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8_黃薔(李相遠)

[대본] <5월 18일 목요일, 월드센터, 김민웅입니다>

忍齋 黃薔 李相遠 2006. 5. 18.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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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마 전두환을 처형하라! 한 손엔 몽둥이 한 손엔 짱돌을 움켜쥐고 연희동으로 몰려가 살인마 전두환을 주살하라!!]

 

<2006년 5월 18일 목요일, 월드센터, 김민웅입니다>의 관련 대본 원본을 공개합니다.

<<다시 생각해 봅시다>>

  - “노란 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

     5. 18 관련 책을 펴낸 이상원씨

 

 

80년 광주민화항쟁이 일어난 지 벌써 27년이 되는 날입니다. 3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마음을 아프게 하는데요. 오늘 <다시 생각해 봅시다> 에서는 5. 18학생 신분으로 신군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요. 그 이후  5. 18에 관해서 “노란 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이라는 책을 쓰신 이상원씨와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Q1.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현재는 미국에서 에너지 규제 위원회 연방공무원으로 근무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미국으로 간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요?

 

예, 안녕하세요. 시국이 어수선 할 때면 늘 언제 잡혀가서 그 고통을 또 당하나 하는 게 걱정거리였습니다.  거창한 이유들은 제책에서도 이야기했는데 본론을 이야기하면 운동권에도 학벌이 존재하더군요. 지금은 없어졌겠지만 전라도대학 운동권출신으로 80년대 상황에선 그 전라도차별의 한계를 벗어날 길이 망막했습니다. 어렵게 리서치 어시스턴트 자리를 구해 유학을 나왔습니다.

 

Q2. 30년 가까이 흐른 광주 민주화 항쟁, 이상원씨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요?

 

신군부는  80년 518직전 예비검속을 통해 전국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불법으로 잡아가두었습니다. 그때  518의 첫 희생자로 기록된 이세종 열사가 희생을 당한 전북대 학생회관에서 금마공수에게 종아리인대가 끊어져가며

잡혀가서 근 4개월여간을 경찰서로  헌병대로  보안대로  끌려 다니며 험악한 꼴을 당했습니다. 518항쟁의 사실을 인지할 형편이 아니었지요. 제자신이 신군부 앞에서 처절하게 목숨을 구걸해야 했던 처지였습니다. 그때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할 수 있나를 실감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Q3. 그 당시 이상원씨는 학생이었는데요. 아무런 죄가 없이 계엄군에게 잡혀가 심한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 이야기를 좀 해주시죠!

 

저는 종로구 계동 13번지가 본적으로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그런 제가 전라도대학을 다니고 있었는데 시사에 민감한 이야기를 하니까 가톨릭학생회 선배한분이 제가 간첩이라고 신고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시절 정보에 둔했던 참으로 순박했던 시골학교의 모습이였지요. 서울운동권의 지령을 받아서 입학을 했느니 어쩠느니 기막힌 소설의 주인공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지막지한 고문 앞에 대학 1학년인 제가 할수 있었던것은 살아보려고 가장 비참하고 비굴해야 했던 시간들이었고요. 그 순간들을 기억하는 것 자체가 잔인한 고문입니다.

 

Q4. 이상원씨는 2003년, 우리나라정부로부터 5. 18 민주화유공자로  인정받았는데요. 어떻습니까?

 

전두환이 살아 있는 한 보상은 아무의미가 없다는 게 기본적인 생각이었습니다. 또 아는 선배 중에는 아직도 보상을 거부한 분들도 계시구요. 근데  지난세월 함께 살아온 제 아내가 제가 잠잘 때 보이는 기인한 행동들 때문에 정신과 진단을 받게 한 적이 있는데 그게  포스트 투라우마 스트레스 디스오더 중증이라더군요. 2003년 4차 보상에 응하게 되고 민주화유공자증서를 받았는데 그 후론 증세가 많이 좋아졌고 이제는 그 시절에 대해 지금처럼 말도 하고 글도 쓰게 되었습니다. 빨갱이취급을 받던 제가 명예가 회복된 점도 있고 더 기뿐일 은 11학년인 제 아들이 자기가 다니는 고등학교에 엠네스티 인터네셔널 - 국제사면위원회 지부도 만들고 수단 등 제3세계의 인권개선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보고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Q5. 5. 18 광주 민주화 항쟁이 이상원씨의 개인적인 삶에는 어떤 영향을 미친 것 같은가?

