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유엔 평화유지국 전문직원 송혜란씨

忍齋 黃薔 李相遠 2012. 4. 8. 09:09
반응형

기사입력 2002-10-21 18:38:00 기사수정 2009-09-17 08:40:05

세계의 분쟁지역에서 10년째 활약중인 송혜란씨. - 뉴욕=홍권희특파원


“지구 구석구석에 할 일이 널려 있어요. 좁은 국내에서 소모적인 다툼에 에너지를 낭비하는 젊은이들이 많은데 많이들 나가야죠.”


세계의 분쟁지역을 돌며 유엔 평화유지국(DPKO) 전문직원으로 10년째 활약 중인 송혜란(宋惠蘭·46)씨는 최근 동티모르 주재 업무를 마치고 다음 임무를 준비하던 중 뉴욕에 잠시 들렀다. 동티모르의 유엔 가입 업무를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유엔은 어려서부터 동경의 대상이었어요. 그래서 유엔본부가 있는 뉴욕으로 무작정 유학을 왔죠. 아프리카 소말리아 내전이 터지면서 유엔의 평화유지 활동이 강화되던 1993년 유엔 직원으로 첫발을 내디뎠죠.”


기자 출신인 그의 첫 자리는 소말리아 유엔공보관. 1년 반 동안 현지에서 신문을 발행했다. A4용지 앞뒤에 주민들에게 알릴 정보를 담은 일간 ‘만타(오늘이라는 뜻)’를 현지어로 5만부, 영어로 5000부씩 찍어 배포했다. ‘만타’는 전란에 지친 주민들에게 열려진 유일한 창(窓)이었다.


그는 이어 유고 내전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슬픔의 땅’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보스니아로 날아갔다. 이번에도 전쟁의 슬픔을 주민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는 이때의 체험을 담아 ‘세계가 주목하는 곳에 그녀가 있다’(초당)라는 책을 써내기도 했다.


“무슨 인연인지 편안한 곳보다는 ‘뜨거운’ 곳이 좋아요. 지금 유엔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은 당연히 이라크죠. 이라크 근무가 확정되면 곧 달려갈 겁니다. 중동에선 서양인보다는 동양인이 일하기가 좋아요. 여성들이 유리한 점도 많습니다.”


그는 아시아권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동티모르에서는 13개 군(郡) 가운데 마나투투군을 거쳐 한국의 상록수부대가 파견나와 있던 라우템군의 지방행정관으로 일했다. 안전문제에서 도로와 주택의 복구, 위생과 교육까지 모두 챙겨야 했다. 자신이 임시정부의 수반이 된 듯한 느낌도 들었다. 밤낮을 잊고 일에 매달렸던 탓일까, 폐허 같았던 마을엔 생기가 돌았고 유엔 깃발을 보면 주민들은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밝게 웃었다. 


“분쟁지역에 유엔이 들어가 어느 정도 안정되면 비정부조직(NGO)들이 활동할 영역이 많이 생깁니다. 동티모르 재건작업엔 국내 기업과 단체가 학용품 컴퓨터 의류 등을 보내 줘 한국이 최대의 지원국으로 기록됐어요. 수암장학회나 월드크리스천프런티어(WCF) 같은 선교단체도 현장지원을 해주었고요. 이라크에서 일하게 되면 이번에도 주변이 안정되는 대로 국내외 NGO들을 현지로 초대할 생각이에요.”


뉴욕〓홍권희특파원konihong@donga.com



▼송혜란씨는▼


▽1956년 전북 정주 출생


▽학력〓이화여중고 졸업, 연세대 2년 재학 중 


미국 유학해 1983년 빙햄튼 뉴욕주립대 졸업


(사회학과), 1989년 컬럼비아대 대학원 졸업


(국제학과·석사)


▽경력〓미주한국일보 기자, 유엔평화유지국 


전문직원으로 소말리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보스니아-동티모르에서 근무


▽유엔지원 동기〓“국제무대에서 뛰는 것이 중고교 


시절부터의 꿈이었다. 대학원에서 유엔을 


전공했고 기자시절엔 유엔을 담당했다.”


