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5_80년5월18일

논문 "한국정치의 후견인-수혜자 관계: 제5공화국의 하나회 인맥에 관

忍齋 黃薔 李相遠 2007. 7. 7.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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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의 후견인-수혜자 관계:
제5공화국의 하나회 인맥에 관한 연구
 

(서창영은 1993년 6월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황수익(黃秀益) 교수의 지도를 받아 석사논문 "한국정치의 후견인-수혜자 관계: 제5공화국의 하나회 인맥에 관한 연구"를 썼다.)

 

요 약 문

 

국문초록


이 논문은 후견인-수혜자 관계의 분석틀을 적용하여 제5공화국의 하나회 인맥을 연구한 글이다. 후견인-수혜자 관계는 권력, 재력, 명망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물질적, 정신적 혜택을 베풀고 그 대가로 자발적인 보답을 받는 관계로 정의된다. 이 논문에서는 위의 분석틀에 입각하여 제5공화국의 정치인맥이 본질에 있어서 하나회 중심의 군부인맥이었으며, 하나회 인맥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내적 요인이 하나회 회원들끼리 서로 밀고 당겨 주는 호혜적 관계에 있었음을 주장한다.

정치분야에서 후견인은 권력서열상 더 우월한 위치에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각종 배려와 혜택을 베풀고 그 대가로 자발적인 충성과 지지를 얻어 내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정치인들간의 후견인-수혜자 관계는 정치지도자-중간보스-일반추종자로 이어지는 복합적인 종적 피라미드 구조를 형성한다. 이 피라미드 조직의 중심에는 최고지도자가 존재하고 그와 동일한 정치적 거리에 있는 사람들로 여러 개의 동심원이 형성되어 최고지도자-중간보스-일반정치인-유권자로 이어지는 거대한 동심원 구조가 형성된다. 후견인-수혜자 관계는 혈연, 지연, 학연과 같은 전통적 인간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급속한 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소멸되지 않고 오랫동안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의 정치인맥도 후견인-수혜자 관계에 기반하여 형성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제5공화국의 하나회 인맥이다. 하나회는 1963년 전두환, 노태우 등 육사 11기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비밀사조직으로서, 아래로는 정규육사출신 장교들의 엘리트 의식과 선배 장교들에 대한 불만에 기초하고 위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와 후원에 의존하여 강한 결속력을 지닌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하나회 회원들은 1960-70년대에 걸쳐 윤필용, 차지철 등의 후원을 받아 성장하였으며, 자기들끼리 주 요 보직을 주고받는 자리 물리기 방식으로 육군본부, 공수특전단, 수도경비사, 보안사 등의 요직을 장악하고, 권력 피라미드의 구조 변화가 있을 때마다 한 걸음씩 권력의 정상을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하나회 인맥은 1979-80년 신군부 세력이 정치무대에 등장하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12.12 쿠데타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진 장교들의 3분의 2가 하나회 회원이었으며, 80년 5월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은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하나회 회원들끼리 자리 물리기를 해 오던 대표적 부대인 공수특전단이었다. 또한 국보위 상임위원급 52명 중 군 출신이 30명으로서 57%를 차지했는데, 이 중 하나회 출신이 9명이었다. 하나회 인맥의 위세는 제5공화국의 출범과 더불어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들은 제5공화국 정권하에서 서로 밀고 당겨 주는 후견인-수혜자 관계를 형성하고, 청와대, 행정부, 국회 및 정당, 군, 정부투자기관, 기업체, 연구단체 등 사회 각계로 진출하여 상층부와 요직을 장악하였다. 그 결과 군부세력을 중심으로 민간세력이 결합하여 전두환-하나회-정규육사출신-관료-민간인의 구조를 가진 거대한 동심원 구조가 형성되었다.

인맥정치는 정치지도자와 그를 중심으로 한 인맥에 의해 주요한 정치적 결정이 내려지고 정치행위가 이루어지는 정치행태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제5공화국의 정치행태는 하나회 중심의 군부인맥에 의한 인맥정치였다. 인맥정치는 정치인들간의 유대관계를 공고한 것으로 만들어 줌으로써 안정된 정치공동체의 형성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맥정치는 정치적 머신, 파벌 등과 마찬가지로 민주적 절차와 제도를 경시하고 집단이기주의와 부정부패를 낳는 온상이 될 수 있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주요 용어

 

후견인-수혜자 관계, 제5공화국, 하나회 인맥, 피라미드 구조, 동심원 구조, 정규육사 출신, 자리 물리기, 하나회 중심의 군부인맥, 인맥정치


Abstract


This paper is a survey which analyzes the Hanahoe group in the fifth Republic of Korea by using the framework of patron-client relationship. Patron-client relationship is defined as the relationship in which a person with political power, financial power, or reputation bestows material and spiritual favors on a person without them and gains spontaneous rewards. In this paper we assert that the political faction in the fifth Republic of Korea is essentially the military clique centering around the Hanahoe and that the inner factor of the Hanahoe group's taking the reins of government can be found in the reciprocal relationship of the Hanahoe members' helping each other.

 


Key Words

 

patron-client relationship, the fifth Republic of Korea, Hanahoe group, pyramid structure, concentric circle structure, handing over the position, military clique centering around the Hanahoe, faction politics.

 

 

 

제1장 서론

 

제1절 문제제기

지난 20-30년간에 걸쳐 한국은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급속한 산업화와 정치적 민주주의를 경험하였다. 한국은 박정희 정권에 의해 추진되기 시작한 근대화운동의 결과로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었고 국민총생산량이 크게 늘어났으며 국민들의 교육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졌다. 한국의 근대화와 더불어 사회의 계급구성도 달라졌다. 농업의 몰락으로 농민의 숫자가 줄어든 반면 수출지향적 공업화의 결과로 산업노동자의 숫자가 늘어났다. 농업과 공업의 비율이 역전되고 자본주의적 관계가 발전함과 더불어 이념적으로도 전통적인 농업사회의 도덕이나 윤리규범이 쇠퇴하고 서구적인 자유주의와 합리주의 사조가 널리 유포되었다.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근대화 추세와 비교해 볼 때 한국정치의 민주화 수준은 상대적으로 뒤떨어져 있다. 사회경제적 발전이 정치적 민주화를 가져온다는 립셋(Seymour M. Lipset)의 가설과는 달리, 한국은 급속한 사회경제적 발전을 이룩하였지만 그것에 비례하여 정치적 민주화를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박정희 정권은 경제건설을 추진한다는 명목으로 정치적 민주화를 유보하거나 후퇴시키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한국정치가 민주화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한국정치의 민주화는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계기로 급속히 추진되기 시작하였으며, 1993년 군사정권이 막을 내리고 문민정권이 들어섬으로써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받아들여짐으로써 법적, 제도적 측면에서 한국정치의 민주화가 크게 진전되었고, 문민정권이 출범하여 정권의 권위주의적 속성이 약화되고 선거, 정당, 의회의 자율적 기능이 활성화됨으로써 정치과정적 측면에서도 민주주의가 크게 진전되었다. 최근 한국정치의 민주화 추세는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현상이 아니라 장기적이고 광범위한 경향이라는 점에서 1960년 4.19 직후의 상황과 차이점이 있다. 한국정치의 민주화는 사회경제적 발전의 단순한 반영물도 아니고 권력자의 시혜물도 아니다. 한국정치의 민주화는 민주를 염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적극적인 노력과 희생의 대가이다.

최근 정치학 연구에서는 선거, 정당, 의회와 같은 정치과정에 관한 연구가 새롭게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 있다. 지난날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정치과정에 관한 연구는 1980년대 후반 이후 한국정치의 민주화가 진행되고 선거, 정당, 의회의 기능이 활성화됨에 따라 새롭게 정치학의 중심적인 연구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정치에 관한 근래의 연구는 투표행태와 선거결과에 관한 분석, 선거운동의 구체적 과정과 실태에 관한 분석, 선거문화와 유권자의 정치의식에 관한 분석, 정당과 의회의 정책기능에 관한 분석 등 다양한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들은 실증적인 조사분석과 각종 통계자료들을 바탕으로 상당히 과학적이고 설득력 있는 결론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정치의 연구에서 많은 연구자들이 직면하는 문제는 미국이나 유럽과 달리 한국에서는 정치과정에서 정책적 요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별로 크지 않다는 점이다. 한국의 정치과정에서는 정책적 요인보다는 비정책적 요인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이념적 동질성이나 정책의 합리성에 따라 정당이 조직되고 선거에서 유권자의 지지가 표현되지만, 한국에서는 이념이나 정책보다도 혈연, 지연, 학연에 기반을 둔 인맥과 사조직, 지역주의 등의 비정책적 요인이 중요한 정치행위를 결정하는 데 더 큰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후보는 자신의 출신지인 부산에서 72.6%, 경남에서 71.5%, 경북에서 63.6%의 지지를 얻고, 김대중 후보는 광주에서 95.1%, 전남에서 91.1%, 전북에서 88.0%의 지지를 얻는 등 지역주의적 투표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반면, 두 후보의 정책적 차별성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또한 제13대 민정당 국회의원 중 박준규, 김윤환, 박철언 등 무려 15명이 노태우 대통령의 출신 고등학교인 경북고등학교 동창생들이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정당활동에서도 정책이나 이념의 동질성보다도 혈연, 지연, 학연과 같은 연줄을 기반으로 하여 인맥과 파벌이 형성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정치에서 인맥과 지역주의는 매우 독특한 정치행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한국정치 분야에서 이 문제에 관한 연구는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최근 국회의원과 선거구민간의 비정책적 연계과정이나 한국정치의 지역균열 현상에 관한 연구논문들이 몇 편 발표되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아직까지 이 분야에 관한 연구는 부족한 편이다. 특히 1980년대의 정치인맥에 관한 연구는 기자들이 작성한 몇 편의 저널리즘적인 글들을 제외하면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이 논문은 1980년대 한국정치의 인맥을 연구주제로 삼고자 한다.

제2절 연구대상 및 내용구성

이 논문에서는 후견인-수혜자 관계라는 분석틀을 적용하여 제5공화국의 하나회 인맥에 관해 살펴 보고자 한다. 후견인-수혜자 관계(patron-client relationship)는 권력, 재력, 명망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물질적, 정신적 혜택을 베풀고 그 대가로 자발적인 충성과 지지를 얻어 내는 관계이다.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주요 정치인맥은 후견인-수혜자 관계에 기반하여 형성되고 발전하였다. 이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제5공화국의 하나회 인맥이다. 이 논문은 후견인-수혜자 관계의 분석틀에 입각하여, 제5공화국의 정치인맥이 본질에 있어서 하나회 중심의 군부인맥이었으며, 하나회 인맥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내적 요인이 하나회 회원들끼리 서로 밀고 당겨 주는 호혜적 관계에 있었음을 주장하려 한다.

이 논문에서는 제5공화국의 하나회 인맥이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는가를 시간적 순서에 따라 구체적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따라서 이 논문은 시간적으로 1960년대 초 하나회 인맥이 형성되기 시작한 때로부터 1980년대 전반기 제5공화국이 수립되어 하나회 인맥이 사회 각계로 진출해 나간 때까지의 시기를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이 논문은 집권여당의 정치인맥을 주된 연구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야당의 정치인맥이나 비정치적 분야의 인맥은 이 논문의 직접적인 연구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 논문에 실린 각종 도표와 자료들은 주요 일간신문과 [신동아], [월간조선], [월간중앙] 등의 잡지에 실린 취재 및 인터뷰(interview) 기사들을 참고하여 재작성되었다. 각종 통계연감과 국회 조사 보고서 등도 객관적 사실을 확인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덧붙여 제14대 국회의원 총선을 맞아 황수익 교수의 지도 밑에 진행되었던 정치과정분석 강의와 그 때 제출되었던 각종 보고서들이 이 논문을 작성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논문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1장 서론에 이어 제2장에서는 전반적인 분석의 틀을 제시한다. 먼저 이 논문에서 사용된 주요 용어들에 관한 엄밀한 개념정의를 시도한다. 다음으로 정치인맥을 학문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이론적 틀로서 '후견인-수혜자 관계'라는 분석틀을 제시하고 실제 정치현실에 대한 설명력을 가질 수 있도록 모형화를 시도한다.

제3장에서는 하나회 인맥의 형성과정에 관해 살펴 본다. 하나회의 뿌리인 오성회가 생겨난 때로부터 1961년 육사생도들의 5.16 지지 시위, 1963년 하나회 결성, 1973년 윤필용 사건 등 주요 사건들을 살펴 본다. 이를 통해 하나회가 아래로는 정규육사출신 장교들의 엘리트 의식과 선배 장교들에 대한 불만에 기초하고, 위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와 후원에 의존함으로써 강한 결속력을 지닌 비밀사조직으로 성장할 수 있었음을 주장한다.

제4장에서는 제5공화국의 정치인맥에 관해 살펴 본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후 12.12사건을 통해 군의 주도권을 잡은 신군부 세력이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국보위 설치, 민정당 창당 등을 통해 구정치세력들을 제거하고 하나회 중심의 새로운 정치인맥을 형성하는 과정을 살펴 본다. 이를 통해 5공인맥은 본질에 있어서 군 내 비밀사조직인 하나회의 연장선상에서 형성된 군부인맥이었음을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제5장에서는 인맥정치의 장단점을 지적하고 이 연구의 성과와 한계를 밝힌다.

제2장 분석의 틀



제1절 개념정의

정치인맥에 관한 연구는 여러 가지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인맥은 중세 봉건사회의 가부장제(paternalism)라는 개념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정치인맥은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유행했던 머신정치(machine politics)의 분석틀에서 파악할 수도 있다. 정당정치가 활성화된 현대에는 정치인맥을 당 내 파벌(faction)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연구자들이 많다. 이 논문에서는 가부장제, 머신정치, 파벌정치 등의 개념을 살펴 보고, 정치인맥의 연구에 가장 유용한 분석의 틀로서 후견제(patronage)라는 개념에 대해 자세히 살펴 보고자 한다.

(1) 가부장제

가부장제는 라틴어의 친족관계(kinship)라는 용어에서 유래된 말로서,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대하는 태도를 본따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가부장제에 관해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세습제(世襲制, patrimonialism)라는 개념을 발전시킨 베버(Max Weber)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세습적 관계는 사장, 고용주, 봉건영주, 기타 유사한 사람과 그 보호의 대가로 충성과 복종을 바치는 추종자 무리 사이의 관계로 정의된다. 그는 이러한 세습제도가 계급구조 속에서 사람들간에 지위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과업들이 부드럽고 효율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문제에 관하여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 준다고 주장하였다.

가부장제의 몇 가지 기본전제들은 정치인맥을 이해하는 데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어떤 정치인맥의 대부로 불리는 사람은 가부장제의 가장에 비유될 수 있다. 정당의 보스(boss)와 추종자(follower) 사이의 관계는 가부장제에서 윗사람(superior)과 아랫사람(inferior)의 관계에 비유될 수 있다. 가부장제는 중세 봉건사회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났지만 현대 사회에서도 비단 정치분야에서뿐 아니라 사회, 경제, 문화, 종교 등 사회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부장제는 위계적 조직의 성원들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나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따뜻한 배려와 혜택을 베푸는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기능이다. 많은 경우에 가부장제는 전자의 의미로 이해되지만, 기업경영에서 가부장제는 종종 자본가가 노동자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정치분야에서 가부장제와 정치인맥은 조직 내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2) 머신정치

사회적 의미에서 머신(machine)이라는 용어는 그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기능을 맡아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다양한 지위를 점하고 있는 위계적 조직을 의미한다. 정치적 머신은 정치권력의 획득, 유지, 확대를 주된 목적으로 하는 직업적 정치인들로 구성된 집단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도력과 위계제 그리고 규율 있는 구성원들을 가진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정치조직은 정치적 머신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오스트로고르스키(Moisei I. Ostrogorskii)는 머신과 정당을 구별하여, 머신을 은밀하고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여 공공의 이익보다 개인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직업적 정치인들의 집단이라고 규정하였다. 반면 브라이스(James Bryce)는 머신을 정당조직과 동의어로 간주하였는데,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후자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시카고의 흑인정치를 연구한 고스넬(Harold F. Gosnell)은 머신이 흑인과 소수 인종을 보호하고 이들에게 각종 혜택을 주는 역할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미국에서 머신은 복잡한 도시생활에서 어려움을 느끼고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 유권자들, 특히 영어를 말할 수 없는 이주민들을 위해 생겨났다. 지방정치에서 머신은 공식적인 정부기구의 복잡한 기능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였다. 가난하고 투표해 본 경험이 없는 소수 인종과 해외 이주민들은 복잡한 선거절차를 이해할 능력과 시간,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머신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였다. 이것이 머신이 생겨난 부분적인 이유이다. 그러나 더 깊은 의미에서 볼 때, 모든 정치조직에서 머신의 성장은 불가피하다. 미헬스(Robert Michels)가 '관료제의 철칙'이라고 이름붙인 바와 같이 일반적으로 모든 조직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을지라도 결국 소수의 몇몇 사람들에게로 권력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그에 따라 조직의 지도력은 정당조직으로, 정치적 머신으로, 그리고 마침내 보스에게로 집중된다.

정치적 머신은 정치인맥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정치적 머신과 마찬가지로 정치인맥은 공공의 이익보다도 자기 그룹의 사적인 이익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정치인맥의 구성원이 누구인지, 주된 활동은 무엇인지 등은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관련자들 사이에서만 은밀하게 알려진다. 머신에 소속된 사람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지방정부나 공공기관보다도 머신의 보스를 자신의 후견인, 보호자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마찬가지로 정치인맥에 망라된 사람은 자신이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법적, 행정적 절차를 거치기에 앞서 정치인맥의 보스에게서 도움과 보호를 받기를 기대한다.

머신의 불가피성과 그 긍정적 기능에도 불구하고 머신은 부패를 낳는 구조적 요인이 될 수 있다.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에 따르면, '부패'란 사적인 목적에 봉사하기 위하여 사회적으로 이미 용인된 규범에서 이탈하는 공무원의 행위로 정의된다. 부패는 효과적인 정치제도가 부재한 근대화 도상의 나라들에서 많이 발생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근대화는 공공의 복지와 개인의 이해를 서로 구별시키고 새로운 집단의식을 유발함으로써, 정치권력과 결탁한 소수 집단이 공공의 복지를 침해하면서까지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기주의를 조장할 수 있다. 머신은 집단이기주의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민주주의의 이상은 머신정치에 의해 타락하며, 온갖 사회적 부정부패가 머신에 의해 생겨난다. 머신과 마찬가지로 정치인맥은 부정부패를 낳는 구조적 요인이 될 수 있다.

(3) 파벌정치

일반적으로 파벌(faction)이라는 용어는 큰 집단 속에서 특정한 개인의 이익이나 정책의 관철을 위해 활동하는 하위그룹을 가리키는 말이다. 정치분야에서 파벌은 하나의 정당 내부에서 다른 당원들과는 구별되는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형성된 소집단을 의미한다. 파벌은 정당의 하위체계이다. 파벌은 하나의 정당이라는 공통성에 기반하면서도 각각의 세부적인 사항의 적용상에서 나타나는 차이점 때문에 생겨난다.

파벌의 형성은 외부의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집권여당의 경우 효율적인 반대세력이 존재하지 않을 때 당 내 파벌이 활성화되는 경향이 있다. 강력한 야당이 부재하기 때문에 외부를 향해 돌려져야 할 세력싸움은 당 내부로 돌려지는 경우가 많다. 야당의 경우 가까운 시일 내로 정권을 잡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면 당 내 파벌이 활성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우 당 내 의견차이는 매우 심각한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고 심하면 정당이 분열되는 수도 있다. 만약 외부에 강력한 반대세력이 존재하거나 혹은 가까운 시일 내로 정권을 잡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면 당 내 파벌은 위축되고 정당의 내적 통합수준은 매우 높아지게 된다. 혁명적 변화의 시기에 정치파벌은 급격히 해체, 재조직된다. 구체제가 붕괴하고 새 정권이 들어서는 시기에 격렬한 파벌투쟁이 전개되면서 낡은 파벌은 쇠퇴하고 새로운 파벌이 형성된다.

