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3_생각해볼글

한국 최초의 재활전문 재단과 병원이 생겨난 배경을 아시나요?

忍齋 黃薔 李相遠 2006. 9. 21.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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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차선변경'
[우리 곁의 재활병원] <1> 이국땅 오지에서 만난 불행
등록일자 : 2006년 06 월 28 일 (수) 09 : 27   
 

  최근 한 주부가 8년간의 소송 끝에 받은 피해보상금 10억 원을 자신과 같은 처지의 장애환자를 위한 재활전문병원 건립기금으로 내놓아 우리 사회에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그 주인공은 영국 오지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뒤 영국과 독일 재활병원을 체험한 황혜경 씨다.
  
  황 씨와 푸르메재단 상임이사로 일하고 있는 남편 백경학 씨는 "불행은 나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올 수 있는 것"이라며 "우리사회에도 하루빨리 환자의 물음에 늘 응답하는 아름다운 재활전문병원이 세워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황혜경-백경학 부부가 인생의 큰 굴곡을 건너 이제는 비슷한 처지의 장애환자들에게 손을 내밀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어본다. <프레시안>은 이러한 노력이 우리사회를 보다 인간의 체취가 나는 곳으로 만드는 작은 손길일 수 있다고 보며,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
  
  인생은 늘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부침을 겪는다. 그것이 삶을 뒤흔들 수도 거대한 바람일 수도 있고 인생의 잔가지 몇 개를 부러뜨리는 소슬바람일 수도 있다. 때로는 추위 속에 희망을 약속하는 온풍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와 내 가족이 8년 전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겪은 사건은 삶의 뿌리가 뽑힐 만한 세찬 태풍이었다. 되돌아보면 삶의 뿌리를 흔들고 지나간 폭풍우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은 그 어려운 고비 고비 마다 우리에게 내민 많은 사람들의 도움의 손길 때문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불행은 나와 전혀 다른 사람들의 문제였을 뿐
  
  1998년 여름, 영국에는 유난히 많은 비가 내렸다. 그해 6월부터 두 달 반 동안 우리 가족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소도시 칼라일 병원의 중환자실에 머물고 있었다. 이곳은 우리의 강원도 영월과 정선에 해당하는 오지였다. 스코틀랜드 여행 중 갑자기 뒤로 나타난 한 대의 벤츠 승용차가 우리 가족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인생의 차선이 한 순간의 사고로 크게 변경됐다. 중환자실에서 혼수상태에 있는 아내를 지켜보며 나는 마치 눈물샘이 고장 난 듯 흐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평생 흘릴 눈물을 그때 다 흘렸으리라.
  


 ▲ 사고를 낸 차량과 가해자의 뒷 모습 ⓒ프레시안




▲ 1998년 6월 9일 사고직후 트레일러 운전사가 황씨에게 점버를 덮어주고 있다. ⓒ프레시안

  늘 낭만과 신비로 가득 찬 '백야'를 동경했지만 내가 현실 속에서 맞닥뜨린 '백야'는 고통과 슬픔에 찬 '백야'였다. 밤 11시가 넘어 하늘이 어두워지고 새벽 세 시가 되면 어김없이 뿌옇게 밝아왔다. 일주일째 내리는 여름비는 한국의 장맛비처럼 하염없이 중환자실 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나는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매일 새벽 우울한 백야를 맞이했다. 고대 스코틀랜드인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북잉글랜드인들이 설치한 거대한 암석장벽이 병실 창문 밖으로 보였다. 장벽 위로 흰 갈매기와 부리가 노란 까마귀들도 먹구름 속을 낮게 비행하곤 했다.
  
  아내는 혼수상태였다. 사고 몇 시간 전만해도 우리는 2년간의 독일생활을 마치고 맞게 될 한국에서의 생활을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그리워했던 친지들을 만나고 고국 음식을 맛보는 것을 상상했다. 독일생활은 행복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인근에 있는 호반도시 프리엔의 기숙사에서 우리는 독일 생활을 시작했다. 주말이면 각국에서 온 20대 초반의 젊은이들과 어울려 토론도 하고 고물 승용차를 빌려 알프스와 이탈리아로 소풍을 다니기도 했다. 어학코스가 끝나자 우리는 뮌헨으로 이사해 늦깎이 공부를 시작했다. 아침 일찍 아이를 유치원에 맡기고 강의가 끝나면 아내와 도서관에 나란히 앉아 공부를 했다. 주말이면 유학생들을 초대해 맥주파티를 열기도 했고 벼룩시장을 헤매고 다니기도 했다.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불행이란 나와 전혀 다른 사람들의 문제였다.
  
  귀국을 한 달 남겨놓은 시점에 나는 아내에게 추억을 만들자며 자동차로 영국을 여행할 것을 제안했다. 아내는 내 성화에 못 이겨 따라나섰다. 폭풍의 언덕이 펼쳐진 스코틀랜드가 우리의 최종적인 여행지였다. 스코틀랜드의 고성 에딘버러와 경제중심지 글래스고를 거쳐 우리는 런던으로 향하고 있었다. 집이 있는 독일 뮌헨으로 돌아가면 한국으로 이삿짐을 부치는 일만 남아 있었다.
  
  한 순간에 날아가버린 행복
  
  아내는 자동차 트렁크 속에 필요한 물건이 있다고 했다. 시야가 툭 터진 오르막길에 비상등을 켠 채 자동차를 세웠다. 길가에 잠깐 차를 세운 일이 이렇게 큰 결과를 불러오리라 누가 상상했을까. 자동차 트렁크를 열고 딸애 속옷을 찾던 아내에게 자동차 한 대가 돌진해 왔다.
  
  '꽝' 하는 굉음과 함께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났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가해자의 자동차 밑에 깔려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도로 위로 자동차들이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광경이 보였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나는 터져 나오는 비명 속에서 죽음을 생각했다. 한 떼의 사람들이 몰려와 자동차를 번쩍 들어 그 아래 깔린 나를 끌어냈다. 쓰러져 있던 아내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내는 다리에 많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딸애는 튕겨져 나간 우리 자동차 안에서 창문에 매달린 채 울고 있었다.
  
  "당신! 살아 있어? 정신 차려 봐!" 나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아내는 말이 없었다. 내가 계속 고함을 치자 정신이 들었는지 눈을 떴다. 핏기가 가신 얼굴이 평온했다. 나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내는 살아 있었다. 가해자는 정신없이 핸드폰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40대 초반의 남자였다. 나는 자동차로 기어가 조수석에 있던 카메라를 꺼냈다. 사고현장과 피의자의 모습을 정신없이 담았다. 내가 찍은 사진들은 나중에 사고의 책임이 전적으로 우리에게 있다는 가해자측 보험회사의 주장을 뒤집을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됐다. 이 사진들로 인해 가해자측 보험회사는 법리논쟁에서 불리해질 것 같자 극적인 합의를 요청해 왔다.
  


▲ 사고직후 혼수상태 모습(1998년 6월) ⓒ프레시안

  나중에 영국 경찰을 통해 안 일이지만 가해자는 평소 편두통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날도 두통약을 여러 알 먹고 운전하다 정신을 잃고 사고를 냈다고 했다. 그가 마약이나 술을 먹지 않고 정말 두통약을 먹었는지, 사고 직후 경찰에 도움을 청했는지 확인해달라고 스코틀랜드 검찰에 요청했지만 그들은 거절했다.
  
  뒷걸음질 치는 운명…불행의 시작…
  
  누구나 그렇지만 서울에서의 생활은 24시간으로 부족하다. 사회부와 정치부 기자였던 나는 늘 일에 쫓겼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열심히 일했지만 일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무언가 재충전이 필요했다. 이렇게 살다 건강과 가족을 모두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고 나는 도망치듯 독일 대학에 연수를 신청했다. 다행히 언론재단과 회사로부터 2년 동안 생활비와 학비를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나는 이런 사실을 아내에게 알렸지만 그녀는 기뻐하지 않았다. 교통문제와 시민의식 등 서울시의 여론조사를 담당했던 아내는 자기 일을 사랑했다. 아내는 몇 달 전 직장을 다니다 가톨릭 신학교에 들어간 동생이 마음에 걸렸고 홀어머니를 덩그렇게 남겨놓은 채 외국으로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 아내가 지금 이렇게 내 눈 앞에서 쓰러져 있다니!
  
  아내는 구급차에 실리면서 말했다. "나는 괜찮아요. 민주가 충격을 받았을 거예요." 아내의 청바지는 유혈이 낭자했다. 고통의 순간에도 딸애를 걱정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신비로웠다. 두 시간이면 끝날 거라는 수술이 훌쩍 8시간을 넘겼다. 천정에 매달린 전구 두 개와 '씨어터'라고 씌여진 수술대기실이 황량하게 보였다. 아내가 드디어 들것에 실려 나왔다. 아내는 혼수상태였다. 아내를 붙잡고 흔들던 나는 까무러칠 듯 놀랐다. 아내의 왼쪽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운명이 뒷걸음질 치는 것 같았다. 한 남자가 다가와 설명했다. 수술을 담당한 의사라고 했다 "당신 부인이 워낙 출혈이 심해서 살리기 위해서는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한 스코틀랜드 사투리였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하느님이 나에게 이렇게 가혹한 시련을 주실 수는 없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아내에게 이렇게 큰 고통을 주시는 건가?' 나는 하느님을 원망했다. 그러나 아내의 다리 절단은 불행의 시작에 불과했다.
  
  '빈손의 하느님' '인간의 얼굴을 한 하느님'과 만나다
  
  아내는 가톨릭 모태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학창시절 성가 단원과 교리 교사를 맡을 정도로 성당활동에 열심이었다. 우리 집안도 어머니와 형수, 누나가 성당에 다니고 있었다. 아내는 독일 뮌헨에 도착하자 한인성당을 찾아 나섰다. 나는 매주 아내를 성당에 태워다 주고 오랜만에 우리 교민을 만날 수 있다는 이유로 성당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앙에 대해 나는 적지 않은 거부감과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 1997년 사고전 독일에서의 모습 ⓒ프레시안

  내가 한국에서 신앙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독재에 맞서 사회주의 이론이 범람했던 80년대 초 대학을 다니며 이념서적을 탐독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기자 생활을 하며 알게 된 일부 고위 성직자들, 특히 일부 기독교 고위 성직자들의 이중적인 태도에 환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늘 화해와 용서를 외치던 그들이 가정과 교회 밖에서 얼마나 탐욕스럽게 변하는지 목격했다. 그들에 대한 불신은 그들이 믿는 이상한 하느님을 더더욱 믿을 수 없게 만들었다. 당시 뮌헨에는 신부, 수녀, 목사들이 많았다. 교구와 수도회, 교회에서 뽑혀서 혹은 자비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우리 부부는 이 분들을 집으로 초대하기도 하고 때로는 1차대전의 폐허 속에서 토마스 만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밤새워 토론을 벌였던 뮌헨 슈바빙 거리의 카페에서 그들을 만났다. 흑맥주를 앞에 놓고 한국 정치와 종교에 대해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함께 걱정하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됐다.
  
