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수도원 순례기 <하>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 - 위대한 침묵 속으로
중앙일보|백성호|입력 2011.12.01 00:32|수정 2011.12.01 06:23|
1000년 동안 열리지 않은 문 … 하얀 수도복 노수사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중앙일보 백성호]
프랑스 동부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의 개인 작업실에서 한 수사가 작업을 하고 있다.
비밀스런 장소였다. 영화 '위대한 침묵'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전에는 더욱 그랬다. 봉쇄수도원. 그것도 무려 1000년 전에 세워진 수도원이다. 한 번 들어가면 죽어서도 나오지 않는 곳, 그런 삶의 패턴을 1000년째 이어오고 있는 곳. 1986년 필립 그로닝 감독이 영화 촬영을 요청했다가, 16년 뒤인 2000년에야 허락이 떨어졌던 곳. 그 허락 마저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던 곳. 바로 카르투시오 수도회의 본원인 그랑드 샤르트뢰즈(Grande Chartreuse) 수도원이다. 그곳을 찾아 '위대한 침묵'을 만났다.
17일 버스를 타고 카르투시오 수도원을 향했다. 수도원은 프랑스의 작은 마을 생피에르 드 샤르트뢰즈에 있다. 파리에서 동남쪽으로 500㎞쯤 떨어진 곳이다. 길가 풍경은 강렬했다. 알프스 산맥의 줄기를 타고 험준한 산세가 이어졌다. 수도원은 해발 1300m에 있었다.
버스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늘을 찌르는 전나무 숲이 울창했다. 계곡과 숲, 그리고 암벽이 굽이굽이 펼쳐졌다. 그렇게 한참을 올랐다. '그랑드 송'으로 불리는 산 정상에는 거대한 암벽이 병풍처럼 펼쳐졌다. 그 아래 카르투시오 수도원 본원이 있었다. 동양의 사찰처럼 수도원도 '명당 중의 명당'에 있었다.
1000년의 역사를 가진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의 본원. '침묵'을 뜻하는 수도원 앞의 표지판이 눈길을 끈다.
버스에서 내렸다. 수도원 건물이 보였다. 담벼락은 무척 높았다. 그곳은 방문객의 출입이 허용됐다. 알고 보니 수도원에서 옛날에 썼던 건물이었다. 지금은 수도원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행여 봉쇄수도원의 겉모습만 보고 돌아오는 건 아닌가 하고 걱정했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갔다. 단순한 박물관이 아니었다. 이곳은 한때 카르투시오 수도원 본원이었다. 덕분에 수도원의 실제 생활 공간을 낱낱이 볼 수 있었다. 수사가 생활하는 독방으로 갔다. 작은 침대와 책상, 그리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좁은 공간이 있었다. 방 가운데에는 난로도 있었다.
수사들이 생활하는 독방. 침실과 기도공간·책상 등이 놓인 단출한 공간이다.
그들이 무릎을 꿇던 곳, 따라서 무릎을 꿇었다. 영화에 나왔던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는 자는/나의 제자가 될 수 없느니."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고개를 떨구고 만다. 지지고 볶는 일상, 무한경쟁의 틈바구니를 헤쳐가야 하는 현대인은 엄두도 내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수도원의 수도자들은 이미 모든 걸 포기한 걸까. 과연 그런 걸까.
예전에 저녁자리에서 이해인 수녀가 했던 얘기가 생각났다. "수녀원에서 식사를 할 때는 주로 함께 앉아서 먹는 사람들과 먹어요. 하루는 식판을 들고 가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죠. '내가 이 수녀원의 수녀님들을 얼마나 깊이 알지?' 그래서 식판을 들고 다른 자리에 앉아서 밥을 먹기 시작했어요. 그 동안 깊이 알진 못했던 수녀님들과 함께."
그랬다. 수도원에 들어간다고, 설사 그게 봉쇄수도원이라고 하더라도 절로 마음이 끊어지는 건 아니다. 세상의 희로애락을 수도원 안에서도 똑같이 겪기 때문이다. 카르투시오 수도원도 마찬가지였다. 복잡한 서울의 봄·여름·가을·겨울과 고요한 카르투시오의 봄·여름·가을·겨울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집중이 더 강하고, 더 길고, 더 고요할 뿐이었다
카르투시오 수도원의 설립자 성 브루노(1035∼1101) 사제. 대주교가 돼 달라는 요청을 뒤로 하고 봉쇄수도원의 수사가 됐다.