정치인맥은 파벌과 많은 유사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파벌이 정당 내부의 소집단을 가리키는 용어임에 반해 인맥은 정당뿐만 아니라 행정부, 사법부, 검찰, 경찰, 군부, 언론, 학계, 종교계, 재계 등 사회의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형성된 소집단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인맥은 구성원과 비구성원간의 경계가 모호하고 파벌에 비해 내적 결속력이 그다지 높지 못하다. 그러나 급격한 정치적 변동기를 맞아 이합집산(離合集散)이 심한 파벌과 달리 정치인맥은 외부의 정치적 변화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상대적으로 오랫동안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정치분야에서 파벌이라는 용어는 종종 반대세력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하나의 정치세력은 반대세력에 대해 파벌이라는 오명을 덮어씌움으로써 그들이 전체의 이익보다도 자기 파벌만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고 대중적으로 선전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정치분야에서 인맥이라는 용어는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배타적인 동질감을 형성하고 자신들만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는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4) 후견제

일반적으로 후견제(patronage)라는 용어는 두 개인간 혹은 여러 사람들간에 맺어지는 상대적 관계, 즉 후견인(patron)과 수혜자(client) 사이의 상호적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이 논문에서도 후견제를 '후견인-수혜자 관계'(patron-client relationship)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자 한다. 후견인-수혜자 관계는 권력, 재력, 명망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물질적, 정신적 혜택을 베풀고 그 대가로 자발적인 보답을 받는 관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후견인은 수혜자의 생활 전반에 걸친 문제들에 대하여 인간적 배려를 베풀고, 수혜자는 후견인의 전반적 배려에 대한 보답으로 자발적인 대가를 치르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후견인-수혜자 관계는 후견인과 수혜자 사이에 물질적, 정신적 혜택을 서로 '주고받는'(give and take) 관계라는 점에서 호혜적이지만, 양자의 지위가 대등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불평등한 관계라는 점에서 일방적이다. 후견인-수혜자 관계는 자발적, 호혜적 인간관계라는 점에서 강제적, 일방적 관계인 지배-피지배 관계와 구별된다. 또한 후견인-수혜자 관계는 인격적, 비계약적 관계라는 점에서 비인격적, 계약적 관계인 자유로운 상품교환관계와 구별된다. 결국 후견인-수혜자 관계는 지배-피지배 관계와 자유로운 상품교환관계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인간관계의 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 세 가지 인간관계의 특징을 비교하여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 표 2-1 ] 세 가지 인간관계의 비교


특 징 호 혜 성 자 발 성 평 등 성 등가교환성 동 시 성
상품교환관계
후견인-수혜자 관계 × × ×
지배-피지배 관계 × × × × ×


후견인-수혜자 관계에 관하여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문화인류학 등 사회과학의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케니(Michael Kenny)는 '후견인'을 한편으로 보호자, 안내자, 모방해야 할 모델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자기 자신보다 더 강력하게 다룰 수 있는 중개자로 간주되거나 스스로 그렇게 간주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였다. 케니에 따르면 개인은 어떤 혜택이나 보호를 받기 위하여 후견인을 찾아나서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수혜자는 후견인이 베푸는 혜택을 거부하지 않고 스스로 요구하고 있으며, 자신이 받은 혜택의 대가로 즉시에 혹은 상당한 시간적 여유를 두고 후견인에게 자발적으로 일정한 보답을 하려 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후견인-수혜자 관계가 착취관계나 지배-복종 관계와 명백히 구별된다고 보았다.

프리들(Ernestine Friedl)과 캠벨(J. K. Campbell)은 후견인-수혜자 관계의 순기능을 지적하였다. 그들은 그리스(Greece)의 후견인-수혜자 제도에 관한 연구를 통해 이 제도가 학식 있고 부유한 소수의 특권층에게만 자원과 권한이 배분되는 것을 막고 일반인에게도 공평하게 자원을 배분하도록 해 준다고 보았다. 게다가 이러한 제도는 상대적으로 이름없이 격리되어 살아가는 지역주민들을 국가와 사회기구들과 접촉하도록 도와 주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였다.

베네트(John W. Bennett)와 이쉬노(Iwao Ishino)는 일본의 기업과 경제에서 나타나는 가부장제에 관해 연구하였다. 그들은 일본의 임업에서 나타나는 목재상(timber dealer)과 임업노동자(lumbermen) 사이의 관계를 후견인-수혜자 관계를 통해 설명하였다. 임업노동자는 목재상이 심지어 경제적 불황기에도 자신을 고용하고 보호해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오직 그 목재상을 위해서만 일한다. 만약 임업노동자가 아무런 통고도 없이 갑자기 일을 그만둔다면 그는 위신이 깍이고 앞으로도 그 일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들은 목재상과 임업노동자의 관계를 대규모 공장에서 나타나는 기업주와 노동자간의 '오야붕-꼬붕 제도'(oyabun-kobun system)와 비교하여 설명하였다.

콜렌다(Pauline M. Kolenda)와 포콕(David F. Pocock)은 인도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는 '자즈맨-카민 관계' (jajman-kamin relationship)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인도의 경우 '자즈맨'은 카스트 제도에서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후견인이고, '카민'은 자즈맨을 위해 여러 가지 농업생산물이나 다른 물품들 그리고 비공식적인 서비스를 바치는 수혜자이다. 그들은 어떤 연구자들은 역할이론, 카스트간의 힘 관계, 봉건적 관계 등을 강조하고 다른 연구자들은 경제적 분배의 측면을 강조하는 등 차이가 있지만,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서 나타나는 자즈맨-카민 관계는 보다 동양적이고 고전적인 후견인-수혜자 관계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밖에도 이 분야의 주요 연구성과로서, 후견인-수혜자 관계에 관한 최근의 사회학 이론을 소개하고 있는 아이젠슈타트(Shmuel Noah Eisenstadt)와 로니거(Luis Roniger)의 논문, 남부 이탈리아의 후견인-수혜자 관계를 연구한 그라지아노(L. Graziano)의 논문, 동남아시아의 정치적 부패의 원인을 후견인-수혜자 관계를 통해 분석한 스코트 (James C. Scott)의 논문, 그리고 정당 내부의 파벌을 후견인-수혜자 관계를 통해 분석하고 있는 란데(Carl H. Lande)의 논문 등을 들 수 있다.

정치인맥의 형성과 쇠퇴는 후견제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 많은 경우에 정치인맥은 권력서열상 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에게 물질적, 정신적 혜택을 베풀고 그 대가로 자발적인 충성과 지지를 얻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만약 서로간에 더 이상 물질적, 정신적 혜택을 주고받는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정치인맥은 해체 또는 쇠퇴할 것이다. 정치인맥의 보스는 추종자들에게 공식적 상하관계로 대하기보다 그들의 사적인 문제들까지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도록 도와주는 비공식적, 인간적 상하관계로 대하는 것이 보통이다. 마찬가지로 추종자는 보스에 대해 어린아이가 부모를 대하듯 무조건적으로 추종하고 복종하는 자세를 취한다. 정치인맥의 보스와 추종자 사이의 관계는 장인(artisan)과 도제(apprentice),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군주와 신하의 관계에 비유되는 후견인-수혜자 관계를 본질로 하고 있다.

정치분야에서 후견제는 공식적 정당조직 안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을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손쉽게 해결할 수 있도록 해 줌으로써 공식적 정당조직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후견제는 '정치인-정치인' 또는 '정치인-유권자' 사이의 유대관계를 공고한 것으로 만들어 주고, 급격한 정치적 변동에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인간적 유대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러나 후견제는 가부장제, 머신, 파벌 등과 마찬가지로 조직 내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부정부패를 조장하며 자기 집단 중심의 배타적 이기주의를 부추기는 등의 부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제2절 후견인-수혜자 관계의 모형화

정치분야에서 후견인은 권력서열상 더 우월한 위치에 존재하며 권력을 행사하여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물질적, 정신적 혜택을 베풀고 그 대가로 자발적인 복종과 지지를 이끌어내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수혜자는 자신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유형, 무형의 보호와 혜택을 받으며 그 대가로 자발적인 충성과 지지를 바치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1) 특징

정치분야에서 후견인-수혜자 관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첫째, 권력을 매개로 하여 권력서열에 따라 형성되는 관계이다. 이 관계는 대개의 경우 권력서열상 더 높은 지위에서 더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을 후견인으로 하고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에서 크지 않은 권력을 가진 사람을 수혜자로 하는 관계이다.

둘째, 권력의 배분이 이루어지거나 혹은 그 가능성이 있을 때 형성되는 관계이다. 정치인과 추종자간의 결합을 공고히 하는 요인에는 이념적 동질성, 개인적 친분과 지역적 연대감, 정치지도자의 지도력, 정치권력의 배분, 정치자금의 배분 등이 있지만, 이 중에서도 특히 정치권력과 정치자금의 배분이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치권력의 배분에는 주요 당직의 배분, 후보 공천, 공직 추천, 그리고 정치자금의 배분 등이 포함된다.

셋째, 혜택을 베푼 사람은 보답을 기대하고 혜택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그 대가를 보답하는 관계이다. 혜택에 대한 보답은 즉시에 일어날 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다소 시간적 간격을 두고 일어난다. 때때로 혜택에 대한 보답은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기도 한다. 만약 혜택에 대한 보답이 없거나 없을 것이라고 기대되면 후견인-수혜자 관계는 더 이상 유지되지 않고 해소될 것이다.

(2) 유형

정치분야에서 후견인-수혜자 관계는 다음의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하나는 정치인과 정치인 사이의 지도자-추종자 관계에서 나타나는 후견인-수혜자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인과 일반 유권자 사이의 대표자-지지자 관계에서 나타나는 후견인-수혜자 관계이다. 이 두 유형은 그 관계의 개념, 외연, 특징 등의 측면에서 서로 구별하여 설명할 수 있다.

첫번째 유형인 '지도자-추종자 관계'(leader-follower relationship)에서 나타나는 후견인-수혜자 관계는 권력의 정점에 위치한 사람이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에게 권력의 일부를 나누어 주고 그 대가로 자발적인 충성을 이끌어 내는 관계로 정의된다. '대통령과 각료' 또는 '정당의 보스와 추종자'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는 권력을 매개로 한 지도자-추종자 관계의 외연에 속한다. 지도자-추종자 관계는 정치인들간에 서로 대등하게 결합된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권력의 정점에 위치한 사람과 그 추종자 사이에 상하로 맺어진 수직적 관계라는 특징을 가진다. 이 관계에서는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위계적 질서, 즉 상부의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과 충성이 강조된다.

두번째 경우인 '대표자-지지자 관계'(representative-supporter relation- ship)에서 나타나는 후견인-수혜자 관계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을 대표로 선출해 준 사람들에게 각종 혜택을 베풀고 그 대가로 자발적인 지지를 얻는 관계로 정의된다. 국회의원과 지역구민 사이의 관계나 선거에서 후보자와 유권자 사이의 관계는 대표자-지지자 관계의 외연에 속한다. 대표자-지지자 관계에서 나타나는 후견인-수혜자 관계는 대등한 관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격한 상하관계라고 할 수도 없다. 이 관계는 대표로 선출되어 권력을 가지게 된 사람과 그 사람에 대한 지지자 사이에 맺어지는 다소 느슨한 수직적 결합관계이다.

[ 표 2-2 ] 두 유형의 비교



비 교 항 목 지도자-추종자 관계 대표자-지지자 관계
관계를 맺는 주체 정치인-정치인 정치인-유권자
후견인이 제공하는 혜택 정치권력의 배분 재화와 용역의 제공
수혜자가 보답하는 대가 충성과 복종 자발적 지지
관계의 성격 위계적て수직적 관계 느슨한 수직적 관계


여기서 강조할 것은 후견인-수혜자 관계가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규정될 수 있는 상대적 개념이라는 점이다. 어떤 정당의 지구당 위원장은 지역 유권자들에 대해서는 후견인의 위치에 있지만 자신이 소속한 정당의 보스에 대해서는 수혜자의 위치에 있게 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지도자-추종자 관계와 대표자-지지자 관계를 결합하여 하나의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3) 피라미드 구조

스코트(James C. Scott)에 따르면 후견인-수혜자 관계는 후견인과 수혜자의 직접적인 연계로 이루어진 단순한 클러스터(cluster)에서 시작하여, 한 명의 후견인을 정점으로 여러 명의 수혜자가 중층적으로 연계된 피라미드(pyramid)로 발전하고, 마침내 크고 작은 여러 피라미드들이 복합적으로 연계된 네트워크(networks)로 확대된다. 피라미드 조직에는 여러 명의 수혜자가 망라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의 피라미드 조직에는 오직 한 명의 후견인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피라미드 조직은 수혜자들 상호간의 연계보다도 후견인과 수혜자의 일대일 연계에 존립기반을 두고 있다.

정치인들간의 후견인-수혜자 관계는 '정치지도자-중간보스-일반추종자'로 이어지는 복합적인 종적(縱的) 피라미드 구조를 형성한다. 정치지도자는 자신에게 가장 충직한 소수의 핵심적 추종자들과 직접적인 호혜관계를 형성하고,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소규모의 피라미드 조직을 형성한다. 마찬가지로 핵심추종자는 자신을 따르는 소수의 추종자들과 호혜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또 다른 피라미드 조직을 형성한다. 이와 같은 소규모의 피라미드 조직들이 충성과 배려의 호혜적 관계에 따라 복합적으로 결합됨에 따라 정치인들간의 후견인-수혜자 관계는 정치지도자를 최고 정점으로 하고 그 직속으로 중간보스들이 위치하며 맨 마지막에 일반추종자들이 위치하는 거대한 종적 피라미드 구조를 형성한다. 이 피라미드 구조를 따라 정치조직의 실질적인 명령계통과 상벌체제가 형성된다. 이러한 복합적 피라미드 구조가 앞에서 스코트가 말한 후견인-수혜자 네트워크이다.

(4) 동심원 구조

정치분야의 후견인-수혜자 관계는 최고지도자를 중심으로 하는 동심원 구조를 형성한다. 동심원의 중심에는 후견인-수혜자 네트워크의 최상위 피라미드에서 후견인의 역할을 하는 한 명의 정치지도자가 존재하고, 그와 그의 추종자들로 첫번째 동심원이 형성된다. 그 주위에 중간보스들을 후견인으로 하는 크고 작은 여러 개의 피라미드들을 포함하여 두번째 동심원이 형성되고, 계속해서 일반정치인들까지 포함하는 여러 개의 동심원이 형성되며, 마지막으로 일반유권자까지 모두 포함하는 거대한 동심원이 형성된다. 피라미드 구조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심원 구조에서도 추종자들 상호간의 관계보다 최고지도자와 추종자간의 관계가 더욱 중요한 기준이 된다.

하나의 작은 동심원은 최고지도자로부터 동일한 정치적 거리(political distance)에 있는 추종자들로 이루어진다. 정치적 거리는 최고지도자로부터 추종자가 받는 신임의 정도에 비례한다. 최고지도자와 추종자간의 접촉이 많을수록, 그리고 이를 통해 양자간의 호혜적 관계가 긴밀해질수록 최고지도자와 추종자간의 정치적 거리는 가까와진다. 최고지도자와 정치적으로 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 큰 정치적 권한을 소유할 수 있고, 더 많은 정치적 자원을 분배받을 수 있다. 참고로 정치적 거리를 구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만약 하나의 동심원 구조 안에 또 다른 중심이 형성되어 독자적인 후견인-수혜자 네트워크를 형성하면 기존의 동심원이 분리되어 두 개 이상의 새로운 동심원이 형성된다. 동심원의 분리는 대개의 경우 상에서 하의 방향으로, 즉 최상층의 분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중간보스들의 분리를 거쳐 마침내 일반정치인과 유권자의 분리로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동심원의 분리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최상층 동심원의 분리만 이루어지고 그 이하의 동심원은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로서, 단순히 최고지도자만 교체되는 경우이다. 둘째는 최상층의 분리로 인해 그를 따르는 중간보스들을 포괄하는 동심원까지 분리되는 경우로서, 정당 내 특정 파벌이 몰락하고 새로운 파벌이 등장하는 경우이다. 세째는 최상층과 중간보스들의 분리로 인해 그를 지지하는 일반유권자들까지 분리되는 경우로서, 정당이 둘 이상으로 갈라지거나 혹은 일부 세력이 탈당하여 새로운 정당을 창당함으로써 유권자들의 정당지지분포가 변화하는 경우이다. 대개의 경우 동심원의 분리는 최고지도자 개인의 교체로 끝나지 않고 그를 따르는 특정 파벌의 교체나 정당의 분리로까지 확산되는 경향이 있다.

<그림 2-7>과 같이 많은 경우에 하나의 정치적 공간에는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동심원이 중첩(overlap)되어 나타난다. 이에 따라 일반유권자는 동시에 여러 개의 동심원에 포함될 수 있다. 위의 그림에서 D는 동심원 A와 B에 모두 포함되어 있는데, A와의 정치적 거리가 B와의 정치적 거리보다 더 가까운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D는 C와는 후견인-수혜자 관계를 형성하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이 일정 기간 동안 두 개 이상의 동심원이 중첩되어 존재하면서 자유로운 경쟁이 벌어지는 정치활동공간을 다원주의 정치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후견인-수혜자 관계는 정치분야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 이유는 사회의 전반적인 근대화, 합리화 추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치분야에는 전근대적, 전통적 요소들이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급격한 변혁의 시기에, 그리고 합리주의나 개인주의에 기반한 계약적 관계에서보다 인정과 의리에 기반한 공동체적 관계에서 후견인-수혜자 관계가 더 쉽게 형성되고 있다. 근대화론의 시각에 선 사람들은 근대화의 진전과 함께 전근대적 인간관계가 보다 합리적이고 계약적인 인간관계로 대체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근대화 과정에서 개인주의화, 원자화된 개인들이 오히려 정서적, 공동체적 유대관계를 중요시하는 후견인-수혜자 관계에 더 적극적으로 매달리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한편 한국정치의 후견인-수혜자 관계가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왜곡된 정치과정의 결과로 생겨났다고 보면서 앞으로 한국정치의 민주화가 진행됨에 따라 보다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인간관계로 대체될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과는 달리 오늘날 선거, 정당, 의회의 자율성이 커지고 권위주의 정권이 민주적인 정권으로 변모해 나가는 시기에 오히려 지역주의적 투표행태가 더 심하게 나타나는 등 혈연, 지연, 학연에 기반한 후견인-수혜자 관계는 쉽사리 소멸되지 않고 있다. 결국 후견인-수혜자 관계는 혈연, 지연, 학연과 같은 전통적 인간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급속한 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소멸되지 않고 오랫동안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제3장 하나회 인맥의 형성



제1절 하나회의 뿌리

1980년대 전반기의 한국정치를 좌지우지한 정치세력은 전두환의 '하나회' 인맥이다. 1963년 전두환, 노태우 등 육사 11기생들이 주축이 되어 비밀리에 결성한 하나회(일명 一心會)는 제5공화국 창출의 모태가 됨으로써 현대 한국정치사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1) 오성회

하나회의 뿌리는 전두환이 육사생도 시절에 결성한 오성회(五星會)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성회는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김복동(金復東), 최성택(崔性澤), 백운택(白雲澤)의 다섯 사람이 장래 장군이 되기를 꿈꾸며 만든 20세 청년들의 친목써클이었다. 최성택의 회고에 따르면 오성회는 단순한 친목써클이었다.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전두환(대구공고), 노태우.김복동(경북고), 박모씨(박병하: 인용자 주), 그리고 경남고를 나온 저는 같은 경상도 출신이고 해서 쉽게 어울려 친하게 되었죠(박씨는 사정상 나중에 12기로 임관해 그룹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외출해 같이 술 마시며 토론도 하고 방학 때면 대구, 김해 등 서로의 집에 놀러가 부모님께 인사드리면서 형제처럼 지냈어요. 스무살 팔팔할 때라 장군을 꿈꾸며 오성회라는 써클을 만들었죠. 각자 마음에 드는 걸 하나씩 골라 용성(勇星, 전두환).관성(冠星, 노태우).여성(黎星, 김복동).혜성(慧星, 최성택) 등 별명을 지어 부르기도 했어요. 3학년 때 합류한 백운택씨는 웅성(雄星)이라고 불렀죠. 하나회는 나중에 목적의식을 가지고 만들었지만 오성회는 단순한 친목모임이었어요. '조국을 위해 일을 하려면 끊을 수 없는 유대를 가져야 한다'는 20세 청년들의 우정써클이었죠."

1955년 오성회의 다섯 사람은 소위(少尉) 계급장을 달고 전방 소대장으로 흩어졌지만 서로의 유대는 변하지 않았다. 그 후 오성회는 회원이 늘어나 칠성회(七星會)로 확대되었고, 이후 이른바 육사 11기 텐 멤버(ten member)로 발전했다.

텐 멤버의 성원들은 엘리트 의식이 대단히 강했고 선배 장교들에 대한 불만이 매우 높았는데, 이것이 하나회를 결성한 동기 중의 하나가 되었다. 텐 멤버의 성원들은 육사 10기 이전의 선배 장교들이 단지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의 군사교육만 받고 군의 요직을 두루 차지하고 있는 데 반해 자신들은 정규 4년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들임에도 불구하고 인사적체현상으로 인해 진급이 더디어지고 있는 데 대한 불만이 매우 많았다. 하나회 회원의 한 사람은 당시 상황에 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정규 4년제인 육사 1기를 뽑는다고 해 놓고선 막상 졸업할 때는 11기 딱지를 붙여 내놓는 거예요. 2.3.4기도 마찬가지로 12.13.14기가 돼 버린 거죠. 그거야 그렇다 하더라도 6개월짜리 교육밖에 받지 않은 선배들이 우리를 시기하고 못살게 구는데 화가 나더라고요. 전방생활을 하는데 선배들의 질시와 견제가 참 심했어요. 그래서 '우리끼리 뭉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정규 육사 동창회인 '북극성회'가 있긴 했지만 해가 바뀔수록 숫자는 늘어 덩치만 컸을 뿐 통솔이 잘 안되고 조직력이 형편없었어요. 그래서 육사시절부터 축구, 럭비, 송구 등 운동부원들의 신망을 받던 축구부 주장 전(全)씨를 중심으로 소수정예조직이 필요하다는 얘기들이 나왔지요."

