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8_黃薔(李相遠)

♡ 토목.환경공학 박사 이상원. 그는 누구인가?

忍齋 黃薔 李相遠 2005. 7. 10.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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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목.환경공학 박사 이상원. 그는 누구인가?

 

 

 

인물과 사상사간 MOOK [살류쥬] 4호
화제: 나의 삶과 사랑 그리고 국군간호사관학교 p110~121

 

[살류쥬] 편집후기) 살류쥬 편집국

 

이상원 / 살류쥬 동인이기도 한 이상원은 27세에 미국 유학을 떠나 현재 미국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40대 초반의 환경학 박사이다.

 

그는 아내가 나온 국군간호사관학교가 폐교의 위기에 이르자 온갖 노력으로 아내의 모교를 살려내었다.

 

간호사관학교는 여학생들에게 국비로 간호교육과 장교의 길을 열어주는 학교이다. 이 학교가 폐교위기에 처해 신입생을 뽑지 못햇던 이유는 경제적 이유의 구조조정보다는 정치적 이유가 더 많았다고 한다.

 

육군사관학교의 1/3, 공군사관학교의 1/10 예산밖에 들지 않는 예산문제보다 구조조정의 실적을 만들려고 현행법까지 무시한 국방부의 무리한 처사와 군의 '여성 무시'가 그 원인이었다고 한다.

 

그가 아내의 생일선물로 만들어준 홈페이지는 <간호사관학교 살리기 운동>의 본부가 되었고 이들 부부는 운동의 핵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모교가 없어지는데도 조직적인 운동의 방법을 모르던 동문회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힘든 일을 감당해 주었다.

 

그의 이런 노력과 열정은 그의 아내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에서 출발한다. 그 아내에게 국비 간호사관학교의 교육이 없었다면 오늘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그는 현재 아내와 1남의 아들과 함께 미국 국방성 산하 수자원 수리국에서 수질오염문제를 다루는 일을 하고 있다. [살류쥬]편집국

 


   

나의 삶과 사랑 그리고 국군간호 사관학교

이상원

 

1990년 가을 어느날, 버지니아의 시골 블랙스버그에서 5시간을 차를 몰고 김치 한 병을 사고자 워싱턴디시 바로 아래 '노던 버지니아'의 한인들이 많이 사는 거리를 지나고 있을때 어디선가 김수희의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 로 시작하는 애모가 들려 왔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앞을 가리면서 그 가사가 어찌나 가슴을 저미는지 길가에 차를 대고 그 노래가 끝날 때까지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1988년 12월 미국에 오기 전까지는 노래를 불러도 김민기, 한대수로 대표되는 소위 운동권 가요만을 고집해 부르고 마치 온 세상의 고민을 한몸에 담은 듯 살았었는데, 질질 짜는 통속가요가 그렇게 심금을 울리던지, 고상한 척 살던 지난날의 후회가 사무쳐왔습니다.

 

어린시절

 

저는 양력으로 1961년 7월 23일, 음력으로 6월 11일에 한강물이 구비쳐 돌고 서울 남산의 삼태기 속 같은 한남동의 화훼식물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식물원은 원예를 전공하신 아버님과 한국일보의 장기영 사장이 공동으로 운영하시던 한국 최초의 서구식 원예농장이었습니다.저는 화훼원예를 평생의 업으로 살아오신 아버님 덕에 꽃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지금도 정서적으로 저의 귀한 자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유치원 다닐 나이 정도에는 불광동의 국립보건원 안에 있는 사택에서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1년 정도를 살았습니다.

 

그곳엔 식물원도 있고 실험용 흰쥐, 모르모트, 토끼들이 있었습니다. 가끔 범죄로 살해당한 시체도 부검을 위해 들어오곤 하여 몰래 그 과정을 지켜보기도 하였습니다.

 

그 보건원에는 종마장이 있어서 친구도 없던 저는 그곳에서 유일한 낙으로 종마장 나무 울타리에 올라앉아 말들이 뛰노는 것을 보며 실험동물 사료 겸 제 군것질거리(?)였던 건빵을 바켓츠로 퍼다 마음에 드는 잘생긴 녀석을 골라 꼬시기도 하였습니다.

 

언제부터인가는 제가 가면 그 녀석은 왕초의 눈치를 살피고 왕초가 묵인하면 무리에서 제게로 떨어져나와 건빵을 나눠먹기도 하고 그녀석의 콧김을 즐기기도 하고 안장도 없이 그녀석 등에 올라타고 놀다보면 하루 해가 지곤 했습니다.