카르투시오 수도원에서 침묵은 필수다. 수사들은 침묵했다. 방에서도 침묵, 식사 때도 침묵, 일 할 때도 침묵, 온종일 침묵이다. 그들은 그저 침묵만 하는 걸까. 아니었다. 수사들은 침묵을 통해 수없이 물음을 던졌다. 그들의 기도, 그들의 묵상, 그들의 독서는 모두 물음이었다. 신을 향해 그들은 물었다.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렇게 묻는 저는 또 누구입니까?" 입이 침묵할 때 물음은 심장을 향한다. 수사들의 침묵은 그저 엄격한 규칙이 아니었다. 더 풍성한 물음을 던지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그러니 침묵이 위대한 것이 아니었다. 침묵을 통해 던지는 '물음'이 위대한 것이었다.
그리 보면 현대인의 일상도 수도원이다. 사람들은 반박한다. "매일 문제가 생기는 데 무슨 수도원인가?" 따지고 보면 '문제'가 있기에 일상이 수도원이 된다. 이치가 꼬일 때 문제가 생긴다. 이치가 통하면 문제도 풀린다. 그러니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번뇌야말로 정확하게 이치가 꼬인 지점이다. 거기가 묵상의 급소다.
수사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독방에서 지냈다. 성당에서 공동으로 드리는 미사를 제외하면 말이다. 혹자는 그걸 "감옥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그런데 감옥은 갇힌 곳이다. 그래서 답답하다.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가 없는 곳이다. 수도원의 독방은 달랐다. 수사들은 기도와 묵상과 노동을 통해 무한히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닫힌 곳은 열린 곳이 된다.
수도원의 독방에도 창문이 있었다. 독방의 아래층은 작업실이었다. 개인별 뒤뜰도 있었다. 거기서 꽃도 키우고, 채소도 키웠다. 봉쇄수도원의 수사들은 꽃과 풀, 나무를 통해서도 그리스도를 찾았다. 거기에 비하면 한국 불교의 무문관(無門關) 수행은 상대적으로 삭막하게 느껴졌다. 화장실 딸린 방에서만 지내고, 밖에서 넣어주는 밥만 먹으니 자연과 교감도 어렵다. 오히려 병이 생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전나무 길을 따라 산을 올랐다. 박물관에서 2㎞쯤 떨어진 곳에 수도원 건물이 있었다. 수도원의 가이드 엘리슨은 "현재 20명의 사제 수사와 12명의 평수사, 그리고 수도원장 등 모두 33명이 생활하고 있다. 몇 달 전에 스물일곱 살 먹은 흑인 수사가 새로 입회했다. 가장 연세가 많은 분은 80세쯤 된다"며 "영화 '위대한 침묵'이 상영된 후 방문객이 부쩍 늘었다. 올해만 4만 명이 이곳을 찾았다"고 말했다.
수도원 담장은 높았다. 출입은 1000년의 세월 동안 금지돼 있다. 담장 너머, 1000년의 침묵이 흘렀다. 수사들은 그 침묵에 답하고 있었다. 사진을 찍고 내려오는 길에 수도원 담장에 붙은 셔터 문이 열렸다. 달려갔다. 하얀 수도복을 입은 노수사가 서 있었다. 몇 살인지, 언제 수도원에 들어왔는지 물었다. 그는 "1964년에 들어왔다. 70세다"라며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무려 47년째 카르투시오 수도원에서 사는 셈이다. 사진을 찍었다. 플래시가 터졌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한마디만 했다. "낫 포 저널!(Not for journal·언론에 싣지 마시오)"
운이 좋았다. 카르투시오 수도원에서 직접 수사를 만났으니까. 전나무 숲길을 내려오다 뒤돌아 섰다. 내려오다 또 뒤돌아 섰다. 수도원은 조금씩 멀어졌다. 대신 우리가 돌아가야 할 산 아래 수도원, 일상의 수도원은 점점 가까워졌다. 담장 아래서 만난 노수사의 표정이 하산의 발걸음을 따라왔다. 완고하지 않았다. 무척 자애로웠다. 맑은 눈과 맑은 웃음, 그게 침묵에서 길어 올린 그리스도의 시선일까.
