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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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조건/문화일보

忍齋 黃薔 李相遠 2008. 3. 28.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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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광장>
행복의 조건

 

 

조부는 중년 이후 모든 가정 경제를 조모에게 일임하셨다. 생산과 수입, 지출, 자녀양육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살림을 조모는 말없이 이끌어나가셨다. 조부가 중병으로 거동이 불편하다거나 금치산 선고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반듯하게 교육을 받았고, 건강도 좋았으며, 인물도 출중하셨다. 조모가 새벽부터 논으로, 밭으로, 부엌으로, 집안으로 종종걸음 치며 돌아다니면 조부는 안채 아래에 있는 별채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시곤 하셨다.

조부가 젊었을 적에 직장을 갖지 않으신 이유는 단 하나였다. 당시는 일제 강점기였는데, 조부에게 면장 제의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당시 조부가 살던 고장은 농촌과 어촌과 산촌의 형태를 두루 갖추고 있어 산물이 풍부하고 유통이 발달돼 있던 덕에 꽤나 은성한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면장 일을 한다면 그래도 출세한 편에 속했다. 하지만 조부는 일본의 심부름꾼이 되어 밥을 먹고 싶지 않다며 완강하게 도리질을 했고, 이로 인해 조모를 포함해 여덟이나 되는 남매는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어쨌든 자존심을 지킨 조부 탓에 장남이었던 아버지를 포함해 작은아버지와 고모는 가난이 무엇인지 혹독하게 겪어야만 했다.

한데 막내 작은아버지는 가난이 지긋지긋해, 월남 파병을 지원하셨다. 죽음의 땅에서 당신의 살길을 찾자고 조모 모르게 자원 입대해 이 땅을 떠났다. 작은아버지는 악기를 다룰 줄 알아 총알이 쏟아지는 전장이 아닌 군악대에서 근무했으니 사실, 목숨을 담보로 싸웠던 전투병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편한 생활을 했었다. 그 작은아버지가 월남에서 근무하시는 동안 시골 조부 댁에는 신기한 물건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때는 수박 하나를 사면 시원한 우물물을 길어 그 속에 담가놓던 게 고작이었는데, 어느 날 커다란 하얀 상자 같은 것이 떡 하니 방에 놓여 있었다. 냉장고였다. 도시 생활을 하던 내게도 냉장고는 신기하였다. 어디 그뿐일까. 작은아버지는 냉장고뿐만이 아니라 전기다리미도 가져왔고, 전축도 들여왔고, 인생을 새롭게 설계할 수 있는 꽤 많은 액수의 종자돈도 마련했다.

생각해보면 냉장고나 전축이나 다리미가 없어도 사람들은 행복했다. 부러운 표정으로 문명의 이기들을 부러워했으나 없다고 해서 불행하지 않았다. 또 이웃집에는 있지만 자신의 집에는 없는 물건을 사기 위해 무리하게 빚을 내거나 외상 거래를 하지 않았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저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았다. 그게 흉이 되거나 얕잡아 보이지 않았다.

또 서민들이 사는 동네는 어디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어느 한 집에 전화가 있으면 그 전화는 동네 공중전화였다. 우리 집에도 전화가 있었는데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 몹시 미안한 어투로 아랫집에 사는 누군가를 바꿔 달라거나 긴한 내용을 전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평소에는 괜찮았지만 비가 올 때나 이슥한 밤에는 전화심부름 하는 게 마뜩찮았다. 그래도 부끄럽지 않았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가난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좀 잘 사는 집은 있다고 젠 체하며 살았겠으나 그렇다고 드러내놓고 떠세를 부리지는 않았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나름의 행복이 있었고, 도덕이 있었고, 정의가 있었다. 뒤섞여서 잘 살았다. 없는 사람들은 내심 빈한함에 대한 좌절과 마음껏 채워주지 않는 사회에 대한 불만은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무차별 공격은 없었다. 그리하여 언제나 예측 가능했으므로 내일을 기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불행한 표정들이다.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 또한 부족하다고 엄살을 부린다. 많고 적음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나뉜다. 진정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느냐 안 하고 있느냐는 생각 밖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가난한 소설가지만 지금 당장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으므로 오늘이 참 행복하다고. 내일도 그러하리라고. 죽는 순간까지 나는 이 가난하고 고단한 생활을 계속할 것이라고. 그러니 부끄럽지 않다고. 다들 그랬으면 좋겠다.

[[은미희 / 소설가]]

기사 게재 일자 2008-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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