이와 같이 하나회가 결성된 동기에는 선배 장교들에 대항해 정규 육사생들끼리 단합함으로써 자신들의 배타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생각이 깊게 깔려 있었다. 물론 군과 같이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위계질서가 강조되는 사회에서 선배 장교들에게 대항하는 조직이 생겨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하나회의 배후에 박정희(朴正熙)라는 막강한 후견세력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 박정희와 전두환의 호혜적 관계

박정희는 1961년 5.16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후 군부 내에서 육사 8기생들의 세력이 커지자 이를 견제할 목적으로 육사 11기의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회 세력을 적극 비호, 육성하였다. 박정희는 이들에게 보직과 진급에서 특별한 배려를 베풀었으며, 그 대가로 전두환 그룹은 박정희에게 절대적 지지와 충성을 바쳤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유대관계는 1961년 5.16 당시부터 시작되었다. 전두환은 5월 18일 약 1,000여명의 육사생도들을 모아 광화문과 시청 등지에서 5.16 지지 시위를 벌임으로써 5.16쿠데타가 성공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얼마전 공개된 이낙선(李洛善) 메모에는 당시 상황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당시 동숭동의 서울대 문리대 ROTC 교관 신분이었던 전두환은 이 날 아침 쿠데타 소식이 전해진 지 불과 몇 시간만인 오전 8시에 육사 동창회 서울지부장을 맡고 있던 이동남(李東南) 대위와 함께 육군본부로 찾아가 쿠데타 주체세력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순발력을 보였다. 이 날 밤 전두환은 수집된 정보를 취합한 결과 주체세력이 예전부터 손영길(孫永吉) 대위를 통해 잘 알고 있던 박정희 장군임을 알게 되자 적극 지지하기로 하였다. 5월 17일 전두환은 육사동창회 간부장교들과 함께 독신장교 숙소에 모인 자리에서 "5.16 지지 데모를 벌임으로써 사실상 이번 거사가 거군적(擧軍的)으로 성공했음을 보이자"고 주장하고, 이상훈(李相薰) 대위가 준비한 시가행진 코스, 시간, 구호, 결의문 등을 채택하였다. 당시 육사교장이었던 강영훈(姜英勳)은 육사생도들의 시위를 반대하다가, 5월 17일 밤 혁명위 본부에서 박정희, 장도영(張都暎) 등이 입회한 가운데 전두환과 대질신문을 벌이는 과정에서 '반혁명분자'로 몰려 즉각 체포되었다. 5월 18일 오전 9시경 약 800명의 육사생도와 200명의 육사졸업생들이 모여 "동대문-광화문-남대문-동화백화점-반도호텔-시청앞" 코스를 따라 시가행진을 벌임으로써, 국민들에게 박정희의 5.16쿠데타가 거군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이 시위를 성공적으로 이끈 데 대한 보답으로 전두환은 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으로 발탁되었다. 이 때부터 전두환은 박정희를 가까운 거리에서 보필하며 충성을 바쳤고 그 대가로 특별한 배려를 받는 호혜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 때 형성된 박정희와 전두환의 후견인-수혜자 관계는 1979년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1963년 7월 6일 전두환, 노태우 등의 육사 11기 그룹은 김종필(金鍾泌)을 포함한 공화당 요인 40여명을 제거함으로써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정치기반을 굳히려는 친위쿠데타를 기도하였다. 비록 불발로 끝나기는 하였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전두환 그룹과 박정희의 유대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5.16 직후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박정희는 자신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치는 전두환 그룹을 특별히 아끼고 배려하였다. 하나의 사례로 1963년 민정이양 당시 박정희는 전두환에게 국회의원 출마를 권유했으나, 전두환은 이를 사양했다고 한다. 전두환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내가 옛날에 박정희 대통령이 최고회의 의장 할 때, 나보고 국회의원 나가라고 하는 것 안 나갔어요. 장도영 사건도 끝나고 얼마 안됐을 때였는데, 사무실에 오라고 해서 갔었어요. 나보고 '전(全) 대위, 국회의원 출마 안하겠나'고 그래. 내가 깜짝 놀라 '제가 어떻게 국회의원을 합니까' 하니, '하면 하는 거지 왜 못해'라고 해. '아닙니다. 저는 군대에 있는 게 좋습니다... 돈도 없고,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는데, 그 때부터 박 대통령이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보는 거야... 내가 끝까지 국회의원 출마를 거절한 게 인상적이었던 것 같고, 참신한 육사 출신으로 본 것 같애."

전두환은 박정희의 특별 배려로 19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직을 맡았으며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도 근무하였다. 군과 같은 위계적 조직에서 인사관련부서는 요직 중에서도 요직에 속한다. 전두환은 방대하고도 세밀한 인사자료들을 확보함으로써 하나회 결성에 참여할 후배 장교들을 엄선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군 내 비밀사조직인 하나회가 결성될 수 있었던 것은 아래로는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의 엘리트 의식과 선배 장교들에 대한 불만 등의 공통된 요구가 있었고, 위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배려와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2절 하나회의 결성과 확대


(1) 하나회의 결성

1963년 하나회 결성작업은 철저한 보안 속에서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인선작업은 전두환, 노태우, 권익현 등 육사 11기가 주축이 되고 13, 14기 후배들이 뒷받침했다. 선발기준은 한수(漢水) 이남 출신으로서 충성심이 강하고 의리가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각 기당 10명 내지 12명으로 정했다. 조직의 명칭은 '태양을 위하고 조국을 위하는 하나같은 마음'이라는 뜻에서 '하나회'(일명 一心會)라고 정했다. 하나회는 초기에 김태환회(金泰煥會)라고도 불렸는데, 이 이름은 김복동, 노태우, 전두환의 이름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온 것이라고 한다. 하나회의 회장은 전두환이 맡았다. 김복동은 전두환과 하나회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다가 패하여 이후 하나회에서 멀어졌다. 조직의 결성방식은 육사 11기 텐 멤버를 본따 각 기별로 텐 멤버를 조직하고 이를 종적으로 통합하여 총100여명을 망라한 단일조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당시 군부 내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육사 8기생들의 힘을 견제하고 박정희의 지지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경상도 출신을 70-80%나 선발한 반면 이북 출신은 배제하였다.

하나회는 단순한 친목단체에 불과했던 것이 아니라 엄격한 규율과 보안을 강조하는 비밀조직이었다. 입회시에는 반드시 엄격한 자격심사와 복잡한 가입절차를 거쳐야 했다. 육사 11기에서 먼저 각 기별로 최초의 회원 한 명을 선정해서 만장일치로 가입결정을 내리면, 다음부터는 이 한 명을 중심으로 동기생들끼리 텐 멤버를 구성했는데, 이 경우 신입회원은 11기 선배들뿐만 아니라 동기들로부터도 만장일치의 동의를 얻어야만 가입될 수 있었고, 만약 한 명이라도 반대자가 있으면 가입될 수 없었다. 가입대상자로 일단 물망에 오른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격, 가족관계, 교우관계, 졸업성적, 건강상태, 사생활 등에 관해 철저한 뒷조사를 받게 되는데, 이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면 가입권유를 받을 수 있었다. 가입권유를 받은 사람은 이를 '최대의 영예'로 생각하고 흔쾌히 받아들였으며, 거절하는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입회식에서는 목숨을 걸고 조직의 비밀을 지키며 명령에 절대 복종할 것을 서약했다. 하나회 회원의 한 사람은 입회식 당시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약속한 시간에 11기 선배의 어느 집에 가면 11기 전체 회원이 마루나 다다미방 같은 곳에서 일렬로 앉아 있습니다. 그 한가운데에는 회장(전두환)이 앉아 있지요. 반드시 혼자 가서 무릎을 꿇고는 '국가와 조직에 충성한다'는 내용의 선서를 합니다. 선서가 끝나면 11기 중의 한 명이 붉은 포도주를 한 잔 따라 줍니다. 두 손으로 그 잔을 받아 마시면 그걸로 하나회 회원이 되는 겁니다."

하나회는 이러한 방법으로 비밀리에 조직원을 모집하여 <표 3-1>과 같이 육사 11기에서 20기까지 총120여명에 이르는 회원을 확보하였다.

[ 표 3-1 ] 하나회 회원 명단 (육사 11-20기)


육사 11기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정호용(鄭鎬溶), 김복동(金復東), 권익현(權翊鉉), 최성택(崔性澤), 백운택(白雲澤), 손영길(孫永吉), 안교덕(安敎德), 노정기(盧正基), 박갑룡(朴甲龍), 남중수(南仲守)
육사 12기 박준병(朴俊炳), 박희도(朴熙道), 박세직(朴世直), 안필준(安弼濬), 정동철(鄭東喆), 장기오(張基梧), 황인수(黃仁秀), 최 웅(崔 雄), 김홍진, 이광근, 임인식
육사 13기 최세창(崔世昌), 오한구(吳漢九), 정동호(鄭東鎬), 신재기(辛再基), 윤태균(尹泰均), 이우재(李祐在), 황진기(黃鎭祺), 조명기(趙明紀), 최문규(崔文奎), 우경윤(禹慶允), 권영휘(權榮暉), 박종남(朴鍾南), 정진태(鄭鎭泰
육사 14기 이종구(李鍾九), 이춘구(李春九), 안무혁(安武赫), 배명국(裵命國), 정도영(鄭棹永), 박정기(朴正基), 장기하(張基夏), 신우식(申佑湜), 장홍열(張洪烈), 이철희(李哲熙), 이경종(李暻鍾), 신쌍호, 문영일, 최종국, 김충욱
육사 15기 이진삼(李鎭三), 민병돈(閔丙敦), 고명승(高明昇), 김상구(金相球), 이대희(李大熙), 나중배(羅重培), 권병식(權丙植), 강자화(姜資和), 이한종(李漢鍾), 이상수(李相秀), 박태진(朴泰珍), 김중영
육사 16기 장세동(張世東), 신말업(申末業), 정순덕(鄭順德), 최평욱(崔坪旭), 송응섭(宋膺燮), 정만길(丁萬吉), 김정룡(金正龍), 이필섭(李弼燮), 양현두, 최원규, 이지윤, 김충식
육사 17기 김진영(金振永), 안현태(安賢泰), 허화평(許和平), 허삼수(許三守), 이현우(李賢雨), 이문석(李文錫), 류근하(柳根夏), 김근준(金根俊), 임인조(林寅造), 김태섭, 이병태, 이해룡, 강명오
육사 18기 이학봉(李鶴捧), 구창회(具昌會), 정태화(鄭泰和), 조남풍(趙南豊), 성환옥(成煥玉), 김정헌(金正憲), 김재창(金在昌), 이시용, 배대웅, 심준석, 이승남
육사 19기 서완수(徐完秀), 김진선(金鎭渲), 노석호(盧錫鎬), 최석림(崔錫林), 장석규(張錫奎), 김상준(金相駿), 최윤식, 김택수, 김학주, 최준식, 이택형, 김정환, 최부웅, 최윤수
육사 20기 안병호(安秉浩), 허청일(許淸一), 김무웅(金武雄), 김종배, 김길부, 이현부, 함덕선, 장호경, 안광열

(이상 122명)

(2) 자리 물리기

하나회 회원들은 이른바 '자리 물리기' 방식으로 군 요직을 두루 장악함으로써 군부의 실세로 떠올랐다. 대표적인 사례로 청와대 경비를 맡았던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 자리를 꼽을 수 있다. 이 자리는 처음에 박정희의 전속부관인 손영길(육사 11기)이 맡고 있다가 1967년 육군대학을 가게 되면서 전두환에게 넘겨 주었고, 1969년 전두환이 물러가면서 다시 박갑룡(11기)에게 넘겨 주었고, 그 후임으로 이종구(14기), 고명승(15기), 장세동(16기), 김진영(17기) 등 계속해서 자리 물리기가 되풀이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하나회 회원들이었다. 하나회 회원들의 자리 물리기 관행은 1980년대에 들어와 더욱 심해졌다. <표 3-2>와 <표 3-3>과 같이 역대 수도방위사령부 30단장과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은 대부분 하나회 출신 장교들이 차지하였다.

[ 표 3-2 ] 역대 수도방위사령부 30단장


성명 재임기간 육사 하나회
이현우 80년 1월-81년 12월  
김상준 81년 12월-82년 12월 17기
김충석 82년 12월-84년 12월 19기  
길영철 84년 12월-86년 12월 23기
안광찬 86년 12월-88년 12월 25기
김부명 88년 12월-90년 12월 29기  
박항규 90년 12월-93년 5월  


[ 표 3-3 ] 역대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성명 재임기간 육사 하나회
박준병 81년 5월-81년 7월 12기
김응열 81년 7월-82년 1월    
안필준 82년 1월-83년 1월 12기
정동호 83년 1월-83년 12월 13기
박명철 83년 12월-84년 7월    
고명승 84년 7월-85년 5월 15기
이대희 85년 5월-86년 6월 15기
최평욱 86년 6월-87년 6월 16기
임인조 87년 6월-87년 12월 17기
이현우 87년 12월-88년 2월 17기
구창회 88년 2월-89년 4월 18기
장석린 89년 4월-90년 6월    
김진선 90년 6월-90년 10월 19기
안병호 90년 10월-91년 12월 20기
최승우 91년 12월-93년 4월


하나회 회원들은 정치권력과 다소 거리가 있는 야전군 사령관으로 근무하기보다 정치권력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는 육군본부, 수도경비사, 공수특전단, 육군참모총장실, 대통령 경호실, 중앙정보부, 보안사 등에서 주로 근무하였다. 일선에서 근무한 경력이 필요한 경우에도 이들은 서울 근방의 1사단이나 9사단에서 단기간 복무한 뒤 곧바로 후방으로 복귀하였다.

[ 표 3-4 ] 하나회 소속 육군본부 근무자 명단


육사 이름 직위
11기 전두환 인사참모부
12기 박준병
안필준
황인수
인사운영감, 인사참모부장
인사운영감, 인사참모부장
정보참모부장
13기 정동호
윤태균
최문규
인사참모부장
정보참모부장
작전참모부장
15기 이대희
나중배
민병돈
인사운영감, 인사참모부장
정책기획실장
정보참모
16기 정만길 작전참모부장
18기 구창회
성환옥
인사참모
헌병감
19기 김진선 인사참모
20기 안병호 인사참모


이들이 가장 많이 근무한 곳은 육군본부였다. <표 3-4>와 같이 1963년 전두환이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 근무한 것을 시발로, 12기의 박준병, 안필준, 황인수, 13기의 정동호, 윤태균, 최문규 등 하나회 후배들은 계속해서 육군본부에서 근무하였다. 이들은 임기를 마치면 그 후임자로 11기 선배들의 동의를 얻어 하나회 동기나 후배들을 추천하는 방식으로 자리물림을 계속하여 군부의 요직을 독차지하였다. 그 결과 이들은 대부분 비슷한 군 경력을 가지게 되었다. <표 3-5>와 같이 전두환과 노태우의 군 경력은 매우 유사하다.

[ 표 3-5 ] 주요 군 경력 비교


전두환 (全斗煥) 노태우 (盧泰愚)
1955 육사 11기 졸업 1955 육사 11기 졸업
1960 미 보병학교 수료 1959 미 특수전학교 수료
1963 하나회 창립 멤버 1963 하나회 창립 멤버
1965 육군대학 졸업 1968 육군대학 졸업
1966 공수특전단 부단장 1974 공수특전 여단장
1967 수경사 30대대장 1978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
1976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 1979 수경사령관
1979 보안사령관 1980 보안사령관
1980 대장으로 예편 1981 대장으로 예편


하나회 회원들은 군과 국가에 대한 충성보다 조직에 대한 충성을 앞세웠으며, 군의 공식적 지휘나 통제보다 조직의 결정사항을 우선시하였다. 그 대가로 이들은 각종 진급과 보직에서 특별한 배려와 혜택을 받았으며, 심지어 중대한 잘못을 범한 경우에도 문책을 당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비하나회 출신의 한 대령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인사문제를 떠나더라도 하나회 출신 장교가 운영하는 부대에서 사고가 생겼을 때 처리하는 관행을 보면 특혜라는 점이 잘 드러난다. 70년대초 이종구씨가 전방부대 대대장으로 있을 때 부대에서 10여명이 사상하는 총기사고가 있었지만 책임자인 그는 무사했다. 박준병씨가 20사단장 때 훈련 중 6명이 죽었고, 최평욱씨가 사단장일 때 예하부대에서 월북사고가 일어났지만 역시 무사했다. 비하나회 출신 장교가 지휘관이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하나회에서 전두환은 특별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동기나 후배들이 진급하거나 보직을 받아 멀리 떠날 때면 반드시 기억될 만한 술자리를 벌이고 격려해 주었다. 그는 회장으로서 다른 동기생들을 친구가 아닌 부하로 대하였다. 마찬가지로 동기생들도 그를 친구가 아닌 상관으로 대하였다.

하나회 회원들은 자기들끼리는 공식적 직위나 계급을 부르지 않고 '형님' 또는 '아우'라고 불렀으며, 특별히 11기 선배들에 대해서는 '큰형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전체 장교의 1%, 정규육사 출신의 5%(매년 200명의 졸업생 중 10여명)에 불과한 이들은 형님은 아우를 끌어 주고 아우는 형님을 밀어 주는 호혜적 관계를 형성하고 회원들끼리 '자리 물리기'를 되풀이함으로써 강력한 세력으로 떠올랐다.

(3) 윤필용 사건

1970년대에 들어와 하나회 세력은 더욱 커졌다. 1973년 1월 전두환은 손영길, 김복동, 최성택과 함께 육사 11기생으로서는 처음으로 별을 달았다. 2월 초 전두환은 손영길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이 베푼 만찬에 초대받아 크라운 4기통 세단 승용차와 금일봉을 하사받았다. 뒤이어 노태우와 정호용도 준장으로 진급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들에게 '一心'(일심)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지휘봉을 하사하였다. 핵심 멤버들이 장군으로 진급함으로써 하나회는 군부 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떠올랐다.

하나회 세력이 커지자 선배 장교들도 하나회를 지원하는 측과 견제하는 측으로 나누어졌다. 윤필용(尹必鏞) 수경사령관, 박종규(朴鐘圭) 경호실장,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 서종철(徐鐘喆) 국방장관, 차규헌(車圭憲) 2군사령관, 진종채(陳鍾埰) 보안사령관, 유학성(兪學聖) 3군사령관, 황영시(黃永時) 육군참모총장, 김시진(金詩珍) 헌병감 등이 이들을 지원하였다. 특히 윤필용 장군은 같은 경상도 출신의 하나회 후배들을 적극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하나회의 대부(代父)라고 불렸다. 반면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 강창성(姜昌成) 보안사령관, 정승화(鄭昇和) 장군 등은 하나회 세력을 견제하려 하였다. 이러한 세력다툼의 과정에서 1973년 '윤필용 사건'과 '보안사 휘발유 유용 사건'이 발생하였다.

1973년 4월의 '윤필용 사건'은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술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노쇠했으니 물러나시게 하고 후계자는 이후락(李厚洛) 형님이 해야 한다"는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윤필용과 그를 따르던 하나회 후배들이 쿠데타를 모의한 죄로 대거 구속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손영길, 권익현, 신재기 등 장교 10명이 구속되었고, 안교덕, 정동철, 배명국, 박정기, 김상구, 정봉화 등 31명이 예편되었으며, 24명이 인사이동 그리고 160여명이 감시대상으로 분류되었다. 또한 민간인으로서 육사 11기와 가깝게 지내던 이원조(李源祚) 제일은행 차장이 해직되고, 윤필용 장군과 가깝게 지내던 김연준(金連俊) 한양대 총장 겸 대한일보 사장이 구속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후계자로 거명되었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도 초조한 마음에 '김대중 납치 사건'을 벌였다가 해임되었다. 유신 직후의 어수선한 사회분위기에서 윤필용이 박정희에 관해 불만을 토로한 것은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 사건은 병력동원과 같은 구체적 거사계획을 잡은 것은 없기 때문에 쿠데타 모의라고까지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강창성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비영남파 세력이 군부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하나회를 상대로 집요한 수사를 벌임으로써 결과적으로 커다란 정치적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 표 3-6 ] 출신지역별 하나회 회원 명단





노태우 (대구), 정호용 (대구), 김복동 (청송), 안교덕 (울진), 박세직 (칠곡),
정동철 (칠곡), 최세창 (대구), 오한구 (봉화), 윤태균 (청송), 황진기 (대구),
조명기 (대구), 우경윤 (예천), 권영휘 (의령), 이종구 (대구), 정도영 (문경),
박정기 (대구), 신우식 (문경), 김상구 (상주), 이대희 (예천), 권병식 (영일),
송응섭 (대구), 김정룡 (문경), 허화평 (포항), 이현우 (대구), 성환옥 (영천),
김정헌 (대구), 김재창 (대구), 서완수 (대구), 노석호 (대구), 허청일 (경산)

전두환 (합천), 권익현 (산청), 최성택 (부산), 손영길 (울산), 박희도 (창녕),
황인수 (사천), 정동호 (의령), 신재기 (창녕), 배명국 (진해), 신말업 (울주),
정순덕 (충무), 최평욱 (남해), 김진영 (충무), 허삼수 (부산), 이학봉 (부산),
구창회 (진주), 조남풍 (부산), 안병호 (진주)
서 울 노정기, 장기오, 최웅, 이우재, 이철희, 민병돈, 정만길,이문석, 장석규
충 청 도 박준병 (충북 옥천), 안필준 (충북 중원), 최문규 (대전),
정진태 (충남 예산), 이춘구 (충북 청원), 이진삼 (충남 부여),
나중배 (충남 예산), 김진선 (충북 괴산)
전 라 도 박종남(전남 목포), 고명승(전북 부안), 장세동(전남 고흥)
강 원 도 장홍열(강원 명주)
이 북 안무혁(황해 안악)


같은 해 8월 이른바 '보안사 휘발유 유용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해임되고, 김귀준 참모장, 김진백 (이진백*) 군수참모, 김영환 군수과장, 이동주 소령 등이 구속되었다. 또한 하나회 조사담당이었던 김종진 보안처장과 이대호, 박영선 비서실장 등 20여명의 장교가 예편되었다. 박종규 경호실장도 얼마 후 해임되었다. 이 사건은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영남파 세력이 강창성에게 가한 일종의 반격작전이었다. <표 3-6>과 같이 하나회 회원의 70%가량이 경상도 출신이었다. 이들은 하나회에 대한 1단계 수사에 이어 2단계 수사가 시작되려 하자 위협을 느끼고 "강창성이 경상도 출신 장교들의 씨를 말리려 한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또한 진종채 수경사령관은 경상도 장군을 대표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강창성 보안사령관의 교체를 강력히 건의했다.

