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 홍수를 예방하기 위해 추진되던 영월 동강댐이 2000년 백지화된 이유 중 하나는 인근에 희귀 생물이 많이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 보호 대상으로 거론된 수십 종의 동식물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세계에서 이곳에만 사는 '동강할미꽃'이다. 석회암지대 바위 틈에서 보라색, 흰색, 자주색으로 하늘을 향해 피어나는 신비로운 이 꽃에 처음 이름을 붙인 사람이 '한국 식물학계의 대부(代父)' 이영노 교수였다.
▶이화여대에서 30여 년을 가르친 이영노 교수가 세계 식물학계에 처음 소개한 식물은 150여 종에 이른다. 동강에서는 동강할미꽃 외에도 '정선황새풀'이라 불리던 야생화에 '동강고랭이'라는 새 이름을 줬다. 서울 창덕궁에서 '창덕제비꽃', 오대산에서 '노랑무늬붓꽃', 태백산에서 '태백기린초'와 '태백바람꽃'을 각각 발견했다. 이 교수가 찾아낸 식물의 학명(學名)에는 그의 영문 이름 머리글자를 딴 'Y. N. Lee'가 붙는다.
▶이런 학문적 업적은 평생을 산과 들에서 산 결과였다. 이영노 교수는 남한의 산은 안 오른 곳이 거의 없고 한라산은 250차례나 찾았다. 백두산도 20여 차례 올랐다. 그의 발길은 남미 아마존 밀림에서 캐나다 북극지대까지 해외에도 닿았다. 6·25 때 10만 점의 식물 표본을 잃어버린 경험을 한 터라 희귀식물을 사진에 담기 위해 늘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이영노 교수가 식물학자가 된 것은 전주사범학교 1학년 생물시간 때 했던 왕벚나무 그림 숙제가 계기가 됐다. 그는 봉오리가 맺혀 꽃이 필 때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담아냈고 선생님은 전교에서 가장 잘됐다며 게시판에 붙였다. 그는 졸업 무렵 1500여 종의 식물 이름을 줄줄 외웠다. 교사로 근무하면서도 식물 연구의 꿈을 못 잊어 서울대 생물교육과에 진학했다.
▶이 교수는 1996년 평생 연구성과를 담아 펴낸 '한국식물도감'에 2006년 800여 종을 추가해 개정판을 냈다. 1800여 쪽에 4157종의 식물 사진과 해설을 담아 한반도에 자라는 거의 모든 식물을 망라했다는 평을 들었다. 얼마 전까지도 일주일에 2~3회 채집을 다니던 그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그제 별세했다. 그는 2년 전 제자들이 출간 축하파티를 열자고 하자 "이제야 식물에 눈을 떴다. 10년 뒤 다음 개정판을 낼 때 하자"고 사양했었다. 평생을 청년처럼 살며 식물학 연구의 외길을 걸은 노(老)학자의 명복을 빈다.
식물학자 고 이영노 박사 회고전 | ||||||
내년 2월까지 국립생물자원관 특별전시실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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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특별전에는 이 박사의 자생식물에 대한 70년간의 열정이 고스란히 담긴 저서와 논문, 친필원고를 비롯해 연구 활동을 담은 사진과 직접 채집한 희귀표본 등 120여점이 전시된다. 특히 금강산과 백두산에서만 자생하는 학술적 가치가 높은 금강인가목, 백두모싯대, 양머리복주머니란 등 희귀한 표본 5점이 일반인에게 최초로 공개된다. 이 박사는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우리나라 전국을 샅샅이 조사해 동강할미꽃, 노랑무늬붓꽃 등 총 242종류의 새로운 식물을 학계에 보고하는 등 자생식물의 분류체계 확립과 식물분류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화여대 생물학과 교수와 한국식물학회장, 한국식물분류학회장, 한국식물연구원장을 지낸 이 박사는 지난해 6월22일 향년 88세로 타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