 

제 개인적으로는 거창한 학자가 된다거나 그런 타입은 아니었습니다. 근데 한국의 운동권으로서 마땅히 살아갈 방도가 없더군요. 선택의 여지도 없이 학비와 생활비를 보장해주는 학교와 교수님들을 찾아 8년 반과 4개 학교에 걸친 미국대학원 석.박사과정을 힘들게 이어가야 했습니다. 제 젊음은 멋없게 소진시켰지만 지금은 전화위복이 되어 미국연방정부의 기술직 공무원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518과 무관하다 할 수 없겠지요. 

 

Q6.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이상원씨는 “노란 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관련 책을 펴내기도 했고요. 또 80518 카페를 만들어 활동하고 계신데요. 특별히 이렇게 책을 쓰고 카페를 운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을 잊고 살던 2000년입니다. 군대에서 두들겨 맞아 대구통합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곳성당 미사때 보았던 국군간호사관학교 4학년생도가 지금의 제 아내가 되었는데요. 제 아내가 난데없이 국군간호사관학교를 살리는데 도와 달라고 하더군요. 한 6개월간 김대중 정부를 상대로 국군간호사관학교살리기 인터넷투쟁을 하게 되었고 국민들의 도움으로 국군간호사관학교가 기사회생을 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 한국군 최초의 여성장군배출의 기틀도 만들었습니다. 그 여력을 모아 환경이야기라는 인터넷카페와 컴뮤니티를 비롯하여 전두환을 처벌하자는 80518카페도 만들게 되었구요. 그곳 게시판과 블로그에 올린글들을 보고 에서이작가100인총서를 발간 중이신 주식회사 에세이의 손형국 사장님이 오마이뉴스 쪽지를 통해서 발간을 권유하셔서 34번째총서의 발간혜택을 보게 되었습니다.

 

Q7. 미국에서 동료들도 있고요. 여러 사람들과 만나면서 광주민주화 항쟁에 대한 이야기도 하실 텐데요. 미국에서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아마 전두환이 미국에 오면 요절이 날겁니다. 제 미국친구들에겐 저는 인권투쟁을 한 작은 영웅입니다. 그 친구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이 저처럼 당했다면 그자를 절대로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 친구들의 품성으로 보아 전두환은 요절이 날것이 자명합니다. 다행히도 전두환은 미국입국이 불가능할겁니다. 입국서류에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관여한적 있느냐를 묻는 부분과 함께 여타학살에 관여한 적이 있느냐는 문항이 있는데 그 항목에 저촉이 되어 미국입국이 불가능할겁니다.

 

Q8.  관련해서 최근 영화도 만들어지고 있고요. 이상원씨 처럼 5. 18관련해서 여러 가지 문학 책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문화들이 5. 18을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봤으면 하는가?

 

518은  한국을 완벽한 민주국가로 진입시킨 디딤돌이었고  세계 선진10 대국 들도록 이끈 원동력입니다. 518이 한국민족의 불의에 대한 저항정신의 표본으로 이해되고 받들어져야 합니다.

 

Q9. 5. 18 광주 민주화 항쟁에 대해 외국에서는 5. 18 정신을 배우기 위해서 방문을 하기도 하는데요. 5. 18 유공자들에 대한 개선도 필요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어떻게 보는가?

 

저도  사죄도 안하는 전두환을 용서하자는 철없는 518유공자 알고 있고 제책에서도 지적한바가 있습니다. 518유공자 분들 중에는 정신자세가 준비되지 못했던 분들도 많을 겁니다. 저역시 피라미처럼 잡혀가 본의 아니게 운동권의 대어가 되기도 했던것 같은데요. 지나가다가 공수 부대원에게 부상을 당했을 수도 있고 말입니다. 5월관련단체들의 소속 518유공자들에게 대한 지속적인 교육도 중요할 거란 생각이 듭니다. 특히 전두환에게서 진정한 참회와 반성을 받아내는 역사적 소명을 잊지 않도록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 네, 오늘 <<다시 생각해 봅시다>>에서는 5. 18에 관해서 “노란 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이라는 책을 쓰신 이상원씨와 5. 18항쟁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번 짚어봤습니다.

 

# 5월 18일 목요일, 김민웅의 월드센터,

  오늘 소식은 여기까지입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80518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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