주논문인 ‘광기의 역사’를 경탄의 눈으로 읽었고 이 논문은 ‘정상과 병리’를 썼던 캉길렘이 지도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는 자신은 보조논문에 대해서만 지도교수가 되겠다고 수락했습니다. 캉길렘도 푸코의 논문을 읽고선 이 논문이 수준 높은 논문이라 확신했고 주저없이 논문 심사교수가 되기를 수락했습니다. 1961년, 35살에 푸코는 심사위원들과 학자들 앞에서 논문발표를 시작했습니다. 자그마한 강당은 100여명의 사람들로 꽉 채워졌습니다. 거기서 푸코는 "광기를 말하기 위해서는 시인의 자질을 가져야 한다"며  ‘광기의 역사’를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발표가 끝난 후, 심사위원들은 푸코 논문의 문제점들을 지적했습니다. 푸코에게도 발언권이 주어졌고, 토론은 격렬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심사위원들은 날카롭게 공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문평가는 '매우 우수하다' 였습니다. 심사위원장은 "푸코 씨가 제출한 두 논문은 성격이 판이하지만 찬사와 비평을 동시에 받을 만합니다. 깊은 교양, 강한 개성, 지적 풍요, 이것이 푸코 씨의 명백한 장점입니다. 그러나 우수한 논문에 반드시 따라야 하는 작업에 대한 부주의가 눈에 띄었습니다. 칸트의 텍스트에 대한 정확하지만 세련되지 못한 번역, 매혹적이지만 좀 부족한 사실들을 토대로 성급하게 쌓아 올린 관념 등입니다."라는 논문심사의 결과를 알리는 공식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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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박사학위심사를 통과했고 곧 프랑스 남동부 오베르 뉴론알프 레지옹에  있는 클레르 몽페랑 대학의 교수가 되어 심리학 강의를 맡았습니다. 이 시절, 푸코는 '멋쟁이 댄디'였습니다. 검은색 벨벳 양복에 흰색 스웨터, 그리고 녹색의 두터운 모직 망토를 입고 다녔습니다. 번민에 휩싸여 남들과 잘 사귀지 못했던 고등사범학교 시절의 그 병적인 청년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푸코의 모습은 쾌활하고, 부드럽고, 경쾌했습니다. 냉소와 도발의 취미는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으나 그는 그것을 자신의 인격 속에 잘 통합시켰습니다. 교육방식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웁살라 대학 때와는 다르게, 클레르-몽페랑에서는 철저히 교육적인 강의를 했습니다. 그의 강의는 좋은 의미에서 교과서적이었습니다. 학생들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푸코를 사랑하고 존경했는데, 강의가 끝나면 함께 이야기를 했고, 퇴근하는 역까지 그를 배웅했습니다. 그 대학에서의 마지막 해에는 매시간 끝마다 학생들에게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물로 1963년에는 ‘임상의학의 탄생’을 출판했습니다. 그러나 심리학을 가르치는 일이 지겨워졌고 지방 도시의 비좁음이 갑갑해져서 푸코는 1965년과 1966년도 학년 말에 클레르-몽페랑 대학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브라질에서 교편을 잡고있는 제자의 초청으로 잠시 브라질에서 2개월간 머물면서 상파울루 대학에서 몇 번의 강의를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 유명한 책 ‘The Order of Things, 사물의 순서, 한국말 번역제목인 “말과 사물”’이 완성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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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사물의 저작배경 – Background of The Order of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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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 ‘말과 사물 (The Order of Things)’은 1966년에 출간되었습니다. 초판 3500부가 단숨에 매진되었습니다. 그 다음 달에 5000부를 더 찍었습니다. 다다음달에도 그 다음달에도 계속해서 찍어댔습니다. 1989년 23년간 이 책의 총 발행부수는 100만 부가 넘었습니다. 철학책이 100만부를 넘긴 경우는 정말 드문 일이었습니다. 이 책이 한참 잘 팔리던 1966년 여름에는, 신문기사에 '푸코의 책이 모닝빵처럼 팔려나간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책을 바캉스를 떠날 때도 가지고 갔고, 심지어 해변에서도 읽었습니다. 자신도 그 유명한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카페의 테이블 한옆에 그저 무심하게 그 책을 슬쩍 놓아두는 것도 유행했습니다. TV는 물론이거니와 소설과 영화에서도 이 책이 언급됐습니다. 거의 모든 방면에서 해설, 소개, 비평, 논쟁 등이 일어났습니다. ‘르 몽드’에서는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라고 말했으며, ‘르 피가로’에서는 "인상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모든 시대는 그 문화를 형성하는 '앎의 격자'를 통해 담론 (에피스테메 épistémè; 진리 와 담론 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를 형성하고 그 시대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그 담론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하는 것은 각 시대적 담론은 역사적으로 '불연속적'이라는 점입니다. 마치 서로 다른 지층이 구분이 되듯이, 시대마다 다른 담론(에피스테메)가 각각의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각각 다르게 규정합니다. 고전주의 시대의 담론은 자연사, 부(富)의 분석, 일반 문법이었고, 19세기 시대 이후의 담론은 생물학, 정치경제학, 문헌학 등의 인간학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 담론을 대체할 새로운 담론이 나올 것인데, 그것이 정신분석학, 민족학, 언어학, 등의 구조주의적 담론이 될 것이라는 게 푸코의 주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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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 없는 익명의 체계', 즉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생각은 그 시대의 담론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푸코의 주장은 즉각 수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푸코의 구조주의가 "그가 의식했든 안했든 미래의 이상을 은폐하려는 부르주아의 이해에 봉사"한다며 비판했고, 가톨릭 에서도 "모든 것이 체계에 의해 정해져 있다면 진보주의적 정치가 개입할 수 있는 토대를 제거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비판했습니다. 사르트르 조차도 "푸코는 어떻게 하나의 담론에서 다른 담론으로 넘어가는지를 말해 주지 않는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실천, 즉 역사를 개입시켜야 하는데 그는 이것을 거부했다."며 비판에 가세했습니다. 