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5_80년5월18일

"전두환, 종신형 받고 지금도 감옥에 있어야"

忍齋 黃薔 李相遠 2011. 6. 15. 06:15
반응형

"전두환, 종신형 받고 지금도 감옥에 있어야"

[인터뷰] 캐나다 한국학 교수 도널드 베이커

오마이뉴스 | 입력 2011.06.14 15:45 | 

 

[오마이뉴스 김성수 기자]

 

▲ 도널드 베이커 교수  
ⓒ 도날드 베이커

 
도널드 베이커 교수는 미국인이지만 캐나다의 브리티시 콜롬비아 대학(UBC)에서 한국역사를 가르친다. 지난 12일 서울 신촌의 한 모임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1970년 대 초반 전라도 광주에서 미국 평화봉사단으로 일한 적이 있다. 그래서 전라도 사투리도 곧 잘한다. 그와 한국 역사와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미처 못 보고 못 느낀 우리 역사의 모습을 그의 입을 통해서 들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는 1980년 5월 광주를 방문했다. 그리고 그 학살의 현장에서 죄 없이 죽은 분들의 피를 직접 보았다. 당시 생존자들의 증언도 들었다.


1983년 국제사면위원회 미국 지부장으로 있으면서 베이커 교수는 당시 미국에 망명중이던 재야 정치인 고 김대중 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당시의 만남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그 잊을 수 없는 감회도 이야기해 주었다. 아래는 지난 12일 신촌의 한 모임에서 내가 베이커 교수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 1971년 광주에서 미국평화봉사단으로 일하며 3년을 머물렀는데 한국문화의 어떤 점에 그렇게 끌렸나?


"한국문화가 내가 자라난 북미문화보다 오래 되었다는 것에 끌렸다. 그래서 그런 한국문화를 알아가는 것이 흥미있었다. 한국문화와 비교하면 북미문화는 그 층이 깊지 못하다. 전라도 광주가 특별히 흥미있던 것은 당시 전라도의 전통적 문화가 여전히 그곳에 생기 있게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문화는 아주 독특하다. 한국에 오기 전 나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했다. 그래서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한국문화도 중국, 일본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고정관념에 있었던 나는 한국문화를 직접 접하고 놀랐다. 한국인들은 중국인과 일본인에 비해 감정적으로 더욱 열려있고 직설적인 성격이다. 그런 연유인지 중국이나 일본인보다 한국인 친구들을 사귀기가 더 쉬웠다."


- 1980년 5월 광주에 있었는데, 광주민주화운동 기간 중 겪었던 체험을 말해 달라.


"1980년 5월 광주에 가기 전 나는 서울에서 폭력사태를 목격했다. 당시 남대문에서 승객이 없는 시내버스가 학생들의 시위를 저지하려는 전투경찰을 치고 질주하는 것을 보았다. 여섯 명의 사람들이 버스에 치여서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후 경찰 트럭이 와서 쓰러진 여섯 명을 트럭 뒤에 막 싣고 가는 걸로 봐서 그 여섯 명이 모두 즉사한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 날 신문을 보니 단지 한 명만이 그 사건으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또 신문은 그 버스를 운전한 사람이 광주사람이라고 했다.


광주에서 학살이 막 시작한 날인 5월 18일 나는 서울에 있었다. 나는 단파 라디오가 있었기 때문에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직접 내 눈으로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고 싶었다. 또 광주에 있는 내 친구의 안부가 궁금했다. 나는 1980년 5월 27일 서울을 떠나 광주로 향했다. 그러나 군인들이 서울에서 광주로 가는 주변 도로를 봉쇄했기 때문에 광주 시내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해남으로 갔고 다음 날인 5월 28일 해남에서 시골버스를 타고 광주외곽에 내렸다. 거기서 나는 조그만 산을 넘어 걸어서 광주로 갔다. 내가 광주에 도착한 5월 28일은 광주시민에 대한 학살이 끝난 후였다.


광주 시내에서 나는 피가 거리 여기저기에 쏟아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중년부모로 보이는 분들이 길거리에 놓인 관속에 누워있는 시신을 보고 절박하게 우는 것도 보았다. 한 어머니는 관을 운반하고 있는 손수레를 끌고 가는 사람들을 향해 따라가며 "내 아들 놔둬!"라고 울부짖기도 했다. 할머니들은 광주도청 근처 체육관 앞에 길게 줄을 서서 시신의 신원을 확인했다.


