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3_생각해볼글

내 여행의 추억은 화장실에서 시작된다 / 은희경 소설가

忍齋 黃薔 李相遠 2008. 2. 28. 16:02
반응형
 

내 여행의 추억은 화장실에서 시작된다                     

 


나는 사람들의 일상이 있는 장소가 좋다. 시장에서 거리 음식을 사먹고 책방에 들어가 엽서를 사고 강변의 벤치에 휘갈겨진 낙서를 읽어보는 게 좋다. 그러다가 길모퉁이 술집에 들어가 맥주를 마시면 화장실 구경은 정해진 순서이다.
 
딸아이가 어릴 때 내게 물었다. 사람은 왜 숨어서 똥을 누게 됐어요?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니잖아. 하긴 소화시키고 남은 음식 찌꺼기를 몸 밖으로 내보내는 일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해도 숨어서 해야만 하는 일이 몇 가지 있다. 그런 연유로 화장실과 침실이 있다.

요즘 나는 네팔 트레킹을 앞두고 준비에 바쁘다. 계획을 짠다, 일정을 맞춘다, 준비물을 산다, 걷기 훈련을 위해 등반을 해본다…. 이런저런 핑계로 같이 갈 작가들과의 떠들썩한 술자리가 계속되고 있다. 작가들은 대부분 여행을 좋아한다. 똑같은 일이라도 지방 강연에 오라 하면 바쁘다며 거절하지만 “지금 벚꽃이 한창인데 한번 다녀가세요. 오신 김에 몇 말씀만 해주면 돼요”라는 식의 유혹에는 이기지 못한다.

가져갈 책의 목록을 나누고 각자의 MP3 플레이어에 들어 있는 음악을 점검하고 약품과 생필품을 분담했다. 그러고 나서 각기 잠버릇과 화장실 쓰는 습관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세계 각지를 여행하신 한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여행이란 게 별 것 아니야. 온갖 곳을 다 돌아다니면서 거기다 똥 누고 오는 일이더라고.” 하긴 그만큼 확실한 족적이 또 있으려고. 화장실이란 게 얼마나 많은 삶의 디테일을 담고 있는가.

독일의 화장실에는 각 칸마다 변기 솔이 갖춰져 있다. 한 고급 식당에서 버튼을 누르면 변기가 한 바퀴 회전하며 자동으로 세척되는 화장실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변기 솔이라는 ‘결자해지(結者解之)’ 방식이 더 인상적이었다. 독일을 다녀온 몇 달 뒤 우연히 독일 문화원에 들렀는데 그곳의 화장실에도 변기 솔이 비치돼 있었다.

중국에 가면 누구나 규모에 압도 당한다. 그러나 웅장한 건물의 외양에 비하면 화장실은 옹색한 느낌이다. 새 건물에도 좌변기보다는 쭈그려 앉는 변기가 더 많이 설치돼 있다. 더 난처한 것은 태연히 ‘2인 1실’을 표방한 곳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칸막이도 문도 없는 공중 화장실은 물론이고 시골 마을에서는 돼지 구유 모양의 기다란 홈통 위에 여러 명이 나란히 앉아 일을 치른 적도 있었다. 대국적인 면모를 타고났기에 사사로운 일 따위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걸까. 큰 인물은 일의 ‘대강’만 처리하고 ‘세목’은 아랫사람이 맡는 법이라더니.

반면 일본의 화장실에 가면 저절로 수줍은 마음이 든다. 좁은 공간을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아서만이 아니다. 안에서 내는 소리가 바깥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한 티가 역력하기 때문이다. 소변을 보는 동안 새 소리를 내보내는 장치를 개발한 곳도 일본이라고 들었다.

미국에서는 타인을 의식하는 것이 개인의 보호로 나타나는 것 같다. 일단 화장실 문이 다르다. 안에 있는 사람의 발이 보이도록 문 아래쪽 부분이 뚫려 있다. 발을 보이면서 용변을 봐야 하는데 그 점에서는 화장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절대로 밖에 알리지 말라는 일본의 스타일과는 반대이다. 아마 공공 화장실에서 생길 수 있는 범죄, 이를테면 화장실이 침실로 쓰이는 경우를 포함한 여러 형태의 폭력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환기를 위해서일 거라는 의견도 있는데 그렇다면 안에 있는 사람이 저지른 일의 결과로 남에게 폐를 끼치는 셈이니 더더욱 일본과는 대조적이다.) 변기 위에 1회용 종이 커버를 씌우게 돼 있는 것 또한 공중위생을 위한 것이리라.

