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외고가 차지한 경기고 명성
뺑뺑이 때문에 사라진 명문고와 새로 생긴 명문고
1970년 서울대 상대에 입학한 경기고 졸업생은 40여 명이었다. 이 해에 경기고는 서울대에 모두 300명 이상의 합격자를 냈다. 서울고·경복고에서는 200명 이상이 입학했다. 또 부산의 경남고·부산고, 인천의 제물포고 등이 100명이 넘는 합격자를 배출했다. 당시 서울대 입학생의 절반 이상은 세칭 명문고 출신이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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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고 졸업생 절반이 서울대 입학
‘뺑뺑이 1기’(고교 평준화 세대)가 서울대에 입학하는 1977년까지 이 같은 상황은 비슷하게 전개됐다. 세칭 명문고에서는 동문 선후배 사이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오갔다. ‘경기고 졸업생의 절반 이상이 서울대에 들어갔다’ ‘어떤 해에는 경기고 졸업식과 서울대 입학식 날짜가 겹쳤는데 경기고 졸업식이 끝나고 나서야 서울대 입학식을 할 수 있었다’ ‘서울대가 한때 서울고의 본교라고 했다’ ‘경남고에서는 한 기수에 300명이 서울대로 들어가던 때도 있었다’ ‘경북고는 대통령·국무총리·국회의장·대법원장을 모두 배출했다’ ‘뺑뺑이’ 덕에 운좋게 명문고에 다닌 후배들에게 비평준화 시절에 대한 선배의 이야기는 ‘전설’이었다.
1974년까지 서울에서는 경기고·서울고·경복고가 명문고의 자존심을 걸고 경쟁했다. 오랜 전통의 공립학교(경성제1고등보통학교)인 경기고가 선두에 있었지만 1946년 개교한 신흥 명문공립학교인 서울고에서는 경기·서울 대신 서울·경기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연세대와 고려대의 대항전을 두고 연고전이냐, 고연전이냐를 말하는 것과 비슷했다. 흔히 “정계와 재계에서는 경기고가, 언론계와 학계·의료계에서는 서울고가 돋보인다”는 말이 나왔다.
여기에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였던 경복고는 서울고와 경쟁했다. 한 경복고 출신 졸업생은 경기고를 서울대에, 서울고를 연세대에, 경복고를 고려대에 비유했다. 경기고는 공부만 하는 학생, 서울고는 공부도 잘하면서 세련되게 잘 노는 학생, 경복고는 촌스럽지만 우직하며 공부도 잘한 학생이 많았다는 것이다. 서울고로 갈 실력이 있는 우수한 학생들이 경복고의 학풍 때문에 경복고로 많이 왔으며, 서울대 입학률에서도 서울고와 경복고의 성적이 비슷했다고 말한다. 여고도 마찬가지였다. 경기여고와 이화여고라는 서열이 존재했다.
부산에서는 경남고와 부산고가 제1명문고를 놓고 다퉜다. 부산고는 경남 지역의 시골 농사꾼 자녀가 많이 다녔다고 해서 ‘부산농고’라고 불렸다. 또 경남고는 부산 시내의 상인 자녀가 많이 다녔다고 하여 ‘경남상고’라고 불렸다. 두 학교는 서울대 입학률에서도 비슷한 성적을 보였다.
대구에서는 경북고의 성적이 압도적이었다. 평준화 직전인 경북고 57회, 58회에서는 서울대에 각각 152명과 153명이 합격했다. 특히 경북고 58회는 서울·부산보다 1년 늦게 평준화가 실시되면서 서울·부산에서도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입학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런 ‘전설적인’ 상황은 고교 평준화 정책이 실시되면서 눈 녹듯이 사라졌다. 1981년 서울대 합격자 분포를 보면 가장 많은 학생을 배출한 학교는 전주고로 178명이었다. 전주고 다음으로 대전고·진주고·마산고 등이 각각 140명 이상씩 무더기 합격자를 냈다. 춘천고와 청주고도 70명 이상의 합격생을 배출했다. 이들 지역은 서울·부산(1974년 평준화 실시)과 대구·광주·인천(1975년 평준화 실시)에 비해 뒤늦게 평준화 대열에 들어갔다. 그 때문에 아직 고입 시험을 치른 우수 학생이 많았다.