이후 푸코는 ‘말과 사물’의 개념을 보다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1969년 ‘지식의 고고학’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자신의 저서들을 회고할때, 그의 '형식주의' 시기 두 작품인 ‘말과 사물’ 그리고 ‘지식의 고고학’은, 그가 가장 애착을 가졌던 작품이 아니며 자신의 '진정한 책'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진정 자신의 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광기의 역사’와 같은 광기, 범죄, 섹슈얼리티 등등에 대한 저작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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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사물’ 저작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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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르-몽페랑 대학교수 자리에서 나온 푸코는 새로운 자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운명의 장난처럼 튀니스 대학 철학과에 때마침 빈자리가 났고, 상상할수 없는 박봉임에도 불구하고 푸코는 친구의 친구를 통해 그 자리를 소개받았습니다. 그래서 푸코는 행정절차를 거쳐 1966년 9월 말, 튀니스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제법 잘 적응했으며 학생들을 정말 열정적으로 가르쳤습니다. 또한 매주 금요일마다 공개강좌를 열었는데, 한번 강의할 때마다 청중이 2백 명 이상씩 몰려들었습니다. 다만 학생들은 푸코의 강의에 열광했지만, 푸코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서는 지지를 유보했습니다. 학생들은 푸코가 마르크스주의를 싫어했기 때문에 '우익'으로 분류했습니다. 하지만 푸코는 좌익도 우익도 싫어했던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 동안 정치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노력했었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다시 정치 쪽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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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한 학생이 버스 요금을 지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두들겨 맞는 일이 발생하자, 이 사건이 화약에 불을 지른 꼴이 되어 온 대학으로 소요가 번졌습니다. 게다가 1967년 6월에 벌어진 제3차 중동전쟁으로 아랍군이 이스라엘군에 패주한 후로부터, 반유대주의를 외치는 폭력의 불길이 튀니지 수도 전체로 거세게 퍼져 나갔습니다. 이들 중 마르크스주의자 학생들은 패배의 대한 책임을 현정부에게 묻고 반정부 투쟁으로 선회했습니다. 그러자 정부는 강력한 조치로 학생들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학생들 중에는 푸코의 학생도 있었습니다. 푸코는 프랑스인 교수들과 함께 학생들의 구금과 고문에 항의하는 집회를 가졌습니다. 푸코는 그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프랑스 대사관의 개입도 요청했지만, 대사관은 튀니지의 내정에 간섭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답변해왔습니다. 그럼에도 푸코는 최선을 다해 학생들을 도왔습니다. 푸코는 일제소탕령에서 몸을 피신한 학생들을 자신의 집에 숨겨 줬으면, 자신의 정원에 학생들의 등사기를 감춰 놓고 유인물을 찍도록 도와줬습니다. 법정에까지 출석해서 학생들을 위해 증언을 했고 이들을 옹호했습니다. 이와 같은 완강한 활동으로 푸코는 몇 번이나 사복경찰의 위협을 받았으며, 시디 부 사이드로 가는 길에서는 정부쪽 누군가에게 붙잡혀 구타를 당했습니다. 그것은 튀니지 정부가 보낸 일종의 경고 메시지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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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비로소 마르크스주의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신화가 필요하다는 걸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원칙이라기보다는 토론을 통해 사람들을 행동 속으로 끌어들이는 미끼에 불과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쓸데없는 궤변이나 총체성 같은 거대 이론이 아니라, 그 열정과 행동  - 즉 구체적이고 분명하고 정확한 투쟁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푸코는 튀니스에서 목격한 반유대주의 폭동을 참을 수 없었고 무엇보다 이제 더 이상 심리학 강의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튀니스를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튀니스의 태양과 바다도 이제는 멀어질 시간이 되었던 겁니다. 푸코는 1968년 말쯤, 튀니지를 뒤로하고 파리에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뱅센 실험대학 설립에 참여했습니다. 뱅센 실험대학은 68운동에 크게 놀란 정부가 기존 교육에 대한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서둘러 착수한 고등지침법안에 의해 새로 만들어진 대학이었습니다. 푸코는 이 대학에서 강의하게 될 교수, 부교수, 조교수 전체를 뽑는 열두어 명의 선출위원 중 한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위원회가 구성되자마자 우익 신문과 대중지들로부터 위원회가 좌익의 집합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좌익 활동가들은 반대로, 푸코가 1968년 5월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그건 사실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푸코는 튀니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푸코는 철학분과의 사람들을 하나둘씩 모았는데, 자신을 포함한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에티엔 발리바르 등 유명철학자들이 합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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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뱅센에서 좌익 활동에 입문하게 됩니다. 68운동의 여파는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고 수시로 집회가 벌어졌으며 학생들은 벵센 대학을 점거하면서 농성을 했습니다. 푸코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밤중에 2천명의 경찰이 들이닥치며, 한쪽에는 최루탄이,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돌과 잡다한 물건들이 하늘을 날아다녔습니다. 경찰 병력은 조금씩 건물을 포위해 들어가 학생과 교수들을 큰 원형강의실 안에 몰아넣었습니다. 그러고는 120명 전부가 경찰본부에 연행됐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푸코도 다음 날 아침 일찍 풀려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34명의 학생들이 퇴학 조치되었고, 181명의 다른 학생들이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푸코는 이 억압조치에 항의하는 집회에서 연사로 나섰습니다. 