미국 사회를 샐러드볼(salad bowl)에 비유한 글을 본 기억이 난다. 각종 재료를 넣고 한꺼번에 끓이는 멜팅포트(melting pot)가 아니라 각기 다른 재료의 맛이 어우러지는 샐러드볼과 같은 곳이 미국이라는 논리다. 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10퍼센트의 똑똑한 사람이 매뉴얼을 만들어서 90퍼센트의 보통사람 및 약간 이상한 사람과 더불어, 혹은 조정해 가며 사는 사회’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화장실 시스템도 예외가 아니라고 말하면 좀 비약일까.

아직 가보지는 못했지만 핀란드에는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로 문을 여는 화장실이 생겼다고 한다. 문에 적힌 지시대로 메시지를 보내면 알리바바가 “열려라, 참깨!” 하는 것처럼 문이 열린다. 발신번호가 접수되기 때문에 시설물을 훼손하거나 변기 물을 안 내리고 도망칠 수는 없게 돼 있다. 언젠가 외신에서 핀란드 휴대전화 제조사 노키아가 주최하는 ‘휴대전화 멀리 던지기 대회’를 본 적이 있는데 휴대전화의 쓰임새가 점점 다양해지는 것 같다. 물론 ‘쇼를 하라!’라는 우리나라 모 통신사 광고 카피에는 못 따라가지만.

최근 들어 우리나라의 화장실 인심이 무척 후해졌다. 고속도로 화장실도 교회나 유치원 꾸미듯 갖가지 과분한 치장을 하는가 하면 ‘아름다운 화장실’ 수상 경력을 큰 자랑으로 내세운다. 화장실 문화라는 말도 자연스럽게 쓰인다. 하지만 잠긴 화장실마다 문을 두드려가며 고통스럽게 건물의 계단을 휘젓고 다니던 기억이 불과 얼마 전이다. 단지 화장실에 가기 위해 찻집에 들어가 커피를 주문한 적도 많았다. 덕분에(?) 이용할 일 없는 호텔 출입을 하기도 했다. 술집에 화장실이 없어 공중변소를 향해 뛰어가다가 무단횡단으로 범칙금을 물어야 했을 때 억울함은 둘째 치고 의경들의 신속한 일 처리 속도에 발만 동동 굴렀던 기억도 떠오른다.

내가 아는 한 화장실에 대한 가장 슬픈 이야기는 양귀자의 단편소설 ‘지하생활자’다. 지하 방에 세 들어 사는 공원(公員) 청년은 아침마다 요의(尿意)에 몸부림친다. 주인집 화장실을 사용해야 하는데 주인 여자는 현관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날이 갈수록 얼굴이 샛노래지던 그는 마침내 자동차 뒤에 몰래 일을 봐버린다. ‘현물’을 발견한 차 주인은 청년에게 악담을 퍼붓는다. “똥 쌀 데가 없으면 처먹지를 말아야지!” 지상에 발 뻗을 방 한 칸은커녕 들어가 똥 쌀 처마 한 군데 없는 처지로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이 보장되지 않는 척박한 사회가 그렇게 실감날 수 없었다. 화장실에 관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라면 존 어빙의 ‘가아프가 본 세상’에 주인공의 습작으로 삽입된 단편소설을 꼽겠다. 미국식으로 아래가 트인 화장실에서 발 대신 손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물구나무선 채로 오줌을 누는 사람일까, 아니면 손으로 걸어 다니는 사람? ‘곰의 탈을 쓴 사람이 아닐까’라고 했던 처음 짐작과 달리 그것은 완전한 곰이었다.

몇 년 전 들은 이야기다. 형제처럼 지내던 멋쟁이 시인과 소설가가 함께 여행을 갔다고 한다. 비행기가 한창 착륙 준비를 할 때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시인을 소설가가 붙잡았다. “형, 이착륙 때에 비행기 사고가 제일 많이 나잖아요. 하필 화장실에서 발견되면 어떡해요. ‘아무개 시인의 시신은 화장실에서 바지를 내린 채 발견돼 주변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라고 신문에 날 거 아녜요.” 이 역시 화장실에 대한 객쩍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박물관과 유적지도 좋지만 나는 사람들의 일상이 있는 장소가 더 좋다. 시장에서 거리 음식을 사먹고 책방에 들어가 달력과 엽서를 사고 공원이나 강변의 벤치에 휘갈겨진 낙서를 읽어보는 게 좋다. 그러다가 길모퉁이 술집에 들어가 맥주를 마시면 화장실 구경은 정해진 순서이다. 오래 전 봤던 영화의 한 장면이 기억난다. 식인종에게 잡혀간 서양인이 화장실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식인종은 팔을 넓게 벌리며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올 어라운드(All around)!” 이번 여행에선 내가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설산이 팔을벌리며 품을 내어주는 것이다.

                                                                     은희경 소설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