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는 현재의 세대를 6·25세대(50대 이상), 광주항쟁세대(40대), 디지털세대(20·30대) 등 크게 3가지로 나누고 있다. 그 이유는 한국의 현대사가 그렇게 만들어놓았다는 것으로, "예상대로 세대간의 갈등은 심했지만 세대화합의 가능성도 있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그렇다. 필자와 같은 50대는 신문기사처럼 한국전쟁의 가난과 폐허 속에서 성장했다. 우리 세대는
4·19혁명(1960년)에 참여했고, 5·16구테타(1961년)를 겪었으며,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6·3시위(1964년)의 앞장섰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월남전 파병의 쓰라린 역사의 현장에 있었고, 젊은 피가 들끓던 20대 때는 「10월 유신」의 사슬에
얽매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 또한 10·26사태, 부마민주항쟁, 광주민주화운동 등 여러 가지 정치적·사회적 격동기를
거쳤던 세대들이다.
한편 디지털세대야 말로 한국사회의 신인류들로 6·25세대들이 겪어보지 못했던 온갖 새로운 일들을 만들어 내면서 인터넷시대의 주역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이들은 기존의 틀과 규정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고 있다.
기성세대보다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더 많이 알고 있는 세대이다. 1백만년도 훨씬 넘는다는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보다 똑똑한 시대를 우리는 맞고 있다. 이 시대의 주인공은 바로 디지털세대임을 부인하기가 어렵다.
신세대들은 붉은 티셔츠와 촛불로 상징되는, 새로운 집회문화와 거리문화를 창조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6·25」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민주화운동」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
그 중간 세대가 바로 중앙일보가 말하는 「광주항쟁세대」이다. 중앙일보는 "이 세대는 산업화를 넘어 1980년대 광주 민주항쟁과 5공독재를 겪은 민주화세대이다. 민주화운동은 87년 6월항쟁으로 폭발했다. 이들은 광주문제에 분노하며, 미문화원에 뛰어들기도 했다"고 쓰고 있다.
중앙일보는 이들 각 세대가 외교·안보분야에서 갈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나, 상대적으로 정치·사회 쪽에서는 갈등의 정도가 약하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광주항쟁세대로 분류된 40대는 디지털세대와 6·25세대의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중간점을 고집하기도 한다. 이 세대는 디지털세대와 6·25세대의 갈등이 심각한 사안에선 캐스팅보트 혹은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고, 전혀 다른 목소리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도 있다.』
필자는 간극이 너무 벌어진 6·25세대와 디지털세대의 「화합」을 위해서는 40대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중앙일보의 기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아울러 참으로 의미 있는 조사를 시의적절하게 한 점도 높이 평가를 하고 싶다.
그런데 한가지 매우 아쉬운 점이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잘 알다시피 「광주항쟁」은 1980년 5월18일에서 27일까지 전라남도 및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全斗煥) 퇴진, 김대중(金大中) 석방 등을 요구하여 벌인 「민주화운동」이다.
학자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사회운동은 1970년대 지식인 중심의 운동에서 민중이 직접 나서는 운동으로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이와 함께 국민들의 미국에 대한 인식변화와 함께 사회운동의 목표로 민족해방·사회주의 등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기점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처럼 광주민주화운동은 역사적으로도 대단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궁금해하는 것은 중앙일보의 이번 조사에서 우리나라 민주화의 불씨가 되었던 「부마민주항쟁」에 대해서는 왜 한마디 언급도 없는가 하는 점이다.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 부산 및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학생과 시민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독재에 항거하면서 벌인 대규모 반정부 시위사건이다. 그 해 10월4일 김영삼의 의원직 박탈 등 일련의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10월15일 부산대학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되고, 16일에는 5천여 명의 학생들이 주도하는 가운데 부산시민들이 합세하여 대규모 반정부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16∼17일 이틀 동안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파출소·경찰서·도청·세무서·방송국 등을 파괴하였고, 18일과 19일에는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이에 정부는 18일 0시 부산지역에 비상명령을 선포하면서 시위는 진정되었다. 그러나 이 것이 계기가 되어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1972년 10월17일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단행한 초헌법적 비상조치로 시작된 유신체제는 7년 만에 의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 해 12월12일에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이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을 연행하고, 당시의 최규하 대통령을 협박하여 사후승인을 받는 12·12사태가 발생했다.
신군부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를 발표하고 민주인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특히 광주에서는 공수부대가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를 과잉진압하면서 사태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5월18일부터 시작된 시민항쟁은 수많은 희생자를 남긴 채 만 9일 만인 27일 새벽 2만5천명에 달하는 군인들이 무력으로 진압함으로써 끝이 났다.
필자가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우리나라에서의 적극적인 민주화운동은 1980년부터가 아니라 부마항쟁이 일어난 1979년부터 보아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부마항쟁이 없었다면, 과연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지면서 서슬 퍼렇던 유신체제가 10년도 못 가서 종언을 고할 수 있었을까.
부산사람들과 마산사람들은 부마항쟁을 일으킨 데 대한 긍지가 남다르다. 특히 마산은 4·19혁명의 발단이 되었던 3·15의거가 일어났던 곳이다. 그래서 두 도시 사람들은 부산과 마산이 광주 못지 않은 「민주화의 성지」 또는 「민주항쟁의 발상지」라고 자부하고 있다.
1982년 3월의 미문화원 방화사건도 부산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전두환 퇴진과 광주의 5.18에 대한 미국의 책임이 제기되었음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앞당긴 계기가 된 것은 「부마항쟁」이라고 생각한다. 「광주민주화운동」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해도 잘 못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중앙일보는 이번 조사에서 40대 이상을 두고 「광주항쟁세대」로 이름을 붙였다. 필자로서는 왜 그런 명칭을 썼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중앙일보는 40대를 가리켜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를 띠고 있는 「민주항쟁세대」라고 했어야 마땅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04.6.26>
[민주항쟁세대] 맞습니다. 그렇게 불리어져야 마땅합니다.
글을 위에서부터 읽어오면서 [광주항쟁세대]라는 어휘에 갸우뚱 거리면서
[민주운동세대]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4.19 또한 민주운동이라 할 수 있으니 항쟁의 기준으로 본다면 부마항쟁이 시초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 또한 79년, 그 암울했던 시기에, 저의 젊은 피를 마산의 공화당 지구당 옥상에서 유신반대를 성토했던
일에 기꺼이 쏟았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꼭 그래서가 아니라 80년대 중반의 시민참여 민주화운동은 79년의 부마항쟁에서
보여준 젊은 피들의 이음이라고 봅니다. 그 당시에 유신반대운동을 했던 세대들이 80년대 중반에 와서는 기성세대의 입구에 들어선 나이였으며, 그
79년도의 희생을 존중해왔던 여타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민주화운동에 참여되도록 연결해 놓은 반석이었음은 분명할 것입니다. 따라서 현시대의 민주화
운동은 마땅히 79년을 기준하여 봄이 좋을 듯 하며, 그 명칭을 부여한다면 '민주항쟁세대'라 함이 옳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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