 

그 녀석이 무리로 돌아가면 다른 녀석들이 질투하듯 뒤발질로 툭툭 차기도 하고 '왕따'를 놓기도 하였지만 외로운 저는 제 욕심만 채웠던 것 같습니다.

 

이미 그때부터 엘레강스하고 섬세한 준마를 완벽하게 제 친구로 꼬실 정도였으니 아마도 그 기술이 후일 제 아내 김영신을 맞이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았나 간혹 생각해 봅니다.

 

그곳에서 소사로 이사갈 때는 그 녀석도 헤어지는 걸 아는지 서로 눈물을 흘리며 아무도 이해하여 주지 못한 슬픈 이별의 아픔을 오랫동안 간직해야만 했습니다.

 

초등학교를 입학할 쯤에 아버님은 근교농업으로 화훼원예농가를 육성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서울과 인천의 중간쯤에 있는 복숭아로 유명한 소사에 원예식물원을 조성하고 농민들에게 원예기술을 보급하기 시작하여 제가 중학교 2학년때까지 운영을 하셨습니다.

 

아마 그 시절은 국민 모두가 먹고 살기 힘든 때라 원예가 농민들에게 큰 소득은 올려주진 못했던 것 같습니다.

 

사진) 팝더 매직 드래곤을 부른 피터 야로 영감님과 함께  

청소년 시절

 

시골이던 소사가 부천시로 바뀌고 농장의 사방 팔방으로 도로가 생기던 중2가 되어서야 저는 할아버지, 할머니, 큰형, 작은형, 누나여동생들이 살고 있는 서울집에 합류하여 드디어 온 식구가 함께 살게 되었지만 더 이상 제가 나고 자란 예전의 서울은 없었습니다.

 

나룻배를 타고 말죽거리로 나가 하루밤을 묵으며 아이들 머리 만한 배를 사서 자루에 담아 오던 어른들을 기다리던 나루터는 간 곳이 없고 제3 한강교가 거대하게 자리하고 제가 태어났던 자리는 "오성볼링장"이 떡하니 자리하여 용돈이 생기면 볼링을 하러 가서는 여기가 내 태가 묻힌 자린데 하며 회환에 젖곤 하였습니다.

 

서울 사람들은 그래서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인가 봅니다. 고등학교 때는 제 위로 형이 둘 누나 하나가 대학을 다녀서 저는 부모님 부담도 덜어 드릴 겸 육군사관학교를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삼국지도 여러 번 읽고 뜻을 같이한 친구들과 박정희 대통령처럼 혁명할 그 날을 꿈꾸면서 말입니다.

 

그 당시 육사는 굳이 과외를 해가며 극성을 떨지 않아도 충분히 가는 곳이라 육사 수준 정도의 본고사 실력만 유지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입니까? 내 인생의 향도와 같은 박정희 대통령이 삼국지의 도원결의 동지(?)에게 창피스럽게 여자를 옆에 낀 채 살해당하다니 말입니다. 

 

그것도 막 육사 입학 준비에 여념이 없던 고3말에 말입니다.그래서 육군사관학교는 저의 장래 선택에서 아무 미련도 없이 제껴지고 말았습니다. 하긴 박정희라는 잘못된 군인의 모습만 보다 느낀 실망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 당시 본고사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가 각기 유형이 틀려 따로 준비를 해야 했던 시절인데다가 의대를 다니는 큰형, 한양대를 다니는 작은형, 누나 때문에 부모님은 제가 학비 드는 일반대학으로 진로를 바꾼 것이 무척 부담스러우셨던 것 같았습니다.

 

그 당시 못사는 편은 결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한번에 4명이 대학을 다니기에는 벅찼을 것입니다.

 

청년시절

 

저는 제 아버님이 젊은 시절 교편을 잡고 전북 임실 출신 어머님을 만나신 전주의 전북대 농대에 차후에 원예과 교수를 할 양으로 지원하엿습니다.

 

농학계열 수석입학을 기대하였으나 4등으로 입학하여 학비와 기숙사비를 지원 받으며 서울 사람이 전라도 대학을, 그것도 농대를 다니게 되었던 것입니다.

 

박정희에 속은 고등학교의 세월도 억울하고 또 이주일 같이 생긴 전두환이가 국민을 우롱하고 농락할 것 같아 어설프게 학생운동에도 관여해 보고 잡혀도 가 보았습니다.
 
