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퇴가 제일 쉬웠어요 난 가난하니까 ①
시사IN | 고동우 기자 | 입력 2009.10.16 10:01
지난해 12월 서울 한 고등학교 교사들은 < 꿈을 잃어버린 학생들에 관한 연구 > 라는 아주 독특한 제목의 보고서를 펴낸 바 있다. 아이들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될까 걱정돼 외부에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그 내용은 사뭇 충격적이었다. 전교생 1600여 명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저소득층 학생의 절반 이상이 영어?수학 과목의 공부를 '포기'한 상태였고, 학습동기나 실행력, 자존감도 일반 학생에 비해 크게 뒤떨어졌다.
↑ 학업중단율은 전문계고에서 높게 나타나며, 자퇴한 아이들은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는 청소년들.
↑ 학교를 자퇴하는 아이가 늘고 있다. 서울의 한 청소년상담소에서 상담을 받는 고등학생.
↑ 서울 한 전문계고의 수업 장면
보고서는 이 중에서도 '자존감'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보고서는 "자존감은 건강한 삶을 살고 학업, 직업, 대인관계 등 온갖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학교는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 학생들을 키워내야 한다"라며 의도했든 안 했든 교사가 가난한 아이들에게 부정적 자아를 심어주지는 않았는지 성찰해보자고 촉구했다.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김 아무개 교사는 "국가가 나서지 않는다고 방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심각한 상황이다"라고 진단한다. "낮은 자존감과 문제 행동, 주변 사람들의 안 좋은 시선이 악순환을 이루면서 무기력하게 학교 생활을 하거나 떠나는 아이가 많다. 국가는 이들을 외면하지만 매일매일 만나고 교육해야 하는 교사는 그러기 힘들다. 혹 우리가 먼저 그 아이들을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교사가 학생을 포기하는 것은 '선생님'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꿈을 잃은 아이들에 관한 연구
공부를 포기하거나 학교를 그만두는(학업 중단 또는 자퇴) 아이가 급속히 늘고 있다고 한다.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소속 민주노동당 권영길의원실이 최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08년 학업을 중단한 고교생 수는 3만769명(질병 제외)으로 2006년에 비해 9000여 명이 증가했고 중단율(자퇴생 수/총 학생 수)도 0.012에서 0.017로 상승했다.
특히 저소득층 비율이 높은 전문계(실업계) 고등학교는 상황이 더 심각해서 학업 중단율이 전체 평균의
2배에 이르고, 특목고에 비해서는 4.3배나 높았다. 소득과 전문계고 입학의 상관관계는 학부모의 직업분포를 보면 확인된다. 2009년 서울 시내 외고·일반고·전문계고 신입생 아버지가 상위직인 경우는 외고와 일반고는 각각 44.8%, 13.1%에 달하는 반면 전문계고는 3.7%에 불과했고, 아버지가 하위직인 경우는 각각 11.1%, 28.4%, 32.3%로 역순을 보였다. 또한 전문계고 학생 가운데 최소한 15% 이상이 편모 가정으로 추정되며, 나아가 그 어머니들의 70%가량은 최저임금 수준의 비정규직 노동자로 파악되고 있다.
학업 중단 이유에는 학습 또는 학교생활 부적응, 가정 형편이나 불화 등 여러 유형이 있지만 모두 경제적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2007년 ㅅ상고를 자퇴한 이 아무개양(19)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잠깐 학습지 공부를 한 것 외에는 사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나쁜 애도 많고 선생님도 너무 엄격해서 학교 가기가 싫었다"라고 자퇴 이유를 밝혔지만 근원을 따져보면 가난과 사교육 소외, 학업 의지 상실이 이미 일찍부터 이양을 괴롭혔다.
