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3_생각해볼글

병사들의 죽음

忍齋 黃薔 李相遠 2011. 9. 30.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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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의 죽음


진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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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당시에 나는 모자에 작대기 두 개를 달고 등촌동에 있는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서 파견근무를 하던 중이었다. 국방부에서 통신지원을 위해 파견된 세 명의 병사가 병원 내의 조그만 방을 내무반을 삼아 살면서 즐거운 군대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 귀찮은 교육도 없고 삽질하는 노역도 없고, 낮에는 끊어진 전화선이나 갈아주고, 밤에는 교환대에 앉아 남자가 그리운 아가씨들의 장난 전화나 받아주면 그만이었다.

입원한 병사들이야 병원 밖 출입이 제한되어 있고, 또 음주가 금지되어 있는 대신에 면회 온 부모에게 받은 풍부한 자금을 갖고 있었다. 반면 우리는 돈만 없지, 언제라도 병원 안팎을 드나들며 물품을 반입할 자유와, 맘껏 술을 마셔도 되는 치외법권지대를 갖고 있었다. 양자의 요망이 서로 완벽하게 일치하기에 밤마다 내무반에서는 풍성한 주연이 열리곤 했다. 위생병들 중에 코가 발달한 녀석들도 빠지지 않고 그 자리를 빛내주곤 했다.

병사의 죽음

그렇게 알게 된 위생병 중에 김 일병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나와 그는 늘 한 조가 되어, 안보의 전선에서 복무하다 부상당한 국군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려고 특별히 시가의 반도 안 되는 저렴한 가격에 그들에게 포경수술을 시술해주기도 했다. 수술비의 4분의 3은 '집도의'인 그가 먹고, 옆에서 조수 노릇을 했던 나는 나머지 4분의 1을 먹었다. '리도케인'이라 불리는 마취약을 맞아 복어처럼 부어오른 물건을 두 손으로 열심히 비벼 원 상태로 되돌리고, 그가 가위질을 하거나 큰 핏줄을 꼬맬 때 옆에서 핀셋으로 포피를 잡아주는 것이었다.

내가 이 친구를 기억하는 것은 그의 화끈함이 내게 여러 차례 깊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리라. 어느 날 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우리는 고기를 구워먹으며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마침 그 자리에는 몇 일 전에 포경수술을 받은 병사 하나가 있었는데, 그 친구도 술이 당겼던지 주치의에게 묻는다. "김일병님, 저도 술 마셔도 됩니까?" 우리 주치의는 예상 밖으로 선선히 허락을 한다. "마셔, 마셔...." 허락을 받은 그 친구가 신나서 한 잔 거하게 들이키고 나자, 그때서야 한 마디 덧붙인다. "x야 불어터지든 말든...."

지뢰 파편에 맞아서 실명을 하여 큰 소리로 울부짖는 병사를 신나게 두들겨 패 주었노라고 자랑하는 친구다. 제 말에 따르면 그렇게 두들겨 패줘야 나약한 마음을 추스르고 앞으로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갈 굳은 의지를 갖게 된다고 한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내가 보고들은 것 중에서 가장 심오한 휴머니즘적인 구타의 예로 남아 있다. 어쨌든 병원에서 그보다 더 안 된 사연을 가진 병사들을 수없이 보다 보면, 절망에 빠져 내지르는 절규도 어린아이의 칭얼거림 정도로 느껴지는 모양이다.

하여튼 이 친구의 감성이 내게 가장 인상을 남긴 사건이 있었다. 중환자실에 근무하던 이 친구의 임무는 사망 환자를 입관하는 것. 하지만 군에서 사고로 죽은 시체들의 형상이 오죽하겠는가. 그렇게 잘려나간 사지를 '와이어'라 부르는 실로 꿰매어 형상을 맞춘 다음에 입관을 하는 것까지가 그의 임무라고 한다. 이 친구가 어느 날 우리 내무반 문을 박차고 들어오더니, 욕설을 퍼붓는다. "x색희, x나게 안 뒤지네." 듣자 하니 소생가능성이 없는 환자 하나가 있는데, 숨이 안 끊어지는 바람에 자기가 아직 잠자러 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병사의 어머니

하지만 중환자실 언저리에는 병사의 죽음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이 있었다. 우리 내무반과 근무처가 바로 중환자실 옆에 있었기에, 우리는 늘 중환자실의 복도에 병사들의 어머니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면회 시간이 지나 아들의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차마 그 곁을 떠나기 어려웠던지 벽에 몸을 기댄 채 수심에 가득 찬 안타까운 얼굴로 하루 종일 거기에 그냥 그렇게 마냥 서 있었다. 그 벽 뒤의 공간에서 죽음의 싸움을 하고 있는 병사도 딱하지만, 그 병사의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고통스럽도록 안타까운 일이다.