당시는 계열별 입학인 때라 2학년 올라갈 때는 학과를 선택해야 했는데 저는 저의 아버님처럼 살고 싶지 않아서 부모님 뜻을 어기고 원예과가 아닌 농공학과를 가서 농대에 있는 토목과를 졸업하였던 것입니다.

 

졸업할 때는 형들, 누나가 이미 졸업하여 비빌 언덕이 생겨 마음놓고 기술고시네 대학원입네 하며 고르다가 영 마음을 충족할 수 없어 만사작파하고 '병역의 의무'부터 해결하고자 병무청을 찾아가 저의 집안에선 유일하게 사병으로 자원 입대, 1985년 5월에 논산훈련소에 입소해 나이 많은 졸병 생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입소하여 하루도 지나지 않아 병무청 징병관이 한심한 듯 자원입대를 원하는 저를 처다보며 대학원 마치고 장교로 가지 그러냐고 하던 말이 뼈저리게 실감이 났었습니다만 제 형들을 보니 장교는 예비군훈련이 길어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습니다.

 

6주 신병교육을 받고 군용열차를 타고 북으로 향하다 조치원에서 내려 호송병의 인솔 하에 경부선 열차를 타고 대구로 가서는 공병훈련도 없이 내당동에 위치한 그곳 공병대에 배치되어 자대배치 첫날부터 별별 고생을 다하다가 또 6주만에 대구통합병원으로 후송을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내당동에 있던 그 당나라 군대는 대대병력의 대부분이 병장들로 이루어진 희한한 부대였습니다. 세상에 인원배치를 어쩜 이렇게 할 수가 있을까 의문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으며 사병들 얼굴에 기름기가 좀 있다 싶으면 집이 다 그동네 대구였습니다.

 

그때 이름이 오원이라는 저보다 나이도 어린 병장녀석 하나가 제게 병원 후송이란 고약한 선물을 선사한 고참이었습니다. 그 선물은 바로 대구통합병원 후송이었습니다.

 

그는 얼마나 못되게 구는지 무릅이 불편하다고 하면 그 불편한 무릅만 집중공격을 하였습니다. 쫄따구가 빠졌다고 오리걸음, 토끼뜀 ... 이젠 기억에도 가물거리는 별의별 얼차례와 군화 발길질은 제 튼튼한 육체를 후송시키는데 6주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군에 이런 가혹행위가 없다니 다행이 아닐 수 없지만 다시는 돌아보기도 싫은 기억입니다.
 
제대 후 직장시절

 

제대 후에는 대구에서 "LGO 문화원"이라는 소규모 무역업과 유학업무그리고 해외 정보계통의 서적을 출판하는 사업을 구씨 오씨 성을 가진 친구들과 함께 하다가 사업이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 두고 서울로 올라와 한국잡지협회 부설 한국잡지연구소의 잡지연구원으로 취직하여 [한국잡지총람]이라는 잡지역사를 한국학과 서지학의 대가 김근수 박사와 함께 발간했고 [저자권법 해설서]를 잡지계를 위해 한국저자권의 권위자 한승헌 변호사와 함께(?) 발간했으며 <잡지광고대학>도 개설하여 광고기법을 잡지계에 소개하였고 잡지기자들의 자질향상을 위해 개설한 <잡지대학>을 통해 유능한 잡지기자들을 배출하고자 노력했었습니다.

 

당시 [마당]이라는 잡지에 1달간 윤락가에 잠입하여 윤락녀들의 실상을 르뽀형식으로 기사화하여 관심을 끌었던 경상도 출신의 조갑제 기자가 [월간조선]으로 스카웃되어 가서 잡지대학에 강사로 초빙하기도 하였는데 그 조갑제 기자가 [월간조선]의 편집장으로 보수진영 언론의 대장을 하며 박정희 추모 열기에 일조를 한다하니 참으로 많은 것이 변한 한국사회임이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그 잡지연구소에 근무하던 때가 제 인생의 큰 굴곡이 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저는 1985년, 1986년, 1987년을 열병을 앓으며 보내야 했습니다. 이런 곡절을 친한 신부님에게 고했고 그분은 마치 자신이 사랑의 열병에 걸리신 양 흥분과 고통 속에 너무도 아름답고 너무도 단순한 답을 주셨습니다.

