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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원짜리 명품 막걸리
# 씨름 vs. 스모
씨름은 박진감 넘치는 스포츠지만 나는 씨름의 그 '싸구려 이미지'에 불만이 많다. 씨름 선수들은 왜 수영복 같은 나일론 팬츠를 입을까. 선수들 팬츠는 울긋불긋 원색에 스폰서 로고까지 새겨져 도무지 국적(國籍) 불명이다.
내가 씨름에 불평꾼이 된 것은 도쿄특파원 시절부터다. 일본의 스모를 보고 씨름과 비교해 보니 우리는 왜 이렇게밖에 못할까, 조금만 신경 쓰면 더 멋있게 만들 수도 있는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스모 선수는 나일론 팬츠를 입지 않는다. '마와시'로 불리는 긴 천으로 주요 부분만 가리는데, 맨엉덩이가 다 드러나 보인다. 그 모습이 민망하다고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나 어쨌든 대단히 독창적이고 일본적이다. 적어도 나일론 팬츠보다는 훨씬 그럴듯한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다.
스모의 이미지는 스모협회에 의해 주도면밀하게 관리된다. 머리를 상투처럼 묶어 올리게 하고, 경기 전 다리를 번쩍 들어 올리거나 주먹을 땅에 대는 식의 독특한 의식(儀式)도 곳곳에 볼거리로 제공한다. 이런 경기 외적인 콘텐츠와 형식미(美) 덕에 스모는 뭔가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준다.
스모가 잘 가공된 무대예술이라면, 씨름은 시골 장터의 마당극 같다. 어느 쪽이 좋은지 정답은 없지만 세계적으로 어필하는 것은 단연 스모다. 우리의 현대 씨름은 스포츠의 기능성에만 치중한 나머지 대대로 축적돼 내려오던 농촌 공동체의 풍성한 콘텐츠를 잃어버렸다.
# 막걸리 vs. 사케
막걸리의 진화는 놀랍다. 막걸리의 괴로운 숙취를 기억하던 우리 세대로선 막걸리가 이토록 뒤끝 깨끗한 술로 재탄생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막걸리가 일본 사케(청주)를 넘어 글로벌한 성공을 거둘 수 있느냐에 대해 나는 낙관적이지 않다. 막걸리가 '싸구려의 함정'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서울 롯데호텔 한식당에는 6종류의 막걸리가 팔리고 있다. 그중 가장 비싼 것(국순당 이화주)엔 6만원의 가격표가 붙어 있다. 사케는 어떨까. 같은 롯데호텔 일식당에서 사케는 가장 싼 게 6만원이고, 무려 150만원짜리도 있다. 일본 주류상점에 가면 소비자 가격이 10만엔(약 130만원)을 넘는 초고가 사케도 수두룩하다. 반면 일본에 수출되는 막걸리는 525엔(약 6800원·국순당 '미몽')짜리가 가장 비싼 것이다. 이러다 영원히 '싸구려' 낙인이 찍힐까 겁난다.
일본의 명품 사케들이 비싼 값을 붙이는 것은 저마다의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다. 최상품 쌀을 60~70% 깎아내 알짜배기 정수(精髓)만으로 몇 년간 숙성시켜 빚었다는 식이다. 요컨대 100만원짜리 사케는 술 자체보다 술에 담긴 스토리를 100만원에 파는 것이다.
막걸리는 왜 파격적으로 비싼 명품을 못 만들까. 맛 좋은 막걸리를 값싸게 마실 수 있다는 것은 막걸리 애호가로서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가격표에 100만원쯤은 호기롭게 매길 수 있는 명품 막걸리도 몇 개쯤은 보고 싶다.
# 오솔길 vs. 철학의 길
일본 교토에 '철학의 길'이란 관광 코스가 있다. 안내 책자엔 저명한 철학자가 명상하며 산책하던 곳이라고 적혀 있다. 몇 년 전 교토 출장 갔을 때 멋진 이름에 혹해 찾아갔다가 약간은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운치 있는 오솔길이었지만 버스를 갈아타면서까지 찾아갈 만큼 대단한 곳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본의 '문화 화장술'은 탁월하다. 평범한 오솔길에 약간의 스토리 요소를 얹어 '철학의 길'이라는 엄청난 이름으로 포장해 내다니, 우리는 낯이 간지러워서도 못한다. 훌륭한 소재를 갖고도 포장이 서툴러 제 대접 못 받는 우리는 순진한 건가, 바보 같은 건가.
- 박정훈 사회정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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