복도에는 의자도 없었다. 하루 종일 서 있는 게 하도 딱해서 의자를 꺼내다 권했더니, "괜찮다"고 물린다. 왜 그랬을까? 구약 성서에 보면 여호수아의 전투가 승리할 수 있도록 모세가 산 위에서 하루 종일 두 손을 들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이와 비슷한 심정이 아닐까? 자신이 그렇게 고통스럽게 서 있어야 죽음의 사자와 힘겹게 싸우는 아들이 그 마지막 전투에서  이길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의자를 물리는 그 고행의 실천이 아들이 당하는 고통에 함께 하는 어머니들의 방식이었다.

어머니가 복도에 서 있는 동안, 우리는 이상하게도 어머니와 정서적으로 동화가 된다. 그리하여 얼굴도 모르는 그 녀석이 저 병동에서 다시 걸어나오기를 바라게 된다. 하지만 군대의 병원에서 그 어머니가 면회가 허용되는 이외의 시간에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어도 된다는 것 자체가 벌써 아들의 용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의 바램대로, 거기에 동화된 우리의 바램대로 아들이 살아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숨이 빨리 끊어지면 행복한 경우이고, 정말 몇 일씩 버티는 경우에는 정작 죽어 가는 아들보다 그 몇 일 동안 글자 그대로 식음을 전폐한 채 거기에 서 있어야 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더 애처롭다.

그러다가 마침내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놀라 나가 보면 하얀 천으로 덮인 병사의 사체가 있고, 그것이 실린 커트를 부여잡고 울부짖는 어머니가 있다. 사체를 시체실로 옮기려고 위생병들은 어머니를 뜯어말리나, 어머니는 아들이 지금 시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 적어도 그들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 아들이 엘리베이터에 실려 아래로 내려가면, 내내 서 있던 다리는 그제야 힘이 풀리고, 어머니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소리를 내며 그제야 엘리베이터의 닫힌 문 앞에 주저앉는다. 그리고 이때, 우리 입에서는 저렇게 제 어미 속을 새까맣게 태워놓고 떠난 그 불효자를 향해 욕이 튀어나온다. "x색희....."

죽은 병사의 일기

그렇게 죽은 병사들은 병원 한 귀퉁이 한적한 곳에 있는 영안실로 보내진다. 영안실에 들어가면 콜라 깡통을 반으로 갈라놓은 것처럼 생긴 커다란 시체 보관용 냉장고가 있다. 앞과 뒤에 각각 위 아래로 문이 둘 씩 달려 있어, 모두 네 구의 사체를 한꺼번에 보관하도록 되어 있는데, 미국 '웨스팅하우스' 제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위생병으로부터 그 네 칸 중한 칸에는 술 마실 때 필요한 안주를 저장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그 말이 농인지 진담인지 확인하기 위해 실제로 그 문을 열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영안실 한 쪽 귀퉁이에는 부검실이 있었다. 텅 빈 공간에 부검용 해부대 하나만 달랑 놓여 있고, 바닥은 씻어 내기 편하게 타일이 깔려 있어 마치 목욕탕처럼 여겨졌다. 영안실 벽 위에는 각 계급별로 위험수당과 복무 중 사망 시에 받을 보상금의 액수가 적힌 표가 붙어 있었다. 액수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하여튼 인간의 목숨 값이 개 값보다 못 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도대체 그런 걸 왜 붙여놨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거기서 나는 울부짖는 유가족들과 번거롭게 목숨 값을 놓고 흥정하고 싶지 않다는 국가의 단호한 의지를 읽었다.  