그는 초만원의 그 집회에서 '공권력의 계산된 도발과 탄압'을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이후 벵센 대학에서는 학생집회, 시위, 경찰과의 충돌, 공산당과 좌파와의 전투, 또는 좌익 분파들 사이에서의 혈투가 일상적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런 혼란에도 불구하고 강의는 꾸준히 행해졌습니다. 푸코의 강의가 개설된 첫해에 6백 명 이상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다음 해부터는 수강생의 수를 제한하기 위해 훨씬 작은 강의실을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백여 명의 청강생이 몰려드는 것을 막을 순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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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뱅센에서 2년을 보냈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그의 경력에서, 그의 작품에서 유일하게 파란만장했던 2년간이었습니다. 푸코는 이 순간부터 행동과 성찰의 모든 전선에서 혈투를 벌이는 강건한 투사가 되었습니다. 1969년부터 푸코는 투쟁하는 지식인의 화신이 되었습니다. 푸코는 언제나 시위 현장에 나타났고, 선언문을 작성했고, '투쟁'하고 '비판'하는 그의 모습이 각인되기 시작했습니다. 1969년에는 사망한 장 이폴리트의 후임으로 콜레주 드 프랑스 고등사범학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평생을 이 자리에서 저 자리로 떠돌아다니고,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방황을 하던 푸코는 이제 드디어 파리의 심장부에, 그것도 가장 영광스러운 지식의 사원에 진입하여 붙박이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1년 뒤 개강연설에서 푸코의 강연을 듣기 위해 수많은 학생들과 학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경찰은 푸코가 선동강연을 해서 시위가 방생할것에 대비해 경찰차로 도로를 막고는 곤봉을 든 데모 진압대를 대기시켰습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강의실 안팎에 느껴졌습니다. 푸코는 이 강의실에서 나중에 '담론의 질서'라는 책으로 편집될, 그 유명한 강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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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사회는 사람들이 말을 한다는 사실, 사람들의 담론이 무한히 증식한다는 사실을 두려워하며, 그 담론의 생산을 통제하고 선택하고 조직하며 재분배하려듭니다. 구체적으로 우선 권력사회는 '진실'을 설정해서 '금기'를 정하고, 그것을 어긴 자와 지킨 자를 '분할'하며, 어긴 자를 '배척'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담론 내부에는, 글이나 말의 우연한 성격을 제거하기 위해 그것들에 말을 덧붙이는 '주석', 글이나 말의 하나하나 흩어진 단독성을 자아와 개체성의 인지 가능한 동일성으로 귀결시키는 '저자'의 개념, 앎을 배열하고 분류하며 거기에 동화되지 않는 모든 것을 변두리로 몰아내버리는 '규율' 등의 원칙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담론의 이러한 원칙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체검열하고 말을 조심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원칙 하에 과학적 기술적 의학적으로만 말하여 경제적 정치적 담론을 장악한 권력사회사람들을 안심시켜야합니다. 그 모든 것이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모든 교육제도는 기득권을 가진 일부 사람들을 위해, 앎과 힘의 담론을 재생산하고 유지, 수정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라는 것이 푸코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담론 속에 있는 금기, 배제, 제한의 사항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비판해야 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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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경찰들이 시위를 가혹하게 진압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연행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푸코는 '사람을 개처럼 다루는' 한심하고 억압적인 체제를 비판하기 위해 감옥정보그룹(GIP)을 결성했고, 시위에 참여하여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 푸코는 선전물을 보내고 사람들을 만나고 전화를 수천 통씩 했으며 계획을 세우고 할 일을 정리했고 수감자에 대한 인권침해를 조사하여 소책자도 간행했습니다. 푸코는 몇 번의 기자회견에 참석했고 범죄기록의 철폐를 요구하는 유인물을 나눠 주던 중 거칠게 연행되기도 했습니다. 이주노동자가 경찰서에서 살해됐을 때, 그 사건에 대한 항의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게 곤봉으로 폭행을 당하고 독방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감옥과 사법제도에 관한 서문, 기고문, 인터뷰, 논쟁, 심포지엄 발표문들을 출간하고, 사형제도 반대 운동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런 실천적 행동으로 얻어진 사유를 통해, 1975년 푸코가 스스로 가장 만족했던 책인 '감시와 처벌'이 탄생했습니다. '감시와 처벌'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파놉티콘의 개념은 '권력의 시선'을 가리키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르 몽드'는 그 책에 대한 소개를 신문 중간의 양면 전체에 특집호로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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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유명 인사가 되어 논문, 신문기사, 현대사 책들에 무수하게 이름이 언급됐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그의 투쟁은 계속되어,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정부가 11명의 남녀를 사형시키려고 하자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규합해 직접 스페인으로 가서 기자회견을 하다가 스페인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잠시 신문기자로 변신하여 호메이니에 관한 기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폴란드에서 쿠테타가 벌어졌을 때는 부르디외와 함께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1970년 이후로는 미국 대학에서도 그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버팔로 대학 프랑스어학과가 그를 몇 번에 걸쳐 초청했고, 버클리와 스탠퍼드 대학에서도 강의를 했습니다. 한 잡지사가 뉴욕에서 주최한 '반-문화' 심포지엄에서는 수천 명의 청중이 몰려들었습니다. 