영화 '위대한 침묵'의 말미에 카르투시오 수도원의 한 장님 수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장님으로 만들어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내 영혼에 이롭다고 여기셔서 배려를 하신 거다." 살을 찌르는 고통의 가시마저 감사의 눈물로 치환하는 힘. 그건 끝없이 내 안으로 내려가는 기도와 명상의 힘이기도 했다.
◆카르투시오 수도원의 생활=수도자들은 개인 은수처(隱修處)에서 침묵하며 생활한다. 1층은 작업실, 2층은 침실 겸 기도실이다. 오전 6시30분에 일어나 오후 7시30분에 잠자리에 든다. 다시 오후 11시30분에 일어나 밤 기도를 하고, 오전 3시30분에 잠자리에 든다. 종일 미사와 기도, 묵상과 노동을 되풀이 한다.
생피에르 드 샤르트뢰즈(프랑스)= 글·사진 백성호 기자 < vangogh@joongang.co.kr >
유럽 수도원 순례기 <중>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 - 무소유로 살라
중앙일보 원문 l 입력 2011-11-24 00:12 l 수정 2011-11-24 06:40
프란체스코 무소유 허리띠 … 그건 하늘에 닿는 밧줄이었다
[백성호 기자]
아시시의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 동상. 그 앞에는 프란체스코의 허리띠가 보관된 유리병이 놓여 있다.
가톨릭 수도원의 역사에는 두 산봉우리가 있다. ‘성 베네딕도’와 ‘성 프란체스코’다. 5세기에 살았던 베네딕도(480~547)는 서양 수도원의 기틀을 다졌고, 13세기에 살았던 프란체스코(1182~1226)는 무소유의 삶으로 수도원의 영적 지향을 지폈다. 베네딕도는 독일인, 프란체스코는 이탈리아인이다. 프란체스코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가장 사랑 받는 성인 중 한 명이다. 무소유의 삶, 자연과 하나 되는 삶을 살았다 이탈리아 중부 아시시의 수도원에서 그의 영성을 노크했다.
20일 로마에서 북쪽으로 3시간 가량 달렸다. 도착했을 때는 캄캄했다. 성 프란체스코의 고향 아시시의 밤하늘에 별이 떴다. 하늘은 차갑고 별은 맑았다. 800년 전, 그도 저 별을 보았으리라. 젊었을 때 프란체스코는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다. 아버지는 내로라하는 부자였고, 프란체스코는 놀만큼 놀았다. 다소 낭만적인 생각으로 전쟁에도 참전했다. 살육의 처절함에 몸서리쳤다. 프란체스코는 그렇게 젊은 날을 보냈다.
전쟁에서 돌아온 프란체스코는 변했다. 집안의 돈과 물건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줬다. 아버지는 크게 노했다. 결국 아들을 대주교에게 고발했다. 재판이 열렸다. 군중 앞에서 프란체스코는 입고 있던 속옷까지 모두 벗었다. 그리고 “제가 가진 돈과 앞으로 받을 유산, 그리고 이 옷까지 모두 아버지에게 돌려드린다”며 집을 떠났다. 그가 벗은 것은 옷이 아니라 소유였다.
그때부터 프란체스코는 ‘가난’과 결혼했다. 더 정확히 ‘가난한 마음’과 결혼했다. 그를 두고 “너무 비현실적이다. 도대체 지금 누가 그런 삶을 살 수 있겠나”라는 비판도 일었다. 하지만 예수는 말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 수사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수사들이 허리띠를 매고 있다. 허리띠에 달린 세 개의 매듭은 청빈·순결·순명을 상징한다.
이튿날 아침,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으로 갔다. 대성당 안에 또 작은 성당이 있었다. 800년 전 프란체스코가 미사를 드리고 수도하던 좁은 공간이다. 각기 다른 복장의 수녀들과 신자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대성당 안에는 성 프란체스코가 숨을 거둘 때 둘렀던 수도복 허리띠가 유리병에 담겨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인은 돈이나 보물을 넣은 허리띠를 둘렀다. 일종의 전대였다. 프란체스코는 가장 단조로운 허리띠를 둘렀다. 청빈(淸貧)과 순결(純潔), 순명(順命)을 상징하는 세 개의 매듭도 묶었다. 수도자들은 지금도 그런 허리띠를 맸다. ‘가난한 마음’으로 하늘나라에 닿고자 하는 생명의 밧줄이다.