  이들은 한국에서 만난 성직자와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특히 유학 온 신부, 수녀님들의 소박한 모습은 종교와 성직에 편견을 갖고 있던 나를 놀라게 했다. 가톨릭 내 민주화와 여성 사제직 도입 등에 대한 진보적인 태도는 교계정치와 세속화로 비쳐진 종교를 새롭게 평가하는 계기가 됐다. 로만 칼라와 베일 속에서 소박과 정결뿐 아니라 한국 가톨릭의 진보성과 합리성을 나는 발견한 것이었다. 이들이 사는 기숙사와 성당 내 숙소를 방문할 기회가 많았는데 책 수십 권과 옷가지 몇 벌, 컴퓨터가 이들이 가진 재산의 전부였다. 이에 비해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지. 이들이 믿는 빈손의 하느님, 인간의 얼굴을 한 하느님이라면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 영국 칼라일병원 본관 ⓒ프레시안

  

▲ 1997년 독일사람들과 함께 ⓒ프레시안

  지금 서강대에 계신 예수회 김용해 신부와 부산교구 홍경완 신부, 수원교구 황치헌 신부 등을 만나면서 나는 가톨릭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이듬해 초 사고가 나기 넉 달 전 나는 뮌헨 프라우엔(성모) 성당에서 독일 추기경 님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가장 어려운 순간 가톨릭 신앙은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 주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빗줄기에 내 눈물도 합쳐졌다. 아내는 칼라일 병원으로 옮겨진 뒤 첫 번째 수술 후 고비를 넘기는가 싶더니 수술 부위가 다시 감염되면서 상태가 더욱 악화됐다. 사고의 충격으로 양쪽 신장이 기능을 중단하자 체온이 42도를 넘어섰고 혈압도 270까지 치솟았다. 양쪽 옆구리와 목젖에 구멍을 뚫어 인공 신장과 인공호흡기를 다는 수술을 받았다. 각종 약물과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10여 개의 호스와 링거선을 몸에 꽂고 있었다. 아내는 사고의 후유증과 노폐물을 배출하지 못한 탓에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혼수상태에 빠진 얼굴을 내려다보며 '이 사람이 과연 내 아내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수한 은혜와 위로 속에 기적 일어나다
[우리 곁의 재활병원] <2> 낯선 땅 오지의 병원에서
등록일자 : 2006년 07 월 05 일 (수) 09 : 17   
 

  칼라일은 북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국경지방에 위치한 인구 10만의 작은 도시였다. 고대 스코틀랜드인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영국 동해안과 서해안을 가로질러 설치된 거대한 장벽이 칼라일 시의 북부를 가로막고 있었다. 이 도시의 외곽에 위치한 칼라일 병원은 인구에 비해 비교적 규모가 큰 300병상을 가지고 있었다.
  
  병원 하면 비좁은 병실과 환자, 방문객이 뒤엉킨 로비가 연상되던 나에게 영국과 독일 병원의 한가로움은 낯선 풍경이었다. 칼라일은 우리로 말하면 강원도 영월이나 정선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병원 본관은 200년 전 대영제국의 영화를 상징하듯 코린트식 거대한 열주와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치장되고 있었다. 특히 병원을 둘러싼 정원은 꽃과 나무가 어우러져서 감탄이 절로 났다. 하지만 병동 내부는 마치 2차대전 때의 야전병원처럼 낡고 을씨년스러웠다.
  
  나와 딸애는 병원에 붙은 가족호텔에 기거했다. 다른 지역에서 온 가족들이 머물 수 있는 가족호텔은 무엇보다 깨끗하고 싼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었고 우리처럼 불의의 사고를 당한 환자 가족들에게는 무엇보다 필요한 시설이었다. 우리의 특급호텔에 버금가는 곳이었지만 펜션과 같이 스스로 음식을 해 먹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설이 마련돼 있었다.
  

▲ 영국병원 정원. ⓒ프레시안

  


▲ 영국 칼라일병원 본관. ⓒ프레시안

  연민이었을까? 직업의식이었을까?
  
  아내가 입원한 중환자실은 6인실과 1인실로 구성돼 있었다. 아내는 중환자실에서도 가장 위중한 환자였다. 아내를 전담하는 의료진으로는 30대 후반의 주치의와 6명의 간호사가 배치됐다. 2명의 간호사가 8시간씩 3교대로 교체됐다. 환자를 보살피는 것은 환자 가족이나 간병인이 아니라 의료진의 몫이었다. 영국으로 여행 왔다 혼수상태에 빠진 외국인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아니면 봉사와 희생의 직업의식 때문이었는지 의료진의 간호는 극진하다 못해 눈물이 날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간호사들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시트를 갈고 체온과 혈압을 재고 아내의 상태를 30분 단위로 끊임없이 확인하고 기록했다. 혼수 상태의 아내에게 주사를 놓을 때도 일일이 어떤 주사이고 왜 주사를 놓는지를 아내에게 설명했다. "미스에스 황! 이 주사는 조금 아플 거예요.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의 출혈을 멈추기 위한 것이고 하루빨리 깨어나길 빌어요"라고 말이다. 조금이라도 환자나 환자가족이 부르면 간호사들은 달려왔다. 그들로부터 "절대 안돼요"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 늘 서로 상의한 뒤 "미안해요. 그 대신 이게 좋을 것 같아요" 하고 차선책을 제시했다. 많으면 귀하지 않다. 우리 사회도 병상이 일정 부분 비어 있고 환자로 넘쳐나지 않는다면 우리 간호진도 영국과 같이 친절할 수 있을까. 환자의 부름에 늘 응답할 수 있을까.
  
  아내의 주치의는 '화이트'(White) 성을 가진 40대 초반의 남자였다. 외국 의사가 주는 선입감과 영국인 특유의 신중함 때문에 처음에는 그가 무척 어렵게 느껴졌다. 그는 아내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중환자실에 올 때마다 아내를 둘러본 뒤 중환자실 옆 응접실에서 초조히 서성이고 있는 나를 찾아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고마움과 황송스러움이 겹쳐졌다. 화이트는 오전 오후 한차례씩 보통 1시간 넘게 아내의 상태를 상세히 설명했다. 나중에는 귀찮을 정도였다.
  

▲ 영국병원에서 민주그림. ⓒ프레시안

  

▲ 영국병원내 가족호텔. ⓒ프레시안

  비록 국적을 달리하지만 나와 그는 같은 백(White) 씨였다. 나중에는 농담할 정도가 됐지만 생존의 기로에 선 보호자로서 의사를 대하기는 여전히 어려웠다. 그는 경상도 사투리보다 심한 스코틀랜드 사투리를 사용해 그래프까지 곁들여 친절하게 설명했다. 아내의 뇌기능이 30% 이상 손상됐으며 사고의 충격으로 패혈증 등 여러 합병증이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나에게 궁금한 것은 '아내가 얼마나 위독하며 과연 살아날 수 있는가'였다. 내가 이런 질문을 할 때면 그는 손사래를 쳤다. '당신 아내의 정확한 상태를 알아야 한다'고 말이다. 하루는 그의 장황한 설명에 내가 "환자가 많아 바쁠 텐데 이제 가봐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화이트는 정색을 하더니 "당신 부인만큼 이 병원에서 위독한 환자가 없다. 당신 부인이 우리에겐 가장 중요한 환자이고 당신은 부인의 상태를 정확히 알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내가 한국에서 경험하지 못한 감동이 일었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
  
  사고 며칠 후 중환자실로 한국 유학생이 불쑥 찾아왔다. 칼라일에서 300킬로미터 떨어진 뉴캐슬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있는 전태일 씨였다. 그는 우연히 영국 경찰로부터 글래스고 근처에서 한국인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달려왔다는 것이었다. 전태일 씨는 나와 민주를 위해 1주일에 한 번씩 김치와 불고기를 싸들고 병원을 찾아왔다. 리버풀에 살고 있는 마리테 민(민원순) 수녀님도 우리의 사고 소식을 듣고 천리길을 달려오셨다. 수녀님은 나를 보자 "우리 함께 기도해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예요. 가깝게는 가족과 많은 분들이 민주엄마를 위해 기도하고 있어요" 하고 말해 결국 나를 울게 만드셨다. 칼라일 시에 살고 있는 영국인 데블린과 카트린 씨 가족도 민 수녀님의 소개로 병원을 찾아 우리 가족을 위로하기도 하고 민주를 데리고 소풍을 가기도 했다. 친구 박인철과 후배 강형동 부부도 독일 도르트문트와 뮌헨에서 자동차를 타고 바다를 건너 우리를 찾아왔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고 했는가. 모두가 그 가장 어려운 순간에 조건 없이 우리 가족을 도와준 은인들이었다.
  
  영국경찰은 런던에 있는 한국대사관에도 우리 가족의 불행을 알렸다고 했지만 한국대사관으로부터는 열흘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다. 그 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한국영사로부터였다. 런던에 너무 일이 많아 오지인 칼라일에 올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황씨 담당간호사들과 함께. ⓒ프레시안

  병원 내에 설치된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민주는 병원 식구들에게 단연 인기였다. 아내의 주치의부터 간호사, 심지어 청소부 아줌마들까지 한국어와 독일어를 조잘대는 민주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사람들은 출근길에 그림책과 스케치북, 크레용, 작은 인형 등을 민주 손에 쥐어주곤 했다. 민주가 그린 그림은 아내 병실을 뒤덮을 정도가 됐다. 간호사들은 "엄마가 깨어났을 때 네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랄 꺼야" 하고 민주를 격려했다.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피어난 위로의 꽃들
  
  두 번째 수술 후 상처부위가 다시 감염되면서 아내의 얼굴에는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아아! 이렇게 죽고 마는구나.' 나는 절망했다. 늘 밝게 대하던 간호사들도 더 이상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내의 시신을 수습해 한국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 이상 잘 수도, 식사를 할 수도 없었다. 65킬로그램을 넘던 내 체중은 48킬로로 떨어졌다.
  
