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5_80년5월18일

아! 5.18 그리고 고(故) 이세종

忍齋 黃薔 李相遠 2011. 7. 31.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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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5.18 그리고 고(故) 이세종
2010년 05월 17일 (월) 15:33:00 
최기재  sjb8282@gmail.com

 
 


 
  ▲ 최기재  
 
때로 진실은 긴 세월을 요구한다. 이세종 열사의 진실 역시 오랜 세월을 기다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5.18 최초의 희생자로 확인된다. 열사의 진실이 밤하늘의 별로 암흑에서 시나브로 밝아지기 시작하였다. 별이 뜨기까지 20년이 걸렸다.

이세종 열사가 5.18 최초 희생자임을 규명한 사람은 이민규 순천향대 교수이다. 이 교수는 2000년 5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언론보도 분석-검열 삭제된 기사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당시에 삭제되었던 동아일보 기사 원문을 공개한다.

"18일 새벽 1시30분께 전주시덕진동 전북대학생회관 3층 옥상에서 동교농학과 2년 이세종(20, 전북 김제군 월촌면 연정리 281)이 13미터 아래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져 숨졌다. 경찰에 따르면 숨진 이군은 이날 자정 비상계엄령이 전국에 확대 발표된 직후, 계엄군이 학교에 진입 학생회관 쪽으로 몰려들자 학생회관 회의실에 있던 3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몸을 피해 옥상 밑에 부착된 철제외 등걸이를 붙잡고 매달렸다가 밑으로 떨어져 숨졌다는 것... "

계엄령이 해제되고 개학했을 때 학생회관 옆 학교버스를 타는 곳에는 핏빛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기사도 이 흔적도 전두환 군부의 조작임이 부검을 통해 뒤늦게 확인된다. 그리고 ‘한겨레신문’은 꾸준히 전북대 의대의 부검 사실을 보도한다. 또한 5.18 민주화 유공자 이상원 박사는 계엄군에 의해 구타로 사망했음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1980년 자정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곧바로 대학 학생회 철야 농성장에 진입한 공수부대원들은 무차별로 학생들을 연행한다. 그 과정에서 이세종은 사망하게 되고 구타로 인한 사망을 감추기 위해 학생회관 아래에 피의 흔적을 남긴다. 신문 기사는 새벽 1시 30분께로 말하고 있지만 12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 맞을 것이다. 단순 추락사도 아니고 사망 시각도 발표한 시간과 다를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민주화유공자로 인정이 되고 우여곡절을 여러 번 겪고 나서야 전북대 ‘이세종광장’에 추모비가 제대로 세워지고 뒤이어 모교인 전라고등학교 교정에도 ‘이세종 열사 추모비’가 세워진다. 20년이 지나서야 5.18 공식 희생자로 공식 인정된다.

이세종 열사는 필자와 고교 3학년 동료 하숙생이다. 같은 방에서 자고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었다. 학급실장으로 성실했고 영혼이 맑았던 친구이다. 생활이 밝았고 열정이 있었다. 특히 불의에는 목소리를 높이는 강한 신념을 가졌다. 그 친구가 남긴 선물을 필자는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자연계열이었던 그 친구는 고전문학 참고서가 자기에게는 필요없다며 필자에게 주었다. 양장본으로 이루어진 당시에 참고서 중에는 꽤나 두꺼운 책으로 기억한다.

5월 17일, 부모님께서 걱정을 많이 하시니까 오늘은 꼭 집에 들어가라는 다른 친구의 간절한 부탁을 이세종은 어렵게 받아들인다. 지금 나가면 잡힌다며 거절하다가 친구의 간절한 부탁이 고마워서인지 설득하기 어려워서인지 부탁을 받아들이지만 그는 남은 동료를 뒤로 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날이 생의 마지막이 되고 만다. 팽팽한 긴장감과 숨 막히는 날들 속에서 그는 따뜻하면서 강한 벗이었던 것이다.

다시 맞는 5.18, 영혼이 순수했던 그는 이제 밤하늘의 별이 되었다. 세상의 혼탁에 단호히 맞섰던 그는 시대의 횃불이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현대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사회를 책임지는 지성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여전히 인간 세상은 홍진(紅塵) 세상이며, 풍진(風塵) 세상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의 우리에게 횃불이며, 하늘의 별로 남는다.

/최기재(전라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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