1980년 10월에 다시 찾은 버클리 대학에서 푸코는 '진실과 주체성'에 관한 강의를 했는데, 이 강의를 들으러 오는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문을 닫기 위해 경찰이 와서 정리를 했습니다. 그해 11월에는 뉴욕 대학의 초청으로 강연을 했는데, 이 강연을 두고 '타임지'는 두 페이지나 할애하여 이 프랑스 철학자 주변에서 벌어진 '숭배'의 현상을 전하면서 그의 '불투명한' 이론을 빈정거렸습니다. 그가 유명해짐에 따라,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그의 급진적인 입장을 비난했고, 미국의 공산주의자들은 그의 체계비판적 허무주의를 비난했습니다. 사람들은 심지어 푸코가 뉴욕 거리의 여성거지들의 존재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푸코는 자기 글에 대한 오독을 교정하기 위해, 또는 신랄한 비난과 맞서 싸우기 위해 미국에 올 때마다 최소한 한 번 이상 자기 작품의 해명 작업을 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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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푸코의 이름이 강의계획표에 올라가면 수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어 원형강의실이 터져 나갈 지경이었습니다. 1983년 버클리 대학을 찾았을 때 '자기 숭배'라는 제목의 공개강좌에 2천 명 이상의 청중이 몰려들어 강의실이 아니라 '극장'에서 강연을 해야 했습니다. 푸코에게 있어서 미국은 즐거움 행복 그 자체였습니다. 동성애 잡지, 신문, 동성애자 바와 나이트클럽 등이 번창하고 있는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마약도 즐겼습니다. 미국에서 일하는 것도 즐거웠고 육체적 쾌락에도 행복했습니다. 그래서인지 80년대 초부터 그는 숨 막히는 프랑스를 떠나 미국에 정착하려는 계획을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습니다. 총 4권으로 구상한 '성의 역사'가 마무리 교정단계에 있었지만, 1984년 초부터 푸코는 심한 피로감과 미열에 시달렸고, 어느 순간 그는 자기가 에이즈에 걸렸음을 알았습니다. 그해 6월 2일 푸코는 자기 아파트에서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푸코는 곧 병원에 입원해서 다량의 항생제를 맞으며 버텼습니다. 잠시 건강이 호전되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작업을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친구들을 맞이해선 웃고 농담도 했습니다. 여행 계획도 얘기했습니다. 질 들뢰즈, 조르주 캉길렘 등이 보고 싶다고, 그들에게 통보해 달라고 부탁도 했습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며칠 만에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습니다. 6월 25일 오후 1시, 티비와 라디오에서 "미셸 푸코 사망"이라는 AFP의 속보가 나오자 온 언론사 편집국과 문화계는 경악했습니다. 다음 날 모든 신문들의 머리기사에서는 이 철학자의 죽음을 언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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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 유명 인사로는 처음인 AIDS 사망자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AIDS는 잘 알려지지 않은 질병이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그 후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르 몽드 지에 실린 사망 기사에는 감염을 시사하는 내용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6월의 이른 아침, 병원 뒤뜰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질 들뢰즈는 "…철학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사유에 대한 비판작업, 바로 그것이 아닐까? 그것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어디까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가를 알아내려는 노력, 바로 그것이 아닐까."라며 '성의 역사: 쾌락의 활용'의 서문에 나오는 푸코의 말을 나지막하게 읊었습니다. 푸코의 관은 1984년 6월 29일 오후에 방되브르의 작은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푸코의 모친이 천주교예식을 원해서 신부가 장례미사를 집전했습니다. 죽기 3개월 전인 1984년 3월 28일, 푸코는 콜레주 드 프랑스 고등사범학교에서 마지막 강의를 했습니다. 이 마지막 학기에서 그는 자기가 준비한 것을 모두 말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학기는 끝이 났습니다. 푸코는 학생들에게 "자, 이 분석 작업에서 여러분들에게 아직도 할 말이 많은데, 하지만, 너무 늦었군요. 고맙습니다."라며 최후의 작별 인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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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의 사상 – Thought of Michel Foucault

푸코의 사상은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눌 수 있는데, 각각 구조주의 시기, 생명정치-통치성 시기, 자기배려-윤리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1960년대 전기 구조주의 시기에 푸코는 스스로를 구조주의자가 아니며 단지 자신은 지금의 시기가 구조주의 시기라는 것을 파악하고 알린 "관찰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실을 '알린'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은 '계몽주의자'라는 게 푸코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말과 사물’과 ‘지식의 고고학’에서는 구조주의적 시각이 많이 보이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이 시기를 구조주의 시기라고 부릅니다. 이후 '외부 담론으로부터 생각이 강제되는 것이라면, 개인의 실천이 들어설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고, '감시와 처벌'에서 미시권력을 분석함으로써 그런 비판은 더욱 강해집니다. 푸코는 사회가 서로를 '통치'하며 자유를 억압하는 구조임을 주장했는데, 특히 철학적 의미로서의 파놉티콘 개념을 제시하였습니다. 푸코는 현대 사회가 감시자가 있든 없든 감시 효과가 나타나는 파놉티콘과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푸코는 우리 사회가 진짜로 파놉티콘처럼 어느 감시자에 의해 감시당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푸코가 말하고자 한 것은 우리가 감시당하는 것 같은 효과 때문에 자유가 침해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푸코는 특정한 감시자는 없으며 현대 사회는 모두가 모두를 감시하는 형태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후 중기 사상에 접어들면 푸코는 자유주의 체제가 단순히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의 생산에 관여하게 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즉 근대국가가 '지상적 신'으로 군림하던 고전주의 시대를 지나, 자유주의 체계가 그 자체로 인간 바깥에 있는 구조가 되는 시대에 접어들며 통치 합리성은 '자연스러운 순환'을 중시하게 변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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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체제 아래에서는 시장이라고 하는 자유로운 체계를 순환시키기 위한 '자유의 생산'이 핵심입니다. 