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0개국 '생존의 현장' 리포트 4.구제금융 1년… 여전히 추운 아이슬란드
집값 반토막, 빚은 2배로 "풍부한 수산·관광자원 잘 활용하면 위기 벗어날것"
8개월만에 다시 찾은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 시내는 평일인데도 여전히 유령도시 같았다. 몰락한 금융업 대신 국가경제의 미래를 짊어지게 된 알루미늄 제련 공장, 수산물 가공 공장들도 문을 닫고 '잠을 자고' 있었다.'여름 휴가철이긴 하지만 빚더미에 올라앉은 나라가 이렇게 여유 부리며 살아도 되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취재 중 만난 아이슬란드인들은 대개 '국가와 나는 별개'라는 사고에 빠져 있는 듯 했다. 지식인이건, 일반 국민이건 '한국의 금(金) 모으기 운동'을 얘기하면 한결같이 "여기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작년 11월 출장 때 성난 민심을 볼 수 있었던 아이슬란드 국회의사당 앞 광장을 지난달 초에 찾아갔다.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던 시위대는 간 곳 없고, 빈병을 모아 끼니거리를 장만하려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부랑아, 대낮부터 술에 취한 노숙자들이 광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국가부도 위기 사태(IMF구제금융 신청)의 피해자는 이들 뿐 아니었다. 금융위기로 하루아침에 재산이 반토막나고, 빚은 두 배로 불어난 외화 대출자들도 파산 상태에 몰리고 있다.
휴대폰가게 종업원 피욜라 할도르스도흐티르씨는 작년 4월 외화 대출을 받아 연립주택을 샀다가 낭패를 보고 말았다. 4000만 크로나(한화 4억원)짜리 집을 구입하면서 스위스 프랑화 대출(약 2100만 크로나)을 받았는데, 금융위기 이후 집값(2400만 크로나)은 반토막난 반면, 그 사이 크로나 가치가 떨어져 갚아야할 대출금(스위스프랑화)은 4000만 크로나로 불어났다. 피욜라는 "남편 월급과 합쳐 월소득이 60만 크로나(600만원)인데, 매달 갚는 원리금이 40만 크로나(400만원)나 된다"면서 "지출을 극도로 줄여 빚을 갚고 있지만, 이 짓을 30년(30년 분할 상환 대출)동안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정말 미래가 암담하다"고 했다. 금융위기 이전, 아이슬란드 3대 은행에서 개인에게 빌려준 외화 주택대출은 25억달러. 이중 20%가량은 대출자가 빚을 제때 갚지 못해 '부실채권'이 됐다.
- ▲ 지난달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 인근의 한 아파트 단지. 어린이들이 뛰어놀고 있는 아파트 앞마당 신축 공사장에 건축 자재들이 널려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아이슬란드 곳곳에서 신축 건물 공사가 중단됐다./레이캬비크=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퇴직자, 연금생활자, 대다수 서민들은 크로나화 가치폭락(수입물가 폭등) 여파로 치솟는 물가 탓에 외식이나 여행은 엄두도 못낸 채 내핍생활을 하고 있었다. 대형할인점 하코이(HAGKAUP)에서 만난 연금생활자 파멜라씨는 "1년 전과 비교하면 체감물가가 100% 이상 올라 수퍼마켓에 가기가 무섭다. 무슨 수가 나야지, 이대로는 못살겠다"고 푸념했다.
실제로 수퍼마켓에서 판매중인 배추 한포기 가격이 498크로나(5000원)나 했고, 초밥 10개들이 도시락이 1900크로나(2만원), 양식당의 양갈비1인분 가격도 30% 가량 올라 5000크로나(5만원)였다. 담배값, 술값, 기름값도 금융위기 이후 50% 이상 폭등했다.
국민들 사이에 불만이 고조되면서 정권이 보수 연립 정부에서 좌파 연립 정부로 교체됐지만아이슬란드 정치권은 '유럽연합(EU) 가입파'와 '독립파'간 국론이 양분돼 갈등을 겪고 있다.
지식인들은 아이슬란드 같은 작은 나라가 번영하려면 EU라는 큰 우산아래로 들어가서 개방 경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반면 일반 국민들은 나라를 곤경에 몰아넣은 개방에 반감을 갖고 있다. 고기잡이에 의지해 평화롭게 먹고 살던 옛 시절에 강한 향수를 느끼고 있다. 상당수 국민들이 EU 가입을 달가워 하지 않은 이유는 EU회원국들에 자국의 앞바다를 열어줘 어족자원을 내주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방송 앵커 출신 언론인 올라브 시그루드로손씨는 "국가부도 위기라는 전대미문의 사태를 맞아 국론이 분열되고 나라가 방향타를 상실한 상태"라고 지적했다.
아이슬란드는 수력·지열(地熱)발전 덕분에 에너지 생산단가가 세계 최저 수준이고, 노천온천, 빙하 등 관광자원도 풍부하다. 세계 최대 규모 알루미늄 제련 기업을 갖고 있고, 수산·제약업 분야 기술력도 세계 톱 수준이다. 아이슬란드대학 토롤비르 마티아손 교수(경제학)는 "수산자원과 관광자원을 잘 활용하고, 한국처럼 제조업 중심의 수출 주도형 경제구조를 새로 짜면 다시 번영의 길로 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