아시시의 높다란 언덕을 올랐다. 성 다미아노 성당이 있었다. 프란체스코는 반쯤 허물어진 이 성당에서 기도를 하다가 처음으로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프란체스코야, 내 집이 허물어져 가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가서 그것을 일으켜 세워라.” 처음에 그는 문자적으로 해석했다. 벽돌로 성당을 다시 지으라는 뜻으로 알았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세속화로 시들어가는 교회에 생명을 불어넣으라는 뜻을….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프란체스코에겐 영적인 동반자가 있었다. 11살 아래였던 클라라 수녀였다. 아시시의 귀족 집안이었던 클라라는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프란체스코를 따랐다. 결국 수녀가 된 클라라 성녀는 나중에 이 성당에서 숨을 거두었다. 성당 지하에는 성녀의 유해가 보존돼 있었다. 얼굴에는 평생 그가 좇았던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프란체스코는 늑대와 비둘기, 들짐승에게 설교를 하고, 그들과 대화를 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걸 ‘특별한 능력’이라고 말한다. 사실 그건 능력도 아니고, 비결도 아니다. 프란체스코는 예수의 눈, 예수의 마음으로 그들을 보았을 뿐이다. 창조물 안에 깃든 하느님의 현존을 보았던 것이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다시 말해 ‘이웃이 네 몸’이라는 예수의 눈에 그의 눈이 포개졌던 것이다.
성 프란체스코의 영적인 동반자였던 클라라 성녀의 유해. 훼손된 신체 일부는 세라믹으로 복원했다.
언덕길을 오르다가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수사들을 만났다. 물었다. “프란체스코 성인이 동물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이유가 뭔가.” 수도원 생활지 51년째라는 구알띠에로 벨루치(67) 수사는 “성 프란체스코는 가난한 마음을 통해 에덴동산 때 아담의 상태로 돌아갔다. 숱한 수도 끝에 가장 원초적인, 원죄 이전의 인간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고 답했다.
다시 물었다. “현대인의 일상상은 고단하다. 성 프란체스코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뭔가.” 벨루치 수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과 일상을 당연시한다. 성 프란체스코는 달랐다. 그는 거기서 단순한 아름다움을 재발견했다. 그리고 거기에 감사했다. 일상 매 순간의 아름다움을 알면 누구나 삶을 새롭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행복의 비결은 그렇게 간단했다.
곁에 있던 동료 수사에게 물었다. “수도원의 수사들은 어떻게 그리스도를 만나는가.” 프란체스코 데 라자로 수사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성서를 읽고 그 말씀을 따르면 된다. 대신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진짜 그렇게 행해야 한다. 그럼 누구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프란체스코 당시 성서는 라틴어로만 읽혔다. 서민들은 읽을 줄도 몰랐다. 그래서 예수의 말씀은 성직자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다. 프란체스코는 이에 반기를 들었다. 아시시 지방의 방언으로 그는 ‘평화의 기도’라는 찬미가를 지었다. 라틴어가 아닌 토스카나 지방의 방언으로 썼다는 단테의 『신곡』(1321년 완성)보다 100년 가량 앞선 시도였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여, 저를 당신의 도구로 삼으소서. 위로 받기보다 위로하게 하시고, 이해 받기보다 이해하게 하시고, 사랑 받기보다 사랑하게 하소서!” 그게 길이었다. 프란체스코가 현대인에게 던지는 단순한 길이었다. 지금도 가톨릭 신자들이 가장 즐겨 올리는 기도 중 하나다.
이탈리아 아시시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 당시 처형장이었던 ‘죽음의 언덕’ 위에 세워졌다.
아시시 언덕 서쪽 끝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으로 갔다. 지하 성당에 프란체스코 성인의 유해가 담긴 석관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석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무소유의 영성, 그 앞에서 소유의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보였다.
프란체스코는 44세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아시시의 처형장이었던 서쪽 ‘죽음의 언덕’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예루살렘의 처형장이자 공동묘지였던 골고타 언덕에서 숨진 예수의 최후까지 닮고자 했다. 실제 프란체스코는 그곳에 묻혔다. 나중에 그 위로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이 지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 가장 남루한 곳, 프란체스코는 거기로 내려가 자신을 온전히 그리스도에 포개고자 했다.