▽유엔 지원자에 대한 조언〓“한국의많은젊은이가


세계를 위해 봉사할 자세가 돼 있고 자질도 


있음을 동티모르를 비롯한 현장에서 여러 번 


확인했다. 한국에서 아옹다옹하지 말고 실력 


있는 사람은 세계 무대로 더 많이 나와야 한다. 


청소년들에게 뭔가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해 


줬으면 한다.”


▼평화유지 활동 PKO▼


분쟁이 악화돼 자체 해결이 곤란한 지역에 유엔이 전문직원을 파견하거나 각 나라가 자발적으로 군사 및 민간요원을 파견해 평화유지를 돕는 활동. 초기엔 주로 안보 업무였으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선거관리와 정치활동 지원, 건설, 구호, 인권 등의 업무가 추가됐다. 유엔은 현재 동티모르를 포함해 세계 15군데에서 평화유지활동을 펴고 있다. 유엔사이트(www.un.org/Depts/dpko/dpko/home.shtml) 참조.

----------------------------------------------------------------------------------------------


세계가 주목하는 곳에 그녀가 있다



초당, Nov 10, 1999 - 286 pages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유엔 평화 유지 요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가 도전과 함께 했던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이야기한 자전적 에세이. 소말리아, 보스니아 등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세계 곳곳을 누비며 난민들과 함 께 새 삶의 터전을 일구어 가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


아프간 바미얀에서 그녀, 송혜란을 만난다


2009년 04월 17일 (금) 11:52:59 업코리아  webmaster@upkorea.net


“제가 유엔에서 일하면서 부임했던 첫 일 터가 소말리아였어요. 모가디슈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산 언저리에 숙소가 있었기 때문에 양측의 화공이 교차되는 전투를 영화 감상하듯 살았지요. 그 때 저는 사람들에게서 일종의 중독증을 느꼈습니다.” 



▲ 유엔 평화유지국(PKO)의 전문직으로 일한 한인 최초의 여성 송혜란 


살인과 전쟁, 그리고 편견과 광기가 가득한 중독증은 흡사 마약에 찌들은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최음제와도 같았다. 8년간 뉴욕에서의 기자생활을 접고 1993년, 유엔으로 직장을 옮긴 이후 단 한번도 전장을 떠난 적이 없었던 그녀의 몸에서 향수대신 화약냄새가 가득한 듯 했다. 현장에서만 줄곧 17년의 삶을 살았다는 설명에 어느덧 그녀에 대한 선입관이 작용한 탓도 있을 것이다. 


송혜란, 이름 석자를 치면 인터넷에 그녀의 간단없는 이력과 함께 유엔 평화유지국(PKO)의 전문직으로 일한 <한인 최초의 여성>이라는 대명사가 먼저 등장한다. 그런 그녀를 아프간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일종의 행운이었다. 일기가 고르지 못한 탓에 칸다하르 방문 길에 일주일간을 갇혀 지내다 돌아온 그녀와 어렵사리 하룻동안을 함께 할 천운을 얻은 까닭이다. 


17년의 대부분을 전쟁과 재난 현장에 있으면서 여성 특유의 미덕을 잃지 않고 살아온 이유를 굳이 묻지 않아도 대화의 행간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었다. ‘이웃 대하기를 내 몸처럼 대하라’는 평범한 진리가 그녀에게는 실천하기 어려운 숙제였다. 어떻게 하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 있을까? 라는 지극히 평범한 과제가 종교나 성, 인종의 문제와 관련하여 풀기 어려운 숙제처럼 느껴졌다. 


