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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님과 의제 허백련 화백님 그리고 우장춘 박사님의 영원한 우정]

忍齋 黃薔 李相遠 2017. 12. 27. 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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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님과 의제 허백련 화백님 그리고 우장춘 박사님의 영원한 우정] 

[지운 김철수 선생님과 나의 인연] 

부안이 배출한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내 고조부 성우 이명직 대감님이 돌린 망해가는 나라를 살리는 길은 선진국 유학이라는 사발통문을 보고 1912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학과 실과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리고 성우 이명직 대감님이 일제에 독살되던 1915년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했습니다. (1) 

1915년에는 죽어 귀신이 되어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울자며 ‘귀곡단’과 ‘열지동맹’을 결성했습니다. 1916년 ‘신아동맹단’을 결성하여 독립지사의 길에 들어섰던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해방되어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 14년을 옥살이했습니다. (2) 

초기 조선공산당 3차 전당대회 전반기 책임비서로 러시아의 코민테른에 참가하여 거액의 군자금을 받아 독립운동자금으로 전용하였고 전북 임실 내맛 출신으로 러시아육사를 나온 이봉섭 선생을 통해 스탈린을 독대했습니다. 당시 만주를 오가던 때 만주 농림국 미곡 검사관이던 내 조부 이성구 지사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3) 

김철수 선생님은 상해임시정부로부터 미주 한인 독립운동기부금의 횡령착복과 조직원 살해미수 혐의로 암살 위협에 처한 이승만을 위해 횡령금액을 대납하여 목숨을 구해준 보답으로 해방 후 유일하게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목숨을 보존 받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지사입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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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구 지사님의 외아들인 방원 이성찬 선생님과 전북 임실의 애국지사인 제 외증조부 보굉 이봉욱 선생님의 장손녀 이춘연 여사님을 중매하여 부부의 연을 맺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탄생했습니다. 김철수 선생님이 서울 나들이를 할때면 제 방에서 주무시며 어린 시절부터 수없이 많은 날 밤을 지운 김철수 선생님의 파란만장한 독립운동 이야기를 들으며 커왔습니다. (5) 

지운 김철수 선생님과 저는 김철수 선생님 자신을 일본 유학과 독립지사의 길로 이끌었던 성우 이명직 대감님이 제 고조부이며 그분의 손자가 독립운동하던 만주에서 도움을 받았던 제 조부이신 이성구 지사님 인지 모른 체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여러해전 제 조상님 공부를 하다 바로 그 성우 이명직 대감님이 제 고조부인지를 알고 전율했지요. 

[지운 김철수 선생님에게 감화받은 의제 허백련 화백님과 우장춘 박사님] 

지운 김철수 선생님에 대해서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지운 김철수"라는 자료집도 내고 여러 사람이 지운 김철수 선생님에 대해 연구도 하여 많이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이어진 지운 김철수 선생님과 의제 허백련 화백님 그리고 우장춘 박사님의 돈독한 우정과 그 인연을 아는 사람은 드물겁니다. 

1916년 우장춘 박사님이 조선총독부 장학생으로 동경대 농학과 실과 청강생으로 입학했을 때 조선인 도자사가 방일하여 조선 유학생을 격려하고자 강연을 하는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경제학을 공부하던 허백련 화백님도 있었습니다. 

그때 와세다대학 유학생이던 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친일강연을 하던 도지사를 향해 연단에 뛰어들어 도지사의 멱살을 잡고 어찌 조선인으로 그런 연설을 할 수 있냐며 거칠게 항의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 모습에 충격과 감명을 받은 사람이 바로 의제 허백련 화백님과 우장춘 박사님 이었습니다. (6) 

그 이후 김철수 선생님과 허백련 화백님 그리고 우장춘 박사님은 우정을 나누게 되었고 조선총독부 장학금을 신청하려던 허백련 화백님은 그 길로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자신이 원하던 동양화에 매진하여 남도 산수화의 거목으로 우뚝 섰습니다. 그리고 작고하는 순간까지 도지사의 멱살을 잡던 김철수 선생님의 애국정신에 존경을 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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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선생님은 우장춘 박사님에게 '너의 부친 우범선이 매국한 것에 대해 속죄하려면, 조선의 독립과 조선을 위해 네가 배운 바로 봉사해야 하고 절대로 너의 조선인의 성을 갈아서는 안 된다'는 민족주의 의식을 심어 주었습니다. 

명성황후시해사건에 가담하고 일본으로 도망간 우범선과 일본인 부인 사이에 태어난 우장춘 박사님은 1919년 농사시험장에 취직하여 원예 육종학의 시작을 알리는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을 1935년에 발표합니다. 김철수 선생님이 말한 데로 성을 갈지 않고 '우장춘의 삼각형(Triangle of U)'으로 식물 육종학의 금자탑을 쌓았습니다. 

1936년에 그 성과를 인정받아 동경제국대학으로부터 농학 박사학위를 수여 받고 1950년 한국의 농업발전에 여생을 받치겠다는 심정으로 한국으로 향하는 귀국선에 몸을 싣고 영구귀국하여 죽을 때까지 한국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지운 김철수 선생님과 의제 허백련 화백님 그리고 우장춘 박사님은 그 분들이 작고할 때까지 오랜 우정을 유지했고 그 분들의 민족 사랑의 정신은 아직도 우리에게 흐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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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1) http://blog.daum.net/enature/15852869
(2) http://blog.daum.net/enature/15851789
(3) http://blog.daum.net/enature/15853970
(4) https://ko.wikipedia.org/wiki/김철수_(1893년)
(5) http://blog.daum.net/enature/15852876
(6) http://blog.daum.net/enature/15853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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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부산국립원예연구소에서 우장춘박사와 함께 좌로부터 방원 이성찬 선생, 농진청 원예과장 고병민 선생,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 원예가 최영전 선생, 중앙 우장춘 박사
2▲ 성우 이명직 대감 (https://ko.wikipedia.org/wiki/이명직_(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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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산국립원예연구소에서 우장춘박사와 함께 좌로부터 방원 이성찬 선생, 농진청 원예과장 고병민 선생,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 원예가 최영전 선생, 중앙 우장춘 박사

 

 

2▲ 성우 이명직 대감 (https://ko.wikipedia.org/wiki/이명직_(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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