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 총리의 박사학위
JP 11개, DJ 9개, YS 8개, 박정희는 없었다
정치학 박사가 과연 정치도 잘할까? 우리나라에서는 이승만박사, 장면박사의 영향때문인지 정치세계에서 박사학위가 지나치게 중시됐다. 한국 주요 정치지도자들의 박사학위 컬렉션.
김학준
인천대 총장·정치학
1948
년 8월15일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된 이후 반세기를 넘어선 한국 현대정치사를 돌이켜 볼 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들 가운데 하나가 명예박사를 포함한 박사 정치인이 많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인 통계는 아니지만 인상적 대비로, 세계 어느 나라보다 우리나라는 박사 정치인을 많이 가졌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에서는 우선 우리나라 대통령들과 대통령 후보급 정치인들의 박사 학위에 관해 알아 보겠다.
우리나라는 초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으로부터 현재의 15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여덟 명 대통령을 경험했다. 그들의 박사학위 수를 모두 합치면 26개나 된다. 대통령 한 사람당 3.2개의 박사학위를 가졌음을 말해준다.
이승만 1∼3대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공식적 학력이 가장 앞선 대통령이었다. 1907년에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정치학 학사를, 1909년에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정치학 석사를, 1911년에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미국의 정상급 명문대학인 하버드대와 프린스턴대에서 학위를 받기까지 재미있는 일화가 한둘이 아니다. 첫째, 그는 조지워싱턴대의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하버드대에 편지를 냈다. 펜으로 쓴 이 한 장짜리 편지에서 그는 “조국의 동포들은 내가 하루 빨리 귀국해 기울어가는 국운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앞장서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 만큼 3년 이내에 박사학위를 받아야겠다”고 쓴 뒤 “조지워싱턴대는 3년 이내에 박사학위를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으나 동포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귀교와 같은 명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아야겠는데 3년 이내에 줄 것을 보장하겠느냐?”고 물었다.
뒷날 드러나는 협상가로서의 면모의 한 부분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하버드대 정치학과 석박사과정위원회는 회의를 열고 다음과 같은 회신을 보냈다.
“학부과정에서 우수한 성적을 기록한 학생이 우리 학교 대학원 과정에 들어와 열심히 공부할 경우 박사학위를 받는 데 평균 5년이 걸리는 만큼 3년 이내에 박사학위를 주겠다고 보장할 수 없다. 3년 이내에 하버드대의 대학원 학위를 받아야겠다고 한다면 석사과정에 입학할 것을 권고한다.”
그의 문의편지 원본과 하버드대의 답장 사본은 오늘날까지 하버드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전 대통령은 이 권고를 받아들여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한 학기에 네 과목씩 두 학기, 그러니까 여덟 과목만 이수하면 논문을 쓰지 않고도 석사 학위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의 성적표를 보니, 그는 미국 헌법과 정치제도 및 역사에 관련된 과목을 일곱 개 수강했으며 모두 B학점이었다. 한 과목이 이수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는 프린스턴대로 전학했다. 이때가 1908년 5월인데, 그에 관한 많은 기록들은 이때를 그가 석사학위를 받은 시점으로 기록하고 있다.
둘째, 프린스턴대로 전학하기 위해 이 전 대통령이 프린스턴대에 보낸 편지도 지금까지 프린스턴대에 보관되어 있는데, 거기서도 그의 성격의 한 단면이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하버드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며 박사학위는 꼭 프린스턴대에서 받고 싶다고 썼던 것이다. 이 말을 그대로 믿고 프린스턴대는 “귀하를 우선 받아들이니 석사학위를 받았다는 증명서를 뒷날 교무처에 제출하기 바란다”고 회신했다.
이 전 대통령의 프린스턴대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는 여전히 미국의 헌법과 정치제도 및 역사에 관한 과목들과 국제법 과목 등 모두 여덟 과목을 1년에 걸쳐 수강했다. 성적은 모두 B였다. 이제 박사학위에 필요한 학점 취득은 끝났으며 논문만 남았다. 그래서 1909년 여름학기에 하버드대로 돌아가서 ‘경제원론’을 이수했다.