내가 1971년부터 1974년까지 광주에 살았기 때문에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을 만나서 5월 18일부터 27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난 충격을 받았다. 난 광주에 2~3일만 묵고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군인들이 도로를 봉쇄했기 때문에 버스가 없어서 다시 오던 길로 산을 넘어 광주외곽으로 시골버스를 타기 위해 갔다.


나는 지금도 광주에서 고통의 눈물을 흘리던 많은 분들의 충격적인 모습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 그중에 특별한 기억은 이렇다. 당시 나는 광주에서 공중목욕탕에 간 적이 있다. 목욕탕에서 표를 팔던 한 여성은 내가 왜 한국에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한국역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라고 했을 때 그녀는 "광주 시내가 다 파괴되었어요. 그래서 이제 광주에 역사는 없어요. 당신, 빨리 돌아가세요"라고 말했다. 그 여성의 말이 지금도 안 잊힌다."

 

 

▲ 1973년 광주에서

ⓒ 도날드 베이커

  
- 1983년 워싱턴 대학교에서 한국역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당신이 한국학 전공자가 된 것과 광주민주화운동이 무슨 연관성이 있나?


"나는 1980년 광주학살이 나기 전 이미 한국역사를 연구하고 있었다. 1971년부터 74년까지 3년 동안 광주에 살면서 나는 한국역사에 매혹되었다. 그러나 대다수 서양인은 이러한 한국역사를 모른다. 광주는 내가 북미인들에게 한국역사와 문화를 가르치도록 영감을 준 곳이다."


- 지난 해 11월, 진실화해위원회 3기 위원장 이영조씨는 미국에서 열린 학회에서 "제주 4,3은 폭동, 광주 5.18은 민중반란"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관련기사].


"나는 이영조씨의 그런 표현에 아주 마음이 불편하다. 1980년 5월의 반란은 광주시민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몇몇 군 장성이 일으킨 것이다. 80년 5월 18일 전국적으로 계엄이 확대 되는 것에 반대해 소수의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다. 그 시위는 평화적인 것이었고 반란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시위대들이 자국민을 상대로 치명적 폭력을 저지른 군대와 마주쳤을 때 그 시민들이 정당방위로 저항한 것이다. 그래서 이영조씨의 '반란'이라는 표현은 아주 부적절하다.


제주 4.3의 경우는 그 시초가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 시키는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해 일어난 군사적 저항이기 때문에 내전(Civil War)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다른 말로 4.3사건 발단은 조국분단이 목적이 아니라 한국의 미래가 어떠해야 하는 가라는 비전을 놓고 일어난 전투였다. 그래서 그것은 내전이지 폭동이 아니다. 미국역사에서도 미국 북부와 남부가 벌였던 남북전쟁을 남부의 북부에 대한 반란이나 폭동으로 부르지 않고 내전으로 부른다. 그래서 제주 4.3 사건과 그 뒤 한국전쟁도 내전으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 캐나다 대학생들에게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가르칠 때 반응이 어떤가?


"캐나다 학생들은 보통 광주학살에 대해 전혀 모른다. 그래서 내 강의를 들으며 큰 충격을 받는다. 지금은 한국이 민주국가라서 한국이 항상 그런 줄로 기대했기에 충격을 많이 받는 것 같다. 내가 1980년 5월 광주에 갔던 일과 목격한 일을 말할 때 교실은 침묵에 쌓이고 전 학생들은 내 말 한마디 한마디를 주시한다.


내가 캐나다에서 가르치는 한국 대학생 대부분도 캐나다 학생들처럼 광주학살에 대해 전혀 모른다. 한국학생들은 5.18에 대해 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얼마나 잔혹한 일이 그때 광주에서 일어났는지는 전혀 모르는 것 같다. 내 학생 중에 간혹 광주 출신이 있다. 그 학생들의 반응은 두 가지다. 첫 부류의 학생은 처음 내 말을 믿지 않는다. 그 후 집에 가서 부모님으로부터 광주학살에 대한 증언을 듣고 왜 부모님이 캐나다로 이민을 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고 나중에 내 말을 믿게 된다. 다른 부류 학생은 수업이 끝나고 내 방으로 찾아와서 고맙다고 한다. 부모님께 그런 증언을 들었지만 캐나다 학생들에게는 공개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해 본적이 없어서 마음이 불편했었는데 내가 화두를 만들어주어서 고맙다는 이야기다."


- 1983년 고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 망명 시 만났지 않나? 그때 재야 정치인 김대중과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혹시 있었나?