  입원한 지 한 달이 되던 날 화이트는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이 상태라면 아내가 24시간을 넘길 수 없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대퇴부까지 절단하는 수술을 시도해보자는 것이었다. 보호자가 수술에 동의하며 사망하더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각서였다. 만약 수술이 실패로 끝나 척추와 골반까지 감염된다면…. 아내의 죽음이 이제 현실로 다가왔다. 일주일 전 한국에서 달려온 장모님은 주치의의 말을 듣더니 냉정하게 말했다. "이제 자네가 강하게 마음을 먹어야 하네. 죽음을 준비하게." 민주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지 나와 외할머니 눈치를 살폈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내 입에서 쉼 없이 성모송이 나왔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묵주가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손가락을 묵주 삼아 성모송을 외우고 또 외웠다. 겨자씨만큼의 신앙심도 없던 나였지만 잠결에도 성모님께 '당신도 그렇게 소중하게 아끼던 외동아들이 눈앞에서 숨지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다른 모든 사람이 외면해도 당신은 그 고통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 고통을 거두어주십시오.' 나는 눈물로 호소하고, 때로 항의하며 성모님께 종주먹을 내밀었다.
  

▲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중환자실로 옮겨진 후. ⓒ프레시안

  아내가 병원에 입원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옆 침대에 40대 스코틀랜드 여성이 입원했다. 위암 환자라고 했다. 그녀는 혼자 정원을 산책하고 노래를 부를 정도로 건강해 '왜 응급실에 들어왔을까' 의문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3주 후 갑자기 숨을 거뒀다. 환자를 둘러싼 가족들은 임종 직후 울음을 삼키며 손을 잡고 기도를 올린 뒤 서로를 위로했다. '우리 같으면 슬픔을 이기지 못해 발버둥치고 통곡을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하는데 가족 한사람씩 나에게 다가왔다. "비록 내 아내는 숨졌지만 당신 부인은 젊고 할 일이 많아요. 반드시 하느님이 당신의 부인을 살려주실 겁니다." "우리 언니가 못 다한 삶을 당신 부인이 살아가길 바래요." 슬픔 속에 잠겨 있어야 할 이들이 오히려 나를 포옹하며 위로했다. 나는 바보처럼 그들을 껴안고 울고 말았다.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병원 안에 있는 성공회성당 여사제도 매일 혼수상태에 있는 아내를 찾아 기도를 올려주었다. 24시간을 넘길 수 없다는 주치의의 말을 듣고 독일에서 친하게 지냈던 예수회 김용해 신부님께 전화를 했다. 독일 성당에 보좌신부로 계셨던 신부님은 다음날 오지의 병원을 찾아오셨다. 내가 종부성사를 부탁하자 신부님은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셨다.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은 런던의 한인성당을 통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유럽 한인 가톨릭 공동체는 시간을 정해 아내의 소생을 간구하는 미사를 일제히 올렸다고 한다.
  
  기적, 그리고 그 의미를 생각하다
  



▲ 사고후 처음으로 산책을 나왔을 때. ⓒ프레시안

  그렇게 많은 분들의 도움과 교인들의 기도 때문이었을까. 희망이 없을 것 같다던 아내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270을 넘던 혈압이 떨어지고 신장 기능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고 했다. 대퇴부로 감염되면 가능성이 없다던 주치의는 '장례절차가 필요 없을지 모른다'며 조금씩 희망을 전하기 시작했다.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던 몸에서 붓기가 빠지면서 아내는 사람 몰골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마지막 수술을 받고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정말 거짓말처럼 아내의 의식이 돌아왔다. "여기가 어디야? 아니, 엄마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나와 딸애, 그리고 장모님은 사지에서 돌아온 아내를 맞았다. 서둘러 아내를 독일로 이송할 비행기를 예약했다. 그리고 다시 독일 땅을 밟았다.
  
  우리 가족이 두 달 반 동안 영국 오지의 작은 병원에서 느꼈던, 애를 끊을 듯하던 고통과 슬픔을 떠오르곤 한다. 우리 가족에게 도움을 준 많은 사람들, 너무도 따뜻하고 친절했던 영국 의료진, 환자뿐 아니라 환자 가족을 위해 설계되고 움직이는 영국병원의 시스템 등 우리 가족이 잊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시간이 지난 뒤 나는 하느님이 아내에게 죽을듯한 고통을 주시고 다시 살리신 이유가 무엇일까 되새겨보곤 한다. 그때마다 교통사고나 뇌졸중 같은 한순간의 불행으로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갈 환자들을 위한 일을 해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곤 한다. '네가 급한 놈이니 우물을 직접 파라'고 말이다.

"우리 엄마 다리는 곧 자라날 거예요!"
[우리 곁의 재활병원] <3> 개인의 불행과 국가의 책무
등록일자 : 2006년 07 월 12 일 (수) 12 : 34   
 

  영국에서 독일까지 비행기로 불과 한시간 거리였지만 우리 가족이 독일로 돌아오는 데에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영국을 떠나기 전날 한 동양 남자가 나를 찾는다는 전화가 왔다. 런던 대사관에서 파견된 교민담당 영사였다. 나는 그를 만나 할 말이 없었다. 사고 직후 스코틀랜드 경찰이 우리의 사고소식을 한국 대사관에 알렸고 도움의 손길이 절실했지만 담당 영사는 "칼라일이 너무 멀고 할 일이 많아서 갈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막상 그의 얼굴을 보자 분노가 치밀었다. "대사관 임무 중 가장 중요한 일이 자국민을 보호하는 것 아닙니까." 그는 "2만 명이 넘는 교민을 혼자 관리해야 했고 무엇보다 대사관 행사가 많아서 움직일 수 없었다"며 거듭 사과했다.
  
  나는 그날 밤 최동진 영국대사에게 편지를 썼다. "대사님, 이역만리에서 자국민이 교통사고를 당해 생사를 넘나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까. 사고 소식을 접하자마자 대사관 직원 중 누군가 달려와 사태를 수습하는 것이 대사관의 임무가 아닙니까. 대사님 가족이 사고를 당했다면 이렇게 방치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우리가 겪은 일을 잊지 않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최 대사로부터 "미안하다"는 전화가 걸려 왔지만 나는 그의 사과를 받지 않았다.
  

▲ 독일병원. ⓒ프레시안

  다음날 독일행은 예정대로 성사되지 않았다. 아내가 들 것에 실려 비행기에 오르자 루프트한자 조종사가 질겁하며 이송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의 몰골이 너무 심각해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주장했다. 영국에서 사고를 당한 것도 분한데 독일마저 우리를 버린다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듯 했다. 루프트한자 맨체스터공항 지사장과 의료진이 나서서 조종사를 설득했지만 그는 '환자의 이송 여부는 조종사의 권한이라며 탑승을 끝내 거부했다. 우리는 결국 독일행을 포기하고 전시·막사 같은 맨체스터병원 응급실로 아내를 옮겼다. 우리가족은 분노에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소송을 불사하겠다는 나와 대사관의 항의 때문인지 다음날 루프트한자는 특별기를 마련했고 우리는 드디어 독일땅을 밟았다.
  
  영국과 비교하면 독일은 훨씬 상황이 좋았다. 영국보다 깨끗하고 편리한 병원시설이 그랬고, 무엇보다 2년 동안 살아 와서 편안했던 데에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고향에 온 것 같은 위안을 줬다. 병원으로 직행한 아내는 다음날부터 무시무시한 재활치료를 받았다. 두 달간의 혼수상태로 근육이란 근육은 모두 사라졌고 사고의 충격으로 운동신경과 균형 감각이 상실된 상태였다.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것도 아내에겐 고통이었다. 아내는 들 것에 실려 평행대 위에 세워졌다. 아내는 계속 비명을 질렀지만 독일 의료진은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두 번씩 혹심한 전쟁을 치르면서 절단수술도 마취제 없이 했다는 독일의 의료 전통이 아내에게 적용됐다. 아내는 재활치료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차라리 사지가 마비됐더라면 이런 운동을 하지 않을 텐데…" 하고 한탄을 했다. 나와 장모님은 '독한 놈들…'을 연발하며 발을 굴렀다.
  

▲ 독일병원수영장. ⓒ프레시안

  다른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아내는 아침부터 오후 4~5시까지 수험생처럼 맹훈련을 받았다. 독일병원은 영국병원과 다른 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병원 시설과 주변 환경이 쾌적했다. 마치 국립공원 안의 호텔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재활치료와 훈련도 환자의 입장에서, 환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지속적인 상담과 여러 팀으로 구성된 의료진이 회의를 거쳐 아내에게 맞는 재활치료의 내용과 강도를 결정했다. 아내의 정신적, 심리적, 육체적인 상태는 매시간 기록됐다. 한 달이 지나자 아내는 병원에 있는 수영장에서 수중재활치료를 받았다. 평생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할 것을 걱정하던 아내는 부력을 이용해 물속을 몇 발자국 걸은 뒤 "나도 혼자 걸을 수 있어' 하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이날 오랜만에 우리가족이 함께 웃었다. 독일병원은 오전 오후로 두 시간씩 가족과 친지의 방문시간이 정해져 있었고 환자를 24시간 병원에서 간호했기 때문에 나는 오전 10시에 출근해 오후 4시가 되면 퇴근해야 했다.
  

▲ 독일병원에서 물리치료사와. ⓒ프레시안

  아내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는 한 떼의 사람들이 몰려왔다. 김용해 신부님과 사고 후 도움을 많이 준 유학생 배정한 씨와 강형동 씨, 독일교민 아주머니, 아저씨들이었다. 병실에 들어서며 아주머니 몇 사람이 "민주엄마…" 하고 눈물을 터뜨렸고 아들 부부처럼 우리 가족을 사랑해주셨던 송준근 사장님은 말없이 나를 끌어안았다. 병실에 침묵이 흘렀다. 그때 일곱 살 민주와 민주친구 난이가 소리쳤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엄마 다리는 곧 자라날 거예요." "맞아요.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도마뱀도 꼬리가 잘리면 또 자라나잖아요."
  
