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5_80년5월18일

12.12 이후 5공인사들, 어떻게 지냈나

忍齋 黃薔 李相遠 2005. 7. 4.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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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이후 5공인사들, 어떻게 지냈나
최근 MBC 드라마 '제 5 공화국'이 방영되면서 5공 인사들의 움직임이 새삼 세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허화평 이학봉 박희도 장세동 씨 등 5공 인사들은 얼마 전 두 차례에 걸쳐 자신들의 의견을 반영해 줄 것을 요구하는 소견서를 MBC 측에 보내 적극적인 의사 표현을 한 바 있다.

1979년 12.12 쿠데타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던 허화평 현대사회연구소장은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12.12는 정당한 임무 수행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5공 인사 중 현재 직함을 가지고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은 허화평 소장, 권정달 자유총연맹 총재 등에 불과하다.
쿠데타 동지로서 두 차례나 법정에서 역사적 심판을 받아야 했던 이들이 모두 끝까지 운명을 함께 한 것은 아니다.

허삼수 허화평씨는 권력 초기에 전두환 전 대통령과 소원했으나 사적인 유대 관계는 지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역사 재판에서도 이들은 전-노 두 대통령과 공동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권정달씨는 5.18 재판에서 당시 어쩔 수 없이 정권 창출에 협조했다며 당시 상황을 폭로, 재판장에서 옛 동지들과 상대를 비방하며 설전을 벌이는 사이가 됐다.

군사반란을 일으켜 역사적 단죄를 받았던 이들의 현주소를 들여다 봤다.


허화평, 정권 초기 친인척비리 지적하다 권력에서 멀어져
미래사회연구소장으로 재직 중
[사진=연합뉴스]
최근 가장 적극적으로 드라마에 대한 의견 제시를 하고 있는 5공 인사는 허화평 현대사회연구소장이다. 육사 17기인 허 소장은 하나회 회원으로 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미래사회연구소는 1981년 현대사회연구소란 이름으로 설립된 민간 사회과학 연구기관으로 허 소장은 1988년 이 단체의 소장으로 취임했다.



12.12 이듬해인 80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한 후 82년 청와대 비서실 정무 제 1 수석 비서관을 지냈다. 그는 5공의 실질적인 설계자이지만 82년 친인척 비리 청산을 주장해 전두환 대통령과 소원해진 후 5공과 6공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83년 도미한 후 88년 돌아와 92년 14대 총선에 경북 포항에 무소속으로 출마,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그 해 말 YS의 권유로 민자당에 입당해 당적을 얻었다.

15대에도 같은 지역구(포항 북)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단기필마로 지역구의 심판을 받아 정치적으로 재기를 노리던 그는 그러나 5공을 출범시킨 역사적 책임을 져야 했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으로 그는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

16대에는 김윤환 이기택 신상우 조순 이수성 김상현 장기표 씨 등의 인사들과 민국당 창당에 참여, 포항 북에 재차 출마했다. 결과는 이병석 한나라당 의원에게 밀려 낙선.

지난해 17대 총선에도 이곳에 무소속 출마를 단행, 16% 가까운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5공 인사라는 딱지가 붙은 그가 시대의 변화를 감당하기는 너무 버거웠다.

정권 초기 그가 전두환 전 대통령과 소원해진 것은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춘데다 원칙대로 직언하는 그의 스타일을 전-노 두 전 대통령 모두 부담스러워했다는 후문이다. 그는 현재 미래한국재단 소장으로 헌법, 역사 등 학문 활동과 저술에 열중하고 있다.

장세동, 17대 총선 실패 후 침묵
[사진=연합뉴스]
전 전 대통령의 영원한 ‘충복’으로 불리는 장세동 씨. 그는 리더를 충실히 따르는 성격으로 마지막까지 전 전 대통령과 정치적 영욕을 함께 했다. 그는 육사 16기로 역시 하나회 출신이다. 당시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산하 수경사 30경비단장을 맡아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도왔다.

금이 갈 것 같지 않던 전 전 대통령과의 사이는 2002년 대선에 무소속 출마한 후 크게 갈라졌다. 전 전 대통령이 그의 대선 출마를 반대한 탓이다. 당시 단기필마로 출마했음에도 불구, 2% 가까운 뜻밖의 지지율을 기록해 세간에 화제가 됐다. 그러나 장 씨는 중도에 후보에서 사퇴했다.

지난해 17대 총선에도 김덕룡 한나라당 의원의 텃밭인 서초 을에 출마했지만 3.7%의 득표율을 보이는데 그쳐 상전벽해를 실감했다.

81년 대통령 경호실장을 지냈고 84년 중장으로 예편했다. 85~87년 안기부장을 역임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지난 대선 당시 "의리를 지키는 나 같은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며 언론 취재에 적극적으로 응했지만 요즘은 밀려드는 취재공세에도 측근에게조차 거취를 알리지 않고 은신 중이다.

권정달, 비하나회 출신, 사건 전모 밝힌 중요한 증언으로 5공인사들과 등져
지난해 자유총연맹 총재로 재선임
[사진=연합뉴스]
권정달 한국자유총연맹 총재는 79년 부마항쟁 때 보안부 대장을 지낸 후 10.26 이후 보안사 정보처장 발탁돼 전두환 참모 그룹에 합류했다. 80년 준장 예편 후 이듬해인 81과 85년 경북 안동에서 11, 12대 민정당 국회의원을 지내며 권력을 이어갔다.