이로써 석사학위가 요구하는 여덟 과목 이수가 충족됐고 그리하여 1909년 8월에 하버드대로부터 M.A. 학위, 곧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하버드대에서나 프린스턴대에서나 이승만의 성적은 평균 B에 머물렀다. 고학을 하면서 항일(抗日)을 위한 교신 및 조직에도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에 공부에만 전념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는 곧바로 학위논문을 집필하기 시작했으며 이듬해에 끝냈다. 제목은 ‘미국에 의해 영향받은 중립주의(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였다. 이 논문은 1912년에 프린스턴대 출판부에서 출판됐다.
그는 이에 앞서 1911년에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학위증을 받기가지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학위증을 받으려면 2달러의 수수료를 내야 하건만 그만한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형편을 이해한 지도교수가 학교 당국에 “조선의 이승만군은 극빈(extreme poverty)상태이므로 수수료를 면제해 줄 것을 요청한다”라는 짧은 메모를 보냈으며, 이 요청이 받아들여져 그는 학위증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 메모 역시 프린스턴대에 지금까지도 보관되어 있다.
흔히 이 전 대통령의 학위는 철학박사인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것은 미국 대학의 박사학위 통칭인 Ph. D. 곧 Doctor of Philosophy를 직역한 것으로, 오늘날의 번역 관례로는 정치학 박사에 해당된다. 이렇게 볼 때, 그는 한국의 첫번째 정치학 박사다.
미국 사람으로서도 ‘하버드 M.A. 프린스턴 Ph. D.’의 학력은 결코 쉬운 성취가 아니었다. 그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때나 미군정 아래서나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서양의 정치인과 외교관 및 언론인들이 그를 일단 비중있게 대했던 데는 그의 뛰어난 학력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 때였던 1954년 7월에 자신이 학부과정을 마친 조지워싱턴대로부터 명예 법학박사를 받았다. 그는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대통령이 이끌던 미국 공화당 행정부를 상대로 ‘강력한 세계적 반공정책’을 건의하고자 방미했던 길에 미국의 수도에 자리잡은 이 학교로부터 명예박사를 받았던 것이다.
사람으로 따져 우리나라의 두 번째 대통령인 윤보선(尹潽善) 4대 대통령은 그의 전임자 및 후임자들과는 달리 대통령제의 대통령이 아니라 의원내각제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글라스고에 자리잡은 스캘리시학교에서 1년 수학하고, 잉글랜드의 버밍햄에 자리잡은 우드부르크대학에서 1년 수학한 데 이어, 잉글랜드의 옥스퍼드대학교에서 3개월 수학한 뒤, 1924년 만 27세의 청년으로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딘버러에 위치한 에딘버러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정치학을 전공하고자 했으나 교수들은 고고학을 추천했다. 오래 전부터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상대로 식민주의 정책을 펴온 영국은 그 지역 학생들로 하여금 고고학을 전공하게 함으로써 그 지역의 역사 연구에 도움을 받고자 했는데, 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질병으로 인한 휴학 2년을 포함해 6년 동안 공부한 뒤 1930년에 에딘버러대에서 B.A. 학위, 곧 문학사를 받았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뒷날 자신의 이력서에, 예컨대 국회의원 입후보나 대통령 입후보의 선거벽보에 자신이 에딘버러대에서 M.A. 학위, 곧 문학석사를 받았다고 썼다. 그러나 에딘버러대의 공식 기록에 의하면 그의 최종학위는 B.A.학위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잘못은 아니라고, 영국의 대학 학위제도에 밝은 학자들은 말한다.
옥스퍼드대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은 한 한국인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옥스퍼드대를 포함해 영국의 대학교에서 B.A. 학위를 받은 사람이 그 대학교에 일정한 수수료만 내면 M.A.학위는 자동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미국식의 M.A.학위는 영국에서 M. Litt.(Master of Litterature : 문학석사) 또는 M. Phil.(Master of Philosophy : 철학석사)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
윤 전 대통령은 제5공화정 시절이던 1985년에 국내외에서 각각 하나씩, 그러니까 경희대학교와 미국국제대학교(United States International University)로부터 명예 법학박사를 받았다. 그가 명예박사를 받은 시점이 흥미롭다. 당시의 전두환(全斗煥) 대통령과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벌이던 시기라면 국내 어느 대학교가 감히 그에게 명박을 줄 수 있었겠는가.