  한동안 말을 잊었다. 우리는 슬픔에 잠겨 있었지만 아이들은 슬픔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보고 있었다. 그 때 김 신부님이 사람들에게 기도를 하자고 하셨다. "모든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 당신께서는 우리 인간의 사고와 상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아직 우리가 당신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울고 있지만 당신이 사랑하는 딸 민주와 난이가 슬픔 속에서 희망을 발견한 것처럼 민주 엄마의 다리가 빨리 자라날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주소서!"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비록 아내의 다리는 잃었지만 수많은 다리로 재생되기를 기원했다.
  
  아내는 다행히 조금씩 독일병원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무엇보다 낙천적이고 늘 웃는 성격이 어려움을 당하자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됐다. 사고 후 눈물을 흘리던 아내는 어느 날 더 이상 울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병원생활은 익숙해졌지만 먹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독일에서는 마늘 냄새에 질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때문에 독일 사람들과 생활을 해야 하는 유학생과 교민들은 금요일 저녁이 돼야 비로소 김치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병원생활을 하는 아내가 한국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은 고통이었다. 아침식사로 우유와 소시지, 빵 한 쪽, 점심과 저녁식사로 차가운 돼지고기 한 덩이가 대부분이었으니 입맛도 없거니와 먹어도 무언가 늘 속이 찌뿌둥했다.
  
  때맞춰 교민들이 김치를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외국에 사는 한국인들에게 김치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삶의 원동력이었고 내가 한국인임을 느끼게 하는 정체성이었다. 냉장고에 김치가 들어가자 일부 간호사들은 "어디서 악마의 냄새가 난다"고 난리를 쳤지만 나는 모른 체 하며 아내에게 조금씩 김치를 먹였다. 아내에게 김치는 보약이었다. 하루는 철학을 전공하던 홍경완 신부님과 태권도장을 운영하던 장재희 사범이 문병을 왔다. 들어설 때부터 눈을 꿈벅꿈벅하며 시그널을 보내는 것이 '뭔가 독일 간호사가 싫어할 것을 가지고 왔구나' 생각했는데 작은 냄비를 내밀었다. 한국을 다녀오는 교민에게 부탁한 '개고기'였다. 교통사고 환자에게는 개고기가 특효라며 게슈타포도 무서워했다는 독일 세관의 눈을 피해 어렵게 개고기를 공수한 것이었다. 그날 밤 아내는 고국에서 가져온 개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이 사실이 알려졌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마 우리가족과 개고기 이야기는 일주일 넘게 독일 언론의 톱뉴스를 장식했을 것이다. 독일 세관과 병원 관계자는 곤욕을 치렀을 것이고 동물 보호로 악명 높은 프랑스 여배우가 달려와 농성이라도 벌이지 않았을까 하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아무튼 그날 밤 아내는 국물까지 남기지 않고 개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 독일병원에서 퇴원. ⓒ프레시안

  독일 병원 생활을 거치면서 고문에 가까운 가혹한 재활훈련이 서서히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던 아내는 시간이 지나자 휠체어를 혼자 굴리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자 혼자 평형대에서 걷는 연습을 했다.
  
  병원을 퇴원하는 날 가톨릭봉사단체인 카리타스에서 파견한 두 사람이 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안 일을 도와주는 독일 아주머니와 뮌헨의대 학생이었다. 독일 병원에서 카리타스에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매주 이틀씩 집을 찾아 왔다. 독일 학생은 장애인증 발급과 체류허가갱신 등 주로 서류 문제를 맡아줬고 독일 아주머니는 아내를 대신해 집안 일을 도와줬다. 독일 사회보장제도의 힘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우리 가족의 사고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일간지 '쥐트도이체차이퉁'이 우리의 사고 기사를 실으면서 8000마르크(약 480만 원)의 성금이 전해졌다. 마을에 있는 신경정신과 여의사는 귀국할 때까지 아내의 치료를 맡겠다고 나섰고 옆집 할아버지는 유치원에서 민주를 찾아주고 내가 병원에서 퇴근할 때까지 놀아주곤 했다.
  
  되돌아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에게 손길을 내밀었다. 거친 폭풍우 속에서 우리 가족이 길을 잃지 않고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도움 때문이었다. 마을 어귀에서 만나는 독일 할머니들은 달려와 아내의 손을 잡고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했고 한국 교민들은 몸에 좋다는 음식을 만들어 오곤 했다. 죽는 순간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 독일병원정원. ⓒ프레시안

  우리 가족은 조금씩 사고 이전의 생활로 돌아갔다. 주말이 되면 도움을 준 사람들과 함께 바비큐 맥주파티를 열기도 했고 아내는 소형 전기자동차를 타고 나와 딸애는 자전거를 타고 마을 호수를 산책하며 그동안 피폐해진 심신을 회복했다. 아내는 매일 마을에 있는 재활센터에서 물리 치료와 지압치료를 받으며 한국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귀국 전 프랑크푸르트 인근도시 '트라운펠드'의 재활병원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 병원은 2차대전 후 독일 상의군인회에서 기금을 모아 정신질환 전문병원으로 건립됐지만 1980년대 환자가 줄어들면서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문병 온 헬무트 콜 총리의 부인이 낙후된 시설을 보고 50만 마르크(약 3억 원)를 기부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민과 기업이 모두 500만 마르크(약 30억 원)를 기부해 리모델링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가 독일에 머무는 동안 뉘른베르크에서는 한 중소기업인의 기부가 화제가 된 일도 있었다. 우리로 치면 '만도기계' 같은 견실한 자동차부품회사를 30년간 이끌어 오던 노사장이 은퇴를 선언하면서 재산을 지역사회에 기부하고 회사 경영권을 장애인 중국인 직원에게 물려준 것이었다. 지역사회는 재산을 기부한 사실은 환영했지만 외국인에게 경영권을 물려준 것에 대한 반대여론이 높았다. 사장은 인터뷰를 자청해 "나는 아들이 둘인데 첫째는 몇 년 내 회사를 말아먹을 것이요, 둘째는 나와 비슷한 능력을 가졌지만 중국인 직원은 회사를 몇 배나 성장시킬 것으로 확신한다. 당신이라면 누구에게 회사를 물려주겠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신문은 기사 내용을 전하면서 "당신은 못난 아들에게 유산을 남겨주겠느냐"는 제목을 달았다. 참 놀랍고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 자동차를 타고 독일마을 산책. ⓒ프레시안

  우리 가족은 독일에서 의료보험료와 사고가 나면 법률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자동차 보험료로 매달 1000마르크(약 60만 원)와 200마르크(약 12만 원)를 각각 냈다. 이것은 나의 월급과 언론재단으로부터 받는 장학금, 가족 수와 연령 등을 모두 고려해 책정된 것이었다. 나는 한국에 비해 너무 비싼 보험료에 불만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가 사고를 당하자 우리가 받은 혜택은 상상을 초월했다. 영국과 독일 병원비, 의족과 휠체어, 휠체어를 실을 수 있는 자동차 리프트, 안경과 특수 신발, 8년 동안 소송을 진행한 독일 변호사와 영국 변호사 비용까지. 아마 보험에 들지 않았더라면 내가 가진 재산은 물론 피해보상금도 고스란히 소송비용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두 독일 보험회사가 우리를 위해 지출한 비용은 10억 원이 넘을 것이다.
  
  외국의 사회제도가 좋고 우리 것이 나쁘다고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각자 발전단계와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를 위해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독일 사회보장제도와 기부문화는 나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가 무얼까. 나는 단연 '남에 대한 배려와 의료 및 교육문제를 국가에서 책임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갑작스런 질병과 사고로 인한 불행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지역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닐까.

"왜 귀국했어요?"
[우리 곁의 재활병원] <4> '차라리 내가 병원을 짓고 말지'
등록일자 : 2006년 07 월 19 일 (수) 09 : 18   
 

  이사짐을 싸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독일에 온 형님 부부와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비행기가 우랄산맥을 넘어 중국 베이징 상공을 지나자 서해안의 섬들이 작은 점 같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곧 인천공항에 도착하겠다"는 기장의 안내 방송은 '고향에 대한 향수를 일깨웠다. '아, 얼마나 그리던 고국이었던가.' 김포공항에서 출국했지만 현대식으로 잘 지어진 인천공항 청사를 통해 입국하면서 새삼 3년 반이란 세월의 변화를 실감했다. 공항에는 가족과 친구 등 20여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삼 말이 필요 없는 만남이었다.
  
  서울로 들어오는 차속에서 친척과 후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국과 독일은 장애인이 살기에 천국이라는데 왜 귀국했니?", "형수님은 그곳에 사시는 것이 훨씬 좋으실 텐데요?" 갑작스런 질문에 할 말이 없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곳을 떠나 외국에 산다는 것을 상상해 보지 않았다. "그래도 가족이 있는 이곳이 나을 것 같아서…."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 후에 나는 사람들로부터 "왜 귀국했느냐?", "이민 갈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
  
  "병실이 없습니다"
  
  귀국한 지 사흘 뒤 '한국병원에 입원해 재활치료를 계속 받으라'는 독일 주치의의 당부에 따라 의료진이 좋다는 국내의 한 재활병원을 찾았다. "병실이 없습니다. 일단 입원 신청을 하신 뒤 2~3개월 기다리셔야 합니다." "네? 병원에 병실이 없다고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응급실도 아니고 일반 병실에 병상이 없다니.' 주위를 둘러봤다. 나 혼자가 아니었다. 입원을 위해 전국에서, 혹은 서울의 다른 병원에서 찾아온 환자 가족들이 여기저기서 입원신청서를 쓰고 있었다. 내가 원무과 직원과 대화하는 것을 들었는지, 아주머니 한 분이 딱하다는 표정으로 설명을 했다. "2개월밖에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병원에선 두 달만 되면 퇴원하라고 해요. 우리는 2년째 다른 병원을 옮겨 다니고 있어요. 다행히 석 달 전에 이 병원에 신청을 해서 입원할 수가 있어요."
  