아프간의 오지 바미얀과 다이쿤디주를 관장하는 그녀가 이러한 과제를 늘 생각하게 된 이면에는 그녀가 관장하는 지역 주민의 대부분이 몽골의 후예로 알려진 하자라족인 탓도 있다. 인구의 50 퍼센트인 파슈툰 족에게 하자라는 700년 동안 성난 이리의 먹이감이었다. 인구 250만명의 하자라 가운데 150만명 가까운 하자라가 카불에서 천민 계층을 이루고 산다. 나머지 100만명을 돌볼 책임이 온통 송선생의 몫이다. 


교육과 보건 위생, 식수문제에서부터 전기, 도로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의 실제 생활과 관련된 모든 문제에 그녀가 일일히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일상적인 숙제들이다.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무정부 상태의 나호템 주지사 역할을 잠시 맡기도 했다. 

현지인들을 돌보는 일 못지 않게 제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유엔 직원들의 다양한 요구를 조정해야 할 책임 역시 그녀의 몫이다. 


워낙 유엔기구가 방만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일이 많다보니 크고 작은 갈등이 적지 않다는 뜻이다. NGO와 국제 기구 요원들, 눈도 많고 의견도 다양해서 이들의 의견을 조정한다는 것이 그만큼 힘들다. 특히 돈 문제에 관해서는 양반도 요조숙녀도 별 수 없다. 배우거나 못 배운 사람도 돈 앞에서는 숨겨진 본능이 여과없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심한 경우에는 단돈 1불 때문에 다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탓에 마음에 맞지 않는사람과 함께 일할 수는 있어도 함께 놀지 못하는 공허감을 맛보기도 한다. 


송혜란 선생은 이제 자신이 한국에서 성장한 세월보다 더 오랜 삶을 이국에서 보낸 셈이다. 

“아프간에 오신지는 얼마나 되셨지요?” “오늘로 4년하고 15일이네요” 

와 ~~~ 군대에서 제대를 앞두고 남은 군복무 기간을 캘리더에 작대기를 그으면서 날짜를 세던 지나온 과거가 파편처럼 아련히 느껴졌다. 

“ 아, 여기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송선생의 고독이 있구나.” 

바미얀 유엔 숙소에서 혼자 생활하는 그녀의 손님으로 머물며 그녀의 식솔들과 교제할 시간이 있었다. 아프간 잡종인 두 마리 개와 스물아홉 마리 야생 토끼다. 


어느 날에는 도둑 고양이가 어린 토끼를 물어간 탓에 속을 끓인 경우도 있었다. 의지할 곳 없는 몽골 족을 돌보며 살아온 지난 4년이 야생 동물인 토끼를 돌보듯 가슴 앓이하며 살아온 날과 다를 바 없는 셈이다. 


▲ 바미얀 주 의회 의장과 상공인 협회장과 더불어 지역 현안문제를 토론하고 있다.


다음 달에는 몇 마리만 남기고 다이쿤디 주에 방목하려고 한다. 원래 야생 토끼가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하듯 바미얀 몽골족도 언젠가는 파슈툰이나 인근 타직 사람들과도 어울리며 사는 법도 익혀야 할텐데 내심 걱정이 앞서는 것은 그녀만의 노파심일까? 


소말리아를 필두로 유고와 보스니아, 동티모르, 아프간등 세계사의 화약고에서 살아온 그녀에게 유독 아프간에서의 지난 4년이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탓에 애정 또한 깊게 느껴진다. 

2005년 3월, 파키스탄과 국경을 맞댄 잘랄라바드에서 시작된 그녀의 아프간 생활. 


가을이면 아프간 3분의 1에 해당하는 서부 헤랏을 맡게 될지도 모른다며 그동안 다릴어를 배우지 못한 회한을 내비치는 그녀에게서 아프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애증을 함께 느낀다. 어쩌면 지나온 세월보다 더 길고 긴 세월일 수도 있을텐데 그녀의 삶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값진 경험들을 우리 젊은이들에게 송두리째 전수할 날을 기다리는 것이 나만의 욕심일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