서울에서는 대일고가 89명의 합격자를 냈고, 중앙고·경성고·서라벌고·우신고·여의도고·동성고 등이 50명 이상씩, 충암고·영훈고·보성고·한성고가 40명 이상씩의 합격자를 냈다. 경기고·서울고는 겨우 40명 이상씩의 합격자를 내, 뺑뺑이 5년차 졸업생은 서울에서도 3류 고등학교로 밀려나는 수모를 겪었다.
강남8학군 새로운 명문고로 등장
평준화 지역의 틈을 비집고 새로운 명문고가 부상했다. 서울과 인천 사이에 자리 잡은 부평고가 양 지역의 인재를 끌어모아 89명의 합격자를 냈다. 평준화를 실시한 이후 불과 몇 년 사이에 상전벽해와 같은 대격변이 일어난 것이다.
이후 다른 지방 도시에서도 평준화가 실시되면서 변화가 생겼다. 대전고·전주고·춘천고·청주고·마산고·제주일고가 1979년 평준화 실시로 명문고의 이름을 서서히 잃기 시작했으며, 진주고도 1981년 평준화 실시로 예전의 명성을 지키지 못했다.
서울 강남에 고급 아파트 촌이 형성되면서 강남8학군의 고등학교가 명문고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옛 명문고인 경기고와 서울고는 평준화의 설움을 딛고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예전의 명성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지만 명문고의 이름을 유지할 수는 있었다.
특목고가 등장하면서 명문고의 판도는 또다시 크게 바뀌었다. 1984년 개교한 대원외고는 1987년 1회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명문고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대일외고, 서울과학고의 졸업생도 서울대에 많이 입학했다. 1994년에는 대원외국어고에서 186명, 서울과학고에서 132명이 서울대에 입학했다. 예전 ‘뺑뺑이’ 이전의 경기고·서울고·경복고에 맞먹는 위치를 얻은 셈이다.
아직 평준화되지 않은 수도권 신도시와 지방 소도시의 학교들도 명문고의 이름을 대신 차지했다. 분당, 일산, 부천, 안양, 과천의 학교들이 실력을 발휘했다. 분당 서현고, 일산 백석고, 안양의 안양고는 2002년 평준화가 되기 전까지 수도권 3대 명문고로 이름을 떨쳤다.
2000년대 들어서도 특목고가 명문고의 맨 앞자리를 차지했고 강남 8학군에 속한 학교가 뒤를 이었다. 지방에서는 강남 8학군과 유사하게 형성된 아파트촌의 학교가 ‘준명문고’의 이름을 얻었다. 최근 몇 년 사이 서울대 입학생의 출신 고교를 보면 특목고 외에 서울 강남의 경기고·숙명여고·휘문고·한영고·반포고·세화고·양재고·보성고가 많은 학생들을 입학시켰고, 대구 수성구 지역의 경신고·대륜고·능인고·오성고가 좋은 성적을 보였다. 강원 횡성의 민족사관고와 전주 상산고·울산의 현대청운고·부산 해운대고와 같은 자립형 사립고도 명문고로 발돋움하고 있다.
엘리트 관문 고시에도 대거 합격
경북고는 대구의 강남8학군에 해당하는 수성구로 학교를 이전한 덕택에 그나마 옛 명성을 구기진 않았지만, 부산의 경남고·부산고는 옛 교사를 그대로 유지해, 부산에서도 신흥 명문고 지역인 해운대구의 학교에 밀리는 형편이다. 서울의 경복고 역시 강북에 그대로 남는 바람에 경기고와 맞먹는 성적을 얻지 못하고 있다.
최근 명문고로 입지를 굳힌 것은 뭐니뭐니 해도 특목고다. 특목고의 위력은 최근 국회의 국정감사 자료에서도 드러났다. 한나라당 정문헌 의원에게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서 서울지역 특목고의 10년 동안 서울대 합격자 현황이 나타난 것이다. 대원외고는 1998년 163명을 합격시킨 데 이어, 매년 50여 명 이상의 합격자를 배출했다. 서울과학고 역시 1998년 132명의 합격생을 낸 데 이어, 매년 30여 명 이상의 서울대 입학생을 만들었다. 여기에 대일외고·명덕외고·한영외고·서울외고·이화여자외국어고가 대원외고를 추격했으며, 한성과학고가 서울과학고와 맞먹는 서울대 입학생을 배출했다.
특히 서울과학고와 한성과학고는 서울대 이외에도 KAIST와 포항공과대학(포스텍)에도 많은 학생이 입학해 이과 계통에서 명문고의 입지를 굳히고 있다. 외고와 과학고 등의 특목고는 외국 대학에 많은 학생을 입학시켜 세계 속의 명문고로 도약하는 꿈을 꾸고 있다.