사람으로 따져 우리나라의 세 번째 대통령인 박정희 5~9대 대통령의 공식 교육은 만주국(滿洲國) 군관학교 예과 수료, 일본제국 육군사관학교 졸업, 미군정 치하 남조선 육군사관학교 2기 수료, 대한민국 육군대학 졸업이 전부다. 그는 학사 학위도 없다. 특기할 것은 그런데도 그는 정치인들이 흔히 받고자 하는 명예박사를 하나도 손에 넣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의 ‘엄격한’성격의 한 면을 느끼게 한다.
뒷날 두드러진 현상으로, 대통령이 외국을, 특히 외국의 수도를 방문하는 경우, 그곳의 대학교로부터 명예박사를 받던 관례를 지적할 수 있다.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때 한 차례(1961년 11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겸 대통령 권한대행이던 때에 한 차례(1963년 11월) 각각 미국을 방문했고, 제5대 대통령이던 시절에는 네 차례(1964년 서독, 1965년 미국, 1966년 2월 말레이시아·타일랜드·대만, 1966년 10월 남베트남·필리핀) 해외방문 길에 올랐으며, 제6대 대통령이던 때에도 네 차례(1967년 호주, 1968년 4월 미국, 1968년 9월 호주 뉴질랜드, 1969년 미국) 해외방문 길에 올랐다. 여기까지만 따져도 열 차례에 걸쳐 아홉 나라를 방문한 셈이다. 그 가운데 두 차례는 상대방 국가 지도자의 장례식 참석이었으니 명예박사를 받을 계제가 아니었다고 해도 다른 계제에는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받지 않았다.
1969년 10월 3선 개헌 이후 10·26으로 사망할 때까지 꼭 10년 동안 그는 해외에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명예박사를 받을 계기가 없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뒷날 전두환이 대통령 재임시기에 청와대에서, 미국의 한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를 받았음을 상기해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성격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으로 따져 우리나라의 네 번째 대통령인 최규하(崔圭夏) 10대 대통령의 공식 교육은 일본국 도쿄(東京)고등사범학교 영어영문과 졸업과 만주국 다퉁(大同)학원 졸업으로 끝났다. 일제시대에 사범학교 입학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고등사범학교 입학은, 더구나 도쿄고등사범학교 입학은 매우 어려웠다.
그가 자신의 화려한 경력 가운데 자랑스럽게 내놓는 것 중 하나가 도쿄고사(東京高師) 졸업이라는 사실은 그런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여기서 닦은 영어실력으로 해방 직후, 오늘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전신인 경성사범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으며 미 군정청 관리를 거쳐 대한민국 외교관으로 입신해 외무부장관에 올랐고 국무총리를 거쳐 대통령에 올랐던 것이다.
그는 외무부 장관을 지내던 1970년에 한국외국어대학교로부터 명예문학박사를 받았다. 이어 대통령에서 물러나 국정자문회의 의장으로 있던 1985년에는 고향 강원도의 강원대학교로부터 명예 법학박사를 받았다.
사람으로 따져 우리나라의 다섯 번째 대통령인 전두환 11~12대 대통령은 4년제 육군사관학교 1기 졸업생으로 1965년에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12대 대통령 때인 1984년 청와대에서 미국 페퍼딘대학교로부터 명예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만일 그가 ‘무식하나 가식없는 단순성의 상징적 군인’과도 같은 자신의 이미지에 충실하게, 또는 자신의 정신적 스승격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엄격성을 조금이라도 계승하여, “국가안보밖에 모르는, 타고난 군인에게 명예박사가 왜 필요한가. 박 대통령이 집권 18년 동안 명예박사 받았다는 얘기는 못 들었다”는 ‘명언’을 남기면서 박사학위 없는 대통령의 반열에 섰더라면, 그에 대한 숱하게 많은 우스갯소리들 가운데 하나는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으로 따져 우리나라의 여섯 번째 대통령인 노태우(盧泰愚) 13대 대통령은 4년제 육군사관학교 1기 졸업생으로 1968년에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대통령 때이던 1989년에 조지 부시(George Bush) 미국 대통령과 워싱턴 D.C에서 정상회담을 마친 뒤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를 받았으며, 역시 대통령 때이던 1990년에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소련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친 뒤 모스크바대학교에서 명예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사람으로 따져 우리나라의 일곱 번째 대통령인 김영삼(金泳三) 14대 대통령은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를 졸업하면서 문학사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졸업생들 가운데 첫 번째 대통령이었다. 그는 현재 여덟 개의 명예박사를 갖고 있다. 제1야당 신민당 총재 시절이던 1974년에 미국 메릴랜드주에 있는 타우슨주립대학교로부터 명예 문학박사를 받은 그는 대통령 재직 5년 동안 일곱 개를 추가했다. 1년에 평균 1.4개를 받은 셈이었다.