 

"사제가 되어 많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여인을 사랑하여 그 여인의 영혼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름답게 이끄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는 보속을 주셨고 저는 답장 없는 일방적인 구애의 편지를 1주일에 한통씩 햇수로 근 3년을 보내서 마침내 1988년 7월 16일 여의도 천주교회에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율을 자랑하는 여의도성당 성가대의 축하 속에 혼배성사를 치루었습니다.

 

저는 1988년 7월 16일 삼복더위에 여의도성당에서 의무복무기간이 3년씩이나 남아 있고 동해경비사령부 산하 최전방 동해병원으로 막 전출한 현역간호장교 중위와 결혼을 하였고 제 인생에 두 번 다시는 오기 힘든 기회인 88서울 올림픽과 장애자올림픽에 '한국잡지풀기자단'의 일원으로 취재와 지원업무에 참여하였고 환경문제가 전 인류의 관심사로 떠오르기 시작할때 [Non-point source pollution]문제를 다루기 위해 버지니아공대로 국가에 메인 아내를 뒤로하고 외기러기 유학길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혼의 단꿈은 전.후방교체라는 군대 괴물이 앗아가더군요. 제대 후 언론계통에 근무하던 저는 직장의 업무와 88년 올림픽 준비업무에 시달리며 주말마다 서울과 속초를 오가는 힘겨운 주말부부 노릇을 하는 바람에 1988년 후반기는 너무나 고통스런 나날이었습니다.88올림픽과 장애자올림픽이 끝난 후 저는 전방에 근무하는 간호장교 중위인 제 아내 김영신에게 어려운 제안을 하였습니다.

 

"당신이 제대할 3년 뒤까지 미국 유학을 가서 인류를 위한 공부를 해보겠다"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선뜻 동의를 해주는 바람에 저는 결혼한 지 5개월만에 서러운 눈물을 뿌리는 간호장교 아내를 뒤로 한채 1988년 12월 홀홀 단신 외기러기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것입니다.

 

환경공학 공부를 하는 동안 제 아내 영신은 남편 없이 혼자서 우리의 아들, 이경환 마이클(1989년 9월 9일생)을 출산해야 했고 의무복무를 마친 1992년에는 제 미국 유학에 동참하여 저의 힘든 짐을 많이 덜어 주었습니다.

 

미국적인 관점에서 아내가 간호사로 돈을 벌며 남편 공부 뒷바라지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미국생활

 

미국 유학을 결정하게 된 저간에는 고된 주말부부생활도 큰 이유이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현실 사회 속에서 받는 학벌과 지역차별이 가장 컸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창시절부터 학생운동과 관련하여 경찰서나 보안대에 끌려가도 단골로 늘 듣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서울대 놈도 아닌 게 데모는 무슨 데모냐"는 학교차별과 "농대 다니는 놈이 뭘 안다고 학생운동이야"라는 전공차별에 무심한 듯 지나치긴 했지만 늘 답답함이 한구석에 남아 있었습니다.

 

직장생활 속에서 느껴야 했던 전라도 대학 농대출신이라 당하는 상처는 서울놈이 전라도 대학 농대를 나왔다까지 이어지면 그야 말로 자존심의 상처와 자괴감을 가져 왔고 이유 없이 무시 당하는 기분을 느끼지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기회가 있다면 자질을 검증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늘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욱 더 잡지라는 언론계를 통해서 이 문제는 전라도 문제가 아니라 한국이 우물안 개구리여서 생긴 일임을 알 수 있었고 틈틈히 관심 있는 분야의 석학들과 서로의 관심분야에 대해 서신왕래를 시작하였습니다.

 

세계적인 석학일수록 저 같은 일개 소국의 미천한 관심자에게 정성을 다해 답장을 보내 왔고 저도 신바람이 나서 최신 논문들을 탐독하며 그들과의 '서신 환경포름'에 푹 빠지게 되었으며 그 석학들은 너나할 것 없이 함께 연구하자며 저의 도미를 강력하게 권하곤 하였습니다.

 

사기가 고양되니 없던 실력도 생기나 봅니다. TOEFL 점수는 600을 넘어가고 GRE는 1400에 육박하니 그당시 입학허가서를 보내준 대학원은 아이비리그 콜롬비아대학을 비롯하여 무려 14곳의 명문대학들이었습니다.