결국 이 두 사건을 통해 영남파의 보스(boss)였던 윤필용과 이들을 견제하려 했던 비영남파의 강창성이 모두 타격을 입고 예편함으로써 양자의 싸움은 승자 없는 싸움으로 끝나고 말았다.

1973년의 두 사건은 박정희와 전두환 모두에게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안겨 주었다. 1972년 10월 유신을 단행하여 장기집권을 꾀하던 박정희는 군부 내 실력자인 윤필용과 강창성을 동시에 제거함으로써 쿠데타 가능성을 없애고 권력기반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또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박종규 경호실장을 제거함으로써 중간보스들의 전횡을 막고 친정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전두환도 이 사건을 계기로 하나회의 주도권을 확고히 잡고 권력의 정점을 향해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그가 하나회 회장이면서도 이 사건에 연루되지 않고 수사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었던 것은 윤필용의 약점과 비리에 관해 박정희에게 직접 중요한 제보를 했고, 또한 박종규 경호실장의 특별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라이벌인 손영길이 구속됨으로써 전두환은 하나회와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의 보스로서 확고부동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중간보스들이 제거된 권력의 빈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피라미드 조직의 정상을 향해 바짝 다가갈 수 있었다. 많은 수의 하나회 회원들이 구속 또는 예편당하는 위기를 겪었지만, 핵심 멤버인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이 이 사건에 연루되지 않음으로써 하나회는 그 명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하나회는 이미 윤필용 장군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자립적인 조직으로 성장해 있었다.

(4) 권력 피라미드의 구조 변화

1970년대 중반 이후 박정희와 전두환의 호혜적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박정희는 육사 8기의 윤필용, 강창성 등에 비해 나이도 어리고 세력도 크지 않아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적은 육사 11기 장교들을 총애하고 적극 후원하였다. 전두환은 선배 장교들에 대항해 자신의 세력을 보호하고 지원해 줄 강력한 후견세력으로서 박정희를 필요로 하였다. 양자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공생관계로 결합되었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관계는 단순한 직책상의 상하관계 이상이었다. 이들은 어버이와 자식의 관계처럼 친밀했는데, 심지어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자(養子)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1961년 5.16 직후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전두환과 하나회 장교들은 박정희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쳤고, 그 대가로 박정희는 전두환과 하나회 장교들에게 진급과 보직상의 특혜를 베풀었다.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중간보스들이 몰락함으로써 박정희와 전두환의 정치적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그림 3-3>과 같이 "박정희-윤필용-전두환"으로 이어지던 권력 피라미드 구조는 이 사건 이후 "박정희-차지철-전두환"의 구조로 변화되었다. 전두환은 이전까지 자신을 보호하고 후원해 주던 윤필용이 제거되자 새로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임명된 차지철(車智澈)을 통해 보호와 후원을 받게 되었다.

1976년 전두환은 차지철의 추천으로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근무하게 되었다. 전두환과 차지철은 서로 밀고 당겨 주는 호혜적 관계로 결합되었다. 전두환은 차지철을 통해 각종 진급과 보직에서 특혜를 받을 수 있었고, 차지철은 전두환을 통해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을 장악, 통제할 수 있었다. 전두환은 차지철을 만나 인사청탁을 자주 했는데, 동생 전경환(全敬煥)이 경호처 경호관으로 발탁된 것도 전두환의 인사청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차지철에게 "제 동생 경환이가 내근 부서인 정보처에 있는데, 충성심이 강하고 유도도 잘 하니 경호원을 시키면 잘 할 겁니다. 선처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차지철은 각종 인사청탁을 들어 주는 대가로 전두환을 통해 하나회 인맥과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을 통제하려 하였다.

"차실장은 하나회 회장이었던 전두환 작전차장보가 동기나 군 후배들을 소개하면 이들을 격려하는 것을 즐겼어요. 주로 별을 달고 야전지휘관으로 나가는 후배들이 인사차 경호실로 전씨를 찾아오면, 전씨는 이들을 실장방으로 데리고 가 소개시켰죠. 차실장은 이들에게 금일봉과 함께 '경호실 증정'이라고 새겨진 지휘봉을 주곤 했는데, 군 후배들은 이를 더없는 영광으로 여겼죠."

1960년대-70년대 초 윤필용이 하나회 후배들을 후원해 준 것처럼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차지철이 하나회 인맥을 이끌어 주고 지원하였다. 마찬가지로 전두환은 윤필용에게 바치던 충성과 지지를 차지철에게 바쳤다.

그러나 1970년대말에 들어와 차지철과 전두환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차지철이 권력의 2인자로서 부통령 행세를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차지철을 견제하기 위해 전두환을 지지, 지원하였다. 하나회 세력이 커지자 차지철도 전두환 그룹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차지철과 전두환의 관계는 협조관계에서 경쟁관계로 변화되었다. 전두환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있을 때 내가 계속 나가겠다고 했어요. 차지철과 내가 사이가 나빴어... 차지철이가 여러 가지 일을 비뚤어지게 해. 중령으로 예편하고 국회의원을 한 사람인데, 경호실장 하면서 꼭 국회의원을 상대하고 높은 장군을 경호실에다 데려다 놓아. 차지철이가 나한테 경호실장 자리 뺏길까 봐 굉장히 신경쓰는 것 같애. 내가 내보내 달라고 했어."

결국 전두환은 1978년 대통령 경호실을 떠나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경호실 작전차장보 자리를 떠나면서 자신의 후임으로 노태우를 추천했다.

1979년 3월 전두환은 박정희의 특별 배려로 보안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그는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 김계원(金桂元) 비서실장과 함께 박정희를 둘러싼 핵심 측근 네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전두환의 부상과 함께 그가 키워온 사조직 하나회의 세력도 커졌다. 육군본부 특명검열단에 있던 허화평(許和平) 대령이 보안사 비서실장에, 허삼수(許三守) 수도군단 보안부대장이 인사처장에 임명되는 등 많은 하나회 후배들이 보안사로 진출하여 요직을 차지하였다.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이 됨으로써 차지철의 후원을 받는 수혜자의 처지에서 벗어나 경쟁자의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전두환 중심의 하나회 세력은 1960년대에는 당대의 세도가 윤필용 수경사령관의 도움을 받아, 그리고 1970년대에는 권력의 2인자 차지철 경호실장의 후원을 받아 성장하였다. 이 세력은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2인자 그룹이 제거되자 박정희와 더 가까와진 것과 마찬가지로, 1970년대말에는 차지철의 후원을 받지 않고도 직접 박정희와 호혜적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1960-70년대의 기간 동안 전두환과 하나회는 권력 피라미드의 구조 변화가 있을 때마다 한 걸음씩 권력의 최정상을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제4장 제5공화국과 하나회 인맥


제1절 1979-1980년 신군부의 등장

(1) 10.26과 합동수사본부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 17년의 역사가 끝나고 새로운 정치정세가 조성되었다. 전두환(全斗煥)과 하나회는 그 어느 정치세력들보다도 신속히 이 사건에 대처함으로써 이후의 정치국면을 주도해 나갈 수 있었다.

10.26사건 직전에 박정희 대통령 주변에는 2인자들간에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권력다툼은 2인자들끼리 서로 견제시키고 충성경쟁을 벌이게 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안정시키려 했던 박정희식 용인술(用人術)의 결과였다. 2인자들 중에서도 특히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세력이 강했는데, 10.26 직전에는 차지철의 세력이 더 강한 상태였다.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이라는 공식 직책에도 불구하고 차지철의 견제를 받아 3월부터 10월까지 단 한 차례도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모든 정보채널은 차지철에 의해 사전에 파악되고 차단되었다.

10월말 전두환은 차지철 경호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金桂元) 비서실장 등 박정희 주변 2인자들간의 역학관계를 분석하고, 이들을 제거할 것을 주장하는 중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는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권력다툼이 극도에 달해 자칫 대통령이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특별 면담을 신청하였다. 그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사실은 10월 26일 돌아가셨지만 10월 27일에 내가 보안사령관으로서 보고를 하도록 돼 있었어. 내가 보안사에 가서 권력주변을 보니 박 대통령 주변이 형편이 없어. 김재규, 차지철, 정당관계 암투가 있어 박 대통령이 상당히 위험할 것 같았어. 두툼한 보고서를 만들었어... 보안사에서도 진종채 사령관이 가면서 나한테 보고서를 내지 말라고 했어요. 내면 죽는다고 하면서. '그러면 누가 박 대통령을 깨우쳐 주느냐' 내가 노재현 국방장관에게도 얘기했어. 비서실 내부도 엉망이고 우군 싸움이 김일성이와의 싸움보다 더 심해. 망하려니 그런가 봐. 그래서 내가 10월에 들어가서 최광수 의전수석을 보고 10월 27일쯤 보고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어. 몇 번이나 읽어 보고 연습도 하고 보고준비를 다 했었는데 박 대통령이 돌아갔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결국은 이렇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했어."

사건 당시 청와대 경호실, 중앙정보부, 대통령 비서실 등 주요 권력기관에서는 사건의 정확한 진상을 몰라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 노재현(盧載鉉) 국방장관,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 이어지는 군 지휘계통에서는 신속히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전두환은 10.26사건을 마치 예견이나 한듯이 신속한 대응을 취하였다. 그는 밤 11시경 국방부 보안사 부대장실에서 김재규 체포 및 호송 작전에 참여하였고, 새벽 2시경 33헌병대를 보안사 직속부대로 배속받아 궁정동 안가로 진입, 경비원들을 무장해제시키고 현장을 접수하였다. 27일 오전 계엄공고 제5호에 따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국내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통제할 수 있는 합동수사본부(약칭 합수본부)를 설치하고 그 장(長)이 되었다. 이로써 그는 권력의 공백기에 모든 정보를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군부와 민간인에 대한 일체의 수사지휘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아침 8시 30분 그는 보안사 회의실에 각 수사정보기관의 책임자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보안사가 박정희 대통령 살해사건의 수사 책임을 맡게 되었음을 통고하고 중앙정보부의 권한과 기능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매일 오전 8시와 오후 5시 두 차례에 걸쳐 수집된 모든 정보를 합수본부에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이 모든 것이 사건 발생 13시간만에 취해진 조치들로서, 너무나 완벽한 대응이었다.

10.26 직후의 합수본부는 단순한 수사전담기관이 아니라 하나의 권력기관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림 4-1>과 같이 합수본부는 중앙정보부, 검찰, 경찰, 보안사, 군검찰, 헌병 등 국내의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장악하고, 3실 3처 1단의 조직구성에 약 5백명의 요원을 망라한 방대한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출신 기관별로 살펴 보면 <표 4-1>과 같이 보안사 출신이 379명으로서 76%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합수본부는 보안사가 다른 수사정보기관들을 장악하기 위해 만들어 낸 임시기구에 불과했다. 합수본부의 권한이 커지자 경찰, 행정관료, 정치인, 기업인, 군 장성 등 각계각층 인사들이 합수본부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합수본부 비서실로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보를 얻으려고 기웃거리는 장교들이 모여들기도 했습니다. 관료들도 합수본부의 통제를 자청해 와서 우리는 본의 아니게 행정적인 일이나 정치적인 일에 간여하게 되었습니다. 경찰도 합수본부에 예속을 자원해 오고 있었습니다. 자석에 빨려들듯이 합수본부로 저절로 힘이 쏠리고 있었습니다."

합수본부의 권한이 커지자 미국측에서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특별히 주목하기 시작했다. 미 정보기관에서는 한국의 차기 정권을 담당할 사람으로서 최규하(崔圭夏) 국무총리 겸 대통령 권한대행,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수본부장의 세 사람을 꼽고, 최규하는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가, 정승화는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이, 전두환은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이 각각 맡아 빈번히 접촉하였다.

미국측이 평가하기에 최규하가 헌법상에 부여된 권한을 행사하여 실질적인 정치지도자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군부를 자기 편으로 돌려야 하는데, 그는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는 인물로 보였다. 정승화는 계엄령하에서 3권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는 했지만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그 위에 얹혀 있는 것으로 비쳤다. 반면 전두환은 보안사, 중앙정보부, 경찰, 검찰 등 수사정보기관을 완전 장악하고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전두환은 하나회라는 사조직과 함께 합수본부라는 공조직까지 모두 장악함으로써 10.26 이후 권력의 공백 상황에서 누구보다도 유리한 위치에서 권력재편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 표 4-2 ] 10.26 이후 주요 사건 일지


79-80년 주 요 사 건
10. 26 박정희 대통령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사망
12. 12 전두환 보안사령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
12. 21 최규하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
4. 14 전두환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겸임 발령
4. 21 강원도 사북탄광 노동자 파업
5. 15 전국 대학생 연일 대규모 시위
5. 17 비상계엄 전국으로 확대
5. 18 광주민주화운동
5. 27 계엄군 광주시위 유혈진압 (사망자 174명 발표)
5. 31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발족 (상임위원장 전두환)
6. 1 중앙정보부 요원 300명 숙정
6. 24 김종필 모든 공직 사퇴
7. 10 고급 공무원 243명 숙정
7. 15 일반 공무원 4,760명 숙정
7. 19 전직 장관 및 국회의원 17명 연행
7. 31 정기간행물 172개 등록취소
8. 13 김영삼 정계은퇴
9. 1 전두환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
9. 17 김대중 사형선고
10. 22 제5공화국 헌법 국민투표 실시
10. 27 국가보위입법회의 발족
11. 12 정치활동규제자 811명 발표
11. 14 언론기관 통폐합
12. 1 민주한국당 창당발기인대회
12. 2 민주정의당 창당발기인대회
12. 6 한국국민당 창당발기인대회


(2) 12.12와 군부의 세대교체

10.26 이후 한국정치의 진로는 세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재야와 야당이 연합하여 정권을 잡는 경우이고, 둘째는 민간부문과 군부의 힘이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최규하 권한대행이 대통령직을 계속 맡아 수행하는 경우이며, 세째는 군부의 강경파가 무력을 사용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경우이다.

향후 정치진로와 관련하여 군부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었다. 정승화 계엄사령관과 노재현 국방장관 등 군 수뇌부는 최규하 권한대행을 대통령으로 옹립하고 군부와 민간부문의 힘이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점진적인 민주화를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소장군부는 군이 정치에 적극 개입하여 구악(舊惡)을 일소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창출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양자간의 의견대립이 심각한 단계에 이른 12월 초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소장군부는 무력을 동원하여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하는 12.12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로써 10.26 이후 한국정치의 진로는 민간정부의 출범이 아니라 군부정권 연장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2.12사건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잡기 위한 일종의 파당적 쿠데타에 해당한다. 이 사건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회 장교들과 그 영향력 아래에 있는 정규육사 출신 소장군부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무력을 동원하여 정승화 계엄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등 상급 장교들을 체포, 연행하고 군의 주도권을 잡은 하극상(下剋上) 사건이다. 1961년 박정희의 5.16쿠데타와 마찬가지로 이 사건도 군부 내 상층과 중하층의 단절과 대립이 심화된 상황에서 발생했다. 당시 상황에 관해 주한미군의 한 정보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우리는 정규육사 출신 장교단과 선배 육사 출신 사이에는 단층선(fault line)이 있다고 보았다. 군부에 이런 단층선이 있을 때 외부적 환경이 조성되면 변란이 생길 수 있는데 (1961년의: 인용자 주) 5.16쿠데타가 그런 경우였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단층선 위에 있는 비정규육사 출신의 상층부만 통제할 뿐, 단층선 아래에 있는 정규육사 장교단이라는 중추부를 컨트롤(control)하지 못하고 있어 불안전한 상태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부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군의 세대교체작업은 정승화와 김재규 인맥을 제거하고 전두환 중심의 하나회 인맥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 작업은 전두환, 노태우,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 김윤호 장군으로 구성된 '6인 군사위원회'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작업으로 12월 19일 구세대에 속하는 약 40여명의 장성들이 강제 퇴역당했다. 반면 12.12에 적극 참여했던 유학성 국방차관보는 3군사령관으로, 황영시 1군단장은 참모차장으로, 차규헌 수도군단장은 육사교장으로, 노태우 9사단장은 수도경비사령관으로, 김윤호 교육사령부 부사령관은 1군단장으로, 백운택 방위사단장은 9사단장으로, 정호용 향토사단장은 특전사령관으로 각각 승진하였다.

군과 같은 위계적 조직에서 12.12와 같은 하극상 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회와 같은 비밀사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군부 내에 단층선이 형성되어 상층과 중하층의 단절과 대립이 심화되어 있었다고 할지라도 하나회와 같이 군의 공식적 지휘계통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병력을 움직일 수 있는 비밀결사조직이 없었다면 쿠데타는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나회 소속 장교들과 이들의 영향을 받은 많은 수의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이 육군본부의 진압명령에 따르지 않고 전두환의 신군부측을 지지하거나 최소한 중립을 지킴으로써 12.12쿠데타는 성공할 수 있었다.

당시 상황에 관해 미 8군의 한 정보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비정규육사 출신 장성들이 육본을 지지하려고 해도 정규육사 출신 대령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정규육사 출신들은 상층부의 비정규육사 출신들 때문에 진급이 늦어지고 있는데 대해서 불만이 쌓여 있었고, 능력이 떨어지는 그들 밑에서 수모를 당해 왔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의 엘리트 의식과 선배 장교들에 대한 불만이라는 공통된 요구에 기반하여 1963년 결성된 하나회는, 16년이 지난 1979년 마찬가지 이유에서 12.12쿠데타를 일으키는 데 주역을 담당했다.

<그림 4-2>와 <표 4-3>과 같이 12.12 당시 병력을 동원한 많은 수의 장교들은 1963년 결성되어 박정희 대통령의 후원을 받으며 비밀리에 성장해 온 하나회 조직의 회원들이었다.

[ 표 4-3 ] 12.12사건 참가자 명단


성 명 직 책 계 급 육 사 하나회
전두환 보안사령관 소장 11기
정도영 보안사 보안처장 준장 14기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   15기
허화평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대령 17기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 대령 17기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 중령 18기
우국일 보안사 참모장 준장    
차규헌 수도군단장 중장 8기  
황영시 1군단장 중장 10기  
노태우 9사단장 소장 11기
정호용 50사단장 소장 11기
백운택 71방위사단장 준장 11기
박준병 20사단장 소장 12기
박희도 1공수여단장 준장 12기
장기오 5공수여단장 준장 12기
최세창 3공수여단장 준장 13기
송응섭 9연대장 대령 16기
이필섭 9사단 29연대장 대령 16기
구창회 9사단 참모장 대령 18기
안병호 29연대   20기
이상규 2기갑여단장 준장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 중장 8기  
정동호 청와대 경호실장 대리 준장 13기
고명승 청와대 경호실 작전과장 대령 15기
우경윤 육본 범죄수사단장 대령 13기
성환옥 육본 헌병감실 기획과장 대령 18기
이종민 육본 헌병대장 중령    
박희모 수경사 30사단장 소장    
장세동 수경사 30경비단장 대령 16기
김진영 수경사 33경비단장 대령 17기
김진선 수경사 33경비단   19기
최석립 수경사 33헌병대장 중령    
조 홍 수경사 헌병단장 대령    
신윤희 수경사 헌병부단장 중령 21기


위의 표와 같이 12.12사건에 참가한 것으로 밝혀진 34명의 장교들 중 하나회 소속은 24명으로서 약 70%에 해당한다. 게다가 차규헌(車圭憲), 유학성(兪學聖), 황영시(黃永時) 등은 하나회 회원은 아니었지만 예전부터 꾸준히 하나회를 후원해 온 장군들이었다. 이들은 보안사와 서울 근교의 9사단, 20사단, 71사단, 공수부대, 그리고 청와대, 수경사, 육군본부, 국방부 등 군부의 요소요소에 포진해 있다가 12월 12일 밤 전두환의 연락을 받고 쿠데타에 가담하였다.

이 날 진압에 앞장섰던 장태완(張泰玩) 수도경비사령관은 하나회 인맥이 반란을 주도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전군에 출동준비를 지시했다. 정병주(鄭柄宙) 특전사령관, 윤성민(尹誠敏) 육군참모차장, 이건영(李建榮) 3군사령관 등도 초기에는 강제 진압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모두 정규육사 출신이 아니며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신임을 받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중하층 병력을 장악하고 있는 지휘관들 중 대다수가 정규육사 출신으로서 하나회의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쿠데타 군의 서울 진입을 막아야 할 수도경비사령부 안에도 장세동(張世東), 김진영(金振永), 김진선(金鎭渲) 등 하나회 소속 장교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 결과 이들의 진압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12.12사건을 계기로 하나회 인맥은 군의 주도권을 완전 장악하고 군부의 세대교체를 이루어 내었다. 1980년 이후 이들은 승진을 거듭하여 <표 4-4>와 같이 대장 18명, 중장 20명, 소장 13명, 준장 9명 등을 배출하였다.