1993년에는 미국 아메리칸대학교로부터 명예 국제정치학 박사를, 1994년에는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교로부터 명예 법학박사를, 그리고 러시아 모스크바대학교로부터 명예 정치학 박사를, 1995년에는 프랑스 파리대학교(팡테옹 소르본느)로부터 명예 철학박사를, 미국 조지타운대학교로부터 명예 인문학 박사를, 그리고 미국 뉴욕대학교로부터 명예 법학박사를, 1996년에는 미국 미네소타대학교로부터 명예 법학박사를 각각 받았던 것이다.
4개국 8개 대학교에 걸쳐 있는데, 국내에서는 하나도 받지 않았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박 정권 시절과 전 정권 시절에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벌이던 선봉장 가운데 한 사람이던 그에게 국내의 어느 대학교가 감히 명예박사를 줄 수 있었겠는가.
대통령 취임 이후 매년 명예박사를 최소 하나씩은 받던 그가 1997년에는 어째서 받지 않았던 것일까? 그해 초 우리나라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가장 큰 금융비리사건이라는 한보사건을 계기로 외환 위기를 겪더니, 마침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에 이르면서 ‘경제신탁통치’를 받게 됐다. 6·25 이후 가장 큰 국란이라고 불리던 이러한 위기 속에서 또 하나의 명예박사를 추가하기가 주저스러웠을 것이다.
사람으로 따져 여덟 번째인 김대중(金大中) 15대 대통령은 아홉 개의 박사학위를 갖고 있다. 특기할 것은 논문을 제출해 받은 박사학위도 하나 가졌다는 사실이다. 그는 14대 대통령 선거를 몇 달 앞둔 1992년 9월에 러시아 외무부 산하 외교아카데미에 ‘한국 : 민주주주의 드라마와 희망 - 한국사회에서의 민주주의의 생성과 발전원리에 관하여(1945~1991)’라는 논문을 제출해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그 밖에 여덟 개의 명예박사를 갖고 있다. 5공 시절 미국 망명의 시기이던 1983년에 미국 에모리대학교로부터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투쟁한 공로’로 명예 법학박사를 받은 것을 시발로, 1992년에는 미국 가톨릭대학교로부터 명예 법학박사와 미국 포틀랜드대학교로부터 명예 문학박사를 받았고, 1994년에는 원광대학교로부터 명예 정치학 박사를, 1996년에는 호주 시드니대학교로부터 명예 법학박사를, 1998년에 경희대학교로부터 명예 경제학 박사를 각각 받았다.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1998년 6월에는 미국 조지타운대학교로부터 명예 인문학 박사를, 고려대학교로부터 명예 경제학 박사를 각각 받았다. 그의 명예박사 자격은 4개국 9개 대학교에 걸쳐 있다.
그가 김영삼 전 대통령과는 달리, 국내의 세 대학교로부터 명예박사를 받았지만 박 정권과 전 정권 시대에는 하나도 받지 못했다. 이것은 박 정권 때 권력 횡포의 표징 같던 김형욱(金炯旭)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국내의 두 대학교로부터 경쟁적으로 명예박사를 받았던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여덟 사람의 대통령만 놓고 비교하면, 김대중 대통령이 아홉 개로 가장 많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여덟 개로 그 다음이다. 이승만·윤보선·최규하·노태우 전 대통령 등이 각각 두 개씩이고,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하나이며, 박정희 전 대통령은 없다.
