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결핍 노인들, 뛰쳐나가라
딸만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가끔 할 때가 있다. 그중 하나는 버스에서 여자 가방을 멘 남자들을 볼 때다. 젊은 남자들이 들어주는 가방은 빨간 가방, 노란 가방, 때 묻은 가방까지 다양하다. 그들은 한쪽에 여자친구 가방을 들거나 메고, 다른 손으로 자기 짐을 들고 있다. 이럴 때, 여자의 몸이 몹시 연약하거나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 보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이렇게 '눈물겨운' 광경을 본 적이 없다.
그건 아마도 애정의 표현에 해당할 것이다. '너 나 좋아해? 그럼 증명해봐' 같은 말에 대한 답인 셈이다. 대체 왜, 자기 애인을 이토록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법으로 애정을 확인하는지 모를 일이지만, 이런 식의 '애정 증명'이 청춘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발한 비유를 잘 쓰던 어느 선배는 아이들을 '거머리'나 '드라큘라'라고 표현했다. 초등학생이 지나가면 "야 저기 거머리 간다"고 했고, 잘 차려입은 대학생을 보면 "저 정도면 드라큘라 급"이라고 했다.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느라 등이 휜다는 불평의 극단적 표현방법이다. 하지만 그 역시 말만 그랬지, 자녀들에게 헌신했다.
어느 부모의 자식 사랑이 뜨겁지 않을까마는 이제는 그 뜨거운 애정을 세대를 넘어 '물질'로 증명해야 하는 시절이 됐다. 미국에서 부모, 친·외조부모 등 6명의 보호자들로부터 아낌없는 경제적 지원을 받는 아이를 '식스 포켓족(族)'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애를 망치려면 돈을 많이 주고, 매를 아끼라'는 말이 있지만, "능력 있어 내가 주는데 웬 간섭이냐"는 말이 더 설득력을 얻는 세상이다. 절제 모르는 이들의 출몰에 직면한 보통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저 시류를 한탄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조건없는 사랑'이란 없다. 주면 바라게 되는 법. 돈을 대주는 부모는 자식 인생에 그만큼 더 많은 간섭과 개입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대개 18개월이면 생기기 시작한다는 인간의 독립심은 결혼한 이후 다시 영아기로 후퇴하는 경향이 생겨난다. 이걸 아주 나쁘게 말하면 부모, 조부모가 자식이나 손자들을 돈으로 '매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문제는 이게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를 떠나 일종의 '사회적 기류'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요즘 농담처럼 떠도는 말이 "혼자 늙어 죽어도 개룡남은 싫다"는 말이다. 개룡남은 어려운 환경에서 성공한 사람, 즉 '개천에서 난 용'을 속되게 일컫는 말. 이런 남자와 결혼하면 남자가 제아무리 전문직이라도 시댁 도와주고 나면 남는 게 없기 때문이란다. 자수성가형 전문직보다 푼푼한 집안의 남자, 상속남이 낫다는 뜻이다. '일부'에서 떠도는 말이라지만, 이 정도가 되면 우리 사회는 희망이 없다. 하긴 몇몇 전직 대통령들도 자식들에게 폼나는 아버지가 되려다 자기 업적에 치명적 흠을 남기기도 했다. 탈법이든 편법이든 자식에게 물질을 전하는 게 사랑의 증명이 된 세상이라면 우리는 이제 그 과도한 사랑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봐야 한다.
일단 돈으로 자식들의 환심을 사려는 '애정결핍 노인들'은 과감히 심리적 울타리를 깨고 밖으로 뛰쳐나가야 한다. 여행이든 식도락이든 부부나 친구가 즐겁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커뮤니티에서 결속을 다져야 한다. 애정 확인은 맨손으로 다시 시도해 보는 게 정정당당하다. 그러나 가방을 든 남자보다 "사랑하면 가방 들어줘"라 말하는 여자 쪽의 죄가 무겁듯, 자식들부터 정신을 단단히 차리게 만들어야 한다. 물론 이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남녀 문제의 답이 자식을 다루는 데도 적용된다면 이런 답도 있다. '헌신하면 헌신짝된다. '
- 박은주·엔터테인먼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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