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진실화해위, 활동 마감 1년 앞으로
군사정권 폭력에 만신창이 뒤 사회적 사형 나날
치유 모임서 털어놓고 들어주며 '응어리' 보듬어
"강원도 삼척에서 3남3녀를 낳고 평범하게 살던 여든세살 할아버지는 1979년 이 곳 저곳 떠돌다 길거리에서 굶어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들 삼형제를 포함해 일가족 7명이 그 해 간첩 혐의로 끌려간 뒤 돌봐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난 13일 밤 9시 서울 삼성동 봉은사.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가 김아무개씨의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는 글을 읽었다. 숙연한 분위기 속에 뒤에 선 20여명이 나란히 제단을 향해 절을 올렸다. 제단 위에는 김씨와 비슷한 사연으로 숨진 사람들을 기리는 다섯 개의 초가 타고 있었다.
지난 2월 초부터 매주 월요일 '가슴속 한이 깊은 사람들'이 봉은사에 모였다. 모두 군사정권 시절 죄 없이 공안기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사람들이다. 서로 생면부지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자신의 아픈 상처를 고백하고, 남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어주고, 서로를 보듬었다. 이렇게 '고문 피해자 치유모임'(치유모임)이 시작됐다.
이 모임에는 '진도 간첩사건'으로 남편·시어머니와 함께 중앙정보부에서 41일간 고문을 당하고 결국 남편을 형장의 이슬로 먼저 보낸 한아무개(66)씨, '송씨 일가 간첩사건'으로 일가족 20여명이 간첩 혐의로 고통받았던 송아무개(68)씨 등 6명이 참여했다. 이날 추모제는 10차례 진행된 치유모임을 마무리하는 행사로, 억울하게 죽은 치유모임 참여자들의 가족을 기리는 자리였다.
치유모임을 꾸리고 이끈 강용주 가정의학과 전문의는 "고문 치유의 첫 단계는 사회가 강요하는 침묵을 깨고 자신의 고통을 바닥까지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1983년 사업차 일본에 갔다가 '조총련계 인사를 만났다'는 누명을 쓰고 간첩으로 몰렸던 구아무개(57)씨는 "지금도 매일 밤 유치장에서 들었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발자국 소리가 끝나면, 철제의자로 나를 내리찍던 순간, 고춧가루 물이 눈을 찌르던 순간이 떠올라요. 그렇지만 친구에게 그런 얘길 하면 그 뒤로 연락이 안 왔어요." 구씨의 아내는 간첩 혐의로 감옥에 끌려간 그에게 이혼을 요구했고, 그 뒤 당시 3살, 8개월이던 두 딸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이들은 지난 3월 말 전남 진도로 함께 여행도 다녀왔다. 간첩 누명을 쓰고 아버지는 사형을 당하고, 자신은 20여년간 감옥살이를 했던 김아무개(61)씨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걸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에는 다른 사람 아픈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이제 치유모임에서 만난 분들이 아프면 내가 아픈 것보다 더 많이 아프다"고 말했다. 구씨도 "모임에서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 탓이 아니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며 큰 위로를 얻었다"고 말했다.
치유모임의 진범수 정신과 전문의는 "고문 피해자들은 신체적인 외상뿐 아니라, 주변의 손가락질, 가족들의 오해 등으로 '사회적 사형'과 맞먹는 정신적 고통을 받아 왔다"며 "평소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감정을 바닥까지 드러내는 체험을 통해 트라우마(상처) 치유가 시작된다"고 말했다. 치유모임에 참여한 전문의 5명 등은 조만간 또다른 고문 피해자들을 모아 새 모임을 이어갈 예정이다.
강용주 전문의는 "진정한 과거청산은 법적·제도적 청산과 함께 피해자들의 정신적 치료가 병행돼야 한다"며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치료센터를 만드는 등 할 일이 많은데 과거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너무 빨리 식는 것 같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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