▲ 한국 재활병원에서 걷는 연습을 하며(2000년초). ⓒ프레시안

  충격이었다. 입사 초기 사건기자로 서울대병원과 경희대병원 응급실을 출입하며 많은 사건을 목격했다. 여름철 복 매운탕을 먹고 혼수상태에 빠진 일가족, 떡을 먹고 급체해 숨진 할머니, 각종 대형 교통사고,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사고 등. 취재하면서 내가 매일 접했던 수많은 사건들은 나와 상관없는 불행이라고 생각했다. 남의 불행은 내가 쓰는 기사의 소재였고 그들의 사연은 내 기사를 채우고 있는 스토리였다. 독일 소설가 하인리히 뵐은 작품 '셀 수 없는 연인(ungezaehlte Liebe)'에서 '인간을 결코 숫자로 대상화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은 내가 쓰는 기사의 대상에 불과했다. '불행은 늘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온다'는 말이 사고를 당하고 나니 새삼 실감 났다. 개인소득 2만 불, 교역량 11위의 경제대국에서 입원할 병실이 없어 유령처럼 전국을 떠도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국내 병원들은 재활병동과 재활의학과를 개설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이유는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응급 환자나 외과 환자의 경우 각종 수술과 검진을 통해 높은 의료비를 받을 수 있지만 장애환자의 경우, 응급 상황을 거쳤기 때문에 병원에서 별로 해줄 것이 없었다. 싼 의료수가에 비해 물리치료나 작업치료 등 모든 것을 비싼 인건비에 의존해야 하는 재활병원은 적자투성이였다. 대표적인 민간 재활병원인 신촌 세브란스 재활병원은 매달 5억 원 이상의 적자가 나고 있다. 세브란스 병원이야 다른 병동에서 거둔 수익으로 재활병원의 적자를 감당할 수 있지만 다른 병원은 섣불리 나설 수 없는 구조였다.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는 서울대병원에서 조차 재활병동을 운영하지 않고 있다. 국립병원이 외면하는 상황에서 대기업이나 대학이 운영하는 병원이 적자가 불을 보듯 뻔한 재활병원을 세울 이유가 없었다.
  
  여기저기 쫓아다닌 끝에 아내는 2주일 만에 1인실에 입원할 수 있었다. 며칠 후 보험이 적용되는 5일실로 옮길 수 있었지만 한국 병원의 문턱은 높기만 했다. 병원에서의 전쟁이 시작됐다. 말이 병실이지 5인실은 난민 수용소와 다름 없었다. 좁은 공간에 환자뿐 아니라 보호자나 간병인 등 보통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24시간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밤낮으로 방문객이 끊이지 않고 병실 TV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왕왕거렸다. TV를 끄자고 제안했다가 "아저씨는 잠깐 병원에 계시지만 우리는 몇 년 째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며 간병인 아주머니에게 면박을 당하기도 했다.
  
  "그 분노를 이해합니다만…"
  

▲ 휠체어를 탈수 있도록 설계된 일산 푸르메마을 집 ⓒ프레시안

  오랜 병원 생활을 지친 환자 가족과 간병인은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음식을 끊여 먹었다 이 때문에 병실에서 음식냄새가 사라지지 않았다. 환자들은 산책할 곳이 없어 병원 로비를 서성이고 하루 종일 창문에 매달려 지냈다. 복도와 로비는 늘 간병인과 방문객으로 넘쳐났다. 나와 아내는 사람을 피해 모두가 잠든 새벽 시간에 복도에서 걷는 연습을 해야 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오랜 병원생활로 인해 부모 자식과 형제 간에도 사이가 벌어지고 결국 원수가 된다고 하지 않는가. 많이 친절해졌다고 하지만 의료진이 해주는 것은 환자에게 주사를 놓아주거나 환자복을 전해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모든 것이 가족과 간병인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원측은 인력부족으로 절절맸다.
  
  하루는 퇴근해 병실을 찾아가니 아내가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에요. 조금 피곤해요."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재촉하자 아내는 결국 낮에 일어난 일을 얘기했다. 점심을 먹고 쉬고 있는데 한 떼의 사람들이 병실로 몰아닥쳤다. 같은 병실에 있는 환자가 다니는 교회의 교인들이었다. 다른 환자와 보호자들은 이들을 보자 무슨 대피 훈련하듯 불이나케 도망가기 시작했다. 혼자 움직일 수 없었던 아내는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었다고 한다. 잠시 후 10여 명의 교인들이 병실 한가운데서 엎드려 기괴한 소리를 지르며 1시간 넘게 통성기도를 했고 난생 처음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 아내는 처음부터 끝까지 괴성을 들어야 했다. 미칠 노릇이었다. 가뜩이나 안정이 필요한 아내는 충격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나는 원장실로 달려갔다. "오늘 병실에 교인들이 찾아와서 1시간 넘게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왜 병원에서 제지하지 않습니까?" 내 목소리가 높아졌다. '시도 때도 없이 방문객이 들이닥치고 어디 쉴만한 곳이 없으니 나을 병도 덧나겠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원장 선생님은 묵묵히 듣더니 말했다. "저도 선생님이 느꼈을 분노를 이해합니다. 제가 몇 년 전 부임했을 때 병원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10여 년간 미국병원에서 일하다 돌아온 그는 한국병원의 현실이 얼마나 열악한지 절감하고 구조를 고치기 위해 노력했지만 한 개인의 힘으로 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재활병원에 오려는 분들은 모든 재산을 팔아서라도 치료받길 원합니다. 원장실이라도 개조해 병실을 하나 더 만들어야 할 정도로 현실이 열악합니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는 그나마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아내의 옆 병실에는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계 대선배가 입원하고 있었다.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수술을 받았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은 물론 말하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했다. 뇌졸중의 후유증도 심했지만 '내가 왜 이런 불행을 당해야 하나?'하는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하루는 그를 찾아가자 붙잡고 하소연했다. "당신 부인은 잘 지내죠? 나는 사는 게 말이 아니에요. 내가 지금 병원에 쭈그리고 있어선 안 되는데…."
  
  이 시간 편집국을 뛰어다니며 기사의 경중을 결정하고 후배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어야 할 그였다. 원고지 10장을 한 시간에 쓸 정도로 문재(文才)가 뛰어나고 말술을 앞에 놓고 밤새 토론을 즐기던 그였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말조차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부인과 간병인에게 늘 모든 것을 의지해야 하는 현실이 자신뿐 아니라 바라보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했다. 누구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사실에 오싹 한 한기가 느껴졌다. "이제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건강한 시절은 지나간 과거고 이제 정신을 차리시고 걷는 운동을 하시라"고 강조하면서 '내가 과연 그가 가진 고통의 절반이나 이해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왜 준비 없이 한 순간에 맞닥뜨려야 하는 절망은 그토록 가혹한 것인지….
  
  "차라리 우리가 병원을 하나 짓자"
  

▲ 장애인단체 사람들과 맥주파티 ⓒ프레시안

  하루는 입원한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리가 영국과 독일의 재활병원을 경험했잖아? 나중에 우리가 경험한대로 환자의 부름에 늘 응답하고, 환자를 인격체로 대하는 아름다운 병원을 하나 만들면 어떨까?" 아내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화답했다. "그래요. 정말 아름다운 작은 병원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게 꿈이 생겼다. 의료진이 24시간 환자를 보살피는 병원, 콘크리트 고층빌딩에 환자가 갇혀 있는 병원이 아니라 마치 내 집 같은 목조주택에서, 푸른 잔디와 오솔길을 거닐며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작은 병원을 만들어야겠다고 말이다. 나는 그 길로 우리가 살던 시내의 아파트를 팔고 일산 외곽에 주택단지의 토지를 구입해 목조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성석동에 있는 푸르메 마을이었다. 마을길과 집 현관을 데크로 연결했고 집안의 문턱을 없애 훨체어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설계했다. 나는 장애인에게 편리한 집은 비장애인에게는 더 편리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당시 새롭게 출범한 아름다운재단이 가난한 이웃에 내 것을 나눔으로써 풍로로운 사회를 만들자고 외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재단은 일반시민의 참여를 촉구하면서 기업과 언론을 상대로 여러 가지 의욕적인 활동을 벌이면서 나눔을 우리사회의 새로운 '화두'로 이끌어 올리고 있었다. 그 중심에 박원순 변호사님이 있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는 참여연대를 취재하고 이곳에서 발간하는 잡지의 편집에 참여하면서 박 변호사님과 인연을 맺었다.
  
  아내가 퇴원하자 우리 부부는 안국동으로 박 변호사님을 찾아갔다. "가족 모두 건강하시지요? 우리가 사고를 당하고 유럽 재활병원을 경험한 뒤 귀국해보니까, 우리 재활병원이 너무 열악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나눔사업도 중요하지만 가장 열악한 환경에 있는 장애환자를 위해 재활전문병원 건립을 아름다운재단에서 추진했으면 합니다."
  
  하지만 박 변호사님은 "아름다운재단이 배분을 목적으로 건립되었기 때문에 갑자기 병원건립을 추진하기는 어려울 뿐 아니라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백 기자가 시간을 가지고 추진해 보세요. 내가 측면에서 적극 돕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나는 서울시와 보건복지부를 찾아다니며 병원건립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병원, 즉 의료법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병원 부지와 건립비, 의료진이 확보되어 있어야 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방법을 바꿨다. 의료법인의 전단계로 재단법인을 세우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가능할 것 같았다. 재단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재단의 주인인 재산과 그동안의 실적이 필요했다. '그래, 내가 재산을 만들어보자"고 결심했다. 이때부터 자면서도 창업을 구상했다.
  
  "네가 신문기자인 것이 자랑스러웠는데…"
  

▲ 사고후 중국으로의 첫 외국여행(2006년). ⓒ프레시안

  우연히 재정경제부 직원으로부터 소규모 맥주양조(마이크로브루어리)가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허가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거다 싶었다.' 독일에 있을 때 친하게 지냈던 후배 방호권 씨가 "선배님! 한국에 가면 우리 프레미엄 맥주를 만드는 회사를 하나 만들자"고 제안한 것이 생각났다. 방 씨는 뮌헨공대에서 맥주양조학 마이스터(전문양조사)와 디프롬 엔지니어(석사) 과정을 마치고 논문을 쓰고 있었다. CBS 경제부 기자였던 후배 이원식 씨(현 옥토버훼스트 대표)에게 조심스럽게 이런 구상을 내비쳤다. 이 씨는 찬성이었다. 재단의 종자돈을 만들겠다는 내 목표와 제3의 맥주회사를 만들자는 이원식 사장, 우리나라에서 가장 맛있는 맥주를 만들겠다는 방호권 씨의 바람이 합해져 우리 세 사람은 맥주 사업에 뛰어들었다.
  