 

학교 선택에서 저는 큰 실수를 범하게 되는데 아이비리그대학에 자신도 없고  두려워 중간 정도의 시골학교인 버지니아공대(Virginia Tech = Virginia Polytechnic Institute and State University)를 택하게 되는되 차후에 행하게 되는 정부의 각종 과제를 수행하는데 뼈저린 후회를 하곤 했습니다.

 

저는 흔히 생각하듯 어디서나 자기 하기나름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만만한 대학원을 선택하였던 것이지요.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혼자서 수행할 만한 작은 것이 없습니다.

 

여럿이 그룹을 이루어 행하여야 하는 것들이지요. 소위 아이비리그라는 대학은 우수한 brain network 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외의 대학들은 더 힘이 들게 되지요.

 

저는 4개 대학원에 걸쳐 총 8년 반을 대학원에서 보낸 후에야 박사학위를 손에 쥘수 있었습니다. Non-point source pollution 을 연구하던 버지니아공대에서 1년 반, <산성비문제가 전지구적문제인가 지역적문제인가>에 3년 반을 소비한 노스이스턴공대, 브라운대학 지질학과에서 <지하수>문제로 반 년, 마지막으로 University of Rhode Island에서 <지하수 오염 모델개발>로 3년을 보내고 환경공학박사학위를 마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동안 미국환경청의 표준모델과 군 관련 환경모델을 개발하여 미국 국방성 산하 수문 수리국에서 수자원개발과 수질오염문제를 다루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교사들

 

더러는 미련하게 남편 뒷바라지하다 남편이 박사취득 후엔 이 구실 저 구실로 나머지 인생을 함께 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서로가 힘든 공부, 힘든 직장생활을 하다 더러 스트레스를 서로에게 풀곤 하여 아주 사소하지만 묵은 감정들이 차곡차곡 싸인 듯 부인은 미국에, 남편은 한국에 서로 다른 둥지를 다시 트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신앙이 아니고는 풀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거기다 시댁 어른들은 아들이 잘나 박사하고 출세한 줄 알고, 친정에선 딸이 헌신하고 돈까지 벌어가며 공부시켰다고 서로 공치사까지 벌어질 양이면 이들의 인생드라마는 파국을 향해 갈 수밖에는 없는 지경들이 되는 것도 주위에서 더러 보았습니다.

 

저는 그런 못난 친구들을 인생의 반면 선생으로 알고 조심에 조심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국군 간호 사관학교 폐지 소식

 

저는 미국에서 공부한답시고 한국 군사정권의 종말도, 군사정권에 야합한 문민정권의 탄생과 종말도, 그리고 비록 국가부도 일보직전이라는 IMF의 처절함 속에서나마 출발한 민주정권의 시작도 지구의 반대편에서 풍문으로 설레는 마음만 가지고 접해야 했습니다.

 

1998년 어느날, '국군 간호 사관학교의 폐지'설을 접하고 놀래며 제 아내 영신에게 전했습니다만 별로 아름다운 기억들을 가지고 있지 못한 듯 그럭저럭 또 2년여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묵은 신문

 

지난해 말인가 올 초에 어느 교민 댁에서 한국의 묵은 신문을 얻어다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국방부의 국군 간호 사관학교 폐지의 부당성'을 따지던 국방위 여성 국회의원 이연숙 의원의 발언 내용이 담긴 기사를 보게 되었고 제 아내에게도 그 'IMF의 해결책으로서의 국간사의 폐지가 다름 아닌 국방부의 생색내기용 희생물'이라는 내용을 보여 주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운동은 국회 사상 최초의 여성 국방 상임위원인 이연숙 의원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1999년 영신이의 생일 선물로 꾸며주었던 인터넷 도매인

http://www.youngsinlee.com

<국군 간호 사관학교 살리기> 웹으로 올 1월 4일 바꾸었고, 관계되는 사람들에게 국군 간호 사관학교의 존폐 문제를 탐문도 하게 되었습니다만 상황은 너무 절망적이었습니다.
 
국간사의 낮은 인지도와 협조자들

 

한국 지도층 내에서조차 국군 간호 사관학교는 이해와 관심 밖 이었고 제가 1985년 처음 느꼈던 그 생소함을 많은 사람들이 저로 인해 똑같이 느껴야만 했습니다.

 

한가지 이해시켜 드리고 싶은 점은 미국의 많은 교민들이 그러하듯 저는 두 개의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미국인처럼 말하고 생각하며 미국 동료들과 어우러져야 하는 현실 속의 미국 연방정부 내의 40살의 직장생활이고, 또 하나는 1988년 한국 나이로 27살에 멈추어버린 한국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라는 것입니다.