푸코는 이에 대해 '통치성'이라는 용어로 접근하는데, 통치성은 명확한 개념은 아니지만 사회를 특정한 방향으로 조직하려 하는 합리성의 뭉치 정도를 뜻합니다. 자유주의 통치성은 시장을 '자연스러운 순환'의 일부로 파악하고, 사회를 시장의 자유라는 개념 아래에서 재조직했습니다. 이것은 권력에 대한 접근방식을 전환하는 관점으로, 권력을 억압적 개념이 아니라 생산적인 개념으로 본 것입니다. 요컨대 푸코에게 권력은 단순히 사법적 처벌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으로 상정되는 체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해나가는데 필요한 장치들의 총체였습니다. 그리고 푸코의 계보학이 주목하는 지점은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자유의 개념이 실제로는 구체적이고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 출현했다는 진실입니다. 이후 20세기의 소위 '신자유주의' 체제는 자유 대신에 경쟁을 중심으로 해서 사회를 조직하게 된다는 것이 아주 러프하게 요약한 푸코의 신자유주의 비판입니다. 다시 말해 경쟁 그 자체를 자연적인 질서의 일부로 보고, 인간을 다윈주의적 경쟁 상황에 놓인 생물학적 존재로 파악하는 인식틀이 성립되었다는 것입니다. 후기에 들어서면 푸코는 이러한 '규율 권력'이라는 담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말하는 파레시아라는 것을 강조하게 됩니다. 즉 담론의 변화는 개인이 '참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솔직한 자기 의사 표현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 시대의 담론은 조금식 변하고 새로운 담론과 그 담론에 따른 새로운 권력이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 후기의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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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사물의 내용 – Content of The Order of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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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사물’은 사르트르 이후 가장 중요한 프랑스 사상가인 미셸 푸코의 대표작으로, 이 책에서 과학적 주체로서의 인간은 기껏해야 최근의 발견물이며, 우리의 문화에서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의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폭넓은 분야를 망라하며 지식의 향연을 펼치는 이 책은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고전주의적 지식 체계가 어떻게 생물학, 문헌학, 정치경제학 등의 근대 과학에 자리를 내주고 물러났는가를 보여줍니다. 시대별 서양 지식의 지형도, 근대 서양의 지식 공간에 출현하는 인간의 형상과 그 형상의 특이성들, 지식의 공간으로 밀려오는 외부 힘들에 의해 인간이 언젠가 사라질지 모르고 적어도 인간의 형상이 바뀌리라 푸코는 단언하며, 현상학과 존재론 사이를 지식, 권력, 힘의 세 단계를 통해 접근했습니다. 인간은 '세계'를 파악하려는 근본 의지를 갖습니다. 동기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순수하게 세계의 미지를 발견하는 데서 얻을 수 있는 탐험의 즐거움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를 구성해내지 못했을 때 느껴지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후자의 경우엔 러브크래프트가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감정은 공포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공포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다."라고 말한 그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은 또 다시 두 가지로 분화됩니다. 그 두려움을 실질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탐험에 나서는 경우와 반대로 망상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탐험에 나서지 않는 경우로 나누어집니다. 또다시, 후자의 경우엔 전근대의 바다지도에서 수평선 너머에 그려진 온갖 괴물들이 대표적입니다. 강박증환자처럼 자신이 아는 세계 바깥은 존재하지 않거나, 도달할 수 없는 공간으로서, 자신이 아는 '세계'를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1) 순수한 탐구심; (2) 미지에 대한 두려움; (2-1) 실질적 해결을 위한 미지 탐험; (2-2) 망상적 해결을 위한 미지 차단입니다. 하지만 4가지 양태는 실제적 현실에서는 완벽히 구분되지 않습니다. 대개는 네 가지 모두가 서로 비율을 달리하며 동시다발적으로 존재하고 기능합니다. 예컨대 16세기 기독교적 세계관 속 유럽의 경우를 살펴보면, 하느님께서 모든 존재들을 창조하고 조율한다고 믿었습니다. 오늘날엔 이걸 '믿음'이라 평하지만 16세기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자명한 '사실'이었습니다. 16세기의 이 하느님이라는 존재는 앞서 말한 4 가지 경우를 모두 포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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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세계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면 그 창조물들을 만나고 발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신의 손길에 근접하는 경이로운 순간입니다. 즉 신앙심의 탈을 쓴 순수한 탐구심입니다. 두 번째,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지만 그럼에도 신앙심을 위해 전진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 번째는, 정반대로 우리는 세계가 신에 의해 조율되고 있다면 미지에 대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의 분노를 사서 최후 심판의 날처럼 미지의 것들이 평온한 일상을 망가뜨리지 않게 율법을 지키면서 일요일마다 교회에 꼬박꼬박 나가는 일입니다. 결국 하느님이란 세계관을 통해서 서로 모순되는 생각과 행위들이 모두 합리화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푸코가 살펴봤던 16세기의 앎의 양상이 매우 난잡하게 진행될 것임을 예측해볼 수 있습니다. 세계에 대한 앎을 과잉될 만큼 추구할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편협성도 있습니다. '말과 사물'의 2장인 '세계의 산문'에서 푸코는 16세기의 에피스테메(épistèmè; 진리 와 담론 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를 탐구합니다. 도입부터 16세기의 앎의 방식이 무엇이었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밝히면서 시작합니다. 