[ 표 4-4 ] 최종 계급별 하나회 회원 명단


대 장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박희도, 박준병, 안필준, 최세창, 정진태, 이종구, 이진삼, 고명승, 나중배, 송응섭, 신말업, 김진영, 이문석, 구창회, 이필섭
중 장 김복동, 최성택, 장기오, 황인수, 정동호, 윤태균, 최문규, 이대희, 권병식, 민병돈, 장세동, 최평욱, 정만길, 김태섭, 조남풍, 김정헌, 김재창, 서완수, 김진선, 안병호
소 장 노정기, 박세직, 조명기, 권영휘, 정도영, 신우식, 장기하, 김정룡, 이현우, 최윤식, 최석림, 장석규, 김무웅
준 장 손영길, 이우재, 안무혁, 이춘구, 정순덕,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성환옥
대 령
이 하
권익현, 안교덕, 정동철, 신재기, 황진기, 오한구, 우경윤, 박종남, 허청일, 박정기, 배명국, 노석호, 정봉화


(3) 5.18과 국보위

1980년의 봄은 민주화 열기가 분출되던 시기였다. 야당과 재야, 노동자, 학생 등은 계엄철폐를 요구하며 연일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4월 21일에는 강원도 사북탄광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고, 5월 15일에는 서울역 광장에 10만여명이 모이는 등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대해 신군부는 무력을 사용하여 강경진압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5월 18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광주시내에 계엄군을 투입하였다. 이로써 정국은 군부와 반대세력간의 정면대결의 양상으로 치달았다.

신군부의 정국대응은 두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기존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을 연행하거나 그 활동을 제한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날로 격화되는 계엄철폐 시위를 무력을 동원하여 억누르는 것이었다. 신군부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양보책을 쓸 수도 있었지만, 일단 무력으로 제압한 이후에 점진적인 유화책을 쓰기로 하였다.

5월 18일 계엄사령부는 김대중(정치인), 김종필(공화당 총재), 이후락(국회의원), 박종규(국회의원), 문익환(목사), 김동길(연세대 부총장), 이영희(한양대 교수) 등 26명을 부정축재 및 사회혼란조성 혐의로 연행하고, 24일 대통령살해사건과 관련해 사형이 확정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박선호 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등 5명에 대한 교수형을 집행하였다.

5월 27일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계엄군을 투입하였고, 이 과정에서 2,000여명의 민간인이 희생되는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계엄확대조치에 동원된 군 병력은 공수특전단, 20사단, 해병사단 등 2만 5천여명이었는데, 광주에 투입된 부대는 공수 7여단의 33대대와 35대대였다. 공수특전단은 1971년 전두환이 제1공수특전단장으로 근무한 이래, 1974년 노태우가 공수특전여단장으로, 같은 해 정호용이 공수여단장으로, 그리고 1977년부터 최세창(崔世昌)이 공수특전여단장으로 근무한 곳으로서, 하나회 회원들끼리 자리 물리기를 해 오던 대표적인 부대였다.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신군부는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를 발족시켰다. 국보위는 명목상 최규하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하고 있었지만, 실질적 권한은 전두환이 상임위원장으로 있는 상임위원회에 있었다. 국보위원의 인선작업은 보안사의 권정달(權正達) 정보처장, 허화평(許和平) 비서실장, 허삼수(許三守) 인사처장, 이학봉(李鶴捧) 대공처장 등에 의해 보안사 안가에서 은밀히 이루어졌다. 국보위는 당연직과 임명직을 포함하여 총14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상임위원급 이상 52명 중에서 군 출신이 30명으로 57%를 차지하였다.

[ 표 4-5 ] 하나회 출신 국보위원


성 명 직 책 육 사 이후 주요 경력
전두환 상임위원장 11기 제11, 12대 대통령
노태우 상임위원 11기 내무장관, 민정당대표위원, 대통령
정호용 상임위원 11기 육군참모총장, 국방장관, 국회의원
이춘구 사회정화위원 14기 국회의원, 내무장관, 민정당사무총장
안무혁 건설위원 14기 국세청장, 안기부장
민병돈 내무위원 15기 특전사령관, 육사교장
최평욱 운영위원 16기 보안사령관, 철도청장
허삼수 사회정화위원 17기 대통령사정수석비서관
서완수 사회정화위원 19기 특전사령관, 기무사령관


<표 4-5>에 나타난 바와 같이 하나회 출신 인사들은 국보위에 들어가 적극 활동하였다. 상임위원회에는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의 세 사람이 참여하였다. 국보위 각 분과 중에서도 특히 많은 역할을 했던 사회정화위원회에는 이춘구(李春九), 허삼수(許三守), 서완수(徐完秀) 등이 참여하였다. 국보위에 참여했던 각계 인사들은 제5공화국 출범 이후 장관, 국회의원, 청와대 등 요직으로 진출했다.

국보위는 "부정부패, 부조리 및 각종 사회악을 일소하여 국가기강을 확립한다"는 취지 아래 대대적인 숙정작업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2급 이상 공무원의 12.1%인 243명, 일반 공무원 4,760명, 국영기업체 임원의 23%인 176명이 숙정되었다. 6월 4일부터 7월 31일까지 2개월에 걸친 정화작업으로 입법부 11명, 사법부 61명, 행정부 5,418명 등 공직자 5,490명과 국영기업체, 금융기관 및 정부산하단체 등 127개 기관 임직원 3,111명 등 총 8,601명이 공직 또는 관련직에서 물러났다. 또한 7월 19일 전직 장관 및 국회의원 17명이 연행되었고, 7월 31일 정기간행물 172개의 등록이 취소되었다. 신군부 세력은 이른바 '3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6월 24일 김종필을 모든 공직에서 사퇴시키고, 8월 13일 김영삼을 정계은퇴시켰으며, 9월 17일 김대중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와 함께 11월 12일 구세대 정치인 811명을 정치활동규제자로 선정하여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국보위 산하 사회정화위원회는 8월 4일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를 단행하고, 11월 27일까지 4개월에 걸쳐 폭력배, 공갈사기배, 밀수마약사범 등 사회풍토문란자 총 5만 7,561명을 검거하고, 이들 중 66%에 해당하는 3만 8,259명을 군부대순화교육 대상자로 분류하여 이른바 삼청교육(三淸敎育)을 받게 하였다. 삼청교육 대상자 중에는 정치인, 재야인사, 광주시위 관련자, 대학생, 종교인 등 시국사범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신군부 세력의 주도로 진행된 공직자 숙정 및 사회정화운동은 구시대 정치세력을 청산하고 새로운 정치인맥을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이 숙정작업으로 신군부 세력에 대해 비우호적이었던 많은 수의 민간정치인들이 정치무대에서 사라졌다. 또한 하나회와 대립관계에 있던 비육사 출신 장교들이 대거 강제 예편당했다. 심지어 1973년 윤필용 사건의 수사책임을 맡아 하나회 소속 장교들을 구속했던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은 7월 21일 계엄군에게 연행되어 2년 6개월간 복역하면서 가혹한 삼청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반면 하나회의 대부로 알려진 윤필용 전 수경사령관은 1980년 도로공사사장을 맡는 등 후배들로부터 과거의 은혜에 대한 보답을 받았다. 또한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강제 예편당했던 많은 수의 하나회 출신 인사들이 새롭게 정계와 국영기업체의 요직에 등용되었다. 하나회 창립 멤버였던 권익현은 윤필용 사건으로 예편한 후 삼성정밀 전무를 지내다가, 육사 11기 친구들의 배려로 7월 26일 제2무임소 장관 보좌역에 임명되었다.

1979-80년 권력의 공백기에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 세력은 10.26, 12.12, 5.18 등 역사적 사건을 거치면서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제5공화국 창출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들이 군 상층부와 야당을 비롯한 민주화 세력 들의 완강한 반대와 저항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회와 같이 내적 결속력이 높은 비밀사조직을 통해 오랫동안 서로 밀고 당겨 주는 후견인-수혜자 관계로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제5장 결론



제1절 인맥정치에 관한 평가

제5공화국의 정치인맥은 본질에 있어서 하나회 중심의 군부인맥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경우에도 국가권력의 핵심부를 장악한 세력은 재벌이 아니라 군부였다.

하나회는 1963년 전두환, 노태우 등 육사 11기 졸업생들에 의해 결성된 비밀사조직으로서 박정희 대통령의 후원을 받으며 성장해 온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엄격한 심사를 거쳐 비밀리에 가입된 이들은 이른바 '자리 물리기' 방식으로 육군본부, 수경사, 보안사 등 군 내 요직을 두루 장악함으로써 비정규육사 출신 선배 장교들의 힘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세력으로 떠올랐다. 하나회는 1979-80년 신군부 세력이 정치무대에 등장하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12.12쿠데타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장교들의 3분의 2가 하나회 회원이었으며,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부대는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하나회 회원들끼리 자리 물리기를 해 오던 대표적 부대인 공수특전단이었다. 이들은 구시대 정치세력을 제거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마련하는 작업에서도 중심적 역할을 했다. 보안사의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등은 국보위 인선작업과 민정당 창당과정에 깊숙히 관여하였다. 하나회 인맥의 위세는 제5공화국의 출범과 더불어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들은 제5공화국 정권하에서 서로 밀고 당겨 주는 후견인-수혜자 관계를 형성하고, 청와대, 행정부, 국회 및 정당, 군, 정부투자기관, 기업체, 연구단체 등 사회 각계로 진출하여 상층부와 요직을 차지하였다. 그 결과 군부세력을 중심으로 민간세력이 결합하여 "전두환-하나회-정규육사출신-전문관료.민간인"의 구조를 가진 거대한 동심원 구조가 형성되었다.

일반적으로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는 원인으로는 군 내부적 요인과 사회정치적 요인을 지적할 수 있는데, 한국의 경우 군 내부적 요인이 더 강했다. 1979-80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회 인맥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된 배경에는 당시의 불투명한 사회정치적 상황도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군부 내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과 비정규육사 출신 선배 장교들간의 세력다툼이라는 군 내부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다.

군사쿠데타는 개인적 쿠데타, 파당적 쿠데타, 제도적 쿠데타의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개인적 쿠데타는 상대적으로 민간부문의 정치제도화 수준이 낮은 국가에서 몇몇 군 장교들의 개인적 야심에 의해 발생하는 쿠데타로서, 1966년 나이지리아 쿠데타의 사례처럼 아프리카 지역에서 자주 발생했다. 파당적 쿠데타는 군 내부에 엄격한 규율과 위계질서가 확립된 국가에서 군부 내 파벌집단간의 세력다툼에 의해 발생하는 쿠데타로서, 박정희의 5.16쿠데타와 전두환의 12.12쿠데타가 여기에 해당한다. 제도적 쿠데타는 잘 조직되고 우수한 교육을 받은 제도화된 군부집단이 민간부문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일으킨 쿠데타로서, 브라질, 아르헨티나, 페루 등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에서 많이 발생했다.

12.12사건은 하나회가 중심이 된 전형적인 파당적 쿠데타에 해당한다. 이 사건은 군부 내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이 비정규육사 출신 선배 장교들과 세력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무력을 동원하여 상급 장교들을 제거한 하극상 사건이다. 이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군부 내에 하나회와 같이 엄격한 규율을 갖춘 비밀사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회 인맥은 큰형님인 전두환을 중심으로 형님-아우 관계로 맺어진 가부장제에 비유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박정희는 하나회를 낳고 길러 준 어버이에, 윤필용과 같이 하나회를 후원한 선배 장교들은 삼촌에 비유될 수 있다. 다른 비밀사조직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사이의 관계에서는 행정적 지시나 명령보다도 서로에 대한 신뢰와 의리가 강조되었다. 하나회는 지도력과 위계제 그리고 규율 있는 구성원들을 가지고 정치적 목적을 추구한 정치적 머신에 비유될 수 있다. 이들은 공공의 이익보다도 자기 그룹의 사적인 이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각종 진급과 보직에서 하나회 회원들끼리 자리 물리기를 되풀이한 것이다. 하나회는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로 구성된 일종의 군부 파벌에 비유될 수 있다. 이들은 정규 4년제 교육을 받은 엘리트라는 동질감과 선배 장교들 때문에 진급이 늦어지고 있다는 공통된 불만을 바탕으로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을 단합시키고 비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에 대항해 배타적 집단이익을 추구하였다. 그 결과 12.12사건 직전에 군부는 정승화를 대표로 하는 상층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중하층으로 양분되었다. 하나회 인맥은 후견인-수혜자 관계에 의해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 하나회는 육사 11기 선배들을 최상층으로 하고 각 기수별로 10-12명의 후배들이 망라된 후견인-수혜자 피라미드에 비유될 수 있다. 이 피라미드의 정점에 위치한 전두환은 자신을 추종하는 회원들에게 진급과 보직상의 특혜를 베풀고 그 대가로 자신과 조직에 대한 절대적 지지와 충성을 이끌어 내었다. 이들이 정권을 잡은 1980년대에는 하나회를 중심으로 각계각층의 민간정치세력들이 망라된 거대한 동심원 구조가 형성되었다.

인맥정치는 정치지도자와 그를 중심으로 한 인맥에 의해 주요한 정치적 결정이 내려지고 정치행위가 이루어지는 정치행태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제5공화국의 정치행태는 '하나회 중심의 군부인맥'에 의한 인맥정치였다.

인맥정치는 정치인들간의 유대관계를 공고한 것으로 만들어 줌으로써 안정된 정치공동체의 형성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서로 비슷한 이념과 정책을 가진 사람들끼리 인맥을 형성하고 정치활동을 주도해 나감으로써 국정운영의 혼란을 최소화하고 일사불란한 통치행위를 펴 나갈 수 있다. 권력의 공백기에 정치인맥은 단합된 힘을 바탕으로 혼란된 정치상황을 헤치고 정국을 주도해 나감으로써 새로운 정치질서의 창출에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맥정치는 민주적 절차와 제도를 경시하고 집단이기주의와 부정부패를 낳는 온상이 될 수 있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의사의 결정이 사적인 자리에서 몇몇 사람들에 의해 은밀히 내려짐으로써 조직 내부의 민주적 절차가 파괴되고 공식적 조직체계가 약화될 수 있다. 또한 자기 인맥에 속하지 않은 다른 집단이나 조직들에 대해 배타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집단이기주의에 빠지기 쉽고 집단간 갈등과 대결을 불러오기 쉽다. 정치적 머신, 파벌 등과 마찬가지로 정치인맥은 부정부패를 낳는 구조적 요인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제5공화국의 하나회 인맥은 한국정치의 민주화와 정치발전에 역행하는 많은 부작용을 일으켰다. 우선 군 내부에서 하나회 회원들끼리 보직을 주고받는 불공정한 인사관행을 되풀이함으로써 군의 사기를 저하시킨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또한 12.12사건과 같이 군의 정상적인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무력을 동원하여 하급자가 상급자를 체포하는 좋지 못한 전례를 남겼다. 하나회 인맥은 제5공화국의 창출과 운영 과정에서 군 출신 인사들을 중용하고 민간정치세력들을 억압함으로써 군부독재라는 비판을 받았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2,000여명의 민간인들이 희생되었으며, 국보위에 의해 주도된 개혁작업과 사회정화활동에 의해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등 3김 세력이 정치무대에서 사라지고 약 8,600여명의 공직자가 물러났다. 이들은 제5공화국 정권하에서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일해재단, 새세대심장재단, 새마을성금, 평화의 댐 건설 등 이들은 갖가지 명목으로 거액의 기부금을 마련하고 개인적으로 유용하였다. 전기환, 전경환, 이규동, 장영자 등 전두환 친인척들의 비리행위도 극심했다.

정치분야에서 인맥이 없을 수 없다. 동서고금의 모든 정치체제에서 인맥이 형성되지 않았던 때를 찾아 보기는 매우 어렵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정치지도자를 중심으로 인맥이 형성되는 경우를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정치와 인맥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인맥정치는 자기 인맥에 속한 사람들끼리는 잘 뭉치고 강한 힘을 발휘함으로써 안정된 정치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반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배타적 자세를 취하는 등 민주적 절차와 제도를 경시하고 집단이기주의와 부정부패를 낳는 구조적 요인이 될 수 있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제2절 이 연구의 성과와 한계


이 논문은 후견인-수혜자 관계의 분석틀을 적용하여 제5공화국의 하나회 인맥을 연구한 글이다. 이 논문에서는 제5공화국의 정치인맥이 본질에 있어서 하나회 중심의 군부인맥이었음을 주장하고, 그 근거로서 하나회의 형성과 발전과정에 관한 구체적 자료들을 발굴하여 제시하였다. 또한 하나회 인맥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내적 요인을 회원들끼리 서로 밀고 당겨 주는 호혜적 관계에서 찾고, 이를 후견인-수혜자 관계의 분석틀에서 설명할 수 있음을 보였다.

이 논문은 정치학이 한국의 정치현실을 분석대상으로 삼아야 하며, 추상적인 정치이론을 구체적인 정치현실에 접목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기반하여 작성되었다. 지금까지 한국의 정치학계는 미국식 정치이론을 무분별하게 수용하거나 혹은 그것에 대한 대응으로 제3세계와 사회주의 국가의 정치이론을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여 왔다. 한국식 정치이론이 독자적으로 마련되지 못한 상황에서 외국의 좋은 경험과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한국정치학의 발전을 위해서 매우 좋은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정치이론이라 하더라도 한국의 정치현실을 실사구시적 관점에서 과학적으로 분석해 내지 못한다면 그 이론의 가치는 크지 않을 것이다.

이 논문은 흩어져 있던 하나회 관련 자료들을 최대한 수집하여 일정한 체계에 맞춰 재배열함으로써 자료발굴과 재해석의 측면에서 나름대로 의의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를 통해 후견인-수혜자 관계에 관한 일반적 정치이론을 발전시키는 데에도 작으나마 이바지하였다. 후견인-수혜자 관계의 분석틀을 적용하여 동남아시아의 정치변동을 연구한 스코트(James C. Scott)의 논문과 마찬가지로, 이 글도 위의 분석틀을 적용하여 한국의 하나회 인맥을 연구한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은 하나회와 관련된 자료들을 인터뷰와 같은 직접적 방법을 통해 구하지 못하고 주로 잡지와 신문에 실린 간접 자료들을 이용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또한 연구자의 능력 부족으로 후견인-수혜자 관계에 관한 더 많은 학자들의 연구성과들을 검토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이 논문은 하나회의 형성과정과 제5공화국 정권하에서 하나회의 위상을 이해하기 위한 체계적인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하나회 인맥과 '티케이'(T. K.) 인맥을 비교하여 양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 보는 것과 문민정부의 출범으로 하나회 중심의 군부인맥이 쇠퇴해 가는 과정을 살펴 보는 것 등이 앞으로 남은 연구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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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에서 군부인맥의 형성과 쇠퇴

(서울대학원신문)

국의 군부인맥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하나회' 인맥이다. 하나회는 1963년 전두환, 노태우 등 육사 11기 졸업생들이 결성한 비밀사조직으로서, 1979년 12.12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이후 1980년대의 한국정치를 좌지우지하였다. 지난 수십년간의 한국정치는 군부정치였으며, 군부 중에서도 특히 하나회 인맥에 의한 정치였다고 요약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하나회 인맥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국민들의 민주의식이 성장함에 따라 어떻게 쇠퇴해 가는가에 관해 개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나회의 뿌리는 전두환이 육사 생도 시절에 결성한 '오성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성회는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최성택, 백운택 등 다섯 사람이 장래 장군이 되기를 꿈꾸며 만든 스무살 청년들의 친목써클이었다. 그 후 회원이 늘어나 칠성회로 확대되었고, 이후 육사 11기 텐 멤버(ten member)로 발전했다. 이들은 강한 엘리트 의식과 선배 장교들에 대한 불만을 기초로 정규육사 출신들끼리 단합함으로써 각종 승진과 보직 등에서 자신들의 배타적 이익을 추구하려고 하였는데, 이것이 하나회를 결성한 동기 중의 하나가 되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이 그룹은 1961년 박정희의 5.16쿠데타를 지지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박정희와 후견인-수혜자 관계(patron-client relationship)라는 특별한 호혜적 관계를 형성하고 이후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로 진출하는 등 보직과 진급에서 특별 배려를 받았다.

1979년 10.26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하자 전두환과 그의 사조직 하나회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12.12쿠데타를 감행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한국정치는 문민정부의 출범이 아니라, 박정희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 배타적 군부인맥인 하나회에 의해 또 다른 군사정권 수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 세력은 계엄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민주화운동을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2,000여명의 민간인의 생명을 앗아갔으며, 국보위를 발족시켜 행정부와 국영기업체의 임직원 등 8,601명을 공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3김 세력을 제거하였으며, 3만 8,259명을 군부대 순화교육 대상자로 분류하여 가혹한 삼청교육을 받게 하였다. 제5공화국의 정치인맥은 본질에 있어서 '하나회 중심의 군부인맥'이었다. 이들은 육군참모총장, 보안사령관, 수도방위사령관 등 군부의 핵심요직을 장악하였고 청와대, 행정부, 국회, 정부투자기관, 기업체 등 사회 각계로 진출하였다.

