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조선의 산 지켜려다 죽은 일본인
일제 목재 수탈에 분노해 나무를 심다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힌 아사카와 다쿠미, 묘비도 세우고...
야나기 무네요시와 함께 광화문 지키기 위해 반대기고문도
김소정 기자 (2011.09.12 07:00:59)
일제 강점기를 아는 한국인으로서 그 시절 한국에서 살았던 일본인을 기리는 모임이 있는 것에 우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사카와 다쿠미에 대해 알게 되기 전 사실은 절반 정도 거부감을 안고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 아사카와 다쿠미 ⓒ서울국제친선협회 제공
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동묘지 ‘사색의 길’에는 한국인의 손에 의해 보존되어온 일본인 묘가 있다. 묘비명에는 ‘한국의 산과 민예(民藝)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고 적혔다.
묘비명의 주인공은 일제 강점기 임업시험소 용원으로 조선에 파견됐던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1931.4)이다. 그는 사실상 조선 목재 수탈을 지원했던 기관인 총독부 산림과 직원이었으나 일본인이 민둥으로 만들어버린 산야에 열성으로 나무를 심었다.
또 일본이 총독부 건물을 짓기 위해 광화문을 헐어버릴 계획을 세우자 유명 민예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와 함께 일본 월간지(개조)에 반대기고문을 발표해 열렬히 반대했는가 하면, 3.1운동과 동경대지진 때 무고한 조선인이 살상당할 때에도 이를 당당히 규탄했다.
아사카와 다쿠미가 조선땅에 온 것은 1914년 24세의 나이였다. 당시 대다수가 서부 일본에서 건너왔던 것과 달리 그는 도쿄 근처인 야마나시현 호쿠토시 출신이다. 36년 동안이나 지속된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인이 겪었던 차별과 굴욕은 말로 다할 수 없다. 조선인이라면 산에 떨어진 나뭇잎 하나를 주워도 잡혀가던 당시였다.
일본의 목재 수탈에 반감 안고 나무심기에 열성
조선에서 아사카와 다쿠미가 일했던 총독부 산하 산림과는 사실상 목재 수탈을 관리하던 곳이었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아사카와 다쿠미 현창회’의 조만제 회장(87)은 “산림과에서 산림 조성이 아니라 오히려 수탈을 돕는 것에 반감이 생겼던 것 같다”고 했다. 당시 “‘산감’으로 불리던 산림 관리원에 헌병, 경찰처럼 형사권이 주어졌고, 이들이 조선인에게 발길질도 흔하게 하던 시절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일본이 한일합방 이후 제일 먼저 한 것은 조선 임야의 나무를 베어낸 일이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큰 제지회사였던 ‘왕자제지’에 공급된 펄프 대부분이 조선의 나무에서 나왔다”고 조 회장은 증언했다.
조 회장은 “일본인들은 백두산에서 수백년 된 나무들을 베어서 뗏목에 싣고 압록강을 거쳐 신의주로 내려갔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사실 식민지에서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산야에 심어져 있는 나무를 수탈하는 일이었을 게다.
이런 산림과의 행태를 지켜보던 다쿠미는 비어버린 야산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그는 주로 싸리나무와 아카시아나무를 골라 심었는데 덕분에 지금 전국 곳곳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수종이 됐다. 그가 아카시아나무와 싸리나무를 선택한 이유는 빨리 자라고 뿌리가 잘 뻗는 특성이 있어서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지금의 광릉수목원을 탄생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수목원을 계획하고 이곳에 심을 수종도 직접 골랐다. 전국을 다니며 지역에 맞는 수종을 고르고 식목하기를 거듭한 결과 지금 한국의 인공림 37%는 다쿠미가 공을 들인 나무라고 한다.
다쿠미는 또 자연 상태 흙의 힘을 이용하는 ‘노천매장법’ 방식으로 조선오엽송 종자를 싹 틔우는 방법도 개발했다. 이전까지 한국 잣나무는 2년을 길러야 양묘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다쿠미가 고안해낸 양묘법 덕분에 기간을 1년으로 단축할 수 있었다.
총독부가 광화문 헐려고 하자 반대 선봉
다쿠미는 조선의 공예를 특히 사랑했다. 다쿠미는 친형인 아사카와 노리타가(1884-1964)를 조선으로 불러들였다. 노리타가는 ‘조선 도자기의 신’이라 불릴 정도로 한국 도자기 발전에 공이 있다. 그는 함경도에서 제주까지 조선 8도의 가마터를 조사해 언제, 어떤 도자기가 나왔는지를 기록한 기초자료를 집대성했다.
다쿠미 역시 조선의 소반문화를 연구해 살아생전에 ‘조선의 소반’이라는 책을 냈다. 그는 한국 문화가 중국의 아류라는 다른 일본인들 주장에 맞서 조선 밥상을 들어 조선 문화의 독자성을 변론했다고 한다. 사후에는 조선 도자기 연구서인 ‘조선도자명고’도 출간됐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우리 공예와 도자사를 연구하는 사람에게 보물 같은 책”이라고 평한 바 있다.