"내가 김대중씨를 만났을 때 그는 미국망명 중 이었다. 나는 당시 국제사면위원회 미국 지부장이었다. 나는 김대중씨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그에 대한 형집행정지를 위해 일했다. 나는 김대중씨와 부인 이희호씨를 미국 시애틀로 초대했고 워싱턴대학교에서 두 분은 이틀을 보냈다. 김대중씨는 대학에서 몇몇 공개강연을 했고 재미교포를 만났다. 난 김대중씨를 좋아했다. 당시 그는 나와 국제사면위원회 인사들에게 두 가지를 이야기 했다. 첫째 그는 자기가 대통령이 될 때 (되면이 아니라) 사형제를 폐지하도록 시도할 것이라고 했다. 나중에 그는 대통령이 되어서 사형 제도를 폐지하지는 못했지만 한 명도 자신 임기 중 사형시키지 않았다.


둘째, 자신이 대통령이 될 때, 제일 먼저 할 일로 자기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가해자들을 사면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것이 그동안 한국을 분열시킨 지역감정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절차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대통령이 되어서 그는 정말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했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15년 전 내게 한 말을 기억한 것 같았고 그가 그 약속을 지킨 것에 감동을 받았다."


- 전두환은 비록 광주학살의 가해자지만 그는 아직도 윤택하게 살고 그에 대한 경호비용은 세금으로 충당된다.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비록 나는 고 김대중 대통령이 전두환을 사면해 준 것을 인정하지만, 전두환은 전직 대통령으로 예우되어선 안 되고 범죄자로 취급을 받아야 한다. 한국인이 그를 대통령을 뽑아준 적이 없지 않은가? 전두환은 군사 쿠데타로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을 뿐이다. 난 사형제도는 반대한다. 그러나 전두환은 종신형을 받고 지금도 감옥에 있어야 한다. 종신형도 못 시키면 최소한 전두환의 전 재산을 한국정부가 다 빼앗아 전두환이 학살을 자행한 광주학살 희생자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 한국학자로서 한국정부에 해 주고 싶은 조언이나 제안이 있나?


"한국정부는 젊은 세대들에게 지난 반세기의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내 경험에 의하면 한국 젊은이 들은 부모나 할아버지 세대가 살았던 역사를 너무 모른다. 만약 한국 젊은 세대들이 부모나 할아버지 세대가 겪었던 희생과 일에 대해 더 안다면 한국역사와 정치가 과거의 권위주의로 후퇴하는 것을 막을 수가 있다.


지난 50년간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단기간에 '빨리 빨리'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그 과정에 한국이 많은 피를 흘렸지만 그 흘린 피의 양도 인도네시아나 인도보다는 적다. 한국과 비교할 수 있는 나라는 대만뿐이다. 한국 젊은이들은 한국현대사의 독특함을 알아야 하고 그래서 그 부모와 할아버지 세대가 이룩한 것에 자부심을 느껴야 할 것이다."


ⓒ 오마이뉴스

 

 

 

 

 

[관련기사]

"제주 4.3은 폭동·광주 5.18은 민중반란"
이영조 진실위위원장의 기막힌 역사인식
제2차 국제심포지엄 자료집서 기술... 번역문 없이 영문으로만 공개 '논란' 
 
10.11.18 10:33 ㅣ최종 업데이트 10.11.18 13:45  김성수 (wadans) 
이영조, 영문책자, 국제심포지엄, 김성수, 진실위 
 

[기사수정 : 18일 오후 1시 38분]

 

 

이영조 진실화해위 위원장 
ⓒ 연합뉴스  이영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위, 위원장 이영조)는 지난 5일 사업계획서에도 없는 예산 5000만 원을 들여 미국 세인트루이스 힐튼호텔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에 참가, '한국 과거사 정리의 성과와 의의(Transitional Justice and Beyond in South Korean)'라는 주제로 제2차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했다.

 

국제학술회의는 국제적 학회인 미국서부정치학회(ISA Midwest, International Studies Association  Midwest), MALAS(Midwest Association for Latin American Studies), CSC(Central Slavic Conference) 공동주관으로 열렸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다른 여러나라의 전문가와 언론인들이 참석할 예정이라는 애초 보도자료 내용과 달리, 미국 현지에서 10여 명만이 참석했다고 심포지엄 참가자는 밝혔다.