88년 노태우 정권 탄생과 함께 실세 그룹에서 낙오돼 13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공천조차 받지 못했다. 14대 때도 역시 정권과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에 출마하지 못했다.


95년 5.18 특별법 제정과 함께 5.18와 12.12 사건이 조사를 받게 되자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데 중요한 증언들을 털어놔 ‘5공 인사’들과 등지게 됐다. 자신은 하나회가 아니어서 핵심 참모 그룹에서 소외받았으며 본의 아니게 정권 창출 과정에 참여하게 됐지만 신군부의 정권 찬탈 음모를 알고 괴로웠다는 것이 증언의 취지였다.

5공인사들은 그가 권영해 당시 안기부장과 긴밀한 관계로 그가 정권에 유리한 위증을 했다고 공격했다. 그 결과 그의 ‘5공 전력’은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는 그의 수사 협조에 대한 대가라는 게 정치권 안팎의 분석이다.

96년 15대에 무소속으로 경북 안동에 출마해 당선됐고 그 해 말 신한국당에 입당했다. 98년에는 정권 창출에 실패한 신한국당을 떠나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회의에 돌연 입당, 변신을 꾀한다.

2001년 제 8대 한국자유총연맹 총재로 선임됐고 지난해 2월 재선임돼 임기를 이어가고 있다.

드라마에 대한 소감을 묻기 위해 권 총재와의 인터뷰를 시도했다. 그러나 권 총재 측은 “드라마 제작 단계에서도 인터뷰 요청 들어왔는데 전부 거절했다. 인터뷰 해 봐야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뭐 좋은 게 있나 생각해 언급 자체를 안 하려고 하는 것 같다”며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했다.

허삼수, 14대 총선 당시 노무현 후보 꺾어
[사진=연합뉴스]
보안사 인사처장으로 12.12 때 전두환 소장을 도왔던 허삼수 씨는 이듬해인 80년 준장으로 예편한 후 80~82년 대통령 비서실 사정수석 비서관으로 일했다. 육사에서 최고 엘리트기로 꼽히는 17기로 역시 하나회 출신이다. 허삼수씨 또한 허화평 씨와 함께 친인척 비리 청산을 지적해 결국 82년 미국 스탠퍼드대 후버 연구소로 떠나 87년까지 머물렀다.

14대 총선에 민자당 후보로 부산 동 지역구에서 당선됐다. 당시 맞붙었던 상대는 민주당 노무현 후보. 이 지역 13대 의원인 노무현 후보는 자신의 지역구에서 재선을 노렸지만 허 후보에게 져 실패했다. 노 후보가 3당 통합에 반대한 후 ‘호남당’ 이미지가 강한 민주당에 입당해 민주당적으로 이 지역에서 출마한 탓이다.


황영시, 최근까지 전 전 대통령과 끈끈한 관계 유지
[사진=연합뉴스]
12.12 당시 1군단장을 맡고 있었다. 하나회는 아니었지만 꾸준히 하나회를 후원해 오다 쿠데타에 참여했다. 81~83년에는 제 24대 육군참모총장 자리 올랐다. 83년 대장 예편 후 84~88년 감사원장으로 재직했다.

지난 1일에는 전 전 대통령과 함께 국립 대전현충원을 찾아 12.12를 함께 이끈 유학성 씨 등의 묘소를 찾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40여 명의 전 전 대통령의 측근과 함께 한 이날 참배 행사에는 대전지역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이들의 참배를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유학성, 3선 의원으로 정치인의 길 걸어
최규하 전 대통령(좌)과 유학성(우) 씨[사진=연합뉴스]
85년 12대 전국구 의원(민정당)을 시작으로 13대(민정당, 경북.예천) 14대(민자, 경북.예천) 국회의원을 지내는 등 오랜 기간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12.12 당시에는 국방부 군수차관보였다. 전두환 장군의 선배 기수로 하나회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다. 쿠데타 성공 후 80년~82년 중앙정보부장 자리에 올랐다. 97년 사망한 후 국립 대전 현충원에 안장됐다. 그의 묘소는 12.12 쿠데타 때 대척점을 그렸던 정승화 당시 육군 참모총장(2002년 사망)과 같은 라인에 위치해 있다. 그의 국립묘지 안장을 두고 최근 정치권 일각과 시민사회단체들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이학봉 허문도, 청와대 행정부 등에서 활동하다 금배지 도전
이학봉 허문도 씨(좌측부터) [사진=연합뉴스]
보안사 과장으로 12.12를 도왔던 이학봉 씨는 육사 18기로 하나회 출신이다. 쿠데타 이듬해인 80년 준장으로 예편한 후 80~86년 대통령 비서실 민정수석 비서관으로 일했다. 88년 안기부 제 2 차장을 거쳐 88년 민정당으로 경남 김해에 출마, 금배지를 달았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으로 정권 창출에 가담했던 허문도 씨는 82년 문공부차관으로 발탁된 후 84년 대통령 정무 제1비서관을 지냈다. 86년에는 국토통일원장관 자리에 올랐다. 5공 정부에서는 언론통폐합 등을 주도했다.

92년 경남 통영ㆍ고성 지역구에 무소속 출마해 30% 가까운 지지율을 얻었지만 하나회 출신으로 신군부의 핵심 세력이었던 정순덕 후보(민자당)를 꺾지는 못했다.



오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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