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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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굉 이봉욱 선생 2

[지운 김철수 선생님과 의제 허백련 화백님 그리고 우장춘 박사님의 영원한 우정]

[지운 김철수 선생님과 의제 허백련 화백님 그리고 우장춘 박사님의 영원한 우정] . [지운 김철수 선생님과 나의 인연] . 부안이 배출한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내 고조부 성우 이명직 대감님이 돌린 망해가는 나라를 살리는 길은 선진국 유학이라는 사발통문을 보고 1912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학과 실과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리고 성우 이명직 대감님이 일제에 독살되던 1915년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했습니다. (1) . 1915년에는 죽어 귀신이 되어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울자며 ‘귀곡단’과 ‘열지동맹’을 결성했습니다. 1916년 ‘신아동맹단’을 결성하여 독립지사의 길에 들어섰던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해방되어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 14년을 옥살이했습니다. (2) . 초기 조선공산당 3차 전당대회 전반..

소련 육사 출신 이봉섭 선생의 아들 이현계 선생

[이 한 장의 사진] . 이 사진속 인물은 전북 임실군 운암면 내맛리 출신으로 러시아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러시아군 비행 장교를 지낸 이봉섭 선생님의 아드님으로 대한민군 공군창설의 주역중의 한 분인 이현계 선생님 입니다. 내맛리에서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보내던 배보 할아버지로 불리던 제 외증조할아버지(보굉 이봉욱 선생)의 동생분의 아드님입니다. . 이현계 선생의 아버님인 이봉섭 선생님은 스탈린이 아끼던 장교였습니다. 그 인연으로 조선공산당 3차 책임 비서 겸 재무담당인 지운 김철수 선생님과 스탈린의 만남을 주선하여 조선공산당이 코민테른의 지원자금 40만 원을 받았습니다. 그 40만 원은 공산혁명에 쓰이지 않고 독립자금으로 전용되었습니다. . 가장 많은 자금을 지원받은 곳은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김원봉의 의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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