 

진실위 활동을 비롯, 한국의 과거사 정리 활동과 한국전쟁기 민간인 집단희생사건과 인권침해 사건 등의 내용을 발표하기 위해 열린 심포지엄이지만 국내 언론엔 한 줄도 보도가 안 되었다. 지난해 안병욱 전 진실위 위원장 시절, 200여 명이 참석하고 언론에 많이 보도된 진실위 국제심포지엄과 큰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국제심포지엄에 대한 보도자료와 자료집조차 불과 행사 전날인 지난 4일 부랴부랴 공개됐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자료집도 이영조 위원장의 글을 포함해 거의 전부 영문으로 되어 있다. 제일 뒤 한 사람의 발제문만 국영문으로 되어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일반 한국인들이나 유족들이 알아 볼 수 없는 내용의 자료집이다. 그래서 언론에서도 이 진실위 국제심포지엄을 한 줄도 다루지 않았던  것같다. 보통 한국 관련 국제포럼을 할 때는 주최 측에서 국영문 자료집을 제공하는 것이 상식적인 처사다.

 

하여간 영문으로 된 이 자료집을 읽다가 '이영조 위원장은 왜 보통 한국인들은 알아볼 수 없는 영문으로만 된 자료집을 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영문 자료집을 다 읽고 난 후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 (☞ 국제심포지엄 자료집 바로가기).

 

영문으로 된 자료집, 누구 위한 심포지엄?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국제심포지엄 
  

먼저, 한국 최초의 진실위라 할 수 있는 이승만 정권하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와해 과정에 대한 이영조 위원장의 평가를 보자(실제 심포지엄에서는 이영조 위원장 대신 강규형 위원이 자료집을 대독했다).

 

반민특위는 국회에 의해 1948년 10월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으로 의욕적인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친일파와 결탁한 이승만 정부의 방해, 친일세력의 특위위원 암살 음모, 친일경찰의 대습격, 백범 김구의 암살 등으로 발족 1년만인 1949년 10월에 비극적으로 해체됐다. 이 반민특위의 와해 과정을 이영조 위원장은 영문 발표문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반민특위가 와해된 것이 이승만과 부역자(친일)들이 공모, 모의한 결과라고 보는 학자들 및 활동가들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이 평생 독립운동 지도자로 살아왔다는 점과 철두철미한 반일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친일 부역자들에 대해 개인적으로 경멸하고 있었다는 점 등을 미루어볼 때, 이승만이 반민특위의 활동 승인을 거부한 것은 어떤 공모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국가기반 건설의 필요성 때문이었다고 판단된다. 이승만으로서는 반한(反韓) 행위 숙청보다 국가기반을 닦고 공산주의로부터 국가를 지켜내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같은 평가는 이영조 위원장이 지난해 12월 금서 조치를 한 진실위 영문책자 <Truth and Reconciliation>(진실과 화해)에 있는 안병욱 전 진실위 위원장의 아래 글과 대조된다.

 

"이승만 정부는 위원회(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하였고 끝내 해체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일제 침략에 협조하였던 인사들은 처벌받기보다는 이승만 정권뿐만이 아니라 그 후 군사정권하에서도 권력을 가지고 큰 영향을 행사했다. 이승만 정부의 실체는 자주적인 국가라는, 한국민이 염원하고 기대했던 모습과는 너무나 판이했다."

 

이영조 위원장이 반민특위 와해 사건을 이승만의 "국가기반 건설의 필요성 때문"으로 평가한 반면, 안병욱 전 위원장은 이승만 정부가 "자주적인 국가라는, 한국민이 염원하고 기대했던 모습과는 너무나 판이했다"고 다른 평가를 내린다.

 

"제주 4·3은 공산주의 세력이 주도한 폭동...광주 5·18은 민중반란"

 

제주도민의 가슴에 깊은 상처와 지울 수 없는 고통의 못을 박은 1948년 4월 3일 미군정 하에 벌어졌던 4·3항쟁에 대해서도 이영조 위원장은 이렇게 묘사한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는 공산주의 세력이 주도한 폭동(rebellion)이 발생하여 여러 해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미 진상규명 끝난 4·3 항쟁을 단순히 "공산주의 세력이 주도한 폭동"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문제다. 4·3사건의 배경에는 제주도내 남로당지부의 활동, 미군정의 친일파 등용과 서북청년단 같은 극우단체들의 폭력과 횡포에 대한 제주도 주민들의 반발 등 여러 복합요소들이 얽혀 있다. 제주 4·3항쟁을 통해 약 3만 명의 무고한 민간인들이 학살 당했다. 이 중에는 무장대에 의해 희생된 사람도 포함되어 있으나 대부분은 서북청년단 등 극우단체와 군경토벌대에 의한 희생자였다.

 

더욱이 민주화 이후 1998년 11월 고 김대중 대통령이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 4·3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벗겨줘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후 1999년 국회에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고, 2000년 제정 공포되면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시작됐다.

