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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실이 지하에 있다고 해서 그다지 불편한 것은 없어요. 다만 저를 찾아온 손님들이 원장실 찾으러 2, 3층에서 헤매는 것이 좀 미안할 따름이죠. 대신 환자들이 많이 이용하는 재활치료센터(물리치료실)는 이 병원에서 제일 전망이 좋은 7층에 만들어 놨습니다.”
환자용 재활 치료센터는 7층
양길승 원장의 명함에는 의사라고 찍혀 있지만 그의 이력을 보면 차라리 ‘투사’에 가깝다. 1967년 서울대 사대 수학과 입학 후 자퇴, 고향인 전남 나주에서 1년 동안 농업에 종사, 1969년 서울대 문리대 의예과 입학 후 두 번의 제적, 그리고 1983년 아일랜드 의대 입학 경력이 눈에 띈다. 양 원장은 대학 입학 20년 만인 1986년이 되어서야 한국 의사면허시험에 합격했다.
그 사이 20대 의학도는 요원들에게 끌려가 중앙정보부 ‘구경’도 했고, 수사관의 ‘매맛’도 경험했다. 긴급조치 1, 2호 위반으로 도망자 생활을 했고, 경찰에 검거돼 교도소 보리밥도 1년 동안 실컷 먹었다. 양 원장의 투사생활은 서울 성수동에 개인병원(성수병원)을 개업하고도 이어졌다. 1980년대에는 한국의 대표적인 산업재해였던 원진레이온 사태 당시 이황화탄소에 오염된 산재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우리나라 최초로 대규모 직업병으로 인정 받는 사례를 남겼다.
1990년대 초중반 길거리에서 스러져간 강경대, 김귀정, 노수석의 시신과 지난해 1월 분신한 두산중공업의 배달호씨 부검에도 양 원장이 참석했다. 2000년 사상 초유의 의사파업 때는 “사회적 강자들의 파업은 부당하다”며 파업을 거부하고 진료를 계속했다. 그 때문에 동료 의사들로부터 숱한 항의성 전화와 이메일을 받았다. 그러나 ‘환자의 신뢰를 잃은 의사는 이미 버려진 의사’라는 그의 소신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의사로서 누릴 수 있는 편안한 삶을 왜 포기했느냐”는 물음에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시대가 나를 선택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맹장염은 지금 돈으로 40만원이면 고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학교를 다닐 당시에는 돈 없는 사람이 맹장염에 걸리면 꼼짝없이 죽는 일도 많았습니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이지만 이런 불의와 불합리를 보고도 참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녹색병원은 양 원장의 이런 철학과 원칙이 살아있는 병원이다.
지난해 9월 문을 연 녹색병원은 원진레이온 직업병 근로자들이 받은 보상금과 공장터 매각대금 등 240억원으로 설립됐다. 원진레이온 사건은 현장에 근무했던 근로자 중 1000여명이 산업재해 인정을 받았고 50명이 이미 숨질 정도로 대형 산업재해였다.
양 원장은 당시 재해를 당한 원진레이온 환자들을 돌본 것을 계기로 근로자들의 산재보상 투쟁에 뛰어들었다. 종합병원 원장이라는 감투를 썼지만 양 원장은 지금도 원진레이온 산재 근로자들만큼은 직접 진료하고 있다.
양 원장은 원진레이온 사태 당시 근로자들과의 인연으로 녹색병원 원장에 취임했다.
하지만 성수병원 시절 이름이 꽤 알려져 수입이 괜찮았던 것에 비하면 월급 받는 원장이 되면서 수입은 반토막이 났다.
“의사들은 금전적으로 볼 때 누가 뭐라고 해도 특권층입니다. 젊은 의사들이 공부할 때 고생한 것 생각하면 돈 욕심이 나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10년 넘게 의사 생활을 하다보면 먹고 사는 데는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돈을 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돈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봉사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중랑구는 서울의 대표적인 미개발 지역으로 46만명이 살고 있지만 녹색병원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변변한 종합병원이 없던 지역이었다. 병원이 들어선 건물은 본래 YH무역이 있던 자리다. 1979년 신민당사에서 유신 독재에 맞서 농성하다 추락사한 고(故) 김경숙씨가 다녔던 회사다.
근로자들의 투쟁으로 탄생한 녹색병원과의 묘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기독병원이 이 자리에 들어섰지만 녹색병원이 인수하기 전에는 병원이 부도가 난 상황이라 건물은 삭막한 콘크리트덩이에 불과했다. 특히 무분별하게 건물을 증축하면서 추가로 지어 올린 건물 정면의 엘리베이터 타워는 이 건물의 대표적인 흉물이었다.
양 원장은 유럽 여행길에서 만난 임옥상 화백을 녹색병원 리모델링에 끌어들였다. 엘리베이터 타워의 낡은 시멘트 벽은 임옥상 화백의 그림판으로 변모했다. ‘2003년 일기’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버려진 숟가락, 페트병, 주전자, 냄비, 수도꼭지 등을 활용해 69개의 작은 작품을 만들어 벽면에 이어 붙여 만든 것이다. 병원 복도 곳곳에도 임 화백의 그림이 걸려 있어 마치 미술관을 찾은 듯하다.
▲ (왼)녹색병원의 전경 / (오)녹색병원 자원봉사자들이 위문공연을 하고 있다. 원진레이온 산재 근로자 치료하다 인연
“재료비만 주고 임 화백으로부터 억지로 뺏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은 액자값도 제대로 주지 않고 그냥 가져온 겁니다. 환자들이 병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것, 생동적인 것을 많이 봐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임 화백이 사람을 살리고 있는 겁니다.”