  "경기도 안 좋은데 사업이 말처럼 쉽지 않다. 네가 신문기자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는데…", "당신이 10여년간 글을 써 왔는데 갑자기 사업을 한다니 너무 큰 모험이에요." 아버지와 아내가 눈물로 말렸지만 나는 미련 없이 사표를 냈다. 이때부터 지인을 찾아다니며 '국내에 처음 도입되는 소규모 맥주사업이 리스크도 크지만 가능성도 있다'고 설득했다. '잘 다니던 직장 때려치우고 너 미쳤냐?'고 걱정하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가능성 하나 믿고 투자한 선후배도 있었다. 이렇게 58명이 5000만 원씩 모두 21억 원을 투자해 우리는 서울 강남역 인근에 국내 최초의 하우스맥주 전문점 '옥토버훼스트' 1호점을 출발시킬 수 있었다.
  
  맥주제조허가를 받기 위해 60여 가지의 서류를 들고 뛰어다니면서 말단 여직원이 그렇게 무섭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회사를 경영하고 직원들에게 월급 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감했다. 사업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두 가지 있다. 아이템과 입지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께 일하느냐이다. 일에 대한 열정과 팀웍이 더 중요하다. 두 번째로 나를 믿고 아파트 전세금을 기꺼이 투자해준 선배부터 이 새로운 맥주 맛을 알리기 위해 발 벗고 나서준 분들께 고개가 숙여진다. 사람들의 평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날마다 느끼면서 겸손해지려고 노력한다. 처음 일을 벌였을 때 만류하던 분들도 이제 새롭게 평가할 때 자랑스럽다. 다행히 사업은 망하지 않아 강남점을 낸 지 1년 만에 추가 투자를 받아 종로1가 청진동에 2호점을 낼 수 있었다.
  
  이 때 가해자측 보험회사로부터 아내가 사용할 전동휠체어와 의족을 구입하기 위한 '우선피해보상금' 1억 원이 도착했다. 나와 아내는 우선피해보상금 1억 원과 내가 소유한 옥토버훼스트 지분을 기본재산으로 보건복지부에 재단설립허가를 요청했다. 재단 이름은 일산에 집을 지었던 장소인 푸르메마을에서 이름을 따 <푸르메재단>으로 했다.

미국 부자와 한국 부자의 차이
[우리 곁의 재활병원] <5> 재단 건립의 와중에서
등록일자 : 2006년 07 월 26 일 (수) 10 : 17   
 

  '기자가 사업을 하면 망한다'는 말이 있다. 주위를 둘러봐도 기자 출신으로 사업에 성공한 사람은 많지 않다. 국회의원과 대기업 홍보이사가 고작이다. 기자가 세상을 잘 알고 적응력도 뛰어날 것 같지만 실제로 자기 일만 아는 '헛똑똑이들'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에 쫓기다보면 집 계약서조차 쓸 시간이 없으니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나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세상살이에 익숙하지 않고 어눌했던 내게 사업적인 재능과 수완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기자생활을 10년 넘게 한 나와 이원식 씨가 사업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 모두 말렸지만 우리가 시작한 소규모 맥주제조사업은 다행히 망하지 않았다. 방호권 씨 손끝에서 빚어진 맥주의 맛이 뛰어난 탓도 있었지만 우리를 아는 많은 분들이 모든 약속과 만남을 '옥토버훼스트'에서 해주었고 홍보대사가 되어서 입소문을 내주었기 때문이다.
  

▲ 옥토버훼스트 맥주공장 모습. ⓒ프레시안

  사업이 3년째 접어들면서 '이제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기존의 대형 맥주회사의 똑같은 맛 대신 효모가 살아 있는 새로운 맛으로 승부하면서 '옥토버훼스트'하면 프리미엄 맥주, 맛있는 맥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대전에서 회사를 다닌다는 한 고객은 '서울로 출장간다'는 이유를 대고 우리 맥주를 맛보기위해 찾아왔다. 그는 1시간 넘게 기다린 끝에 맥주를 주문했는데 '옥토버' 맥주가 동났다는 설명을 듣자, 직원 멱살을 잡았다. "내가 산 넘고 물 건너 어떻게 여기를 왔는데…"하고 말이다.
  
  "작은 물방울이 모여 큰 강을 이루고"…재단 건립의 '첫 삽'
  
  회사가 어느 정도 기반을 잡았다고 생각되자 나는 재단 건립을 위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장애인 문제에 애정을 가지고 병원 건립에 힘을 모아주실 분들이 필요했다. 박원순 변호사와 기자협회장이던 한겨레신문 이상기 선배를 찾아갔다. 박 변호사께서는 "이왕 재단을 설립하려면 지금부터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고, 이 선배는 "각계를 대표하면서 사회적으로 신망이 높은 분들을 모시라"고 조언했다.
  
  재단 이사장으로 종교계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큰 어른이신 김성수 성공회대 총장님을 모시기로 했다. 이사로 청소년 문제에 열정을 바치고 계셨던 강지원 변호사님과 성철 스님의 상좌이셨고 불교 청소년단체를 이끌고 계신 원택 스님, 서강대 김용해 신부님, 박원순 변호사, 조인숙 다리건축대표를 모셨다. 내가 몸담았던 언론계에서는 안국정 SBS 사장, 이정식 CBS 사장, 김성구 샘터사 사장, 이상기 기자협회장이 이사로 선임됐다. 나중에 동아일보 김학준 사장께서도 흔쾌히 동참하셨다. 다음날부터 나는 차례로 한분씩 찾아뵈었다. 모두 바쁘신 분들이라 설명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나는 입사 면접을 보듯 우리가족이 외국에서 겪은 경험과 장애인이 되면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현실을 설명하고 이사직 수락을 요청했다. 처음부터 승낙하신 분도 있고 주저하다가 내 얘기를 듣자 눈물을 흘리며 흔쾌히 손을 잡아주신 분도 있었다. 다행히 모두 동의하셨다.
  


▲ 김성수 이사장님과 함께. ⓒ프레시안

  하지만 김성수 총장님은 쉽지 않았다. 김 총장님은 1973년 정신지체 어린이 특수학교인 '성베드로 학교'를 성공회대 안에 만드셨고 유산으로 받으신 강화도 온수리 땅에 정신지체 장애인 공동체 '우리마을'을 건립하는 등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을 위해 온 힘을 쏟고 계셨다. 어렵게 요청 드렸지만 "사회연대은행과 성베드로학교 등 맡은 단체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데 푸르메재단까지 너무 버겁습니다."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이대로 물러설 순 없었다. 고심 끝에 성공회대에 재직 중인 진영종, 조효제 교수에게 SOS를 쳤다. 두 분은 총장님을 설득하기 위해 아예 총장실을 점거한 채 농성을 하다시피 했다. 그러기를 이틀째, 핸드폰이 울렸다. 진영종 선배였다. "경학아! 축하한다. 드디어 김 총장님께서 백기를 드셨다."
  
  2004년 8월 17일 한국프레스센타 19층에서 작은 모임이 열렸다. 푸르메재단의 창립발기인대회였다. 김성수 총장님을 비롯해 강지원, 박원순 변호사님 등 모두 열 한 분이 이사로 위촉됐다. 김 총장님은 상기되신 표정으로 "작은 물방울이 모여 강물을 이루고, 조그만 벽돌이 모여 거대한 성채를 이루듯 장애환자를 위한 아름다운 재활전문병원을 건립할 때까지 앞만 보고 뚜벅뚜벅 걸어가자"고 당부하셨다. 드디어 나와 아내가 꿈꿔 오던 재활전문병원을 만들기 위한 '푸르메재단'이 닻을 올린 것이다. 아내는 이날 밤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다리가 수많은 다리로 재생할 것을 믿으면서 말이다.
  
  "우리 사회엔 왜 장애환자를 위한 시설이 그토록 적은 걸까?"
  
  80년대와 90년의 이슈가 '정치적 민주화'와 '부의 분배'였다면 2000년대 들어 '나눔'이 우리사회의 화두가 되고 있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사람들이 조금씩 내 자식, 내 가족뿐 아니라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를 주도한 곳이 나는 단연 아름다운재단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운재단은 설립 6년 만에 회원 3만명과 이들이 내는 기금 100억 원이 넘는 단체로 성장했다.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월급의 1%를 쪼개서 어려운 이웃을 돕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쉬운 것은 이 기금이 지속적인 사업과 항구적인 시설을 위해 투자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극빈층과 소년소녀가장, 독거노인은 아름다운재단과 사회공동모금회 등 각종 사회단체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지만 장애와 질병, 가난이라는 삼중고 시달리고 있는 장애환자는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는 물론이고 일반 시민과 사회공헌을 주장하는 대기업들도 유독 장애환자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인색하기만 하다.
  
  이웃인 일본만 하더라도 장애환자의 상황이 크게 나을 뿐더러 시민과 기업의 봉사활동이 일상화되고 있다. 24개區를 가진 오사카市의 경우, 26개의 일반 재활병원과 4개의 어린이재활병원 등 모두 30개의 재활병원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전체의 4배 규모다. 고베시의 경우, 고베 시장이 노르웨이를 방문한 뒤 서구복지제도에 자극 받아 1982년 총 62만 평의 부지에 장애인종합복지타운 '행복촌(幸福村)'을 만들었다. 이곳에는 재활병원과 노인병원, 양로원, 공원, 호텔, 온천장, 직업훈련소 등 34개 건물이 들어서 있고 고베시로부터 위탁받은 의사협회와 복지회 등 민간단체가 운영하고 있다. 토요타와 소니 등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들은 매년 이곳에서 직원연수를 겸한 사회공헌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기업들의 활동에 공감해 일본 국민들은 휴가를 받으면 이곳에서 와서 산책을 하거나 장애인시설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연간 이용객수가 200만 명을 넘고 있다. 기업과 장애인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삶의 현장이다.
  