이제부터는 대통령급 또는 대통령 후보급 정치인들의 박사학위에 대해 써보자. 우선 장면(張勉) 전 국무총리부터 시작해 본다. 그는 대통령제의 제1공화정에서 국무총리와 부통령을 지냈으며, 의원내각제의 제2공화정에서 국무총리를 지냈다.
장면 전 국무총리의 공식 교육은 1917년에 오늘날의 서울대학교 농생명과학대학 전신인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1925년에 뉴욕시 맨해튼 구(區)에 있는 가톨릭계 학교인 맨해튼대학 문과를 졸업한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미국의 가톨릭계 대학에서만 세 개의 명예 법학박사를 받았다.
1948년 12월에는 주미대사로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 총회에서 승인받는 데 이바지한 공로로 모교인 맨해튼대로부터 명예박사를 받았고, 1950년 12월 주미대사에서 국무총리로 승진해 갈 때 6·25전쟁 기간중 미국과 유엔을 상대로 외교교섭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데 대한 공로로 뉴욕의 포덤대학교로부터 명예박사를 받았다. 이어 1957년에는 제4대 부통령으로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한 데 대한 공로로 뉴저지주의 시튼홀대학교로부터 명예박사를 받았다.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는 박정희 대통령 때 국무총리를 지냈으며 지금의 공동정권에서도 국무총리를 맡고 있다. 1987년에 실시된 13대 대통령 선거 때는 신민주공화당 후보로 입후보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부 3년 수료와 육군사관학교 8기 졸업으로 공식 교육을 끝낸 그는 11개의 명예박사를 갖고 있다.
제6대 국회의원으로 집권여당 민주공화당의 의장이던 때인 1964년에 미국 뉴욕주에 있는 롱아일랜드대학교로부터 명예 법학박사를 받은 것을 시발로, 미국에서 다섯 개(롱아일랜드대·웨스트민스터대·페어리디킨슨대·유타주립대·오리건주립대), 일본에서 한 개(규슈대), 국내에서 다섯 개(중앙대·홍익대·명지대·동의대·공주대)를 받았다. 공동정권에서 국무총리가 된 1998년에는 그 해에만 네 개를 받았다.
학위의 분야도 다양하다. 법학 문학 철학 정치학 과학 경제학 교육학 등, 두루 박(博), 넓을 박(博)의 뜻 그대로 두루 넓게 일곱 분야에 걸쳐 있다.
여기서 잠시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이른바 3김의 박사학위 수를 헤아려보면, 모두 28개에 이른다. 김종필 국무총리가 열한 개로 제일 앞서 있고, 김대중 대통령이 아홉 개로 중간이며, 김영삼 전 대통령이 여덟 개로 마지막이다. 3김은 대통령 자리를 놓고서만 경쟁한 것이 아니라 명예박사를 놓고서도 경쟁한 것 같다.
14대 대통령 후보였던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명예회장도 여덟 개의 명예박사를 갖고 있다. 1975년에 경희대학교에서 명예 공학박사를 받은 것을 시발로, 그는 국내에서 여섯 개(경희대·충남대·이화여대·연세대·서강대·고려대)를, 미국에서 두 개(조지워싱턴대·존스홉킨스대)를 받았다. 분야는 공학 경제학 경영학 문학 정치학 철학 등 역시 두루 넓게 걸쳐 있다.
집권여당이던 민주자유당의 14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 뜻을 두었다가 그만두었던 자유민주연합 박태준(朴泰俊) 총재는 모두 다섯 개의 명예박사를 갖고 있다. 1988년에 미국 카네기멜런대로부터 명예 공학박사와 영국 셰필드대로부터 명예 금속공학박사를, 1989년에 영국 버밍햄대로부터 명예 공학박사를, 1991년에 캐나다 워털루대로부터 명예 공학박사를, 1992년에 모스크바대로부터 명예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대부분이 포철 회장으로서 포철 신화를 창조한 데 대한 인정의 결과로 보인다.
국무총리를 지낸 뒤 집권여당인 신한국당의 15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던 이홍구(李洪九) 현 주미대사는 두 개의 박사학위를 갖고 있다. 1968년에 미국 예일대로부터 정치학 박사를, 1986년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시절에 자신의 학부과정 모교인 에모리대로부터 명예 문학박사를 받았다.