우리가 가끔 영안실에 간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대개 고참병들이 제대를 할 때는 군복무를 기념한답시고 보급품 중에서 이것저것 들고 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 중 가장 만만한 것은 역시 고도리를 칠 때 필요한 모포와 등산, 낚시 등 레저용으로 요긴하게 쓸 수 있는 판초우의였다. 이렇게 분실된 물건들은 검열을 대비해서 어떤 식으로든 채워 넣어야 했고, 그때 제일 만만한 것이 바로 죽은 병사들의 물건이었다. 영안실 옥상에는 그렇게 죽은 병사들의 개인 보급품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어느 날 그렇게 영안실 옥상에서 보급품을 조달하다가 우연히 병사의 유품을 발견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관한 한 권의 책. 아마 다른 책들에 묻혀 아직도 집구석 어딘가에 있을 게다. 그 책의 빈곳에는 죽은 병사의 글이 적혀 있었다. 그 중 한 구절. "이 책은 나의 인식론을 형성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아마도 대학에서 나처럼 철학을 공부하던 학생이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글 밑에 적어 넣은 날짜를 보니, 정확히 15일 전이다. 그러니까 15일 사이의 어느 날에 학교로 돌아갈 꿈을 꾸며 읽을 것과 연구할 계획을 적어 넣었던 그 병사는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왜 죽었을까?

축제의 날

병원에 있다 보니 과거부터 현재까지 있었던 여러 가지 유형의 사고에 대해 듣게 된다. 군대에 떠도는 얘기라야 대부분 과장되고 허위가 섞인 것이지만, 그 중에는 제법 듣기에 그럴 듯한 것들도 있었다. 육군의 사고는 대부분 교통사고, 총기 사고, 아니면 지뢰, 크레모어, 불발탄의 폭발사고다. 해군들의 경우에는 좀 특이한 데가 있다. 가령 군함을 정박시키기 위해 닻줄을 끌어당기다가 놓치는 바람에 닻줄이 병사들의 허리를 쳐, 두 동강이 났다든지. 하지만 실제로 그런 끔찍한 사고로 입원한 사람은 많지가 않고, 대부분 일반 병원에서 볼 수 있는 그런 환자들이다. 특이한 게 있다면 들쥐가 옮긴다는 유행성 출혈열에 걸린 병사들이 꽤 많았다는 정도일까.

내가 있을 때 일어난 사고 중에 극적인 것은, 훈련용 박격포탄을 복부에 꽂은 채 실려온 어느 병사의 경우다. 나중에 들으니 그는 운 좋게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또 하나는 다리에 총상을 입고 실려온 병사의 경우였는데, 경계임무를 맡고 투입되는 중에 뒤에서 총소리가 들려 구덩이에 엎드렸는데, 알고 보니 자기 후임병이었단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그 이등병이 자기가 엎드린 구덩이를 향하여 조준사격을 하더란다. 내게 이 얘기를 들려준 것은 사고조사를 맡은 보안대의 김상병인데, 그의 말에 따르면 "그 후임병을 구타했느냐"는 질문에 그 병사는 끝까지 "그런 적 없다"고 잡아뗐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내무반에 앉아 위생병들과 바둑을 두고 있는데, 갑자기 공군 김병장이 들어오더니 당시 유행하던 코미디언의 제스처를 흉내내며 "경사났네, 경사났어" 라고 한다. 듣자 하니 전방에서 큰 사고가 일어나 지금 그 부상병들이 이리로 후송되고 있는 중이란다. 잠시 후 상공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들린다. 나가 보니 한 두 대가 아니었다. '파다다닥' 하는 엄청난 소음과 함께 헬리콥터가 저 북쪽에서 한도 끝도 없이 몰려오고 있었다. 부상병들이 들것에 실려 들어오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병원은 발칵 뒤집히고, 복도에서는 군의관과 간호장교와 위생병들이 이리 저리 뛰어다녔다.

그렇게 들 것에 실려 들어오는 병사들의 모습은 차마 눈뜨고 봐 줄 수가 없었다. 그나마 하얀 천으로 덮여 있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먹은 것을 다 게워냈을 것이다. 인간 신체의 내부를 돌던 액체가 흘러나와 풍기는 비릿한 냄새는 그렇게 강한 것은 아니었지만 속을 메스껍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부상당한 병사를 덮은 하얀 천은 가끔 허리 아래 부분에서 그냥 밑으로 툭 떨어지곤 했다. 하반신이 날아간 모양이다. 들 것 아래로 붉은 피와 허연 액채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십자가의 예수가 "물과 피를 흘렸다"고 한 성경 말씀이 거짓말이 아닌 모양이다.