 

조사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2003년 10월 고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까지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진실과 화해를 추구하는 위원회의 위원장이라는 직책으로 국제심포지엄에서 다시 제주 4·3항쟁을 "공산주의 세력이 주도한 폭동"이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영조 위원장의 상식을 뛰어넘은 표현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한때는 '광주사태'로 불리다가 1988년 이후로는 공식적으로 광주민주화운동(Gwangju Democratization Movement)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영조 위원장은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에서 발생한 민중반란(a popular revolt)"이라고 썼다. 이 '민중반란'이라는 표현은 신군부를 지지하는 일부 우파 인사들만이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이영조 위원장은 개인 자격이 아니라 국민들 혈세로 운영되는 과거사정리 기관의 공식 수장인 공무원 신분으로 이 글을 쓴 것이다. 그럼에도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표현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편향된 진실위 조사관"의 실체

 

또한 발표문에서 이영조 위원장은 진실위 조사관들의 소위 '편향성"을 이렇게 묘사한다.

 

"중도 성향의 한 NGO의 분석에 따르면, 진실위에서 채용한 조사관들의 65.5%가 진보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과거사 정리와 관련된 단체들에서 일했던 사람들이라고 한다… 위원들의 경우, 이데올로기적 성향은 조사관들만큼 편향되어 있지는 않았다."

 

이영조 위원장은 편향된 조사관 성향을 언급하는 근거로 <동아일보>를 인용했다. 난 이영조 위원장이 말하는 중도성향의 한 NGO가 어딘지 그가 인용한 <동아일보>를 찾아봤다. 그것은 이영조 위원장이 사무총장을 지내던 '바른사회시민회의'라는 단체였다. 이 단체에 관여하고 있는 몇몇 인사들을 보니 남덕우, 박효종, 류근일, 봉두완씨 등이었다. 이 단체에 대한 언론의 표현을 검색해 보니 다음과 같았다. "우파NGO의 원조", "뉴라이트계열 시민단체", "보수단체", "보수성향" 등이다.

 

바른사회시민회의 창립식을 다룬 교수신문(2002.4.9)은 이렇게 기술한다.

 

"이 단체에는 과거 권위주의와 관치경제가 횡행했던 시절, 정권에 직접 참여했던 정관계 인사 상당수가 참여하고 있고 상식적인 중도나 보수로 여기기 힘든 수구적 인사까지 들어있어 과연 스스로 표방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정체성을 지킬 수 있겠느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이영조 위원장님, 앞으로 진실만 말하세요

 

극우에서 보면 우익이 좌편향적이고 극좌에서 보면 좌익도 우익으로 보인다. 사람은 상대적 존재라는 말이다. 나는 이영조 위원장이 향후 공직자나 학자적 입장에서라도 좀 더 공식적, 중립적이고 신중한 표현을 사용해주길 기대한다. 특히 해외에서 외국인들에게 발표하는 국제심포지엄에서 말이다.

 

이영조 진실위 위원장이 배포 중단을 지시한 영문책자 <진실과 화해> 표지. 
ⓒ 진실과화해   진실위 
 

해외 출장 12차례로 이미 국민혈세 1억 원 이상을 쓰고 그것도 모자라 또 다음 달 진실위 종료 전에 한 번 가본 적이 있는 영국 출장을 또 준비하고 있는 이영조 위원장은 진실위의 예산문제도 이번 국제심포지엄 발표문에서 이렇게 비판한다.

 

"진실위는 보고서 한 편당 평균 2억5000만 원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영조 위원장의 이런 지적은 사실이 아니다. 진실위가 지난 5년간 보고서 발간을 위해 쓴 총 예산은 760억 원이다. 이것을 진실위 결정사건 수 436개(진실규명 결정 사건 372개+진실규명불능 결정 사건 64개)로 나누면, 1개 사건 보고서 당 1억7400여만원을 사용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결국 2억5천만원은 잘못된 계산이다. 이영조 위원장의 이러한 발언들은 결국 진실위 활동을 폄하하기 위한 의도적인 숫자놀음과 조작에 불과하다.

 

피해자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위로하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다. 도덕적 존재이어야 할 인간이 추구할 당연한 의무 사항이기에 하는 것이다. 돈이 안 생기면 부모도 버리는 것이 효율적인가? 인간성을 상실한 효율성은 아무 의미가 없다. 나는 진실위가 그 설립목적에 맞게 "은폐된 진실을 밝혀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국민통합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김성수 기자는 <함석헌 평전>의 저자입니다.
 
  
 [관련기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79646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