양 원장의 방이 지하 2층에 있는 것에 반해 넓은 창으로 둘러싸인 병원 7층에는 120여평 규모의 재활치료센터가 들어서 있다. 재활치료센터는 녹색병원의 자랑거리지만 병원 수입에는 별 도움이 안되는 곳이다. 재활치료를 받는 환자는 병원의 주수입원인 의사 진료가 끝난 상황이기 때문에 “재활치료환자가 많은 병원은 망한다”는 것이 의료계의 금언이다. 병원 물리치료실이 대부분 지하에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양 원장은 “큰 수술을 받았거나 장기적인 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들일수록 바깥 풍경을 봐야 재활 의욕이 강해지기 때문에 일부러 전망이 좋은 곳에 재활치료센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도 병원의 주요 사업이다. 지난해 11월부터는 내과 전문의 백재중(40)씨의 제안으로 200여명의 직원이 매달 1000원씩 모아 불우 어린이를 돕는 ‘파랑새의 꿈’ 사업도 진행 중이다. 지역주민들을 위한 건강강좌와 건강걷기대회도 개최했다. 지난 달에는 환경운동의 대부 최열씨가 이끄는 환경재단과 녹색병원이 건강검진 원가를 반반씩 부담해 환경시민단체 운동가들을 대상으로 건강검진도 실시했다. 병원이 단순히 치료만 하는 기관이 아니라 사회의 봉사네트워크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양 원장이 운동권 출신의 병원장이라고 해서 경영마인드 없이 무조건 봉사를 부르짖는 아마추어는 아니다. 후원 기업의 돈이나 재단의 돈을 까먹어 가며 병원을 운영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한다는 것이 양 원장의 지론이다.
▲ 한 환자가 병원에 전시된 그림을 보고 있다.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면서 환자로부터 신뢰를 얻으면 환자들이 모이게 마련입니다. 의사는 치료하고 환자는 치료당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와 환자가 함께 병을 고쳐나가는 것이 우리 병원의 방침입니다.”
양 원장은 녹색병원을 개업하기 전 전문경영인으로부터 경영수업도 받았다. 동갑내기 유한킴벌리의 문국현(55) 사장이 그의 경영학 선생님이다.
양 원장의 딸이 문 사장의 딸과 같은 반에 있어 학부모로 만났다. 녹색병원을 개업하기 전 양 원장이 “병원 경영을 해야하는데 훈수를 부탁한다”고 요청하자 문 사장이 선뜻 응했다. 하지만 ‘훈수’ 수준이 아니라 ‘경영수업’에 가까웠다. 10일 동안 하루 3시간씩 경영수업을 진행한 것이다.
첫 날은 문 사장이 직접 강의하고 다음 시간에는 유한킴벌리의 이사들이 직접 나와 강의를 했다.
녹색병원의 취지에 동감한 문 사장이 “이런 병원이라면 유한킴벌리의 사장과 이사들이 시간을 쪼개 사회봉사 차원에서 강의를 할 수 있다”며 직접 나선 것이다. 양 원장은 “문 사장의 강의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면서 사회에 대한 봉사도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개원 9개월째를 맞는 녹색병원은 불경기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의사와 직원들이 일은 고되게 하더라도 급여는 일정수준 이상 보장한다는 것이 녹색병원의 원칙이다. 양 원장은 녹색병원에 대해 신념에 가까운 희망을 갖고 있다.
“우리 병원의 지향점은 ‘한국 의료의 미래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봉사와 이윤이 함께 공생하는 병원을 만드는 것이죠. 미래 한국 의료의 모델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녹색병원이 반드시 성공해야 합니다.”
◈ 원진레이온 산업재해란?
이황화탄소 중독… 50여명 사망, 1000여명 ‘산재’ 인정받은 대표적 사고
한국 산업재해의 대명사로 불리는 원진레이온 사태는 1966년 일본 도레이레이온사의 방사기계가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됐다. 경기도 미금시 도농동에 있었던 원진레이온은 당시 양복의 최고급 안감으로 쓰이는 원사를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그러나 생산공정에 사용된 이황화탄소(CS₂) 때문에 직업병의 대명사가 됐다.
사건의 발단은 1987년 당시 4명의 퇴직근로자가 이황화탄소 중독증을 호소, 산업재해 보상을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30년간 은폐돼 왔던 산업재해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노동부는 1988년 원진레이온에 대해 특별근로감독과 작업환경진단을 실시했지만 퇴직근로자 1명이 이황화탄소 중독 증세로 사망함에 따라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결국 1993년 11월 원진레이온은 ‘직업병 양성소’라는 오명을 남기고 문을 닫았다.
원진레이온 근로자 1만5000여명 중 산업재해 판명을 받은 사람은 지금까지 1000명에 이르고 50여명이 숨졌다. 이황화탄소 중독은 현대 의학으로는 완치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졌다. 당시 근로자들은 지금까지 구리 녹색병원과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고 병상에서 죽음의 순간만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공장이 문을 닫은 후 법정관리자였던 산업은행이 공장터를 매각해 빚을 갚고 남은 1600억원에서 전문병원건립비 110억원과 산재 보상기금 96억원 등 206억원을 내기로 한 것이 녹색병원이 설립된 배경이다.
이석우 주간조선 기자(yep249@chosun.com)
2004.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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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 안 드는 지하2층으로 원장실 내려보낸 녹색병원 양길승 원장
"원진레이온 근로자의 피·땀, 헛되이 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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