1987년 6월민주화운동으로 전두환의 5공인맥이 붕괴되고 노태우 중심의 6공인맥이 형성되었다. 6공인맥은 흔히 'T. K.인맥'으로 지칭된다. 노태우는 군부에 대해서는 하나회 회원 중에서도 그가 9공수여단장과 9사단장 시절 자신의 휘하에서 근무한 장교들을 주축으로 '9.9인맥'을 형성하였고, 정계에서는 군 출신 인사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박준규, 김윤환, 박철언, 문희갑 등 경북고 출신 민간정치인들을 중용함으로써 군부독재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러나 6공인맥은 5공인맥을 청산하고 민간정치인들을 요직에 등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자신을 포함한 핵심요직의 경우 여전히 군 출신 인사들이 차지했다는 점에서 하나회 인맥의 연장선상에 위치한 군부인맥이었다. 노태우의 9.9인맥과 경북고 인맥의 '이중적 인맥구조'는 군사정권이 문민정권으로 이행해 가는 과도기에 위치한 혼합적 성격을 띠고 있다.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함으로써 하나회 중심의 군부인맥은 급격히 쇠퇴하고 있다. 김영삼은 대통령 취임 직후 최세창, 김진영 등 하나회 인맥과 박준규, 박철언 등 경북고 인맥을 제거하고 최형우, 김덕룡 등 민간정치인들을 중용하는 인사조치를 단행하였다. 김영삼 정권은 군부를 반대하고 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여론의 힘을 바탕으로 군부인맥을 제거하고 문민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정치인맥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

국정치에서 군부인맥의 형성과 쇠퇴에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는, 군 내부적 요인으로 파벌집단의 존재 및 결속 정도와 외부적 요인으로 국민들의 민주정치역량의 성숙 정도의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1960년대 초 박정희의 후원을 받아 비밀리에 성장한 하나회 세력은 1980년대 한국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국민들의 민주정치의식이 성숙하고 군사정권 퇴진과 민간민주정부의 출현을 바라는 광범위한 요구가 분출되자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전두환의 5공인맥이 전형적인 군부인맥에 해당한다면, 노태우의 6공인맥은 군부인맥과 민간인맥이 절충된 과도기적 성격이 강하고, 김영삼의 문민정권 하에서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정치인맥은 대체적으로 보아 민간정치인맥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아직까지도 군부인맥이 잔존하면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는 있지만, 한국정치의 민주화 추세에 비추어 볼 때 과거와 같은 군부의 정치개입은 더 이상 재현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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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의 인맥, 사조직 연구


이 글은 서창녕(徐唱寧)이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석사학위논문을 준비하면서 쓴 글로서,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의 '하나회 인맥'과 제6공화국 노태우 정권의 'T.K.인맥'을 다룬 글이다. 이 글은 <서울대학원신문> 제23호(1993년 3월 16일 화요일, 서울대학교 대학원 자치회 협의회 발행, 제4면)에 실렸던 것이다.



< 차 례 >



1. 한국정치의 특징 - 인맥정치


한국정치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이념이나 정책보다도 혈연, 지연, 학연에 기반을 둔 인맥과 사조직, 지역주의가 중요한 정치행위를 결정하는 데 더 큰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이념적 동질성이나 정책의 합리성에 따라 정당이 조직되고 선거에서 유권자의 지지가 표현되지만, 한국에서는 이념이나 정책이 거의 중요한 정치적 변수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후보는 자신의 출신지인 부산에서 72.6%, 경남 71.5%, 경북 63.6%의 지지를 얻었고, 김대중 후보는 광주에서 95.1%, 전남 91.1%, 전북 88.0%의 지지를 얻는 등 지역주의적 투표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반면, 두 후보의 정책적 차별성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또한 정당활동에서도 정책이나 이념의 동질성보다도 혈연, 지연, 학연과 같은 연줄을 기반으로 인맥과 파벌이 형성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1988년의 제13대 총선에서 당선된 민정당 국회의원 중 박준규, 김윤환, 박철언 등 무려 15명이 노태우의 출신고교인 경북고등학교 동창생들이었다. 한국정치에서 인맥과 지역주의는 매우 중요한 정치행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한국정치 연구자들은 이 문제에 큰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였다. 기존의 연구들은 투표행태와 선거결과에 관한 분석, 선거운동의 구체적 과정과 실태에 관한 분석, 선거문화와 유권자의 정치의식에 관한 분석, 정당과 의회의 정책기능에 관한 분석 등 주로 정책적 측면의 연구에 치중되었다. 그런데 많은 연구자들이 직면하는 딜레마는 미국이나 유럽과 달리 한국에서는 각종 선거나 정당활동에서 정책적 요인이 거의 비중을 차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오히려 인맥과 지역주의와 같은 비정책적 요인들이 더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이 글은 정책적 측면보다 주로 비정책적 측면에서 1980년대 한국정치의 인맥과 사조직을 분석하고자 한다.

2. 1980년대 주요 정치인맥

(1) 전두환의 '하나회' 인맥

1980년대 전반기의 한국정치를 좌지우지한 정치인맥은 전두환의 하나회 인맥이다.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정호용 등 육사 11기생들이 주축이 되어 1963년에 결성한 군 내 비밀사조직인 '하나회'(一心會)는 이후 제5공화국 창출의 모태가 됨으로써 현대 한국정치사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였다. 물론 박정희도 5.16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이후 군 출신의 김종필, 차지철, 박종규 등을 등용하였지만, 그것은 개인적 친분에 의한 것이었지 하나회와 같이 수십년간 유지되어온 조직적 관계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회의 뿌리는 전두환이 육사생도 시절에 결성한 오성회(五星會)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성회는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최성택, 백운택의 다섯 사람이 장래 장군이 되기를 꿈꾸며 만든 20세 청년들의 친목써클이었다. 그후 오성회는 정호용 등 5인이 더 가입하여 텐 멤버(ten member)로 발전하고, 이들 10명이 주축이 되어 육사 11기에서 20기까지 매기수별로 10명씩을 엄격한 기준에 따라 선별하여 총100여명을 망라한 하나회로 발전하였다. 하나회는 단순한 친목단체일 뿐이라는 관련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하나회 소속 장교들은 입회시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했으며 목숨을 걸고 조직의 명령에 따르며 절대 비밀을 지킬 것을 서약하였다고 한다. 하나회 소속 장교들은 이른바 '하나회식 의리'를 바탕으로 후견인-수혜자 관계를 형성하고 승진과 보직 등에서 서로 밀고 당겨 주면서 군 요직으로 진출하였다. 하나회가 군부 내에서 급격히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육사 8기인 김종필이 군부 내에서 충청도 출신 장교들로 세력을 확장하자 이를 견제할 목적으로 육사 11기인 전두환, 노태우 등을 불러 경상도 출신 장교들의 단합을 호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나회는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소속 장교들이 일부 구속되는 등 시련을 겪었지만, 하나회의 회장이었던 전두환 등이 박정희의 배려를 받아 예편을 면했기 때문에 1979년까지 비밀리에 조직의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1979년 12.12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이후 하나회 출신 인사들은 대거 정계로 진출하여 정치인맥을 형성하고 권력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1980년 5월 27일 광주항쟁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신군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를 설치하고 과거 유신체제하의 정치세력과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의 이른바 '3김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기 시작했다. 국보위는 유신치하 권력의 핵심이었던 중앙정보부의 기구를 축소하고 요원 3백명을 숙청했으며, 2급 이상 공무원 2백 34명, 3급 이하 공무원 5천 237명, 정부산하단체 및 국영기업체 임원 1백 76명 등을 숙청했다. 이러한 숙청작업은 군부, 경찰, 법조계, 정계, 언론계, 학계 등 사회 각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제4공화국이 제5공화국으로 넘어가는 정권교체의 과정은 박정희 인맥이 전두환의 하나회 인맥으로 교체되는 인맥교체의 과정이기도 했다. 1980년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하고, 8월 27일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뒤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사회 각 분야에서 요직을 장악했다. 특히 정보기관, 국방부, 육군참모총장, 검찰 등 권력의 핵심부에는 대부분 하나회의 영향력 아래 있는 군 출신 인사들이 등용되었다.

[ 하나회 출신의 주요 인사들 ]

육사11기 전두환(12대 대통령), 노태우(13대 대통령), 김복동(전 민자당 의원, 국민당 입당), 정호용(전 무소속 의원, 민자당 입당), 손영길(전 수경사 참모장), 권익현(민자당 의원), 노정기(전 필리핀 대사), 최성택(전 석유개발공사 사장), 백운택, 박갑용
육사12기 박희도(전 육군참모총장), 박준병(민자당 의원), 박세직(민자당 의원), 안필용, 정동철(산업안전공단 이사장)
육사13기 최세창(국방부 장관), 김우재(전 체신부 장관), 오한구(민자당 의원), 신재기(민자당 의원), 정동호(민자당 의원)
육사14기 이종구(전 국방부 장관), 안무혁(전 안기부장, 민자당 의원), 이춘구(민자당 의원), 배명국(민자당 의원), 박정기(전 한국전력사장), 장기하(진로사장), 정도영(전 사회정화위원)
육사15기 고명승(전 3군사령관), 민병돈(전 육사교장), 이진삼(체육청소년부 장관), 김상구(민자당 의원,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서)
육사16기 장세동(전 안기부장), 신말업(전 군사령관), 최평욱(산림청장), 정순덕(민자당 의원)
육사17기 김진영(육군참모총장), 안현태(전 경호실장), 허화평, 허삼수(민자당 의원)
육사18기 이학봉(13대 민자당 의원), 정봉화(윤필용 전 수경사령관의 비서실장)


제5공화국은 군부독재라고 비판받아 왔다. 정권의 요직을 육사 출신의 군인들이 장악했다는 점에서 제5공화국은 군사정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 보면 제5공화국은 군부 중에서도 '하나회'라는 특정 비밀사조직에 기반을 둔 정권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군 출신이면서도 하나회 회원이 아니었던 이종찬(육사 16기)은 민정당 창당의 주역을 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인사들로부터 끊임없이 견제를 당해야 했다. 하나회 인사들은 1988년 5공청산의 국민적 요구에 밀려 전두환(백담사), 정호용(외유), 장세동(구속) 등 커다란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하나회 인맥은 제6공화국에서도 노태우 대통령을 배출하는 등 정치세력을 유지해 왔다. 또한 강창성(前 보안사령관)의 증언에 따르면, 하나회 인맥은 군 내부에서도 하나회(육사 11기-20기), 만나회(21기-32기), 알자회(33기-43기)로 여전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제5공화국 창건의 주역을 담당한 하나회 인맥은 1980년대 전후반에 걸쳐 한국정치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문민정권이 출범한 1993년 현재까지도 현역 국회의원 중 10여명이 존재하는 등 하나회 인맥은 무시할 수 없는 정치세력으로 남아 있다.

(2) 노태우의 'T. K. 인맥'

1980년대 후반기의 한국정치를 좌지우지한 정치인맥은 노태우의 T. K. 인맥이다. 노태우는 1987년 6.29선언으로 여권 내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이후 전두환의 5공인맥을 제거하고 자신의 출신고교인 경북고 동창생들을 중심으로 'T. K. 인맥'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노태우가 한때 자신이 속했었고, 대통령 선거에서도 자신을 지원해 준 5공인맥을 제거하기로 결심한 것은, 정권이 바뀌면 정치인맥도 바뀐다는 일반적 이유 이외에도 당시 여소야대의 국면 속에서 5공비리 청산과 민주개혁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높았기 때문에 제5공화국과 제6공화국의 차이점을 확실히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88년 국회청문회에서 6공화국의 수뇌부와도 관련이 있는 광주문제보다도 5공비리문제가 더 크게 부각된 점이나, 5공비리 중에서도 군 출신 인사들의 부정부패보다도 주로 전두환의 친인척과 관련된 사건들이 집중적으로 거론된 점에 비추어 볼 때, 당시의 5공청산문제는 결과적으로 전두환의 정치인맥을 약화시키고 노태우의 6공인맥을 확립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전두환-이순자 부부의 친인척인 전기환(전두환의 형, 노량진수산시장 강제인수 관련, 징역 4년), 전경환(동생, 새마을비리사건 관련, 징역 7년), 이규승(처삼촌, 삼호그룹 은행부채유예 관련, 징역 2년) 등이 사법처리된 반면, 노태우와 같은 경북고 출신의 이원조(부실기업정리와 정치자금모금 관련 혐의), 김만기(삼청교육대와 공무원 숙청의 실무책임자) 등은 사법처리를 면할 수 있었다.

넓은 의미에서 T. K. 인맥은 대구-경북 출신의 인사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T. K. 인맥은 노태우 대통령의 출신고교인 대구 경북고등학교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인맥이라고 보아야 한다. 박정희나 전두환도 경상도 출신 인사들을 중용하였지만, 엄밀히 보면 경상도 출신이라는 점보다도 군 출신이라는 점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이런 점에서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은 대구-경북정권(T. K. 정권)이라기보다 군사정권이라는 규정이 더 정확하다고 하겠다. 반면 노태우는 6공화국이 군부독재가 아니라 6.29선언과 직선제를 거쳐 탄생된 정통성 있는 정권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군 출신 인사들을 배제하고 민간인 중에서 주요 인사들을 발탁하였다. 노태우는 민간인 중에서도 자신의 출신고교인 경북고 동창생들을 중심으로 6공화국의 정치엘리트를 구성함으로써 이른바 '경북고 인맥'을 형성하였다. 1988년 4.26총선에서 반(反) T. K. 여론이 형성되자 노태우는 12월 당정개편에서 비(非)하나회 인사인 강영훈(전 국무총리), 김재순(전 국회의장), 서영훈(KBS 사장), 장덕진(전 농수산부 장관), 홍성철(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 이른바 '신원로(新元老) 그룹'을 대거 발탁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이북 출신들로서 반 T. K. 여론을 잠재울 수 있으면서도 이남에 지역적 기반이 없기 때문에 쉽사리 정치세력화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후로도 몇 번의 개각이나 당직개편 등에서 비 T. K. 인사들이 요직에 등용되었지만 대부분 '전시용'에 불과했고 실질적 권한은 경북고 인맥을 중심으로 하는 T. K. 세력에게 있었다.

[ 경북고 출신의 주요 인사들 ]

25기 박준규(국회의장)
32기 노태우(제13대 대통령), 김윤환(전 민자당 사무총장), 정소영(전 농수산부 장관), 정춘택(전 산업은행 총재), 정호용(전 내무부 장관)
33기 박우병(국회의원), 서동권(전 안기부장)
34기 김만제(전 경제기획원 장관), 김우현(전 치안본부장), 박희도(전 육군참모총장), 이영창(전 치안본부장), 최세창(전 국방부 장관)
35기 권병식(전 수도방위사령관), 오한구(전 국회의원), 이종구(전 육군참모총장)
37기 문희갑(전 국회의원), 정해창(전 법무부 장관)
38기 서영택(전 국세청장)
39기 사공일(전 재무부 장관)
40기 서완수(전 특전사령관)
41기 박철언(전 정무1장관)



3. 1990년대 새로운 정치인맥의 형성

1992년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한국정치에서 군사정권은 막을 내렸다. 새롭게 출범한 김영삼 정권은 과거 5, 6공화국의 정치인맥을 해체하고 새로운 인사들로 문민정부를 구성할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로 김영삼은 최근 청와대 비서실과 장차관급 임명과정에서 주요 직책에 대해 '군 출신 인사 배제 원칙'을 세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심지어 김영삼 대통령은 지난 3월 18일 임기가 9개월이나 남은 하나회 출신의 김진영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을 군 통수권 확립 차원에서 전격 경질하고, 그 후임에 비(非)하나회 출신의 김동진(육사 17기), 김동윤(육사 22기)를 각각 임명함으로써 군 내 하나회 인맥을 뿌리뽑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내비쳤다. 또한 김영삼 대통령은 새 정부의 각료구성에서 경북고 출신의 비율을 보통 수준으로 낮추었다. 새 정부의 장차관급 인사 45명의 출신고를 살펴보면, 경기고 9명, 경북고 3명, 부산고 3명, 청주고 3명, 기타 각 1-2명 등으로 비교적 고른 분포를 보이고 있다. 정권이 바뀌면 인맥도 바뀐다는 평범한 정치상식에 맞게 5, 6공화국의 하나회 인맥과 T. K. 인맥은 쇠퇴하고 김영삼의 사조직인 '민주산악회'와 '나라사랑실천운동본부'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던 최형우, 김덕룡, 박관용 등을 중심으로 한 김영삼 인맥이 형성되고 있다.

정치분야에서 인맥과 사조직이 없을 수 없다. 인맥과 사조직은 공식적인 정당조직 안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을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손쉽게 해결할 수 있도록 해 주며, 급격한 정치변동에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인간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따라서 정치인맥과 사조직은 공식적 정당조직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정치인맥과 사조직은 '정치인-정치인' 또는 '정치인-유권자'의 유대관계를 공고한 것으로 만들어 줌으로써 안정된 정치공동체의 형성에 이바지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인맥과 사조직은 지역주의를 심화시키고 부정부패를 낳는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하는 등 부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정치인맥과 사조직의 긍정적 측면은 조장하고 부정적 측면은 억제함으로써 바람직한 정치공동체의 건설을 지향하는 지혜와 결단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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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회 인맥' 다룬 논문 나왔다



☞ 서울대 대학원생 첫 학문적 접근
세계일보 1993년 7월 19일 월요일 22면 보도자료

민정부 출범 이후 군 사조직인 '하나회'의 '해체작업'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제5공화국의 하나회 인맥에 관한 연구논문이 나왔다. 이 논문은 한국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면서도 학문적 접근이 어려웠던 '정치인맥'을 처음으로 연구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울대 대학원 정치학과 서창녕 씨(27)는 석사학위논문 '한국정치의 후견인-수혜자 관계: 제5공화국의 하나회 인맥에 관한 연구'를 통해 제5공화국 정치인맥의 큰 줄기인 '하나회 중심의 군부인맥'의 태동과 권력장악과정에서의 '자리 물려주기', 인맥정치의 폐해 등을 다루고 있다.

'후견인-수혜자 관계'(Patron-Client Relationship)란 권력 재력 명망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물질적 정신적 혜택을 베풀고 그 대가로 '자발적인' 충성과 지지를 얻어내는 관계. 한국의 정치인맥도 이같은 관계를 기반으로 형성됐으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제5공화국의 하나회 인맥이라는 주장에서 이 논문은 출발한다.

씨는 63년 전두환 노태우 등 육사 11기생을 주축으로 결성된 '하나회'가 정치인맥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 전대통령과 전씨의 호혜적 관계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61년 5월 18일 전씨가 육사생도들을 모아 '5.16' 지지시위를 벌이면서 맺게 된 박 전대통령과 전씨의 '후견인-수혜자 관계'는 전씨를 권력 핵심에 가까운 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수경사 30대대장, 보안사령관 등 요직에 등용하는 특혜를 가져왔다는 것. '하나회'는 박 전대통령의 후원 속에서 '자리 물려주기' 방식으로 군 요직들을 장악, '군부 실세'로 떠올랐다.

문에 따르면 역대 보안사령관의 경우 10명 전원이, 수도방위사령관도 8명 전원이 하나회 회원이었다. 서씨는 이같은 관행이 80년대 들어 더 심해졌다고 밝히고 80년 이후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을 맡은 15명 중 12명이, 육군참모총장은 5명 전원이 하나회 회원이었음을 근거로 들고 있다. 또 제5공화국이 태동하면서 전 전대통령은 '수혜자'에서 '후견인'의 자리에 서게 되고 이후 '하나회' 중심의 정치인맥이 등장하게 됐다.

나회는 '10.26' 이후 벌어진 정치적 사건들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는데, 12.12사건 참가자로 밝혀진 34명의 장교 중 '하나회' 소속이 23명으로 67%를 차지했고 80년 5월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은 '하나회'의 최세창 장군이 이끄는 공수부대였다. 또 80년 5월 31일 발족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의 상임위원급 52명 중 군 출신이 30명으로 57%를 차지했으며 이 가운데 전두환 상임위원장을 비롯, 하나회 출신이 9명이었다는 것이다.

나회 출신 인사들은 5공화국 하에서 사회각계로 진출했다. 논문에 따르면 현재 명단이 밝혀진 88명(중복 포함) 중 군부가 35명으로 가장 많고 △국회 및 정당 23명 △행정부 20명 △정부투자기관 19명 △청와대 12명 △기업체 11명 △사회단체 연구소 7명 순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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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인맥의 큰 줄기 '하나회' 해부



☞ 석사학위논문 펴낸 서울대 대학원생 서창녕
뉴스피플 1993년 8월 5일 발행 62쪽 보도자료

정부 출범 이후 군 개혁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5공의 하나회 인맥에 관한 연구논문이 나와 눈길을 끈다. '한국정치의 후견인-수혜자 관계: 제5공화국의 하나회 인맥에 관한 연구'라는 석사논문을 펴낸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과 서창녕 씨(27)는 "그 동안 정치학 연구는 이론 중심으로 현실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다"며 마침 문민정부 출범을 계기로 한국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면서도 학문적 접근이 어려웠던 정치인맥을 연구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논문에서 서씨는 5공 정치인맥의 큰 줄기인 하나회 중심의 군부인맥의 태동과 권력장악 과정에서 '자리 물려주기'같은 인맥정치의 폐해 등을 다루고 있다.
"하나회는 63년 전두환 노태우 등 육사 11기 졸업생 등이 주축이 돼 결성된 조직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와 후원에 의존, 강한 결속력을 지닌 조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기들끼리 주요 보직을 주고받는 '자리 물려주기' 방식으로 육군본부 공수특전단 수도경비사 보안사 등 요직을 장악하였지요."

씨에 따르면 이들은 권력 상층부에 변화가 있을 때마다 한 걸음씩 권력의 최정상을 향해 앞으로 나아갔으며 10.26, 12.12, 5.17을 통해 신군부세력이 정치무대에 등장하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 80년대 전반기의 한국정치를 장악했다는 것이다.