엘리트의 관문이 되는 고시에도 특목고 졸업생들이 대거 합격했다. 올해 사법고시 합격자의 17%가 특목고 출신으로, 대원외고가 46명, 한영외고가 24명, 명덕외고가 18명의 합격자를 냈다. 2002년∼2006년 사법연수원 입소자 중에는 대원외고가 167명으로 가장 많았다. 반면 옛 명문고인 경기고는 35명에 불과했다.
외국어 능력이 중시되는 외무고시에서는 특목고 출신의 성적이 압도적이다. 올해 합격자(30명) 중 절반이 특목고를 졸업했다. 대원외고 출신은 6명이다. 올해 행정고시 합격자에서도 상위 5개 고교가 모두 특목고였다.
이같이 특목고가 10여 년 동안 이름을 날리면서 ‘뺑뺑이’ 이전의 명문고와 같은 학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들 학교의 졸업생들이 사회에 나가 서서히 자리를 잡으면서 선·후배 관계를 만든 것이다. 하재근 ‘학벌없는 사회’ 사무처장은 “한국 사회에서 학벌이 강화되거나 약화되는 시기가 존재하는데, 특목고처럼 특정 학교가 대학 입시와 고시에서 독점 현상을 보이는 것은 학벌사회를 강화하는 하나의 징후로 볼 수 있다” 고 비판했다.
고위공직자는 구 명문고 출신이 많아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은 여전히 옛 명문고 출신이 많다. 정부가 홍미영 의원(대통합민주신당)에 제출한 ‘고위 공무원단 공무원의 출신 고교 현황’을 뉴스메이커가 집계, 분석한 결과, 경기고-경북고-광주제일고 순으로 고위 공직자가 많았다. 고위 공무원단은 3급 이상 고위 공무원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정부에서 도입한 제도다. 주로 1∼3급의 고위 공무원으로 정부 모든 부처의 고위 공무원이 대부분 포함된다. 1296명의 고위 공무원단 중 경기고 출신이 65명(5%)으로 가장 많았다. 특히 경기고는 재정경제부(전체 47명)에서 12명, 공정거래위원회(전체 15명)에서 6명으로 경제 분야에 많이 분포돼 있어 눈길을 끈다. 경기고 출신 다음으로는 경북고 출신이 54명, 광주일고가 43명으로 뒤를 이었다. 두 학교 출신은 정부 각 부처에 골고루 분포돼 있다. 30명 대에는 서울고가 33명, 대전고가 32명, 경복고가 32명이었다. 경복고의 경우 보건복지분야에 특히 고위 공무원(보건복지부 5명, 식품의약품안전청 3명)이 많았다. 이밖에도 전주고가 고위 공무원단에서 29명을 차지했다. 비평준화 시절 2차시험 중 명문고였던 중앙고는 23명으로 옛 명성을 지켰다. 광주고가 22명으로 중앙고와 비슷했다. 신정아씨 사건과 관련해,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직권 남용으로 관심을 끌었던 부산고는 22명으로, 경남고의 19명보다 많았다. 대구고와 진주고는 나란히 20명씩의 고위 공무원이 있었다. 용산고는 15명, 춘천고는 14명으로, 이들 학교가 명문고였음을 알게 해주고 있다. |
“뺑뺑이 1기는 동문회도 못 나갔어요”
시험을 봤다면 니들이 어떻게 여길 들어오냐?
‘공부 못하는 세대'로 낙인찍힌 뺑뺑이들의 비애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교육정책 공약이 교육계는 물론, 학부모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다. 대선을 불과 2개월도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지지율 50%를 넘는 후보의 공약인 만큼 현실화될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이 후보의 정책 공약 중 핵심은 자율형 사립고·마이스터고·기숙형공립고 등 300개의 특성화고를 육성하는 것이다. 이 같은 정책에 대해 일부에서는 고교 입시가 부활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놓았다. 하재근 ‘학벌없는 사회’ 사무처장은 “특목고 신설로 고교 평준화 제도가 상당부분 해체됐는데, 이 후보의 공약은 평준화를 완전히 해체하자는 주장과 다름없다”고 날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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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평준화 제도는 1974년 서울·부산에서 먼저 시작돼 우리 사회에서 30여 년간 지속해왔다. 1974년까지는 고등학교 간에도 서열이 엄연히 존재했다. 지금의 세대들이 서울대-연세대·고려대-서강대와 같은 대학 간의 서열을 뚜렷이 알고 있는 것처럼 당시 세대에게는 경기고-서울고·경복고-용산고와 같은 고등학교의 서열이 뚜렷하게 존재했다. 당시 서울고의 한 졸업생은 “중학교에서 입시 상담을 할 때 경기고를 갈 실력이 되지 않으면 다음으로 서울고를 권유했다”고 말했다. 서울의 다른 고등학교에도, 지방의 고등학교에도 서열의 계단이 있었고, 이 순위는 쉽게 바꿀 수 없었다.