 

저의 한국에서의 20대는 1980년, 대학 1학년의 어린 나이에 예비검속에 끌려가 개처럼 당한 군사정권의 테러, 3달여에 걸친 헌병대 유치장 속의 공포, 대학 2학년때 광주의거 1주기 위령제로 정보과 형사들에게 당한 린치, 그 와중에 제자의 학교생활을 보호해 주고자 제적은 면하게 해주실 요량으로 젊은 형사들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손이 발이 되게 잡아가지 말라고 싹싹 비시던 이병기 학장님의 모습을 통한 저 자신의 이루 헤아리기 힘든 참담함 등등 끝도 없이 열거되는 영육간의 황폐화는 그로 인한 살인마 전두환에 대한 씻지 못할 분노들이 얼룩져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다행히 그 아픔을 함께 했던 그 시절의 선배, 친구, 후배들은 이제 한국 사회의 각계 각층에서 우리가 품었던 합리적인 세상을 만들고자 열심히 살고 있고 이 <국군 간호 사관학교 살리기>의 보이지 않는 후원자들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들의 도움으로 멀리 미국에 있으면서도 국군 간호 사관학교와 관계된 한국사회의 집권층의 의향을 파악할 수 있었고 사회과학 서적류의 책에 나오는 내용대로 자로 재듯 이일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도서관에서 수백여 권에 이르는 정치학.사회학.조직학여론학 NGO관련서적, 심지어 여성학에 이르기까지 관련서적을 탐독하였고, 저명한 관련 학자들에게 자문도 여러 번 구했던 귀중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입법 투쟁과 정치적 중립

 

힘에 겹기는 했지만 의회를 향한 입법 투쟁이 우리의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이 입법 투쟁의 가장 큰 걸림돌은 의회 구성원 전체에 존속 동의를 구해야 할 국간사 문제가 몇몇 국회의원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시간도 촉박하고 딱히 방도가 없어 기존의 판을 뒤엎고 국간사 문제를 국회의 일반화된 문제로 만들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국간사가 군 조직이기에 정치적 중립을 목숨처럼 지켜야 했던 것도 피를 말리는 외줄타기 곡예사의 긴장 그 자체이기도 했습니다. 북한의 작고한 김일성 주석의 중국과 소련에 대한 양다리 외교만큼이나 시간과 타이밍과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정보수집은 이 글을 읽는 분들의 상상에나 맡길까 합니다.

 

하늘은 우리를 도왔습니다. 김화중 간호협회장이 전국구를 승계하여 입법부에 합류하였고, 수세에 몰리던 박지원 전장관이 청와대 수석으로 들어갔고 새천년 민주당 정책위 의장이 과거 학생 운동권의 거목 이해찬 의원으로 바뀌었고 신설된 여성부 장관에 역시 재야출신 한명숙 의원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들은 결국 국간사의 교육적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한 분들입니다.국간사는 시련을 당했지만 그나마 김대중 정권은 한 집단이 이 사회에 자리잡기 위해서는 그 집단이 이 사회 속에 올바르게 공헌하여야 한다는 기본원칙을 국간사에 일깨워 준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하여 국간사 존속을 반대하는 일단의 무리들은 9건에 달하는 공표되지 않은 불미스러운 국간사의 문제도, 집권층에 올리는 학교 살리기 운동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학교가 살아나 무척 기쁩니다. 제 아내같이 똑똑한 여학생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잇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제는 정말 동문들의 몫입니다.

 

동문들도 진정한 애국이 무엇인지, 거듭나야 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며 학교를 새롭게 만들어 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 
 

 
 

 

 

 

 

[이상원박사 부부사진]

 

[현각스님과 함께]
 

 

 

 

노란장미(Samuel S Lee, Ph.D.)의 미국인명록 2006~2007년도 판 등제
 

 

팬스테잇에 있다가 지금은 샌트랄 프로리다 대학에 있는
조지 예 박사와 함께 샌프란 AGU컨퍼런스에서
 

 

[한양대 교수님과]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상원 배상.
 
 
커뮤니티 - 환경 이야기
 
황장 이상원의 환경이야기와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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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커뮤니티 > 중력기관 연구촌 [원문보기]
작성자 : 황금철 (hkc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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