▲ 고베 행복촌. ⓒ프레시안

  우리 상황은 크게 다르다. 우리나라에는 매년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교통사고와 각종 산업재해, 뇌졸중 등으로 하루아침에 후천적인 장애인이 되고 있고 이중 140만 명은 어떤 형태로든 정기적인 치료와 재활 프로그램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지만 재활전문병원은 전국을 통틀어 손을 꼽을 정도다. 지방에 있는 작은 의원까지 합해도 병상수는 4000개에 불과하다. 통탄할 노릇이다. 부자들은 장애가 찾아오면 외국 병원으로 떠나고, 1인실에 입원해 특별대우를 받으며 치료를 받을 수 있지만 일반 시민은 전국 병원을 전전해야 한다.
  
  미국 병원에서 일하다 귀국한 한 의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정부의 무관심한 장애인 의료정책을 비판하면서 "국정을 맡고 있는 최고 책임자와 당국자가 장애인이 돼야 정부의 정책이 변할 것"이라고 한탄했다. 대통령과 대기업 총수가 하루아침에 장애인이 된다면 아마 1년 안에 각 시도마다 재활병원이 들어설 것이다. 아니, 외국의 좋은 시설을 찾아 떠나고 서민만 고통 받을지도 모른다.
  
  "TV에서 보던 불행이 바로 내 이야기야"
  

▲ 성남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책을 전달하며 2005. 12. ⓒ프레시안

  이런 점에서 최근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회장 빌 게이츠에 이어 워런 버핏이 우리 돈으로 35조 원(370억 달러)을 기부했다는 소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부자라고 돈이 아깝지 않으랴. 미국의 자린고비 중 최고 구두쇠로 통하는 버핏이 평생 모은 재산의 85%를 흔쾌히 기부했다니 보통사람으론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의 결단에 감동받은 미국 부자들이 줄줄이 기부를 준비하고 있다니 '기부도 전염성이 강한가' 보다. 미국의 기부행렬은 강철왕 카네기와 석유로 돈을 벌어 시카고 대학을 세운 록펠러, 자동차왕 포드를 거쳐 게이츠와 버핏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 부자의 기부가 빛을 발하는 이유는 우리처럼 사회적 물의에 대한 속죄의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재산을 미련 없이 내놓고 박수를 받고 떠나는 모습은 아름답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부자는 돈의 가치를 아는 부자다.
  
  올 들어 우리사회에도 대기업의 기부가 줄을 잇고 있다. 상속논란을 빚은 삼성 이건희 회장이 8000억 원의 사회헌납을 선언했고 현대차 정몽구 회장도 비자금사건으로 1조 원의 사회기부를 약속했다. 두 사람 모두 자식에게 더 많은 재산을 물려주려다 낭패를 봤다. 다른 기업들도 이미지 개선을 위해 대규모 기부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잘못된 지난 일이야 할 수 없고 이번 기회에 우리 사회의 부자와 기업들도 박수를 받으며 기부하는 전통을 세울 수 없을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잃은 이건희 회장의 비통함과 두 번씩 구속된 정몽구 회장의 고통과 같은 것들을, 이 땅에 사는 가장 어려운 장애환자와 그들의 재활을 약속하는 데에로 승화할 수는 없을까 말이다.
  
  얼마 전 고교동창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이 왕따를 당하자 3년전 미국 누나 집으로 아들을 유학 보낸 친구였다. 아이는 미국 학교에 잘 적응해 친구도 많이 사귀고 최근에는 대통령 장학생으로 선발됐다고 한다. 백악관으로 아들이 초청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축하한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는 통화에서"아들이 심장마비로 숨져 오늘 싸늘한 주검이 되어 귀국했다"고 울먹였다. 충격적이었다. 문상을 갔지만 자랑스러운 자식을 잃고 슬픔에 잠겨 있는 동창에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곳에서 오랜만에 다른 친구를 만났다. 왕래가 없어 10년만에 만난 친구였다. 세상 얘기를 하다 집안 안부를 물었다. "제수씨는 건강하지?" 친구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내가 혹시 잘못 물었나?' "벌써, 죽은 지 10년이 됐어"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참, 난감한 노릇이었다. 친구는 "삼풍백화점 사고 당일 아내가 쇼핑할 것이 있다고 해 백화점에 데려다 주었는데 그것이 마지막이었어. 임종이라도 지키고 시신이라도 찾았다면 죽은 걸 믿겠는데…." 그 친구는 "오늘밤이라도 아내가 불쑥 찾아올 것 같아 10년 동안 이사도 못가고, 재혼도 안하고 아이와 단 둘이 살고 있다"고 했다. "인생이 소설 같아, TV에서나 보았던 불행이 바로 내 이야기야." 그날 밤 나는 친구의 불행을 위로하며 소주를 마시다 영안실을 빠져나왔다.
  
  '관청의 문턱'에서 서성이다
  
  발기인대회를 마치자 재단설립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정관을 비롯해 이사진의 이력서, 인감증명서, 취임승락서, 의사록 등 서류가 갖추어지자 나는 보건복지부 담당부서를 찾아갔다. 발 벗고 도와주리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담당자를 만나자 실망감과 분노가 치밀었다.
  

▲ 푸르메재단 발기인대회. ⓒ프레시안

  담당자는 '돈도 없이 왜 사서 고생을 하려고 하느냐?'는 투로 "사업비의 절반에 해당하는 기본재산이 있어야 재산설립 허가를 내줄 수 있다"는 반응이었다. "대기업이 수백억 원을 출연한 재단만 재단이냐. 우리는 빈손에 가까운 3억원으로 시작하지만 정말 장애환자들이 필요한 일을 하겠다"고 설득했지만 '허가를 받기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오래전 허가 난 일부 재단들이 정부에 재정지원을 요청하면서 재단 허가조건이 더욱 까다로워졌다는 것이다. 담당자는 "푸르메재단의 설립취지는 이해하지만 기본재산이 최소한 10억 원이 넘어야 하며 이사진 수와 정관의 문구까지도 보건복지부에서 지시한대로 수정해야 허가를 검토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관청의 문턱이 높다는 것은 알았지만 한숨이 나왔다. 인허가권을 쥐고 있는 관청 앞에 민원인이 왜 작아질 수밖에 없는지? 김성수 총장님과 강지원 변호사님을 찾아 상의 드렸지만 별 뾰족한 대안이 있을 리 없었다. 시름에 잠겨 있던 나를 보고 아내가 제안했다. "피해보상을 받으면 이 중 절반을 재단에 출연하면 되잖아요?"

작고 아름다운 재활병원을 꿈꾸며
[우리 곁의 재활병원] <6·끝> 긴 마무리와 새로운 시작
등록일자 : 2006년 08 월 03 일 (목) 11 : 15   
 

  푸르메재단 설립서류를 제출한 지 석 달이 지났지만 보건복지부 담당부서에서는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재단 설립허가는 고사하고 심사조차 하지 않았다. 기자 생활을 하며 통일부와 외교부, 서울시청 등 정부 부처를 출입해 봤지만 복지부의 벽은 높기만 했다. 시간이 지연되자 푸르메재단에 관심을 가진 많은 분들이 측면에서 지원해주기 시작했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자그동안 꼼짝 않던 실무자들도 비로소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밀고 당기는 실랑이 끝에 결국 2005년 3월 재단을 세워도 좋다는 설립허가가 떨어졌다.
  
  '격려'와 '열정'과 '더불어 사는 삶' 속에서
  
  재단이 설립되자 강지원 변호사님이 대표로 추대됐다. 그동안 청소년 문제에 천착(穿鑿)해 오신 강 변호사님은 어머님이 뇌졸중으로 고생하시면서 '질병 앞에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가' 절감하셨다고 했다. 변호사님은 흔쾌히 대표직을 수락하셨다. "내가 검사 시절부터 청소년 문제를 전공해 왔는데 이제 장애환자와 재활병원 문제도 공부하게 되어서 적잖게 걱정이 돼요." 말씀은 이렇게 하셨지만 워낙 열정과 재능이 있는 분이라 나는 "변호사님, 한 달만 공부하시면 청소년문제보다 훨씬 전문가가 되실 겁니다"라고 응원했다.
  
  강 변호사님과 본격적으로 일을 하면서 수시로 감탄한다. 거의 한 시간 간격으로 하루 몇 개의 약속이 있지만 푸르메재단 일이라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오셨다. "백 이사! 잠을 자려다 생각났는데 일단 기업의 홍보책임자를 설득합시다." 밤 11시건, 12시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전화를 주셨다. 아마 너무 바빠 재단 일을 잊고 계시다가 잠자리에 드시면 '푸르메재단'이 인생의 업보처럼 생각나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늘 온화함을 잃지 않으시고 "걱정 말고 추진하세요. 하느님이 우리 재단을 도우실 겁니다." 격려해 주시는 김성수 총장님과 일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 뭉치신 강지원 변호사님 밑에서 1년 넘게 일하면서 '푸르메재단이 갈 길이 멀지만 가능하다'는 확신을 하게 된다.
  

▲ 홍보대사 위촉식. 강지원 대표, 이지선씨, 강원래씨(2005년 5월) ⓒ프레시안

  재단이 설립되고 두 번째로 한 것은 재단의 설립취지와 장애환자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두 사람을 홍보대사로 위촉한 일이다. 홍보대사로 위촉된 한 사람은 2000년 11월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불법 유턴 차량과 부딪혀 하반신 마비가 된 인기가수 강원래 씨였다. 다른 한 사람은 이화여대 졸업반이던 2000년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오빠와 귀가하는 길에 음주 차량의 교통사고로 전신 화상을 당한 이지선 씨였다. 지선 씨는 화상으로 인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재활심리학을 공부하며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인생의 쓴 맛'을 경험을 했지만 '인생을 맛있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최근에는 강원래∙ 이지선 씨를 비롯해 김혜자∙ 박완서 선생님, 장영희 교수님, 작가 고정욱 씨 등 23명이 장애의 아픔을 이겨낸 원고를 한 편씩 기부하면서 재단에서 에세이집 <사는 게 맛있다>를 출간하기도 했다.
  