“무시당하지 말자” 단합하기도
1974년 시험 없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이 1977년 대학에 입학하면서 고교평준화 정책의 결과물이 그대로 드러났다. 단적인 예로 서울대 입학생의 출신학교 판도가 확 뒤집어지면서 평준화가 바로 ‘교육혁명’임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평준화 혁명’의 결과는 30년 동안 알게 모르게 한국 사회에 스며들었다.
1974년 고등학교에 입학한 학생은 무시험 세대라고 해서 ‘뺑뺑이 세대’라고 불렸다. 뺑뺑이란 ‘숫자가 적힌 둥근 판이 돌아가는 동안 화살 같은 것으로 맞혀 그 등급을 정하는 기구’라는 사전적 의미가 있다. 시험을 치르지 않고 추첨을 통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는 사실을 비하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뺑뺑이 세대에게는 ‘공부를 못하는 세대’ 또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혜택만 입은 세대’라는 낙인이 찍혔다.
특히 경기고·서울고·경북고·경남고 같은 옛 명문고의 비평준화 세대는 후배들에게 이 말을 자주 썼다. 이들 동문회에서는 ‘뺑뺑이 후배’를 후배로 인정하지 않았다. 평준화 덕분에 명문고에 입학한 후배들은 재학 중 선배와 선생님에게서 ‘실력이 없다’는 핀잔을 들었으며,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동문회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 같은 상황은 명문고일수록 더 심했다. 인터넷에서 경기고 동문회의 홈페이지 목록을 보면 73회 이후 77회까지 홈페이지 주소가 나타나 있지 않다. 경기고 72회가 비평준화 세대이며, 경기고 73회가 평준화 세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차별도 없어졌다. 경기고 79회 박신철 동기회장은 “당시에는 그런 것이 있었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경기고의 경우 강남 8학군에 들어가면서 지금은 선·후배 간에 그런 단절감은 없다”고 말했다.
서울·부산의 경우 ‘뺑뺑이 1기’는 1958년에 태어나 ‘58년 개띠’로 불렸고, 1974년 무시험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뺑뺑이 세대’라는 2개의 명칭을 얻었다. 대구·인천·광주에서는 다음 해인 1975년 평준화가 실시돼 1959년생이 ‘뺑뺑이 1기’가 됐다. 이들 1957년∼1959생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강’이 존재한다. 이들에게는 상대방이 뺑뺑이 기수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 한 명문고의 비평준화 마지막 졸업생은 선배들을 만나 고등학교 기수를 말하면 “그래”라는 무덤덤한 반응을 얻는다. “선배님, 저희가 막내입니다”라는 말을 덧붙여야 선배로부터 ‘제대로 된’ 후배 대접을 받았다. 여기서 막내란 비평준화 마지막 기수라는 표현이다. 이처럼 윗세대는 아랫세대가 ‘뺑뺑이 세대’인지를 확인했다. 아랫세대는 윗세대에게 ‘뺑뺑이 세대’인지 아닌지를 밝혀야 했다. ‘뺑뺑이 1기’의 개인적인 경험을 들어보면 평준화 세대와 비평준화 세대 간의 간극은 아직까지도 존재한다.