"동서고금의 모든 사회 정치체제에서 인맥이 형성되지 않았던 때를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정치와 인맥은 그만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는 셈이죠." 하지만 서씨는 인맥정치는 자기 인맥에 속한 사람들끼리는 잘 뭉치고 강한 힘을 발휘, 안정된 정치공동체를 형성하는데 기여할 수 있지만 반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자세를 취하는 등 민주적 절차와 제도를 경시하고 집단이기주의와 부정부패를 낳는 온상이 될 수도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문 잡지 군사백서 인명록 등을 이용했다는 서씨는 등장인물들이 생존해 있는데도 직접 인터뷰를 하지 못한 점, 문민정부 출범 이후 하나회 중심의 군부인맥이 쇠퇴해 가는 과정을 살펴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했다.

부에서 경제학을 전공,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정치학으로 전공을 바꾼 서씨는 앞으로도 파벌과 인맥에 관해 계속 연구해 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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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치인 명단


☞ 강영훈(姜英勳): 1922년 평북 창성 출생, 43년 만주 건국대 수료, 49년 연대장, 52년 주미대사관 부무관, 55년 국방부 동원차관보, 56년 육본관리부장, 58년 미국 육군참모대 수료, 59년 군단장, 60년 육사교장, 61년 중장으로 예편; 70년 재 워싱턴 한국문제연구소 소장, 73년 미국 남가주대 정치학박사, 77년 외대 대학원장, 78년 외무부 외교안보연구원장, 81년 주영대사, 83년 주에이레대사 겸임, 84년 주로마교황청대사, 87년 외무부 본부 근무, 88년 13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 88-90년 국무총리, 91년 대한적십자사 총재, 91년 최남선 선생 기념사업회장, 저서 '한 외교관의 영국 이야기'.

☞ 강창성(姜昌成): 1927년 경기도 포천 출생, 49년 육사 졸업, 전 보안사령관, 92년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

☞ 권정달(權正達): 1936년 경북 안동 출생, 59년 육사 졸업, 78년 보안부대장, 79년 보안사 정보처장, 79년 연대 행정대학원 졸업, 80년 국보위 내무분과위원, 80년 입법회의 의원, 80년 준장으로 예편; 81-82년 민정당 사무총장, 81-88년 제11.12대 국회의원, 82년 IPU 한국의원단 이사회 의장, 83년 70차 IPU 총회 준비위원장, 83년 국회 내무위장, 85년 남북국회회담 수석대표, 87년 민정당 국책조정위장.

☞ 금진호(琴震鎬): 1932년 경북 영주 출생, 58년 서울대 법대 졸업, 64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졸업, 65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행정대학원 수료; 62-70년 총무처 관리.의정.총무과장.행정관리국장, 73-78년 상공부 중소기업.섬유공업.공업기획.광무국장, 78년 동력자원부 석탄국장, 79년 특허청 항고심판소장, 80년 상공부 기획관리실장, 80년 국보위 상공자원분과위원, 80년 국무총리 비서실장, 81년 상공차관, 83-86년 상공부 장관, 87년 소비자 보호원장, 87년 국제퇴계학회장, 88년 무역협회 고문, 89년 국제무역경영연구원 회장.

☞ 김윤환(金潤煥): 1932년 선산 출생, 56년 경북대 문리대 영문과 졸업, 62년 조선일보 주일특파원, 66년 조선일보 주미특파원, 68년 미국 오하이오대 신문대학원 수료, 72년 조선일보 편집 부국장, 75년 동 편집국장 대리, 78년 오상 교육재단 이사장, 79년 10대 유정회 국회의원, 80년 입법회의 의원, 80년 민정당 창당 발기인, 81년 11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 81년 한일의원연맹 간사장, 82년 민정당 중집위장, 85년 문공차관, 86년 대통령 비서실 정무 제1수석비서관, 87년 대통령 비서실장, 88년 정무1장관, 88년 13대 민정당 국회의원, 88년 민정당 원내총무.중집위원.국회운영위장, 90년 정무1장관, 90년 민자당 원내총무.국회운영위장, 91-92년 민자당 사무총장.

☞ 문희갑(文熹甲): 1937년 경북 달성 출생, 66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졸업, 67년 경제기획원 사무관, 72년 미국 테네시 주립대학원 수료, 76년 경제기획원 예산국 기업예산과장, 77년 경제기획원 방위예산담당관, 78년 국방부 예산편성국장, 81년 경제기획원 경제개발예산심의관, 82년 경제기획원 예산실장, 85년 민정당 국책연구소 정책연구실장, 85년 12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 85-88년 경제기획원 차관, 86-88년 남북경제회담 수석대표, 88-90년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90년 13대 민자당 대구서갑 보궐선거 국회의원.

☞ 박준규(朴浚圭): 1925년 경북 달성 출생, 48년 서울대 문리대 정치외교과 졸업, 50년 미국 브라운대 대학원 수료, 53년 미국 컬럼비아대 박사과정 수료, 54년 서울대 문리대 교수, 60년 5대 민의원, 62년 부산일보사장, 63-71년 6.7대 공화당 국회의원, 67년 국회 외무위원장, 71년 정경연 이사장 겸 정경연구 발행인, 71년 8대 공화당 국회의원, 73-80년 9.10대 국회의원, 73년 공화당 정책위 의장, 79년 동 의장서리, 79년 IPU 명예종신의원, 83년 미국 버클리대 동북아문제연구위원, 87년 미국 동서문화센터 연구위원, 88년 13대 민정당 국회의원, 88년 남북국회회담 대표단장, 88-89년 민정당 대표위원, 90년 민자당 입당, 90년 국회의장.

☞ 박철언(朴哲彦): 1942년 대구 출생, 경북고 졸업, 65년 서울대 법대 법과 졸업, 67년 사법고시 합격, 69년 서울대 사법대학원 졸업, 69년 육군 법무관; 72년 부산지검 검사, 74년 법무부 검사, 77년 미국 조지워싱턴대 법과대학원 수학, 78년 서울지검 검사, 80년 국보위 법사위원, 80년 청와대 정무.법률 비서관, 85년 외교안보연 연구위원 겸 서울지검 특수2부장, 86년 법무연수원 연구위원, 88년 대통령 정책보좌관, 88년 13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 89년 정무1장관, 90년 한양대 법학 박사, 91년 미국 펜실베니아 디킨슨 법대 명예법학박사, 90-91년 체육청소년부 장관, 저서 '언론과 국가안보'.

☞ 서동권(徐東權): 1932년 영천 출생, 경북고 졸업, 57년 고대 법대 졸업; 61년 서울.광주.대구 지검 검사, 65년 대구지검 의성지청장, 69년 서울지검 검사, 73년 대구지검 부장검사, 75년 서울고검 검사, 78년 광주.대구 지검 차장검사, 80년 대구고검 차장검사, 80년 법무부 송무담당관 겸 대검 검사, 81년 동 보호국장, 81년 법무차관, 81년 대검 차장검사, 82년 서울고검장, 85년 검찰총장, 87년 변호사 개업, 89-92년 안기부장, 저서 '한국검찰사'

☞ 신상우(辛相佑): 1937년 양산 출생, 60년 고대 정치과 졸업, 60-68년 부산일보 정치부 기자, 70년 8대 신민당 국회의원, 72년 고대 경영대학원 수료, 73-80년 9.10대 신민당 국회의원, 81년 민한당 사무총장, 81년 11대 민한당 국회의원, 83년 민한당 부총재, 85년 민추협 부의장, 88년 13대 민주당 부산북구을 국회의원, 88년 국회 보사위원장, 90년 민자당 입당, 90년 민자당 당무위원, 저서 '원점에 서서', '고독한 증언'.

☞ 윤필용(尹必鏞): 1927년 경북 청도 출생, 49년 육사 졸업, 60년 육군대학 졸업, 61년 최고회의의장실 비서실장 대리, 63년 육본관리참모부 분석과장, 64년 방첩대장, 65년 방첩부대장, 68년 사단장, 70년 수경사령관, 73년 소장으로 예편; 80-86년 도로공사 사장, 87년 전매공사 이사장, 89년 담배인삼공사 이사장.

☞ 이낙선(李洛善): 1927년 경북 안동 출생, 53년 미국 포병학교 수료, 61년 동아대 정치과 졸업, 61년 최고회의 의장 비서관, 63년 대령으로 예편; 63년 대통령 민원비서관, 66년 국세청장, 69년 경희대 대학원 수료, 69-73년 상공장관, 72년 성균관대 명예경제학박사, 73-74년 건설장관, 75년 중국문화학원 명예철학박사, 76년 육영재단 감사, 77년 국제기능올림픽 한국위원회장, 77-79년 창원 기능대 이사장, 80년 롯데그룹 부회장, 81년 롯데상사 회장 겸 호텔롯데 사장, 83년 국세 동우회장.

☞ 이원조(李源祚): 1933년 대구 출생, 55년 경북대 사대 화학과 졸업; 56년 제일은행 입행, 72년 제일은행 이촌동.후암동.동교동.동대문.종로.서소문 지점장, 78년 제일은행 이사.영업부장.인사부장, 80년 제일은행 상무, 80년 국보위 자문위원, 80년 대통령 경제비서관, 80년 석유개발공사장, 82년 석유시추선 사장 회장, 86년 은행감독원장, 88년 13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 90년 민자당 입당.

☞ 이종찬(李鍾贊): 1936년 서울 출생, 60년 육사 졸업, 71년 소령으로 예편; 72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졸업, 73년 주영대사관 참사관, 80년 안기부 총무국장, 80년 안기부 기획조정실장, 80년 입법회의 의원, 80년 민정당 창당 준비위원, 81-88년 11.12대 국회의원, 81-85년 민정당 원내총무.국회운영위장, 82년 민족사관정립위장, 86년 한중문화협회장, 88년 13대 국회의원, 88년 정무1장관, 88년 민정당 사무총장, 90년 민자당 당무위원, 저서 '민족의 종을 울리며 민주의 탑을 쌓으며''개혁과 온건주의' '자유여 민주주의여'.

☞ 이후락(李厚洛): 1924년 경북 울산 출생, 51년 육본 정보국 차장, 52년 미국 병함교 고군반 수료, 54년 육본 병참반, 56년 국학대 법과 졸업, 57년 주미대사관 무관, 59년 국방부 기관장, 61년 소장으로 예편; 61년 대한공론 이사장, 61년 최고회의 공보실장, 63년 대통령 비서실장, 68년 과기정보센터 이사장, 70년 한국기원 총재, 70년 주일대사, 70-73년 중앙정보부장, 72-73년 남북조절위 공동위원장, 79년 10대 국회의원.

☞ 장덕진(張德鎭): 1934년 춘천 출생, 60년 고대 법대 졸업, 58-60년 고시 사법 행정 외교과 합격, 67년 서울대 사법대학원 졸업, 68년 재무부 이재국장 겸 대통령 비서관, 69년 재무부 재정차관보 겸 대통령 외자관리 수석비서관, 71년 8대 공화당 영등포갑 국회의원, 73년 농수산차관, 75년 경제기획원 차관, 77년 농수산부 장관, 82년 사회발전연구소 회장, 월간 '한국인' 발행, 84년 고대 명예경제학박사, 84-90년 농업진흥공사 이사장, 88년 대륙연구소 창립회장, 91년 대륙종합개발 주식회사 회장, 저서 '우리나라의 금융정책과 제도'.

☞ 장태완(張泰玩): 1931년 출생, 50년 육군종합학교 수료, 58년 조선대 법과 졸업, 71년 육군사 연구실장, 71년 군단참모장, 73년 수경사 참모장, 75년 사단장, 78년 육본 교육참모차장, 79년 수경사령관, 80년 소장으로 예편; 82년 한국증권전산 주식회사 사장, 89년 동 회장.

☞ 정승화(鄭昇和):

☞ 차지철(車智澈): 1934년 서울 출생, 6-9대 국회의원, 대통령 경호실장, 79년 10월 26일 김재규에게 살해당함.

☞ 최규하(崔圭夏): 1919년 원주 출생, 41년 일본 동경고 사문과 졸업, 43년 만주대 대학원 졸업, 45년 서울대 사대 교수, 48년 농림부 양정과장, 51년 외무부 통상국장, 52년 주일대표부 총영사.참사관.공사, 59년 외무차관, 64년 주 말레이시아 대사, 67년 외무장관, 70년 외대 명예문학박사, 71년 대통령 특별보좌관, 72년 남북조절위 서울측 대표, 75년 국무총리 서리, 76년 국무총리, 79년 대통령 권한대행, 79년 10대 대통령, 85년 강원대 명예법학박사, 81-88년 국정자문회의 의장.

☞ 허문도(許文道): 1940년 고성 출생, 64년 서울대 농대 졸업, 64년 조선일보 기자, 71년 일본 동경대 대학원 사회과 졸업, 74년 동경대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74년 조선일보 동경특파원.외신부 차장, 79년 주일대사관 공보관, 80년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 80년 국보위 문공분과위원, 80년 대통령 비서실 정무 제1비서관, 82년 문공부 차관, 84년 대통령 비서실 정무 제1수석비서관, 86-88년 통일원 장관.


 

하나회 명단

 

< 11기 >

전두환(全斗煥): 1931년 경남 합천 출생, 대구공고 졸업, 55년 육사 졸업, 59년 부관학교 졸업, 60년 미국 보병학교 수료, 61년 육본 특전감실 기획과장 대리, 61년 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 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63년 육본 인사참모부 근무, 65년 육군대학 졸업, 66년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 67년 수경사 30대대장, 69년 육참총장실 수석부관, 70년 주월백마부대 연대장, 71년 제1공수특전단장, 76년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 78년 1사단장, 79-80년 보안사령관, 80년 중앙정보부장 서리, 80년 국보위 상임위원장, 80년 대장으로 예편; 80년 11대 대통령, 81-88년 민정당 총재, 84년 미국 페퍼다인대 명예정치학박사, 81-88년 12대 대통령

노태우(盧泰愚): 1932년 대구 출생, 경북고 졸업, 55년 육사 졸업, 59년 미국 특수전학교 심리전 과정 수료, 68년 육군대학 졸업, 74년 공수특전여단장, 78년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79-80년 수경사령관, 80년 국보위 상임위원, 80-81년 보안사령관, 81년 대장으로 예편; 81년 정무제2장관, 82년 초대 체육장관, 82년 내무장관, 83-86년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 84년 대한체육회장 겸 대한올림픽위원장, 85년 12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 85년 민정당 대표위원, 87년 민정당 총재, 89년 미국 조지워싱턴대 명예법학박사, 90년 민자당 총재, 88-92년 13대 대통령

김복동(金復東): 1933년 경북 청송 출생, 경북고 졸업, 55년 육사 졸업, 69-70년 주월사 보안대장, 73년 육사생도대장, 75년 3군사 작전참모, 77년 5사단장, 79년 3군사 참모장, 80년 육사교장, 82년 중장으로 예편; 82년 서울대 경영대학원 수료, 82년 광업진흥공사 사장, 85년 연대 행정대학원 졸업, 88년 국제문화연구소 회장, 89년 미국 남캐롤라이나대 명예법학박사, 민자당 대구동갑 지구당위원장

정호용(鄭鎬溶): 1932년 대구 출생, 경북고 졸업, 55년 육사 졸업, 63년 서울대 대학원 졸업, 67년 육군대학 졸업, 74년 공수여단장, 78년 사단장, 79년 특전사령관, 80년 국보위 상임위원, 81년 육참차장, 81년 군사령관, 83-85년 육군참모총장, 85년 대장으로 예편; 87년 내무장관, 87년 국방장관, 13대 대구서갑 민정당 국회의원, 저서 '용병의 원리와 실제'

권익현(權翊鉉): 1934년 경남 산청 출생, 55년 육사 졸업, 67년 육군보안사 정보처장, 69년 육군대학 졸업, 69년 주월맹호사단 대대장, 70년 육참총장 보좌관, 72년 연대장, 73년 윤필용 사건으로 투옥, 74년 대령으로 예편; 76년 연대 경영대학원 수료, 76년 연합철강 상임고문, 78년 삼성정밀 전무, 80년 제2무임소 장관 보좌관, 81년 11대 국회의원, 82년 민정당 사무총장, 84년 민정당 대표위원, 85년 12대 민정당 국회의원, 85년 한일의원연맹 회장, 85년 민정당 상임고문, 92년 민자당 전국구 국회의원

남중수(南仲守): 55년 육사 졸업

노정기(盧正基): 1935년 장흥 출생, 55년 육사 졸업, 68년 육군대학 졸업, 68-69년 주월맹호사단 공병대 대장, 71년 수경사 군수참모, 73-75년 제1207건설공병단장, 78년 제2공병여단장, 80년 한미연합사 공병참모 겸 군사정전위 한국군 대표, 소장; 82-89년 주미대사관 국방무관て정무공사, 89년 주 필리핀 대사

☞박갑룡(朴甲龍): 55년 육사 졸업

☞백운택(白雲澤): 55년 육사 졸업, 71방위사단장

☞손영길(孫永吉): 경남 울산 출생, 55년 육사 졸업, 61년 5て16 당시 박정희 장군의 전속부관, 73년 윤필용 사건으로 투옥, 준장으로 예편; 동주산업회장

☞안교덕(安敎德): 1933년 경북 울진 출생, 55년 육사 졸업, 59년 서울대 문리대 영문과 졸업, 56-60년 육사 영어과 교수, 68년 맹호사단 작전참모.대대장, 70년 미8군 연락장교단장, 72년 연대장, 73년 군사령부 작전과장, 74년 대령으로 예편; 76년 정우개발 대표이사, 정우개발 부회장, 81년 11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 82년 한-네덜란드 의원친선협회 회장, 85년 농업개발공사장, 86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수료, 87년 농수산물유통공사장, 90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고위정책과정 수료, 91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

☞최성택(崔性澤): 1931년 부산 출생, 경남고 졸업, 55년 육사 졸업, 76년 육본 교육참모부 개인교육처장, 77년 사단장, 79년 육본 정보참모부 차장, 79년 합참2국장, 81년 국방부 정보본부장, 84년 중장으로 예편; 84-85년 미국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연수, 86-90년 석유개발공사 사장



< 12기 >

☞김홍진: 56년 육사 졸업

박세직(朴世直): 1933년 경북 칠곡 출생, 56년 육사 졸업, 56년 육사 교관, 60년 서울대 문리대 졸업, 69년 육군대학 졸업, 74년 수경사 작전참모, 76년 대통령 안보담당특별보좌관, 78년 국방부장관 보좌관, 79년 군사정보참모, 79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수료, 80년 사단장, 80-81년 수경사령관, 81년 소장으로 예편; 81년 서울대 경영대학원 수료, 82년 한전 수석부사장, 82년 안기부 2차장, 85년 총무처 장관, 86년 체육장관, 86-88년 서울올림픽 및 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원장, 88년 안기부장, 89년 미국 타우슨대 명예인문학박사, 89년 국민체육진흥공단 고문, 90-91년 서울시장, 91년 미국 남캘리포니아대 대학원 졸업, 민자당 구미 지구당위원장

박준병(朴俊炳): 1933년 충북 옥천 출생, 대전고 졸업, 56년 육사 졸업, 60년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졸업, 60년 육사 교수, 70년 육군대학 졸업, 79년 사단장, 80년 육본 인사참모부장, 81-84년 보안사령관, 84년 대장으로 예편; 84년 국민대 대학원 사학과 졸업, 85년 12대 민정당 국회의원, 85년 민정당 국책조정실장, 87년 국회 보사위장, 88년 13대 국회의원, 90년 민자당 입당, 90년 민자당 사무총장, 91년 민자당 당무위원

박희도(朴熙道): 1934년 경남 창녕 출생, 56년 육사 졸업, 69년 육군대학 졸업, 72년 연대장, 76년 군수지원사 참모장, 76년 공수여단장, 80년 사단장, 81년 특전사령관, 82년 제1군단장, 82년 연대 경영대학원 졸업, 83년 참모차장, 83년 군사령관, 85-88년 육군참모총장, 88년 대장으로 예편; 88년 서울대 AMP과정 수료, 저서 '영원한 삶을 위하여'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 서다'

안필준(安弼濬): 1932년 충북 중원 출생, 청주고 졸업, 56년 육사 졸업, 77년 육본 교육훈련처장, 78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발전정책과정 이수, 80년 사단장, 81년 육본 인사운영감, 82년 육본 인사참모부장, 82년 연대 경영대학원 졸업, 83년 군단장, 84-85년 보안사령관, 85년 야전군사령관, 87년 대장으로 예편; 87년 한국청소년연맹 총재, 88년 석탄공사장, 91년 보사부 장관

☞이광근: 56년 육사 졸업

☞임인식: 56년 육사 졸업

장기오(張基梧): 1932년 서울 출생, 56년 육사 졸업, 75년 연대장, 77년 특전사 작전처장, 78년 공수여단장, 81년 사단장, 82년 동국대 대학원 졸업, 83년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83년 특검단장, 84년 군단장, 85년 육군 교육사령관, 86년 중장으로 예편; 86년 총무처 차관, 87-88년 총무처 장관, 89년 근로복지공사 이사장

☞정동철(鄭東喆): 1933년 경북 칠곡 출생, 대건고 졸업, 56년 육사 졸업, 61-64년 육사 교관, 66년 서울대 상대 경영과 졸업, 71-73년 서울지구 보안부대장.주월맹호사단.대대장 사단포병사령관, 73년 대령으로 예편; 78년 호텔신라 사장, 80년 감사원 사무차장, 81년 노동부 차관, 85년 한국문화진흥 사장, 87년 한국산업안전공단 이사장

최웅(崔雄): 1934년 서울 출생, 56년 육사 졸업, 63년 외대 노어과 졸업, 68년 대대장, 74년 연대장, 77년 특전여단장, 81년 사단장, 82년 특전사령관, 84년 특명검열단장, 85년 합참본부장, 85년 외대 무역대학원 국제경영과 졸업, 86년 중장으로 예편; 86년 외교안보연 연구원, 87년 주 파키스탄 대사, 90년 외교안보연 연구위원, 92년 주 폴란드 대사