16세기 말엽까지 서양 문화에서 닮음의 역할은 지식을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텍스트에 대한 주석과 해석을 대부분 이끈 것은 바로 닮음입니다. 닮음에 의해 상징 작용이 체계화되었고 가시적이거나 비가시적인 사물의 인식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사물을 나타내는 기법의 방향이 결정되었습니다. 재현은 바로 모든 언어의 호칭, 언어가 말해지고 언어의 말할 권리가 표명되는 방식이었습니다. 푸코는 닮음, 유사성을 중심축으로 해서 지식이 구성됐다는 단순한 닮음이 아닌 반영 관계를 뜻합니다. 물론 그 반영의 최종 심급은 하느님입니다. 자연세계에서 벌과 꽃은 공생 관계이고, 인간세계에서는 이웃들끼리 서로 돕는 것과 닮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닮아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마태복음22장:39절처럼 벌과 꽃과 이웃이라는 가시적인 것들로부터 예수그리스도라는 비가시적 것의 인식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16세기에 무언가를 재현한다는 것은 성경으로 세계를 조망함을 뜻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언어 또한 이걸 제대로 재현하고 있는가로 판가름 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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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푸코는 자신이 유사성이란 16세기적 앎에 대해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1)유사성 개념이란 무엇인가? (2)유사성은 지적 체계성을 갖출 수 있는가? (3)근본적인 유사성은 확증될 수 있는가? 푸코는 이를 위해서 16세기 앎의 네 가지 범주였던 콘베니엔티아(convenientia), 아이물라티오(aemulatio), 유비, 감응을 살펴봅니다. 우선 '콘베니엔티아'는 유사성보다는 장소적인 측면에서 근처에 있는 것들인 인접성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돌멩이 위에 이끼가 끼는 것처럼, 16세기적 앎은 여기서 돌멩이와 이끼를 인접성 관계로 인식하고, 더 나아가 이 둘 사이에 모종의 친근성이 있다고 상정합니다. 물론 우리의 시선에서 돌멩이와 이끼는 별다른 관련은 없습니다. 이끼는 그늘지고 서늘하며 습한 곳을 선호하는 선태식물일 뿐이고, 이 조건이 갖춰진다면 꼭 돌멩이가 아니더라도 아무데서나 자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에피스테메를 갖고서 이끼를 규정하고 있지만 16세기적 앎은 이런 독립성을 애당초 인정하지 않습니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기독교적 세계관을 다시 떠올려보면, 세계는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또한 적절한 곳에 배치된 채로 조율되고 있는 공간으로써 정의됩니다. 따라서 돌멩이와 이끼가 인접해 있는 것엔 그 둘이 어울리기를 바란 하느님의 손길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며, 두 사물에게 바로 그러한 속성을 부여했다는 결론까지 도출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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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닮음은 누군가 꿰뚫어 보려고 시도하면 이중적이 됩니다. 두 사물이 자연적으로 놓인 장소에 따른 속성의 유사성이 드러나는데, 실제로 세계는 자연의 용기(容器)이고, 세계라는 자연의 용기에서 근접은 사물들 사이의 외적 관계가 아니라, 적어도 불명료한 친근성의 기호입니다. 그리고 또 이러한 접촉으로부터 새로운 닮음이 서로 간의 교환에 의해 생겨나고, 필연적으로 하나의 공통된 체제가 형성되며, 인접의 은밀한 근거로서의 유사성에 근접의 가시적 효과인 닮음이 겹쳐집니다. 이런 이유에서 두 사물의 인접성은 속성의 닮음과 함께, 그런 질서들을 부여한 존재가 포괄하는 세계 자체에 대한 상상으로까지 뻗어갑니다. 하느님이 무한한 존재라면 그분의 시선에서 세계라는 공간은 돌멩이와 이끼가 만나는 습한 동굴처럼 작아 보일 겁니다. 그렇게 조망해봤을 때 세계의 모든 만물은 서로 인접해있는 존재로서 규정되고, 이것은 신비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존재의 대사슬' 따위를 떠올리게끔 만듭니다. '이처럼 닮음과 공간의 연쇄에 의해, 유사한 사물들을 한데 모으고 인접한 사물들을 유사하게 만드는 이 부합에 의해, 세계는 내부적으로 사슬을 형성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암묵적으로 위계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수평적인 존재 사슬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수직적인 존재 사슬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서로 닮았다고 여겨지는 존재는 경합, 즉 아이물라티오(aemulatio)를 벌입니다. 모두가 유사성으로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최종 심급인 하느님을 제외한다면,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모방한 것이란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세계는 유사성이되 모방과 반영으로서 규정된 위계적 유사성으로 재규정됩니다. '공간에 퍼지는 이 반영들 중에서 최초의 것은 무엇일까? 실재는 어디에 있고, 투사된 이미지는 어디에 있을까?' 가령 인간과 인격신이 서로 경합을 벌이듯, 방금 전의 예시였던 돌멩이와 이끼도 서로 경합을 벌입니다. 예컨대 영원한 단단함을 가진 돌멩이를 질투한 이끼가 그 위에 달라붙음으로써 그 단단함을 모방하려고 한다는 식으로. 물론 반대로 살아서 꿈틀거리는 이끼를 부러워한 돌멩이가 이끼를 두름으로써 그 생명력을 모방하려고 했다는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반영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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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한 것은 유사한 것을 감싸고, 이 과정은 아마 무한히 계속될 수 있는 중복에 의해 반복됩니다. 경합의 고리는 부합의 요소와는 달리 사슬을 형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호적 반영 및 경쟁의 동심원을 형성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콘베니엔티아아이물라티오가 서로 겹치는 단계가 구성됩니다. 단순한 인접성에서 닮음의 경합을 벌이는 세계관으로 옮겨갔다면, 여기서 그 경합의 최종 우승자가 누구인지 묻는 질문이 던져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리하여 '유비' 개념이 도출됩니다. 외관부터 시작해서 속성까지 사물들 간의 닮음을 규정하되 특정 기준을 상정하는 지적 능력입니다. 예컨대 앞선 예시에서 벌과 꽃의 관계가 예수그리스도의 이웃사랑으로 연결되는 것을 보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꿀벌의 2개의 겹눈과 머리 위쪽에 붙은 홑눈들을 예수그리스도로 연결시키지 않습니다. 여기서 유비의 기준은 꿀벌이 아닌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물론 이런 해석에는 인간중심주의가 강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세기인 오늘날 이런 분석을 했다간 근본주의자 취급 받게 됩니다. 그렇다고, 오늘날 인간중심주의가 극복되지는 못했습니다. 