‘뺑뺑이 1기’인 홍익대 광고홍보대학원 전시교 교수는 지난 10월 14일 졸업 30주년 기념식을 모교인 경복고에서 가졌다. 경복고는 52회가 ‘뺑뺑이 1기’다. 52회 동문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전 교수는 “동기들 사이에 뺑뺑이 1기라고 무시당하지 말자라는 이야기가 나와, 1년 선배들보다 더 많은 돈을 모금해 이번에 모교에 기탁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학교를 다닐 때 동기들끼리 “실력으로는 경기고를 가야 하는데 뺑뺑이가 되면서 경복고에 왔다”라는 농담을 나누며 위안을 삼았다고 한다. 전 교수는 “경복고는 다른 명문고와는 달리 선배들에게서 차별은 커녕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졸업하고 난 뒤 니네부터 뺑뺑이 1기라는 소리를 듣기는 했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사회에 나가서 알게 모르게 옛 명문고 시절 선배의 도움을 많이 받은 편이라고 토로했다. 전 교수는 평준화 정책이 발표된 중학교 2학년 이후에도 그대로 학원을 다녔다고 말했다. 고등학교에서는 고3 때 대학입시를 위한 우열반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역시 ‘뺑뺑이 1기’인 월간 미술세계 김상철 주간은 “당시 참고서인 완전정복 표지에 고등학교의 모표가 쭉 나열돼 자신이 가고 싶은 학교를 거기에다 표시했다”고 기억했다. 특별히 입시 준비는 하지 않았지만 머릿속에 명문고를 가야 한다는 의식이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평준화 정책이 발표되면서 책을 손에서 놓아버렸다고 한다. 김 주간이 ‘뺑뺑이’를 통해 입학한 학교는 당시 2차 선발 시험에서 신흥학교를 꿈꾸던 신일고였다. 경기고 시험에서 떨어진 학생들이 2차 선발시험에서 대부분 중앙고를 갔으며 신일고가 4∼5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명문을 꿈꾸던 신일고로서는 ‘뺑뺑이 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뺑뺑이 1기’들은 학교에 입학한 후 선생님에게서 “돌밭이라서 자갈 소리가 난다” “너희가 이런 제도가 아니었으면 감히 여길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김 주간은 “어린 시절이었지만 우리들에게는 마음의 상처로 남았다”고 말했다. 성적 차이가 나는 학생들때문에 학교는 우열반을 나눴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동문회에서는 ‘뺑뺑이 세대’라고 인정받지 못했다.
58년 개띠 이미 우리사회 지도층
대구 대륜고 출신인 임규옥 변호사는 서울·부산보다 1년 늦게 평준화를 실시한 대구에서 ‘뺑뺑이 1기’다. 평준화를 실시한 덕분에 학원에도 다니지 않고 과외도 하지 않은 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임 변호사는 “특설반이 한 반 있었는데 거기에 들어간 학생들은 그래도 학교와 선배에게서 대우를 받았다”며 “평반과는 다른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임 변호사는 또 “당시 우리 기수가 서울대에 경북고보다 더 많이 입학했다”며 오랫동안 지켜온 경북고의 아성이 그때 무너졌다고 회고했다. 경북고 친구들이 선배들에게서 뺑뺑이 세대라고 홀대받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한나라당 정병국 의원 역시 ‘뺑뺑이 1기’로 독특한 경험을 했다. 정 의원은 원래 ‘비뺑뺑이 마지막 기수’였지만 , 1차·2차 선발시험에서 세칭 일류고에 입학하는 데 연거푸 실패했다. 그는 재수를 해서 ‘뺑뺑이 1기’가 됐다.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입학한 학교는 당시로서는 하위권이었던 서라벌고였다. 학생들은 스파르타식으로 교육을 받았다. 1학년때 이미 3학년 과정을 배워 선행학습을 했다. 정 의원은 “졸업 때 우리 학교가 전국 최고의 실력을 냈지만, 다닐 때는 학교에 대한 애정이 없었고 단순히 학원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비평준화의 마지막 기수인 양승실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위원은 “당시에는 무엇 때문에 공부하는지 모르고 공부했다”고 회상했다. 양 연구위원은 시험을 쳐서 들어간 이화여고에서 “뺑뺑이와 비뺑뺑이 간에 차별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선생님들은 ‘후배들을 가르치는데 수준이 달라 어렵다’며 토로하곤 했다”고 말했다.
서울·부산의 ‘뺑뺑이 1기’는 이미 50세의 나이에 이르렀다. 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공무원의 경우 2급, 3급에 해당하는 국장이 되었고, 법조계에서는 부장검사와 부장판사의 위치에까지 올랐다. 유시민 의원처럼 ‘뺑뺑이 1기’가 장관(보건복지부)직에 오른 경우도 있다. 이제 ‘뺑뺑이 세대’는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 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선택당한 ‘뺑뺑이’에 대해 이들은 어떤 부분에서는 비슷한 생각을, 어떤 부분에서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전시교 교수와 김상철 주간은 다양한 부류의 친구를 사귈 수 있었던 것을 ‘뺑뺑이의 미덕’으로 평가했다. 전 교수는 “뺑뺑이 이전에는 그 세대의 목표 의식이 뚜렷해 교수, 변호사, 공무원 같은 비슷한 직업이 많았지만, 우리 동기 중에는 여러 직업이 많다”며 “동문회에서 다양한 직업을 가진 동기가 어울리면서 훨씬 더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그 예로 이번 동문회 행사의 전야제를 동기의 바비큐 집에서 했다고 했다. 김 주간은 “동문회에 가면 여러 부류의 동기가 있어 역동성이 느껴지고 더 끈끈한 정을 느낀다”고 말했다.