☞황인수(黃仁秀): 경남 사천, 경남상고 졸업, 중장, 육본 정보참모부장, 육사교장, 사회정화위장, 전 국방부차관



< 13기 >

☞권영휘(權榮暉): 경북 의령, 소장, 육본수송사령관, 창원기계공단 이사장

☞박종남(朴鍾南): 전남 목포, 대령, 새서울종합용역 대표

☞신재기(辛再基): 1933년 경남 창녕 출생, 57년 육사 졸업, 68년 육군대학 졸업, 73년 윤필용 사건으로 투옥, 73년 대령으로 예편; 78년 한국트랜스주식회사 총무부장.이사, 80년 한국강업주식회사 사장, 80년 수협중앙회 상임이사.부회장, 84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수료, 88년 13대 민정당 국회의원, 90년 민자당 입당, 90년 농어촌발전특별위원장

오한구(吳漢九): 1934년 경북 봉화 출생, 경북고 졸업, 57년 육사 졸업, 68년 서울대 상대 경영과 졸업, 71년 육군대학 졸업, 71년 육군대학 교관, 77년 대령으로 예편; 77년 포항제철 관리부장.서울사무소장.이사, 81-88년 11.12대 민정당 국회의원, 81년 민정당 원내부총무, 82년 대한산악연 회장, 83년 민정당 대구.경북도지부위원장, 85년 국회 경제과학위원장, 88년 13대 민정당 국회의원, 90년 민자당 입당.탈당, 90년 국회 내무위원장

☞우경윤(禹慶允): 경북 예천, 대령, 범죄수사단장, 전 덕평골프장 사장

☞윤태균(尹泰均): 1935년 경북 청송 출생, 경북고 졸업, 57년 육사 졸업, 73년 수경사 정보참모, 79년 서울대 학군단장, 80년 육사 참모장, 82년 37사단장, 83년 한양대 행정대학원 졸업, 84년 육본 정보참모부장, 85년 국방부 정보본부장, 87년 중장으로 예편; 88-91년 한국도로공사장, 90년 도로협회장, 92년 13대 민자당 전국구 국회의원

이우재(李祐在): 1934년 서울 출생, 57년 육사 졸업, 68년 육군대학 졸업, 69년 사단 통신참모, 73년 국방대학원 졸업, 76년 군단 통신참모, 78년 통신단장, 80년 육본 통신차감, 80년 국보위 교통체신분과위원장, 80년 입법회의 의원, 81년 준장으로 예편; 81년 11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 82-89년 전기통신공사장, 83년 한양대 행정대학원 졸업, 83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발전정책과정 수료, 85년 한국전자통신연 이사장, 86년 국제사격연 부회장, 87-91년 아세아사격연 부회장, 89-90년 체신부 장관

정동호(鄭東鎬): 1935년 경남 의령 출생, 마산고 졸업, 57년 육사 졸업, 61년 제1공수특전단 지대장, 65년 주월군수단장, 69년 육군대학 교관, 76년 연대장, 80년 대통령 경호실장, 81년 8사단장, 82년 연대 행정대학원 졸업, 83년 육본 인사참모부장, 83년 5군단장, 85년 육참차장, 86년 중장으로 예편; 86-88년 도로공사장, 도로협회장, 88년 13대 민정당 국회의원, 89년 낙하산협회장, 90년 민자당 입당, 90년 민자당 상무위원회 수석부의장

정진태(鄭鎭泰): 1934년 충남 예산 출생, 57년 육사 졸업, 61년 서울대 문리대 외교과 졸업, 61년 육사 교수, 76년 수도경비사령부 작전참모, 79년 제1군단 참모장, 80년 육본 인사참모부 인력관리처장, 81년 보병 제9사단장, 83년 육본 정보참모부장, 84년 정보사령관, 85년 고대 경영대학원 졸업, 85년 수도군단장, 87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88년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90년 비상기획위 위원장, 대장

☞조명기(趙明紀): 대구, 소장, 헌병감, 지하철공사감사

☞최문규(崔文奎): 대전, 대전고 졸업, 중장, 육본 작전참모부장, 수도군단장, 국방대학원장, 육사교장, 비상기획위 부의장, 석유개발공사 이사장

최세창(崔世昌): 1934년 대구 졸업, 경동고 졸업, 57년 육사 졸업, 57년 육군 소위, 71년 여단작전참모, 74년 연대장, 76년 군단작전참모, 77년 특전여단장, 80년 사단장, 81-83년 수방사령관, 83년 군단장, 84년 한양대 행정대학원 졸업, 84년 육참차장, 85년 3군사령관, 87년 합참의장, 89년 대장으로 예편; 90년 광업진흥공사장, 91년 국방장관

☞황진기(黃鎭祺): 대구 출생, 경북고 졸업, 57년 육사 졸업, 73년 윤필용 사건으로 예편, 대령



< 14기 >

☞김충욱: 58년 육사 졸업

☞문영일: 58년 육사 졸업

☞박정기(朴正基): 1935년 대구 출생, 58년 육사 졸업, 70년 육군대학 졸업, 73년 윤필용 사건으로 중령으로 예편; 73년 (주)종근당 부장, 76년 정우개발 상무, 81년 정우개발 사장, 81년 평통자문위원, 82년 한국중공업 사장, 83-87년 한국전력 사장, 83년 에너지연 이사장, 84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발전정책과정 수료, 84-87년 원자력산업회의 회장, 84년 전기협회장, 85년 육상연맹 회장, 85년 KOC 상임위원, 89년 한덕생명보험 회장, 91년 육상연맹 집행이사, 저서 '어느 할아버지의 평범한 이야기'

☞배명국(裵命國): 1934년 경남 진해 출생, 58년 육사 졸업, 62년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 졸업, 62년 육사 교수, 65년 주월사 대대장, 70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졸업, 72년 중령으로 예편; 72년 청와대 민정비서실 근무, 81-88년 11.12대 민정당 국회의원, 81년 국회 건설위장, 83년 국회 상공위장, 85년 민정당 중집위원, 88년 민정당 진해.의창 지구당위원장, 88년 지역개발연구소 이사장

☞신쌍호: 경북고 졸업, 58년 육사 졸업

☞신우식(申佑湜): 경북 문경, 문경고 졸업, 소장, 관광공사 감사

안무혁(安武赫): 1935년 황해 안악 출생, 58년 육사 졸업, 62년 서울대 대학원 졸업, 62년 육사 전임강사, 71년 공병여단장, 73년 육군대학 교관, 78년 건설공병단장, 80년 국보위 건설분과위원장, 80년 입법회의 경제 제2전문위원, 81년 공병여단장, 81년 준장으로 예편; 81년 사회정화위원장, 82년 국세청장, 87-88년 안기부장, 90년 한국발전연구원 이사장, 14대 민자당 전국구 후보 8번

☞이경종(李暻鍾): 1936년 서울 출생, 58년 육사 졸업, 62년 미국 퍼듀대 대학원 토목과 졸업, 62-73년 육사 토목과 조교수.부교수, 70-75년 서울시 수도행정자문위원, 73년 중앙대 부교수, 75년 한국해외건설사업담당 이사, 79년 극동건설주식회사 기술담당 상무, 81년 정우엔지니어링 사장, 81년 정우개발 부사장, 83년 정우개발 사장, 86년 (주)한양 사장, 88년 양간종합산업주식회사 회장, 91년 양간화학공업주식회사 명예회장

이종구(李鍾九): 1935년 대구 출생, 경북고 졸업, 58년 육사 졸업, 76년 한양대 행정대학원 졸업, 81년 사단장, 82년 국방대학원 안보과정 졸업, 83-85년 수방사령관, 85-86년 보안사령관, 86년 2군사령관, 88-90년 육군참모총장, 90년 대장으로 예편; 90-91년 국방장관

☞이철희(李哲熙): 1934년 경남 진해 출생, 58년 육사 졸업, 62년 미국 퍼듀대 대학원 전기과 졸업, 62년 육사 전자과 교수, 73년 숭실대 전산과 교수, 88년 중앙대 전산이학박사, 88년 숭실대 정보과학 대학원장, 88-90년 정보과학회장, 저서 '소프트웨어공학' '컴퓨터 구조론'

이춘구(李春九): 1934년 충북 청원 출생, 58년 육사 졸업, 75년 국방대학원 졸업, 75년 수경사 정보참모, 76년 사단 포병대장, 80년 국보위 재무분과위원, 80년 국보위 사회정화위원장, 81년 준장으로 예편; 81년 11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 82년 내무부 차관, 85년 12대 민정당 국회의원, 86년 민정당 사무총장, 87년 대통령선거대책본부장, 88년 13대 민정당 국회의원, 88년 내무부 장관, 88년 민정당 충북지부위원장, 89년 민정당 사무총장, 90년 민자당 입당, 90년 한-우루과이 의원친선협회장, 92년 민자당 사무총장

☞장기하(張基夏): 1933년 경북 울진 출생, 58년 육사 졸업, 74년 국방대학원 졸업, 74년 국방대학원 교수, 78년 연대장, 82년 한양대 행정대학원 졸업, 82년 사단장, 84년 소장으로 예편; 84년 청보식품 사장, 85년 (주)진로 고문, 88년 (주)진로 사장, 90년 진로그룹부문 부회장, 91년 진로그룹 회장

☞장홍열(張洪烈): 1935년 강원도 명주 출생, 강능농고 졸업, 58년 육사 졸업, 77년 명지대 대학원 졸업, 81년 정보사 참모장, 82년 육본 인사운영감, 83년 육군 제50사단장, 85년 교육사 참모장, 86년 육본 관리참모부장, 87년 국방부 조달본부장, 89년 중장으로 예편; 89년 조달청장

정도영(鄭棹永): 1935년 경북 문경 출생, 문경고 졸업, 58년 육사 졸업, 74년 육군대학 졸업, 79년 보안사령부 1처장, 80년 보안사 참모장, 82년 한양대 행정대학원 졸업, 85년 국방대학원 경영관리과정 수료, 85년 소장으로 예편; 85년 평통자문회의 상임위원, 86-89년 사회정화위원장, 89년 성업공사장, 90년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91년 부동산신탁 주식회사 사장, 자유총연맹 사무총장

☞최종국: 58년 육사 졸업



< 15기 >

☞강자화(姜資和): 59년 육사 졸업, 군인공제회 관리이사

고명승(高明昇): 전북 부안, 전주사범 졸업, 대장, 84년 육본 인사참모부장, 85-86년 수방사령관, 86-87년 보안사령관, 군사령관, 민자당 부안 지구당위원장

☞권병식(權丙植): 1934년 경북 영일 출생, 경북고 졸업, 59년 육사 졸업, 65년 연대 상경대 경영과 졸업, 66년 연대 대학원 졸업, 81년 육본 인사관리처장, 82년 수도경비사 참모장, 83년 보병 제26사단장, 85년 육군 제3사관학교장, 86-87년 수방사령관, 87년 육군참모차장, 88년 육군 교육사령관, 88년 합동참모본부장, 90년 중장으로 예편; 91년 한국도로공사 사장

☞김상구(金相球): 경북 상주, 수경사 포병대대장, 석유개발공사 이사, 호주대사, 12대 민정당 국회의원

☞김중영: 59년 육사 졸업

☞나중배(羅重培): 충남 예산, 대전고 졸업, 대장, 사단장, 육본 정책기획실장, 군단장,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주 사우디아라비아 대사

민병돈(閔丙敦): 서울, 휘문고 졸업, 중장, 80년 국보위 내무위원, 육본정보참모, 특전사령관, 육사교장

☞박태진(朴泰珍): 1935년 부산 출생, 59년 육사 졸업, 75년 육군대학 졸업, 82년 방공포병 1여단장, 83년 주일수석무관, 87년 방공포병사령관, 87년 소장으로 예편; 87년 외교안보연 연구위원, 88년 주 요르단 대사, 91년 외교안보연 연구위원

☞이대희(李大熙): 1935년 경북 예천 출생, 경북고 졸업, 59년 육사 졸업, 72년 대대장, 75년 수경사 인사참모, 78년 연대장, 82년 동국대 행정대학원 졸업, 83년 사단장, 85년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85년 육본 인사참모부장, 87년 군단장, 89년 특명검열단장, 90년 중장으로 예편; 90년 병무청장

☞이상수(李相秀): 59년 육사 졸업

이진삼(李鎭三): 1937년 충남 부여 출생, 부여고 졸업, 59년 육사 졸업, 77년 국방대학원 졸업, 77년 연대장, 78년 사격지도단장, 80년 공수특전여단장, 82년 사단장, 85년 정보사령관, 86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수료, 87년 군단장, 88년 육군참모차장, 89년 군사령관, 90-91년 육군참모총장, 91년 대장으로 예편; 91년 체육청소년부 장관

☞이한종(李漢鍾): 59년 육사 졸업, 정우개발사장, 국방대학원 교수



< 16기 >

☞김정룡(金正龍): 경북 문경, 문경고 졸업, 소장, 보안사 참모장, 국방부 정보본부차장, 수자원공사 감사

☞김충식: 60년 육사 졸업

☞송응섭(宋膺燮): 대구, 중앙고 졸업, 대장, 합참 제1차장, 남북고위급회담 군사대표

☞신말업(申末業): 경남 울주, 부산고 졸업, 대장, 사단장, 참모차장, 전 군사령관

☞양현두: 60년 육사 졸업

☞이지윤: 60년 육사 졸업

☞이필섭(李弼燮): 1924년 당진 출생, 60년 육사 졸업, 79년 연대장, 사단장, 군단장, 2군사령관, 87-89년 육사교장, 91년 합참의장

장세동(張世東): 1936년 전남 고흥 출생, 60년 육사 졸업, 81년 대통령 경호실장, 84년 중장으로 예편; 85-87년 안기부장

☞정만길(丁萬吉): 서울 출생, 서울고 졸업, 중장, 5공수여단장, 7사단장, 육본 작전참모부장, 5군단장, 국방대학원장, 광업진흥공사 사장

정순덕(鄭順德): 1935년 경남 충무 출생, 60년 육사 졸업, 74년 육군대학 졸업, 78년 국방대학원 졸업, 80년 군단참모장, 81년 준장으로 예편; 81년 11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 82년 대통령비서실 정무제1수석비서관, 85년 연대 경영대학원 수료, 85년 12대 민정당 국회의원, 85년 민정당 사무총장, 87년 한-모로코 의원친선협회장, 88년 13대 민정당 국회의원, 88년 국회 재무위원장, 88년 민정당 경남지부위원장, 90년 민자당 입당, 90년 민자당 사무총장

☞최원규: 60년 육사 졸업

최평욱(崔坪旭): 1937년 경남 남해 출생, 60년 육사 졸업, 80년 국보위 운영위원, 86년 육본 인사참모부장, 87-88년 보안사령관, 88년 교육사령관, 89년 중장으로 예편; 90년 산림청장, 91년 철도청장



< 17기 >

☞강명오: 61년 육사 졸업

☞김근준(金根俊): 61년 육사 졸업, 전 군단장

김진영(金振永): 1938년 경남 충무 출생, 부산고 졸업, 61년 육사 졸업, 73년 미국 지휘참모대 졸업, 79년 수방사령부 33경비단장, 79년 수방사 작전참모, 83년 수방사 작전처장, 84년 수도기계화 사단장, 86년 육군3사관학교장, 87-89년 수방사령관.교육사령관, 90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91-93년 육군참모총장, 대장, 91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수료

☞김태섭: 61년 육사 졸업, 중장, 7군단장

☞류근하(柳根夏): 61년 육사 졸업

☞안현태(安賢泰): 전 대통령 경호실장

☞이문석(李文錫): 서울, 경복고 졸업, 대장, 특전사령관, 참모차장, 1군 사령관

☞이병태: 61년 육사 졸업

☞이해룡: 61년 육사 졸업

이현우(李賢雨): 대구 출생, 61년 육사 졸업, 80-81년 수방사령부 30단장, 87년 육본 인사참모부장, 대통령 경호실장, 소장

☞임인조(林寅造): 61년 육사 졸업, 87년 육본 인사참모부장

허삼수(許三守): 1936년 부산 출생, 부산고 졸업, 61년 육사 졸업, 76년 연대 경영대학원 수료, 79년 보안사 인사처장, 80년 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 간사, 80년 준장으로 예편; 80-82년 대통령 비서실 사정수석비서관, 83년 미국 하와이대 동서문화센터에서 연수, 민자당 부산동구 지구당위원장

허화평(許和平): 1937년 경북 포항 출생, 포항고 졸업, 61년 육사 졸업, 육군대대장, 사단작전참모, 특명검열단 검열관,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준장으로 예편; 82년 대통령 정무 제1수석비서관, 현대사회연구소장, 경북 포항 무소속 후보



< 18기 >

☞구창회(具昌會): 경남 진주, 경남고 졸업, 대장, 88년 육본 인사참모부장, 89-90년 수방사령관, 90-91년 보안사령관, 3군사령관

☞김재창(金在昌): 대구, 중장, 군단장, 합참 작전실장

☞김정헌(金正憲): 대구, 중장, 육사교장

☞배대웅: 62년 육사 졸업

성환옥(成煥玉): 1938년 경북 영천 출생, 대구사범 졸업, 62년 육사 졸업, 75년 사단 헌병대장, 77년 육본 헌병감실 작전기획담당, 79년 육본 헌병대장, 79년 육본 헌병감실 기획과장, 79년 수경사 헌병단장, 82년 국방부 범죄 수사단장, 83년 육본 헌병감, 85년 준장으로 예편; 86년 대통령 경호실 차장, 90년 감사원 사무총장

☞심준석: 62년 육사 졸업

☞이승남: 62년 육사 졸업

☞이시용(李時容): 1938년 의령 출생, 62년 육사 졸업, 62년 육군 지휘관 및 참모, 77년 주서독대사관 국방무관, 80년 준장으로 예편; 81년 주 라이베리아 대사, 83년 미국 하와이동서문화센터 연구원, 84년 미국 하와이대 대학원 정치과 졸업, 84년 외교안보연 연구위원, 85년 주 오스트리아 대사, 89년 외교안보연 연구위원, 90년 주 로마교황청 대사

이학봉(李鶴捧): 1938년 부산 출생, 경남고 졸업, 62년 육사 졸업, 77년 보안사 과장, 80년 보안사 처장, 80년 준장으로 예편; 80년 대통령 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86년 안기부 2차장, 88년 민정당 국책조정위 상임위원, 88년 13대 민정당 국회의원, 90년 민자당 입당

☞정태화(鄭泰和): 소령, 73년 윤필용 사건으로 예편

조남풍(趙南豊): 부산, 중장, 88-90년 보안사령관, 교육사령관



< 19기 >

☞김상준(金相駿): 63년 육사 졸업, 81-82년 수방사령부 30단장

☞김정환: 63년 육사 졸업

☞김진선(金鎭渲): 충북 괴산 출생, 괴산고 졸업, 63년 육사 졸업, 90년 육본 인사참모부장, 90-91년 수방사령관, 참모차장, 중장

☞김택수: 63년 육사 졸업

☞김학주: 63년 육사 졸업

☞노석호(盧錫鎬): 중앙고 졸업, 63년 육사 졸업, 중령, 삼성중공업 부사장, 삼성항공 부사장

서완수(徐完秀): 대구 출생, 경북고 졸업, 63년 육사 졸업, 80년 국보위 사회정화위원, 특전사령관, 91-93년 기무사령관, 중장

☞이택형: 63년 육사 졸업

☞장석규(張錫奎): 서울, 경복고 졸업, 63년 육사 졸업, 보안사 보안처장, 보안사 참모장, 소장, 성업공사 사장

☞최부웅: 63년 육사 졸업

☞최석림(崔錫林): 63년 육사 졸업, 전 헌병감, 소장

☞최윤수: 63년 육사 졸업

☞최윤식: 63년 육사 졸업, 헌병대령, 경호실 안전처장, 소장

☞최준식: 63년 육사 졸업



< 20기 >

김길부: 64년 육사 졸업

김무웅(金武雄): 64년 육사 졸업, 소장, 한미연합사

김종배: 64년 육사 졸업

안광열: 64년 육사 졸업

안병호(安秉浩): 경남 진주 출생, 진주고 졸업, 64년 육사 졸업, 90-91년 육본 인사참모부장, 91-93년 수방사령관, 중장

이현부: 64년 육사 졸업

장호경: 64년 육사 졸업

함덕선: 64년 육사 졸업

허청일(許淸一): 1941년 경북 경산 출생, 경북고 졸업, 64년 육사 졸업, 81년 대령으로 예편; 81년 11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 81년 민정당 원내부총무.의원실장, 83년 연대 행정대학원 졸업, 83년 민정당 총재비서실장.중집위 상임위원, 83년 대륜교육재단 이사, 85년 12대 민정당 국회의원, 87년 민정당 윤리위원장, 91년 기계공업진흥회장, 저서 '국사봉 더운 가슴이여'


* http://blog.daum.net/enature/11937137 - 댓글 amy 2010.05.12 00:45 - 80년도 이후 어려운 세월을 보내고 있는 이진백씨. 이름이 나올 곳은 보안사 휘발유 유용사건 이진백 군수참모 자리 밖에 없는데 김진백으로 나와 있습니다. 서창녕씨에게 전화하여 김을 이씨로 고쳐 달라고 했고 고쳐졌다고 했는데 곳곳의 인용문등등에서는 계속 김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씨로 고쳐 져야합니다. 부탁드립니다. 이글을 쓰는 사람은 가족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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