"공부 잘하는 애들이 부러웠어요. 그래서 좀 늦었지만 중2 때부터 밤도 새워가며 열심히 공부를 했죠. 하지만 기초가 없어서인지 잘 안되더라고요. 학원을 다니고 싶었지만 과일 장사를 하는 아버지가 버는 돈으로는…. 동생도 둘이나 있어서 차마 말을 못했어요. 결국 바닥을 헤매다가 성적에 맞춰서, 선생님이 가라는 데로 간 곳이 전문계고였어요. 그런데 분위기가 너무 안 좋은 학교더라고요. 잘사는 집 애들처럼 어릴 때부터 사교육을 받고 그랬다면 전문계고도 안 가고, 제 인생이 좀 달라질 수도 있었겠죠?""자퇴? 하고 싶은대로 해"
서울 용산구의 한 복지기관에서 월 100여만원을 받고 일하는 장 아무개씨(50)는 가정 형편과 불화 때문에 요즘 걱정이 태산이다. 아이가 넷인데, 고등학생인 첫째는 어릴 때 학원을 다녀서인지 어느 정도 공부를 따라가고 있지만 사교육을 받지 않은 둘째(중학생)는 성적이 나쁜 정도를 넘어 아예 공부 자체에 뜻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요즘 아내와도 사이가 좋지 않아 집안 분위기가 말이 아니라고 한다.
"돈이 없으면 아무래도 가정이 화목하기 어렵죠. 아내와 자주 싸우는데, 아이들도 스트레스를 상당히 받는 것 같아요. 혹시 엇나가지 않을까 조마조마해요. 둘째한테 '왜 이리 성적이 안 나오냐'고 화를 내보곤 하지만, 솔직히 해주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부끄러울 뿐이에요."
물론 가정 형편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한국 사회에 만연한 지나친 학력주의?학벌주의 문화나 성적 중심의 공교육 시스템, 갈수록 좁아지는 취업문, 전문계고의 열악한 교육 환경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학업 중단' 현상은 지금 이 시각, 전국 곳곳에서 이미 우후죽순 터지고 있는 일이다. 한 해 3만명이면 하루에 80여 명꼴이다. 앞서 김 아무개 교사의 지적처럼 국가를 원망하며 방관만 할 수는 없으며, 다른 어느 곳보다도 '매일매일 아이들을 만나는' 학교와 교사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사안이다.
권영길 의원도 "고교 진학률이 99.7%이고, 대학 진학률이 84%인 나라에서 고교를 마치지 않고 안정적인 직장을 가질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학업 중단은 그 자체로 빈곤과 불안정 노동의 시작으로 봐야 한다. 학생들은 '사회적 돌봄'이 필요한 미성년자다. 제도적?재정적 지원을 대폭 늘려야 하며, 최소한 교실에는 빈곤의 침투가 없도록 해야 한다. 방치된 아이들은 작은 관심에도 적극 반응한다. 꿈꿀 수 있는 미래를 제시하고, 대화하고, 교감할 대상이 있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현실은 별로 그렇지 못한 듯하다. 자퇴를 하거나 집안이 가난한 아이 대부분은 학교에서 받은 크고 작은 상처를 저마다 또렷이 기억했다. 르포 작가 김순천씨가 최근 펴낸 < 대한민국 10대를 인터뷰하 다 > 라는 책에는 중학교 때 자퇴를 했다가 ㅇ공고에 재입학한 정미진양(19)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하루는 졸업 후 진로가 걱정돼 학교 진로상담실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미진이가 느낀 선생님의 태도는 이런 것이었다.
"상담을 받으면 뭔가 뾰족한 수가 나올 줄 알고 간 건데, 한 선생님이 그냥 '네가 있는 위치에서 열심히 해라' 그러고 마는 거예요. 그 뒤로는 거기 절대로 안 가요. 너무 형식적이에요. 틀에 박혀 있고. 선생님 딴에는 '편하게 말해라, 네 심정을 다 이해한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데 제가 보기엔 형식적인 것 같아요."
고동우 기자 / intereds@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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