이후 두 사람은 ‘일본 공예의 아버지’로 불리운 야나기 무네요시를 조선으로 불렀다. 이렇게 세 사람은 조선에 머물면서 조선에 관한 글을 쓰고, 도자기와 목기를 모으는 일에 주력했다. 또 일본이 총독부 건물을 짓기 위해 광화문을 헐어버리려 하자 열렬한 반대운동도 함께 펼쳤다.
당대 최고의 미술평론가였던 무네요시는 일본에서 발행되는 월간지 ‘개조’에 장문의 글을 기고했다. ‘장차 잃게 된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라는 글에는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너의 생명이 조석(朝夕)에 절박하였다 / 어찌하면 좋을까 / 가령 일본이 쇠약하여 궁성이 폐허가 되고 에도성이 헐리는 모습을 상상해 주기 바란다”라고 돼 있다.
조선인도 못 나섰던 일에 당대 유명한 예술가 3명이 나서 여론을 형성하자 총독부는 당초 계획한 일을 3개월씩이나 연기하며 전전긍긍했다. 결국 총독부는 여론에 굴복, 계획을 철회하고 경복궁 동쪽으로 광화문을 옮기는데 그쳤다. 총독부 건물은 경복궁과 광화문 사이에 지어졌다.
다쿠미는 생전에 출간된 책 ‘조선의 소반’에 조선에 대한 절절한 애정을 담기도 했다. 책에는 ‘피곤에 지쳐 있는 조선이여, 다른 사람 흉내를 내기보다 갖고 있는 중요한 것을 잃지 않으면 머지 않아 자신에 찬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은 공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라고 씌어 있다.
이 글이 발표되면서 다쿠미는 자칫 총독부의 눈엣가시가 될 뻔했다. 하지만 당시 경성제국대학 교수인 아베 요시게가 발 빠르게 총독부로 찾아가 문제 삼지 말아달라고 특별히 부탁, 아무런 문제가 안 됐다고 한다. 아베 요시게는 해방 이후 일본 초대 문교부장관이자 천황의 아들이 다니는 귀족학교의 교장을 지낼 정도로 명망가였다.
◇ 아사카와 다쿠미와 백자 ⓒ서울국제친선협회 제공
고구려인 새 터전 호쿠토시에서 나고 자라
다쿠미는 경성(지금의 서울) 아현리(아현동)에 살면서 온돌방에서 잠을 자고 한국말을 쓰며(당시 조선에 머물던 일본인들은 한국말을 쓰지 않았다) 늘 흰색 바지저고리 차림에 망건까지 쓰고 다녔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다쿠미는 41살에 요절한다. 그가 죽은 다음날 많은 조선인들이 몰려들었다. 흰 한복을 입고 누워있는 그의 시신을 보고 통곡하던 조선인도 많았다. 한 동네에 살던 이문리 사람들은 서로 관을 메겠다고 나섰다. 그의 장례식 날 청량리 일대의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1931년 4월 그의 유언대로 다쿠미는 그가 살던 이문리 마을 뒤에 묻혔다가 죽은 지 11년이 지난 1942년 묘지 근처에 새 도로가 뚫리면서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해 묻혔다. 해방 후 훼손 된 그의 묘를 1964년 6월 20일 직장동료인 ‘한국임업시험장’ 직원들이 다시 복원해 그해 8월 25일 한글 묘비를 세웠다.
그런데 아사카와 다쿠미의 고향인 후지산 북쪽에 자리잡은 호쿠토시는 많은 고구려인들이 건너가 터전을 잡은 곳이다. 다쿠미는 어린시절 국학자이자 한학자로서 크리스찬인 외조부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조 회장은 “다쿠미가 실제로 고구려 후손일 수도 있고, 혹은 한국에 대한 동경을 품고 살아온 일본인이었을 수도 있다”고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1910년 일제 강점 이후 1920년 전후로 30만여명의 일본인이 점령군처럼 조선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1930년 전후로 30만여명의 한국인은 고향에서 살지 못해 만주로 떠나갔다. 이 기간 동안 아사카와 다쿠미는 한국의 뛰어난 문화를 발견해내고, 이를 기록하고, 전수시키는 업적을 이뤘다.
사실 그동안 일본에선 아사카와 다쿠미의 일생을 그린 책이 200여명에 의해 출간됐다. 이 중 에미야 다카유키가 쓴 ‘백자의 사람’은 20만부가 팔려 베스트셀러로 꼽힌다. 한국인이 아사카와 다쿠미를 기리는 이유도 일본인이 그에 대해 열광하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 회장은 “조선에서 압제와 핍박만 일삼은 지난 역사를 잘 알고 있는 그들로서 한국에서 봉사한 일본인이 있다는 점에 큰 위로를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데일리안 = 김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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