‘뺑뺑이 세대’와 ‘비뺑뺑이 세대’의 경계에 속한 이들은 대부분 ‘뺑뺑이의 미덕’으로 권위주의의 타파를 들었다. 김상철 주간은 “비뺑뺑이 세대는 권위주의로 무장하면서 서열화를 만들었지만 뺑뺑이 세대는 융통성 있는 사고를 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 주간은 미술 전문가답게 ‘비뺑뺑이 세대’를 직선 세대로, ‘뺑뺑이 세대’를 곡선 세대로 표현했다.
“다양한 친구 사귈수 있어 좋았다”
‘뺑뺑이 세대’인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서울 숭문고 졸업)은 “참여정부가 2년차로 접어들면서 경제관료가 대부분 경기고 출신이더라”며 “아직도 그런 학벌 인맥이 남아 있긴 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비서관은 “뺑뺑이 세대가 공무원 사회에서 국장급이 되는 만큼, 폐쇄적 학벌 인맥이 사라지는 데 30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1957년생으로 비평준화 세대인 대구대 홍덕률 교수(사회학)는 평준화를 파워 엘리트 서열구조를 깬 긍정적인 제도로 평가했다. 홍 교수는 “과거 시험세대의 명문고 출신들은 사회 지도층이 되면서 특권·선민 의식을 갖고 있다”며 “이들이 후배들을 뺑뺑이 세대로 구별하는 것은 자신의 권위를 지키려고 하는 심리적인 반응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평준화 제도가 30년을 넘어서면서 ‘뺑뺑이 세대’는 자신의 자식들이 고등학교를 입학하는 현실적인 상황에 다시 접하게 됐다. 전시교 교수는 중학교 3학년인 자녀를 특목고에 보낼 계획이다. 전 교수는 “대학교처럼 자기가 능력껏 원하는 학교에 가야 하며 자기가 한 결과에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미술 전공 특목고에 다니는 자녀를 둔 김상철 주간은 “평준화는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면서 “어릴 때는 공부보다 좀 놀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라고 말했다. 정태인 전 비서관은 “이제 대학 서열화도 없애야 한다”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정병국 국회의원은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정상적인 교육을 하는 고등학교는 뒤떨어진 학교가 됐고, 학교를 학원화하면 일류고가 되는 지금의 현실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정 의원은 “고등학교가 서열화돼서는 안 되지만, 하향 평준화의 문제점은 꼭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육개발원 양승실 연구위원은 하향 평준화라는 것에 반대 입장을 나타냈다. 양 연구위원은 “뺑뺑이로 하향평준화가 됐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면서 “영재 교육은 평준화의 문제가 아니라 대입제도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뺑뺑이는 박지만 때문에 생겨났다 뺑뺑이 세대의 이야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인 박지만씨로부터 시작한다.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은 “박지만씨가 들어가기 전에 중학교, 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없애서 우리는 행복했다”고 말했다. 1958년생인 박씨가 중학교를 입학하기 한 해 전에 중학교 입학 시험이 없어졌다. 또 박 씨가 고등학교를 입학하는 1974년 평준화 제도가 실시됐다. 박 씨의 중·고교 입학에 한 해 앞서 또는 해당 연도에 입학 시험 제도가 없어지면서 당시에는 ‘박지만씨 때문에 중·고교 입시가 없어졌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박씨는 ‘뺑뺑이’로 중앙고에 입학했다. 중앙고는 2차 선발 학교였지만 경기고에서 떨어진 우수한 학생들이 대부분 입학한 명문고였다. 지난해 개띠해를 맞아 출판된 ‘58개띠들의 이야기’(화남 출판사)에서는 이 소문의 진상(?)이 일부 드러나 있다. 1958년생인 임백천이 이 책에서 자신의 경험을 글로 적었다. “나는 몇 년 전 박정희 대통령의 ‘영식’이라고 불리던 박지만씨를 친지의 결혼식에서 우연히 만나 지금은 서로 교분을 트고 지낸다. 그 역시 58년 개띠생이라 나는 그와 동류적 친밀감을 느꼈다. 서로 교분을 트며 친해진 뒤 어느 날 그에게 내가 학창시절에 들은 뺑뺑이 관련 소문(대통령 아들의 고교 진학 때문에 뺑뺑이를 실시하게 되었다는 그 소문)에 대해 시치미를 뚝 떼고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자신도 그런 소문을 들었다면서 말했다. ‘그런 소문이야 나도 알고 있었지. 그런데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어, 진짜.’ 물론 소문은 소문일 뿐 사실이 아닐 수 있다. ”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 담론의 사회정치적 성격에 관한 연구’(권대훈 저/한국교원대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를 보면 당시의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권대훈씨는 ‘뺑뺑이’가 1972년 10월 유신에서 비롯했다고 주장한다. 