죽기 2년 전, 동굴에서 기도하던 프란체스코의 몸에는 오상(五傷)이 나타났다고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몸에 난 다섯 상처(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창에 찔린 옆구리)다. 지하성당을 나왔다. 옛 처형장에 섰다. 바람이 불었다. 그랬다. 프란체스코가 설한 십자가의 길은 거창하지도, 난해하지도, 험난하지도 않았다. “위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라!” 그렇게 단순했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은 그토록 단순했다.
아시시(이탈리아)=글·사진 백성호 기자
◆성 프란체스코(Francesco d’Assisi·1182~1226)=유럽 중세 가톨릭의 ‘수퍼스타’다. 모든 세속적 가치를 포기하고 평생 청빈을 실천한 가톨릭의 성인(축일 10월 4일)이다.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유명하다. 무소유 정신으로 가난한 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봤던 그의 수도회는 중세 신분사회를 크게 흔들어놓았다. 성 프란치스코, 성 프란치스꼬, 프란시스(영어식 표현) 등으로도 음역된다.
유럽 수도원 순례기 <상> 성 오틸리엔 수도원 - 기도하라 일하라
[중앙일보] 입력 2011.11.18 00:06 / 수정 2011.11.18 17:32
독일 시골 ‘침묵의 수도원’ … 그곳에 김대건 신부 있다
독일 바 이에른 주뮌헨 근교에 있는 성 오틸리엔 수도원 전경. [백성호 기자]
어쩌면 그곳은 감옥이다. 스스로 수인(囚人)이 된 채, 그리스도를 찾고자 내 안으로 무한히 내려가는 공간. 세상은 그곳을 ‘수도원’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들이 살까. 아침은 뭘 먹고, 점심에는 뭘 하고, 잠은 얼마나 잘까. 물음표투성이인 그곳을 역사는 ‘가톨릭의 필터’라고 부른다. 14일부터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주관으로 유럽에서 ‘가톨릭 영성의 심장’ 수도원을 순례했다. 독일·스위스·프랑스·이탈리아 4개국을 돌았다. ‘유럽 수도원 순례기-가톨릭 영성을 따라서’를 3회 연재한다.
15일 독일 뮌헨에서 서쪽으로 1시간을 달렸다. 성 오틸리엔은 한적한 시골마을이다. 목장에는 말이 풀을 뜯고, 숲이 우거진 동네였다. 그곳에 1884년 지은 성 오틸리엔 수도원이 있었다. 공기는 차가웠다. 순례자 숙소 앞에는 어린 양을 안고 지팡이를 든 예수상이 서 있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이정주 신부는 “‘울타리 안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길을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그랬다. 길을 잃은 어린 양의 심정으로 사람들은 수도원을 찾았다. 침묵 속에서 길어 올린 수사들의 한마디가 내 삶의 돌파구가 되진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하며 순례객들은 수도원의 숲길을 걸었다. 수도원 안에는 출판사도 있고, 소와 돼지를 키우는 축사도 있고, 중·고교도 있었다. 모두 수사들이 꾸리는 살림이었다. 성 오틸리엔 수도원은 베네딕도 수도회 소속이다. 경북 왜관의 베네딕도 수도원, 부산 광안리의 베네딕도 수녀원이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한국 가톨릭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어둠이 내렸다. 수도원을 산책하는데 종이 울렸다. ‘대~앵, 대~앵’ 검은 옷을 입은 수사들이 바쁜 걸음으로 성당으로 모였다. 저녁 미사시간이었다. 급히 가서 성당에 앉았다. 연단(演壇)에는 사각의 제대가 있었다. 제대를 떠받치는 인물상 중 하나가 최초의 한국인 사제였던 고(故)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였다. 제대 안에는 김 신부의 유해 일부가 있었다.
외국인 수사가 줄지어 들어왔다. 수도원의 미사,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일반 신자들도 보였다. 수사들은 1000년 전 라틴어로 만들어진 그레고리안 성가를 불렀다. 눈을 감았다. 파이프 오르간 소리와 함께 성가가 가슴을 타고 흘렀다. 아름다웠다. 저들은 무엇을 찾는 걸까. 무엇을 위해 21세기에 1000년도 더 넘은 삶의 양식을 고집하는 걸까.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이가 저 가락을 통해 그리스도를 불렀을까.
베네딕도 성인은 1500년 전 인물이다. 그의 영향력은 지금도 막강하다. 현재 유럽 수도원의 70~80%가 베네딕도 수도회 계열이다. 유럽의 수호성인도 다름 아닌 성 베네딕도다. 베네딕도 당시 수도자들은 사막(광야)이나 외딴 동굴로 갔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금욕적인 고행을 했다.