"야, 너희들 뭐 해? 이리 와서 바닥에 흘린 거 좀 치워." 멀뚱히 바라보던 우리를 간호장교가 부른다. "우리는 위생병이 아니라 통신병인데요." 작대기들의 변명은 밥풀떼기에게 간단히 제압당한다. "야, 지금 그런 거 따질 때냐. 빨리 치우지 못 해?" 마지못해 대걸레를 잡는다. 바닥을 닦는 것까지는 좋은데, 걸레를 빨 때가 문제였다. 평소에는 손으로 빨았으나, 차마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군화발로 밟아서 대충 붉은 물만 뺀다. 수채 구멍으로 불그스름한 물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는 기분은 그리 유쾌한 경험이 못 된다.

두 다리를 날리고 인간의 형상을 잃은 그 물체(?)는 실려가면서 간간이 신음 소리를 냈고, 가끔은 꿈틀거리기도 했다. 이렇게 실려와 이들은 일단 응급실로 보내졌다. 응급실 바깥의 마당에는 이들의 몸에서 벗겨낸 전투복이 수북히 쌓여 있었는데, 갈갈이 찢겨져 피범벅이 된 그것은 더 이상 '옷'이 아니었다. 마침 지나가던 군의관에게 물었다. "쟤들, 살 수 있을까요?" 그랬더니 퉁명스런 대답이 돌아온다. "어디 살리려고 데려 온 거냐. 아직 살아 있으니까 데려 온 거지."

사고의 경위는 나중에 보안대 김상병에게 들었다. 전방에서 5대조 작업을 하다가 6.25때 미군이 떨어뜨린 커다란 불발탄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것을 제대 일주일 남긴 병장이 막 전입 온 신병에게 삽으로 까라고 시켰는데, 군기가 바짝 든 그 신병이 실제로 그 폭탄의 뇌관을 삽으로 내려쳤다는 것이다. 계급이 낮은 이병과 일병들은 겁이 나 뒤로 물러서 있는 바람에 무사했고, 주로 '짬밥' 자랑하느라 그 자리를 지키던 상병과 병장들이 희생당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실려온 병사들 중 몇 명이나 살았는지는 알지 못한다.


Name      진중권  (2003-04-07 01:20:32, Hit : 344, Vote : 34)


Subject  
   영혼의 상처



육체와 영혼

이런 참상은 그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영혼에 큰 상처를 남긴다. 또 하나의 충격적인 기억. 파견근무를 마치고 본대로 귀대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가니, 입구에 입 간판이 길게 늘어서 있다. 뭔가 궁금하여 다가가니 그 위에는 병사들의 사체 사진이 붙어 있었다. 교통사고, 감전사고, 폭발사고 등 각종 사고로 숨진 병사들이 그 참혹한 모습을 내보이며 우리에게 '너희는 우리처럼 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이것이 '안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군대의 방식이다. 사진을 보고 나서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으려니, 자꾸 사체들의 영상이 식판 위의 반찬에 오버랩되어 결국 구역질을 내며 먹기를 포기하고 만다.

84년인가? 학교에 광주항쟁 희생자들의 사체 사진이 나붙었다. 그 중에서 특별히 끔찍했던 사진. 뭔지 모를 이상한 형체인데, 도대체 인간 신체의 형상이 아니다. 자세히 보니 아랫부분에 반달 모양의 물체가 눈에 들어온다. 이빨이 가지런히 난 인간의 아래턱! 그것은 짓이겨진 인간의 머리였다. 그 사진을 내건 이들이야 그것으로 군부독재에 대한 적개심을 심어주려고 했겠지만, 적어도 내게 그것은 역효과를 냈다. 그것을 보고 나는 군부독재가 아니라 그냥 세상이 싫어졌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잔혹함은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나, 그 한도를 넘어서는 압도적인 잔혹함은 인간을 정치적으로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으로 만든다.

얼마 전 지하철역에서 끔찍한 포스터를 보았다. 거기에는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두 여중생의 사체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 무거운 차량에 깔렸으니 몸이 온전하겠는가. 한 소녀의 몸밖으로 시뻘건 살이 튀어 나와 있었다. 이미 영혼이 떠난 몸이니 막 내보여도 된다는 말일까? 그 사진은 두 소녀에게서 영혼을 무시하고 그들을 한갓 '살덩어리'로 격하시키고 있었다. 굳이 이런 사진을 공개된 장소에 내걸어야 했을까? 소녀들의 인간적 위엄을 지켜주는 것이 사고를 낸 미군에게 유죄판결을 내리는 것보다 덜 중요한 목적일까? 이런 것에서 미군에 대한 적개심을 느끼는 감성도 있으나, 적어도 내게 이런 사진은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언젠가 독일에서 고속전철(ICE)이 탈선하는 사고가 일어났을 때, 현장에서 구조작업을 하던 대원들의 상당수가 후에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질환을 앓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를 대비하여 현장에는 목사와 신부, 정신의 등이 '영혼관리사'(Seelensorger)로 투입되었지만, 감각은 원래 개념보다 강력한 것, 그리하여 그들의 기도와 조언도 현장의 그 끔찍함을 목격한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기에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우리의 영혼은 상처받는 어떤 것이다. 이 끔찍한 감각의 폭력에 상처받지 않는 영혼이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영혼이 아니리라.