  설립된 지 불과 1년 만에 푸르메재단은 장애인 100명의 삶을 표현한 사진전시회를 비롯해 장애인 음악가와 인기가수가 어울려 노래한 테마 콘서트, 저소득층 장애인과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연탄을 배달하는 행사, 국내 처음으로 장애인과 자원봉사자 90명의 판문점 방문 등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하는 다양한 행사를 개최했다.
  

▲ 장애인 사진전 개막식 ⓒ프레시안

  

▲ 저소득 노인들에게 연탄나눔행사(왼쪽부터 김성구 샘터사 사장, 강정원 국민은행장, 강지원 변호사, 이동섭 대한석탄공사감사) ⓒ프레시안

  

▲ 장애인과 함께한 판문점 행사 ⓒ프레시안

  '환상통'을 넘어서서
  
  독일 자동차 보험회사에서는 사고 직후 아내의 소송을 위해 스코틀랜드 현지 변호사와 독일 변호사 두 사람을 선임해줬다. 아내가 1년 동안 독일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은 뒤 1999년 말 귀국하면서 나는 독일 보험회사에 아내를 위해 일해 줄 한국국제변호사가 필요하다고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독일 보험회사는 한국이 유럽연합(EU)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변호사를 지원할 수 없다는 답변이 왔다. 아내를 위해 일해 줄 한국 변호사가 없다면 사건의 해결은 물론 피해보상조차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수소문 끝에 나는 부천에서 오랫동안 노동자 변론 활동을 해 온 이양원 선배를 찾아갔다. "언제 소송이 끝날지 모르지만 우리 사건을 맡아줄 국제변호사가 필요합니다." 이 선배는 즉석에서 적임자를 소개해줬다. 이양원 선배가 소개한 사람은 법무법인 광장의 안용석, 장우영 변호사였다. 두 사람은 M&A 분야의 전문가였다. 안용석 변호사는 우리 부부를 보자 "제 누님도 대학을 졸업하고 인도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숨지는 불행을 당했습니다. 누구보다 두 분의 아픔을 이해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와 일하는 만큼 수임료는 받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소송이 20년이 걸릴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피해보상을 받을 수 없다는 각오를 하십시오." 그는 진심으로 우리 부부의 불행을 위로하면서 마음을 강하게 먹을 것을 요구했다.
  
  우리 부부는 지난 5월 상대측 보험회사인 콘힐 알리안츠과 8년 동안 끌어 온 소송에 합의한 직후 사례를 위해 안용석 변호사를 찾아갔지만 그는 수임료를 받지않았다. 아내가 피해보상금의 절반을 재활전문병원 건립기금으로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힌 만큼 자신들의 수임료도 좋은 뜻에 포함시켜달라고 말이다. 안 변호사는 "저는 피해보상을 받지 못할까 마음을 졸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순조롭게 끝나 다행입니다. 살다보니 이렇게 행복한 날도 오는군요"라며 활짝 웃었다. 우리는 그동안 고생한 두 변호사의 손을 잡고 놓지 못했다.
  
  하지만 불과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우리 부부는 가해자 측 콘힐 알리안츠 보험회사와 지루한 싸움으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8년이라는 기간이 우리에겐 지루한 장마였다. 잊을 만하면 사고와 관련된 서류와 증명서를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얼마나 많은 서류를 요구했는지 영국에 보낸 것 만해도 4000페이지가 넘었고 바인더 파일이 10개나 됐다. 한 해에도 몇 번씩 나와 딸애에 대한 건강증명서를 비롯해 아내가 서울시청에 복직했을 때 받을 수 있는 봉급표 등을 요구했다. 한 번도 아니고 시도 때도 없이 요구하는 데에 화가 났다. 그렇다고 안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내가 근무했던 서울시청에 염치없이 찾아갔지만 같이 일했던 동료들은 두말없이 아내와 같은 직급 직원의 봉급표를 만들어 주었다. 주치의였던 신촌세브란스 재활병원의 신지철 교수님은 긴급하다고 연락을 하면 지방 출장 중에도 돌아와 진단서를 만들어 줄 정도로 너무 많은 수고를 했다.
  
  아내는 영국으로부터 연락이 올 때마다 심리적으로 심한 고통을 받았다. 교통사고는 피해자의 육체뿐 아니라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아내는 매일 4시간씩 집안과 밖에서 걷는 운동을 하면서 지팡이 두 개로 평지를 걸을 정도로 좋아졌다 하지만영국에서 연락이 왔다는 소식만 들으면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식사도 하지 못했다. 악몽이 되살아난 날에는 무엇도 할 수 없었다. 한 달에 두세 번 찾아오는 환상통(幻想痛)도 고통이었다. 실제로 다리가 없었지만 마치 다리에 전기충격을 가하는 것처럼 2~3초 간격으로 찾아오는 도깨비 통증(팬텀스 패인)에 아내는 밤새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흘렸다. 때때로 구토할 정도로 심한 편두통과 손 떨림, 말더듬 증세도 교통사고 후유증의 하나였다. 교통사고는 시간이 지나면 다 나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때부터 여러 가지 후유증이 나타나기 때문에 더 무서운 것인지 모른다.
  
  "이제 용서할 때가 된 것 같아요"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해자 보험회사에서 시도 때도 없이 "황혜경 씨의 정신적, 육체적 상태가 얼마나 회복됐는지,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안용석 변호사는 "한국 병원에서 더 이상 해줄 것이 없고 2달밖에 입원이 안되기 때문에 집에서 재활훈련을 하고 있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러면 상대측에선 "병원이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다는 것은 거의 회복됐다는 것을 뜻하는데 왜 취업을 하지 않느냐"고 다그쳤다. 그들은 한국 장애인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세계 교역량 11위, OECD 회원국인 한국에서 병실이 없어 환자가 전국을 유령처럼 떠도는 상황을, 내가 상대측 변호사라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황혜경씨 기금 전달 ⓒ프레시안

  가해자 측 보험회사와 계속되는 공방전도 참기 힘들었지만 사고를 낸 가해자와 보험회사로부터 8년이 지나도록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 듣지 못한 것이 우리를 더 분노하게 만들었다. 책임소재를 둘러싼 논쟁을 벌이면 벌일수록 그들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커졌다. 뉴스에서 '영국과 스코틀랜드'란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벌렁벌렁했다. 이러다 미칠 것 같았다. 어느 날 아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더 이상 그를 미워하지 말아요, 이제 그를 용서할 때가 된 것 같아요. 그래야 우리가 편안하게 살 수 있어요."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해자에 대한 미움이 조금씩 잊혀져 갔다.
  
  분노가 사라져갈 즈음인 지난 5월 중순,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처음으로 법정이 열린다는 연락이 왔다. 나와 변호인단은 갑자기 자료를 준비하기 위해 분주해졌다. 개정 시한을 불과 보름 정도 앞두고 가해자 측 보험회사에서 처음으로 피해보상액을 제시했다. 50만 파운드, 우리 돈으로 약 9억 원이었다. 상대측은 보상액을 제시하면서 "당신들이 사고에 기여한 과실률을 적용할 경우, 이보다 훨씬 적은 금액이 될 것"이라며 "이것이 마지막 제안"이라고 위협했다. 나와 아내는 분노했다.
  

▲ 안용석 변호사, 설미영씨, 장우영 변호사(왼쪽부터) ⓒ프레시안

  나는 편지를 썼다. "가해자가 사고를 낸 직후 구조대가 아닌 곳에 휴대폰을 거는 장면을 비롯해 당시 정황을 담은 증거사진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피해보상을 못 받더라도 현지 법정에서 끝까지 시시비비를 가리겠다"는 내용이었다. 편지 내용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니면 법정까지 갈 경우 더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 것을 우려했는지, 상대측은 며칠후 피해보상액을 두 배로 올려 100만 파운드로 제시했다. 우리 부부는 앞으로 몇 년간 지루하게 계속될 법정소송을 벌이느냐를 놓고 고심했다. 우리 측 스코틀랜드 변호사와 안용석 변호사는 두 팔을 걷고 말렸다. 소송에 승리하더라도 상처뿐인 승리가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었다. 고심 끝에 결국 그쪽에서 제시한 107만5000파운드를 수락했다. 8년 동안 지루하게 계속된 싸움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되돌아보니 참 멀고도 먼 여정이었다.
  
  이제 우리도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싶다
  
  아내의 스코틀랜드 변호사로부터 소송을 종결한다는 연락을 받고 나와 아내와 함께 집 근처 의 공원을 찾았다. 5월의 하늘이 눈부셨다. 영국 칼라일 병원의 응급실에서 아내가 생사를 넘나들 때 보았던 먹구름 대신 5월의 태양이 빛났다. 나와 아내는 "8년간 거대한 태풍 때문에 우리 가족의 뿌리가 뽑힐 정도로 힘들었지만 이제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고 다짐했다. 다음날 은행으로부터 피해보상액이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아내는 다른 비용을제외하고 보상액의 절반인 50만 파운드를 푸르메재단에 내놓았다.
  
  가끔 혼수상태에 빠진 아내를 바라보며 눈물 지었던 순간들이 생각난다. 스코틀랜드 오지병원의 응급실 창 너머로 낮게 드리워진 먹구름과 그 아래를 유영하던 갈매기와 까마귀의 노란 부리까지 기억 속에 선명하다. 그때가 손에 잡힐듯 한데 벌써 8년의 시간이 흘렸다. 가끔 아문 상처를 매만지듯 그때의 심정을 곰곰이 되새겨본다. 우리 가족이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넘어야만 했던 그 험한 산과 물보라 치던 강물이 이제 되돌아보니 작은 봉우리와 냇물처럼 보인다. 그렇게 애를 끊을 듯 힘들었던 시절도 지나고 나니 고통과 감동스런 기억이 중첩돼 내가 지나온 수많은 작은 오솔길처럼 보인다. 생사의 갈림길이 떠오를 때마다 우리를 향해 내밀어준 수많은 도움의 손길이 생각난다. 그리고 우리가 겪은 고통을 지닌 채 험한 산과 깊은 물을 건너게 될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싶다.
  
  '하느님께서 아내에게 그렇게 큰 고통을 주시고 살리신 이유가 무엇일까.' 오늘도 곰곰이 되새겨 본다. 푸르메재단이 설립하게 될 작고 아름다운 재활전문 병원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백경학/푸르메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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