그걸 통해 그리스도를 찾았다. 베네딕도는 로마에서 공부를 하다가 도시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수도자가 됐다. 은수자(隱修者) 생활을 하다가 수비아코 동굴에서 3년간 머물기도 했다. 그의 명성을 듣고 사람들이 모였고, 결국 은둔생활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으로 발전했다. 성 베네딕도는 무작정 고행에 반대했다.
“이 배움터에 지나치게 가혹하고, 지나치게 괴로운 일이 일절 발을 붙일 수 없기를 바란다. 우리가 믿음 속에서 살면 하느님 계명을 따르는 좁은 길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랑의 달콤함으로 채워질 것이다.” 좁은 길의 달콤함, 그게 베네딕도의 생각이었다. 그는 그걸 수도원 규칙에 녹였다.
베네딕도는 ‘영적 독서’를 강조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으로 성서를 해석하며 교회를 사업 수단처럼 키우는 일부 목회자에겐 폐부를 찌르는 칼날이다. 베네딕도가 말한 ‘영적 독서’란 뭘까. 그 답을 성 오틸리엔 수사들은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수사들은 수시로 침묵했다. 밥을 먹을 때도 침묵을 지켰다. 대신 한 명씩 당번을 정해 식사시간 동안 성서를 읽었다. 다른 수사들은 성서 읽는 소리를 들으며 식사를 했다. 저녁기도 후에는 다음 날 아침기도까지 밤새 침묵을 지켜야 했다. 그게 수도원의 규칙이었다.
수도원 부속 학교에서 프랑스어와 역사를 가르치는 마우루스 블로머(50) 수사를 만났다. 그에게 ‘침묵의 가치’를 물었다. 그는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신의 소리를 들으려면 침묵해야 한다. 단지 말을 안 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침묵도 포함한다. 세상의 소리는 크게 울린다. 그 속에서 들리는 하느님의 소리는 작다. 우리는 하느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바른 삶을 살 수 있다. 하느님의 소리를 듣기 위해선 침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수사들은 기도만 하지 않았다. 책을 만들든, 소나 돼지를 키우든, 책상을 만들든, 학생들을 가르치든 각자 자신의 일이 있다. 한창 중요한 일을 하다가 점심기도 종이 울릴 때도 있다.
“1분만 더 하면 일이 마무리되는데. 갔다가 와서 다시 하면 완성도가 떨어질 텐데” 싶어도 수사들은 종소리와 함께 손을 딱 멈춘다. 이유가 있다. 수도원 출판 총책임을 맡고 있는 치릴 세퍼 수사는 “성 베네딕도는 ‘오라 엣 라보라!(기도하라, 일하라!)’라고 말했다. 오틸리엔 수도원은 영성과 노동을 병행한다.
둘 다 중요하다. 균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의 노예가 돼도 곤란하다. 일을 하다가 아무리 중요한 마무리가 남아도 종이 울리면 즉각 일을 멈춘다. 수도복으로 갈아입고서 기도를 하고 돌아오면 오히려 일이 더 잘 풀릴 때가 많다”고 설명했다. 수사들은 일을 하되 집착 없이 하는 걸 익히고, 또 실천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기도는 노동이고, 노동은 또 기도였다. 따로 따로가 아니었다.
성 베네딕도가 강조한 ‘좁은 길의 달콤함’은 추상적이지도, 관념적이지도 않았다.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수사들은 기도과 노동을 통해 그걸 일구고 있었다. 수도원 울타리에 갇힌 수사들의 눈은 고요하고, 깊고, 생기가 넘쳤다. 반면 울타리 밖의 현대인은 바쁜 일상에 쫓기며 하루하루 지쳐간다.
갇힌 자는 과연 누구일까. 사실 일상은 현대인의 수도원이다. ‘일상’이란 거대한 수도원 속에 살면서도 우리는 정작 명상을 망각한 건 아닐까. 우리에겐 노동만 있고, 명상은 없는 게 아닐까. ‘대~앵, 대~앵!’ 지금도 울리는 내면의 종소리를 외면하며 사는 건 아닐까. 수도원을 나서며 그런 물음이 자꾸 올라왔다.
성 오틸리엔(독일)=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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