그런데 이런 참상이 어쩌다 발생하는 '사고'가 아니라 아예 '일상'이 된다면? 전쟁은 이 특별한 사고를 결코 특별하지 않은 범상한 '일상'으로 만든다. 어쩌다 경험하는 예외적인 상황은 일상적인 삶의 한 부분이 되고, 어쩌다 목격하는 참혹한 장면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삶의 친근한 풍경이 된다. 그것이 전쟁이다. 전쟁의 일상이 우리의 감각에 풀어놓는 그 압도적인 잔혹함. 그 속에서 상처받기 쉬운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전쟁이 영혼에 입힐 외상을 안고 살아갈 자신이 없으며, 아예 영혼이 없이 사는 수 밖에 없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오래 전부터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쟁이 정말 일어났는가?


Name      진중권  (2003-04-07 08:21:52, Hit : 389, Vote : 24)


Subject  
   적군의 죽음



1986년 1월 논산 훈련소. 사과 하나 깎을 없을 정도로 무딘 날을 가진 대검을 M16 소총에 꽂고, 구덩이에 엎드려 있다가 분대원들과 함께 일제히 적의 고지를 향해 돌진한다. "약진, 앞으로!" 고지에는 적군의 몸뚱이 대신 둥근 타이어가 걸려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착검한 소총으로 타이어를 '툭' 찔러본다. 별 힘도 주지 않았는데 그 무딘 칼날이 그 단단한 고무 타이어 속으로 쑥 들어가는 게 아닌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대검은 갈아서 사용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총검술을 가르치던 조교는 우리에게 적의 몸을 찌를 때는 곧바로 찌르되 뺄 때는 돌려서 빼라고 가르쳤다. 그래야 세 겹의 살의 장력을 받는 칼날이 몸밖으로 빠져 나올 수 있단다.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 나오던가? 포탄을 피해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온 프랑스 병사의 배에 대검을 집어넣고, 그 병사가 죽어가며 내는 가는 신음소리를 들으며 구덩이 안에 나란히 누워 함께 밤을 지새우는 장면. 그때 바라 본 밤하늘의 별은 어떻게 느껴질까? 그리고 내가 찌른 그 병사. 그는 없애야 버려야 할 가증스런 적으로 여겨질까? 아니면 그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어느 어머니의 아들로 여겨질까? 그리고 그 신음소리. 나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수도병원 김 일병처럼 그 소리가 듣기 싫어 빨리 안 죽는다고 마구 욕설을 퍼부을까? 아니면 나 때문에 죽어 가는 자의 고통을 지켜보며 죄책감을 느낄까?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 방금 뉴스를 보니 미군 병사들이 레이저 유도장치로 미사일을 발사하여 목표물에 명중하자 환호성을 지른다. 브라보!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축하하는 것일까? 인간의 몸을 갈갈이 찢어 놓는 것이 그렇게도 좋을까? 그 명중의 완벽함 속에서 그들도 한 인간이 사방에 흩어진 살점으로, 산산이 흩뿌려진 피자국으로 해체되는 모습을 떠올렸을까? 왜 그것이 그토록 기쁠까? CNN이 보여주는 화면 속의 이라크군의 전차는 하나 같이 불을 뿜으며 타오르고 있다. 거기에도 사람이 타고 있었을 터. 용광로처럼 더운 쇳덩어리 속에서 사람이 까맣게 타죽어 간다는 사실이 왜 그들을 그토록 기쁘게 할까? 오, 친구여...  


"나는 그대가 죽인 적군이라오.
나는 그대를 이 어둠 속에서 알아보았소.
어제 나를 찔러 죽일 때에도
그대는 그렇게 얼굴을 찌푸렸기에..."
(윌프레드 오웬 <이상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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