역시 국무총리를 지낸 뒤 신한국당의 15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던 이수성(李壽成) 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세 개의 박사학위를 갖고 있다. 1976년에 서울대에서 법학박사를, 1998년에 러시아사회과학연구소에서 명예 법학박사를, 1999년에 원광대에서 명예 정치학 박사를 각각 받은 것이다.
국무총리를 지낸 뒤 신한국당의 15대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가 차점을 기록한 이회창(李會昌) 현 한나라당 총재는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으로 공식 교육을 끝냈다. 그러나 이후 그는 15대 대통령 후보이던 1997년 7월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극동국립대로부터 명예 법학박사를 받았다.
다른 한편으로, 14대 대통령 후보이던 박찬종(朴燦鍾) 전 국회의원과 15대 대통령 후보이던 이인제(李仁濟) 전 경기도지사, 그리고 신한국당의 15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던 이한동(李漢東) 의원과 김덕룡(金德龍) 의원 및 최병렬(崔秉烈) 전 서울특별시장 등은 박사학위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면 훨씬 이전 시대의 대통령 후보들 또는 대통령 후보급 지도자들은 어떠했는가?
제1공화정 때 제헌국회와 2대 국회에서 국회의장을 지냈고 제1야당 민주당의 대표 최고위원으로 제3대 대통령 후보에 나섰던 신익희(申翼熙), 제1공화정 때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지냈고 2~3대 대통령 후보였던 진보당 당수 조봉암(曺奉岩), 제1공화정 때 서울특별시장과 외무부 장관을 지냈고 4·19직후 과도정부 수반을 거쳐 제5대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가 야당 후보 단일화의 명분을 위해 사퇴했던 신정당 당수 허정(許政) 등은 박사학위를 갖고 있지 않다.
제1공화정 때 제1야당이던 한국민주당의 당수였으며 제2대 부통령을 지낸 김성수(金性洙)는 고려대학교의 사실상의 설립자였는데도 명예박사를 받지 않았다. 제1공화정 이래 1983년에 별세하기 몇 해전까지 야당의 투사였고 제3공화정 때 제1야당 신민당의 당수였던 ‘박 할머니’ 박순천(朴順天) 여사도 박사학위를 갖고 있지 않다.
제1공화정 때 3대 부통령 후보였고 제1야당 민주당의 대표 최고위원으로 4대 대통령 후보에 나섰던 조병옥(趙炳玉)은 오늘날까지도 ‘조병옥 박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대통령 출마를 앞두고 1959년에 출판한 ‘나의 회고록’에서 자신이 1925년에 미국 컬럼비아대로부터 ‘조선의 토지제도’라는 논문으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고 썼다.
그러나 컬럼비아대에는 그것과 관련된 자료가 전혀 없다. 다만 그가 경제학 학사와 경제학 석사를 받고 경제학 박사 과정에 재적했던 기록은 남아 있다. 그래서 학계는 그가 학위 논문을 제출하지 못한 채 귀국한 것으로 결론내리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조 박사를 도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고 제2공화정의 초대 국무총리로 윤보선 대통령의 지명을 받았으나 국회에서 인준을 받는 데 실패했던 김도연(金度演)은 1931년에 미국 아메리칸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해방공간에서 한국민주당의 간부로 활약하다 암살됐던 장덕수(張德秀)는 1936년에 미국 컬럼비아대로부터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해방정국의 한국 지도자들 가운데 미군정 일각으로부터 ‘앞으로 출범할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고려됐던 김규식(金奎植)은 명예 법학박사였다. 1903년에 미국 버지니아주의 작은 도시 로노크에 자리잡은 로노크대학을 졸업한 그가 1차대전을 마무리짓는 파리 국제평화회의에서, 그리고 워싱턴에 세워진 구미위원부를 통해 미국의 조야에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해 1923년 로노크대학이 주었던 것이다.