박 전 대통령이 국민적 반감을 희석시키기 위해 평준화 정책을 강행했다는 것이다. 이해 12월 입시제도 연구협의회가 만들어지고 불과 3개월 만인 1973년 초에, 1974년부터 고교평준화를 실시한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공청회도 없었고, 당시의 시대 분위기 속에 어느 누구의 반발도 없이 평준화 정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피해자였던 사학에서도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뺑뺑이’는 정부가 국민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시혜적 차원에서 그렇게 ‘후다닥’ 만들고 시행했다. 양승실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위원은 평준화 정책을 성급하게 추진하긴 했지만 당시 사회적인 문제 때문에 실시했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양 연구위원은 무즙 파동을 언급했다. 1964년 12월 중학교 입시 문제 하나로 온 사회가 떠들썩했던 사건을 말한다. 양 연구위원은 “‘무즙 파동’에서 드러났다시피 중·고교 입시가 당시 과열됐다”며 “당시 농촌인구의 도시 이동, 사교육비 증가, 어린이들의 발육 부진 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없애기 위해 평준화를 실시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
고교평준화는 사회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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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교길에 붕어빵을 사먹고 있었다. 그때 그 노점 트랜지스터에서 ‘바로 그 뉴스’가 흘러나왔다. 서울에 이어 대구도 고교 입시 제도를 폐지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씹고 있던 붕어빵이 튀어나오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학교가 많이 몰려 있던 대구 신천 근처 하늘은 중학생들이 기쁨에 겨워 던져올린 검정색 모자로 까맣게 뒤덮였다. 1974년 3월 막바지 어느 날 어스름 무렵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33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렇게 나는 ‘뺑뺑이 1기생’이 되었다.
입시지옥으로부터의 해방감 만끽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두 해 전에 중학교 입시가 폐지되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에는 시간만 나면 축구를 하면서 신나게 놀았다. 그래도 당시에는 대구 변두리에 있었던 수성초등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대륜중학교에 배정되어 가보니 그게 아니었다. 알파벳도 모르고 들어간 중학교에서 내 성적은 400명 가운데 70등 정도였다. 사립학교나 대학부속 초등학교를 나온 아이들이 상위권을 휩쓸었다. 그때도 사교육과 교육 양극화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3이 되었을 때는 겨우 30등 안으로 들어왔다. 가정 형편상 과외는 고사하고 학원 단과반에 등록할 여유도 없었기에 혼자서 열심히 공부했지만 성적이 잘 오르지 않았던 터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정 방문을 오신 담임선생님은 어머니에게 10등 정도만 더 올리면 경북고에 턱걸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며칠 후에 고교입시 폐지 뉴스가 나왔다. 내게 그것은 ‘입시지옥으로부터의 해방’을 알리는 복음이었고, 그 해방감은 ‘감격과 환희’를 안겨주었다.
나는 ‘뺑뺑이 1기생’으로서 신생학교인 심인고등학교에 배정되었다. 그리고 첫 학기에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전교 1등’이라는 것을 했다. 대구의 내로라하는 명문고 선생님들에게서 영어·수학 그룹과외를 받는 친구들보다 공부를 더 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역사상 처음 만들어진 ‘평준화 학교’는 사실 제대로 된 학교가 아니었다. 선생님들은 중상위권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게 강의했다. 공부를 아주 잘하는 학생들은 명문대학 본고사에 대비해 과외와 학원수업을 받았다. 학업 성취도가 떨어지는 학생은 대부분 학교수업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는 학교수업을 따라가기에 바빠서 별 불만이 없었던 나도 이제는 다른 상황에 놓였다. 다 아는 내용을 가르치는 학교수업이 시간 낭비로 느껴졌다. 그래서 수업시간에는 그 과목 참고서를 펴고 혼자 공부했다. 밤에 독서실에서 자습하느라 잠이 부족했기에 수업시간에 참 많이도 잤다. 학교는 불법적으로 특설반을 만들었고, 교육청은 그걸 알고도 눈감아주었다. 선생님들도 학생들도 나름의 마음고생을 한 것이다.