현대에서도 유비의 중심은 인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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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가역성과 다면성 때문에 유비는 보편적인 적용 범위를 부여받습니다. 세계의 모든 형상은 유비에 의해 서로 연관됩니다. 그렇지만 모든 방향으로 통하는 이 공간에도 하나의 특권적인 지점이 존재합니다. 이 지점은 유비로 포화되어 있고, 관계들은 이 지점을 거치면서 방향이 거꾸로 바뀌지만 변절되지 않습니다. 이 지점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래서 푸코는 '인간은 비례의 중요한 지렛대, 이를테면 관계의 근거인 동시에 관계에 대한 성찰의 출발점이 되는 중심'이라고 평가합니다. 이러저러한 예시를 들 필요도 없이 종교나 문학의 수많은 상징들을 떠올려보면 이건 너무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16세기로부터 400여년이 훌쩍 떨어져 있는 입장이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겠지만, 사실 이 시절의 최종 심급인 하느님 역시도 사실은 인간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여태껏 인류는 '하느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라는 창세기1장:26절 말씀에 매우 충실해왔습니다. 조금이라도 위협이 되는 종이라면, 전시할 정도로만 남겨두고서 깡그리 멸종시켜버렸습니다. 비인간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감히 공룡들을 멸종시켰던 거대한 운석에 비견할 수 있을 만큼의 극악한 종입니다. 다시 16세기에 집중하자면, 어쨌거나 이 시절의 중심은 아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중심에 앉은 것이 분명 인간이긴 했으나 본인인 신을 만들어낸 존재임을 자각하지 못한 상태의 인간이었습니다. 또한 오늘날처럼 우리가 북극의 얼음을 녹여버릴 정도로 지구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절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세계를 유비적으로 구성하면서 그 중심에 인간을 뒀다고 해서, 실제로 세계가 인간적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습니다. 1755년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에 맞춰 수많은 사람들이 성당으로 몰려나왔던 날에 벌어졌던 '리스본 대지진'처럼 세계는 창세기를 가볍게 찢어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유비에 대한 실제적인 세계 적용, 즉 '감응'의 단계에서 인간중심주의는 엇박자를 타기 일쑤였습니다. 따라서 감응은 두 갈래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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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를 바탕으로 세계를 실제로 그렇게 구성하고자 시도하는 것이 바로 감응입니다. 그런 감응은 전형적인 동일자의 운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동일자를 중심축으로 해서 모든 것을 이를 위한 수단으로 환원시켜버립니다. 도시개발처럼 움직이는데 불편한 산을 깎아버리고, 벌레를 꼬이게 만드는 나무를 모조리 뽑아버리며, 비가 올 때마다 질척거리게 되는 흙은 아스팔트로 덮어버립니다. 모두 자연을 인간의 동일자로서 환원하는 작업들입니다. 그래서 푸코가 감응을 두고 '사물들을 서로 동일하게 하고 뒤섞고 사물의 개체성을 사라지게 하고, 따라서 사물을 이전의 상태와 무관하게 만드는 위험한 동화의 힘'이라고 표현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이 집요한 심급은 리스본 대지진의 경우처럼 무참히 철회될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군사적 관점에서 16세기는 건축기술이 그리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이기 때문에 험준한 산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키지 못했고, 그래서 그 지형을 적극 모방하면서 군사 요새를 구축했습니다. 여기서 험준한 산은 인간이 자유롭게 떠올린 건축 설계도를 망가뜨립습니다. 즉 감응에 대한 '반감'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응의 쌍둥이 형상, 즉 반감에 의해 감응이 보완됩니다. 반감은 사물을 고립된 상태로 유지하고 동화를 방해합니다. 반감으로 인해 각각의 종(種)은 끈질긴 차이와 현재의 상태에 머무르려는 성향을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푸코는 감응의 짝패로서 반감을 보충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동일자 속에 집어넣으려고 하지만, 거기서 빗어지게 되는 반감과 반작용 때문에 세계의 모습이 계속 유지된다고 봅니다. 마치 모두가 주권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왕정이 아닌 민주주의가 유지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감응과 반감은 모종의 균형을 만들어내며, 그 균형으로써 유지되고 공간에 붙이는 이름이 곧 세계가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이 상태는 정적인 상태가 되고 맙니다. 작용과 반작용 사이의 균형점이 갖춰진 상태이기 때문에 그 균형을 벗어나는 변화가 불가능한 까닭입니다. 또한 그 균형에 속한 개체들 역시도 최대한 자신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반복하게 됩니다. 무리한 감응이 야기시키는 반감에 죽임을 당할 수 있고, 반대로 무리한 반감 역시도 그 반작용을 부르기 마련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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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반감이라는 짝패의 절대적인 힘, 이 짝패에 의해 촉발되는 움직임과 분산은 모든 형태의 닮음을 야기합니다. 앞서 나온 세 가지 유사성은 이 짝패에 의해 재검토되고 설명됩니다. 세계의 부피 전체, 부합의 모든 인접, 경합의 모든 반향, 유비의 모든 연쇄는, 사물들을 접근시키고 사물들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는 감응과 반감의 공간에 의해 지탱되고 유지되며 두 겹이 됩니다. 이 상호 작용 때문에 세계는 동일한 모습을 유지합니다. 유사한 것들은 계속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서로 닮아 갑니다. 동일한 것은 여전히 동일한 것으로 남고, 외부에 대해 빗장을 지른 채 자기에게로 틀어박힙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체계는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열려 있습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동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감응-반감에 의해 균형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유비의 주인이 누구인지 명확히 선언되지 않습니다. 16세기의 세계는 여전히 인간과 감응하지 않는 반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자칫 잘못하여 반감 쪽으로 무게중심이 기울어버리면 유비 관계 자체가 망가지게 됩니다. 개를보면, 인류가 최초로 길들인 가축답게 늑대와 달리 개는 인간에게 친화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개는 인간에 대한 유비입니다. 