한말 개화운동의 선구자로 미국에 망명해 한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의 의사 자격을 얻은 뒤 항일운동을 이끌다가 조국이 해방되자 귀국해 미군정의 특별의정관으로 활약하던 가운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거론됐던 서재필(徐載弼)은 흔히 ‘서재필 박사’로 불렸다. 그러나 그는 박사가 아니었다. 의사라는 뜻의 닥터(Doctor)를 사람들은 박사라고 불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북한의 김일성(金日成)과 김정일(金正日)에 대해 살펴본다. 김일성은 세 개의 명예박사를 가졌다. 1965년 4월에 수카르노(Achmed Sukharno) 대통령이 통치하는 인도네시아를 방문했을 때 인도네시아대로부터 명예 공학박사를 받은 것이 첫 번째였다.
이 무렵 김일성은 의기양양해 있었다. 북쪽의 경제가 남쪽의 경제를 확실하게 앞질러 있었고, 남쪽은 한일회담 반대와 남베트남 파병 반대로 국론이 완연하게 갈려 정치적 대립 상태였다.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의 국가들은 반미와 비동맹을 앞세우면서 북한을 성원한 반면에 남한을 깎아내렸다.
신이 난 김일성은 자신의 만 52세 생일인 4월15일에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 있는 국립 알리아르함 사회과학원에서 ‘조선혁명론’을 주제로 연설, 남조선에서의 혁명이 멀지 않았다고 장담하기에 이르렀다. 이 연설 다음날 그는 명예박사를 받았다.
두 번째 명예박사는 그때로부터 꼭 10년 뒤인 1975년 5월에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 있는 알제대학교에서 받았다. 1974년 4월에 남베트남이 공산화되면서 인도차이나 전체가 공산화하자, 김일성은 남한에서 미군철수가 뒤따를 것이며 그 결과로 공산혁명이 임박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래서 아내 김성애(金聖愛)와 함께 알제리를 비롯한 반미적 비동맹 국가들을 순방하며 지원을 요청했는데 그 두 번째 방문국이 알제리였다. 그때 알제리는 남한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반면에 북한에 대해서는 대단히 우호적이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김일성에게 명예박사를 주었던 것이다.
세 번째 명예박사는 그때로부터 11년 뒤인 1986년에 평양에서 페루의 시클라요대로부터 받았다. 이로써 김일성은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등 세 대륙의 대학교로부터 고르게 명예박사를 받아, 제3세계의 ‘학문적 수령’으로서의 자격을 ‘완벽하게’ 갖추기에 이르렀다. 재미있는 것은 이때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굳힌 김정일과 함께 받았다는 사실이다.
박사라는 칭호는 우리 역사 속에 가장 오래된 관직의 이름이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학문이나 전문기술에 종사하던 사람에 주던 벼슬이었고, 조선에서는 성균관·홍문관·규장각·승문원 등에 딸린 정7품 벼슬이었다. 이 이름이 미국의 Ph. D. 학위의 번역어로 쓰이기에 이르렀다. Ph. D. 학위는 대학교에서 전문적으로 가르칠 수 있고 연구할 수 있는 자격을 가졌음을 인정하는 증명서다.
그래서 명예박사는 뛰어난 석학과 훌륭한 정치가 등에게 주어지는 것임에도 그러한 자격을 굳이 묻지 않고 주었기 때문에 명예박사 받은 사람을 그날 하루만 박사라고 불러주는 것이 관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승만 박사’ ‘김규식 박사’ ‘조병옥 박사’ ‘장면 박사’의 영향 때문인지 박사학위가 직접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정치세계에서 박사가 지나치게 중시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경향에서 벗어나고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외국에서도 대학이 대통령과 국무총리 또는 제1야당 당수 등 한 나라를 대표할 만한 지도자에게 명예박사를 주는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영국의 총리를 지낸 뒤 제1야당 당수로 있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만 해도 1946년에 미국 미주리 주 풀턴에 있는 웨스트민스터대의 초청을 받고 명예박사가 됐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하게 상기돼야 할 것은 그가 명예박사를 받으며 역사에 길이 남을 명연설을 했다는 사실이다. 유명한 ‘철의 장막(Iron Curtain)’연설이 그것이다. 우리 정치인들도 명예박사를 받으며 그와 같은 연설을 남긴다면 얼마나 뜻깊고 멋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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