‘사교육 번창’ 현상은 평준화와 관계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평준화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었다. 시장이 커진 것은 국민소득이 증가하고 학부모들의 지불능력이 커졌기 때문이다. 고교입시를 되살리면 사교육 시장은 지금보다 훨씬 더 커질 것이다. 강남 논술과외 시장에서 활약하는 어느 후배의 말에 따르면, 서울과 경기도에서 제일 좋다는 외국어고와 과학고 학생들이, 그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나 들어간 후에나 변함없이, 고액과외를 제일 많이 받는다고 한다. 학생들이 교실에서 잠을 자는 소위 ‘교실 붕괴’도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33년 전 고교평준화가 처음 이루어졌을 때부터 있었으며, 아이들의 다양한 수준을 반영하지 못하는 획일적 강의가 진행되는 학교에서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명문고 학벌은 공정한 경쟁 저해
‘뺑뺑이 세대’의 비애를 체험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였다. 과거 소위 ‘일류고교’를 다녔지만 ‘일류대학’에 가지 못한 친구들은 ‘공부 잘한 선배들’에게서 엄청난 냉대를 받았다. 하지만 신생학교나 이른바 ‘따라지 학교’를 나와 ‘일류대학’을 간 친구들은 도움을 받을 만한 선배가 전혀 없었다. 모교인 심인고등학교 ‘뺑뺑이 1기’ 가운데 7명이 서울대를 갔는데, 그중 5명이 사회계열이었다. 문과에서 제일 인기 있던 사회계열 신입생 가운데 1%였다. 다음 해에는 무려 22명이 서울대에 합격했다. 내 모교는 그렇게 해서 대구의 ‘신흥 명문고’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대학생활과 사회활동을 하면서 고교 인맥의 도움을 받은 일이 거의 없었고, 내가 후배들의 든든한 인맥이 되어준 적도 거의 없었다. 정치를 하면서 동문들의 신세를 지기는 했지만, 모교 동문들이 대한민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나 작았다.
그런 면에서 고교평준화는 하나의 ‘사회혁명’이었다. 박정희라는 절대권력자의 말이 곧 법이 되는 권위주의 체제가 아니었다면 할 수 없었을 ‘사회혁명’이었다. 대한민국을 지배해왔고 지금도 그 지배력을 일부 유지하고 있는 ‘명문고 학벌’을 해체했기 때문이다. 정부 중앙부처 국장급 이상 고위관료, 대기업의 주요 임원, 언론계와 학계, 법조계의 중견 원로 인사들, 정당과 국회의 거물급 정치인들,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주요한 공공 또는 민간 권력기관의 상층부는 아직도 서울과 지방의 명문고 학벌이 강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학벌은 합리적 의사 결정을 방해하고 공정한 경쟁을 저해하며 정실인사나 부당한 특권 특혜를 만들어내는 정당성 없는 권력이다. 앞으로 10년 정도만 더 지나면 이러한 명문고 학벌은 거의 완전히 사라질 전망이다.
고교평준화를 폐지하고 명문고를 부활시키는 정책은 평준화가 몰고 온 ‘사회혁명’을 거꾸로 돌리게 될 것이다. 평준화 체제를 비판하는 분들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니다. 평준화는 ‘수월성 교육’에 부적합한 면이 있다. OECD 회원국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를 비교평가하는 PISA 보고서를 보면, 우리가 뛰어난 재능과 학습의욕을 지닌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시 명문고를 만드는 게 바른 처방은 아니다. 그보다는 평준화 학교 안에 주요 과목을 다양한 수준으로 가르치는 강의를 개설해 학생들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는 게 더 나은 대안이다. 선생님들에 대한 보상은 수강생 수에 따라 지급하면 된다. 경쟁과 평가 그리고 그에 따른 보상이라는 시장의 원리를 한사코 거부하는 교원단체가 태도를 바꾸기만 한다면 이것이 제일 좋은 해법이 될 수 있다. 지금은 고등학생 딸과 초등학생 아들을 둔 ‘뺑뺑이 1기생’ 아버지의 체험적 결론이다.
유시민〈대통합민주신당 의원·전 보건복지부 장관〉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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