인간이 훈련을 통해 관습을 주입 당하듯, 인간과 가족이 된 개 역시도 훈련을 통해 몇몇 규칙들을 주입 당했습니다. 즉 개는 몇몇 늑대 종이 의인화된 공정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개는 인간이 아닙니다.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에서 배고픈 사냥개가 주인인 램지(Ramsay Snow)를 물어뜯어서 죽이듯, 닮음이 끊어져버리는 지점들이 분명 존재합니다. 그리고 전근대엔 이렇게 닮음이 끊어진 지점에서 사유를 멈추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시절엔 지금까지 말한 콘베니엔티아-아이물라티오-유비-감응으로서 세계에 대한 앎을 구성해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관습 내에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던 끔찍한 연쇄살인에 대해 '늑대인간'이라는 딱지를 붙였던 겁니다. 오늘날 범죄학에서의 심리 분석이나 체계적인 분류와 달리, 그렇게 치부된 지점에서 앎은 중단되어 버립니다. 이런 이유에서 닮음으로서 구성된 앎의 체계는 반감이 강해지는 지점부터, 그 세계 전체가 암흑으로 뒤덮여버리는 참사가 일어납니다. 따라서 16세기적 에피스테메는 체계 내에서 열린 부분들을 완전히 닫아버리기 위한 보충물이 필요합니다. 참고로 푸코는 이걸 '유사성의 새로운 형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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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는 '말과 사물'을 통해 모든 역사적 시대가 근본적인 인식론적 사고 방식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생물학, 경제학, 언어학의 기원을 설명함으로써 진실은 무엇이며, 주제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는 담론은 무엇인지 알아보았습니다. 인간 과학의 기원에 대한 소개는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의 그림 Las Meninas (The Ladies-in-waiting , 1656)에 존재하는 시선, 은폐 및 표현의 복잡한 네트워크에 대한 상세하고 법의학적 분석과 토론으로 시작됩니다. 자세한 설명을 위해 푸코는 "예술사적 조사의 다양한 텍스트에 의해 규정되지도, 필터링되지도 않은" 언어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화가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그림을 보고 있습니다. 상호 가시성의 이 가느다란 선은 불확실성, 교환, 거짓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네트워크 전체를 포괄합니다. 화가는 우리가 그의 주제와 같은 위치에 있는 한에서만 우리에게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재현적인 그림 으로서 라스 메니나스 는 유럽의 지성주의에서 고전주의와 현대주의의 두 "큰 불연속" 사이의 중간 지점에 있는 새로운 에피스테메(사고 방식) 입니다. 이제 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그의 진동의 중립 중심에서 고요의 순간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어두운 몸통과 밝은 얼굴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중간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볼 수 없는 캔버스에서 나타나 우리의 시선 속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잠시 후 그가 우리 시선에서 벗어나 오른쪽으로 한 걸음 물러나면, 그는 자신이 그리고 있는 캔버스 바로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는 잠시 무시되었던 그의 그림이 그림자나 과묵함이 없이 다시 한 번 눈에 보이는 영역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마치 화가는 자신이 표현된 그림에서 동시에 자신이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있는 그림도 볼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물의 질서는 푸코가 법의학 분석을 수행한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마무리됩니다. 18세기 말 이전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생명의 힘, 노동의 생산성, 언어의 역사적 밀도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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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사물'에 제시된 인식론적 실천에 대한 비판은 문화사  연구 방법론을 확장하고 심화시켰습니다. 사고 방식에 대한 인식의 문화적 변화에 대한 푸코의 제시와 설명은 과학역사가 테오도르 포터(Theodore Porter)가 지식 생산의 동시대 기반을 조사하도록 자극했으며, 조사 중인 과거에 대한 현대의 역사적 지식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태로 남아 있는 과거 사람과 사물에 대한 지식을 현대 범주에 대한 과학 연구자의 심리적 투사라는 비판을 낳았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말과 사물'이 지식인 사이에서 푸코의 지적 탁월성을 인식시켰습니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말과 사물'에 대한 리뷰에서 푸코가 "부르주아지의 마지막 바리케이드"라고 말했습니다. 그에 대해, 푸코는 사르트르에게 "불쌍한 부르주아지. 그들이 나를 '바리케이드'로 필요로 한다면 그들은 이미 권력을 잃은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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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Michell Foucault)의 ‘말과 사물(The Order of Things)’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50년 푸코가 교수자격 시험에 낙방했을 때 필기시험에 대한 심사위원장의 코멘트가 이책의 성격을 이야기 합니다. “주어진 주제를 다루기보다는 자신의 박학을 과시하는 데 치우쳤음”입니다. 이 말마따나 '말과 사물'은 독자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만큼 난해하기 짝이 없는 책입니다. 어려운 문자써가며 뻔한 이야기 어렵게만 이야기 하는 사람에게 박학다식한 잘난체는 바로 이렇게 하는 거라고 권하고 픈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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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책 100선 중 52번째 책 인문학 부문 22번째 책 미셸 푸코(Michell Foucault)가1966년에 출간한 말과 사물 (The Order of Things) 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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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p_8nkCdSn3E

https://youtu.be/ONWXsSO9Qq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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