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해여관 / 저자 김성희 / 출판사 사회평론
잊혀진 우리 역사와 인물을 재조명, 제2회 고루살이문학상 수상
소설가 김성희의 첫 소설이다. 안동의 명문가이자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유명한 이규락, 이동하, 이병기 삼대를 소설 형식을 차용해 재조명했다. 사회평론의 이전 책들인 『경성트로이카』나 『이관술 1902-1950』과 비슷한 형식이며, 그 맥을 잊고 있다. 김성희 작가는 이 작품으로 잊혀진 역사와 인물을 재조명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2회 고루살이문학상을 수상했다. 고루살이문학상은 “오늘의 현실을 읽어내고 사람들에게 보다 나은 사회에 대한 꿈과 의지를 심어주는 힘찬 문학”, “인간평등을 위한 저항의 역사, 저항하는 민중의 삶을 그리는 문학”을 기치로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과 안재성, 이시백, 조선희, 김응교 등의 작가들이 창립한 문학상이다.
안동의 명문가, 독립운동가 집안
이 책은 안동의 명문가이자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것으로 유명한 이씨 집안의 삼대가 굴곡진 현대사를 살아간 이야기다. 항일단체 충의사를 설립한 이규락 선생(1850~1929), 교육자로 만주에서 학교설립운동을 주도한 이동하 선생(1875~1959) 그리고 이병기 선생(1906~1950)이 그들이다. 예산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하고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한 이병린 선생(1892~1936), 경성트로이카의 구성원이었던 이효정 선생(1913~2010) 역시 이 집안 사람이다. 퇴계의 후손인 이 명문가는 집안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들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이제는 거의 잊혀지다시피 했다. 허울뿐인 명문가가 아니라 몸소 실천하는 명문가가 되고자 했던 이들은 어떤 역사를 살았던 것일까.
뼈조차 추리지 못한 잊혀진 그 이름, 이병기
이 책의 주인공을 꼽는다면 그건 이병기다. 사실 이병기는 그리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다. 사회주의 운동이나 공산주의를 대표할 만한 인물도,역사에 남을 만한 굵직한 혁명가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 일견 평범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생애와 운동사가 조명되어야 했다. 한국 현대사에는 자유민주주의라는 명분 아래 자본주의가 일으킨 광기와 이념 수호라는 미명하에 죽음의 독재가 낳은 야만적인 역사 사이에서 자행된, 밝혀지지 못하고 밝히고자 하지 않은 억울하고 치욕스런 죽음이, 인물이 너무도 많다. 그러나 그런 무의미해 보이는 삶과 죽음 이면을 우리는 모른다. 이병기의 존재를 밝혀 봄으로써 무의미가 신은 무지였음을 독자들 역시 깨닫을 수 있기를, 작가는 간절히 바랐다.
몇 줄의 약력과 사진들, 그리고 이병기의 아내 오묘연과 아들 이효철의 증언이 남은 전부였다. 그것만으로 이병기의 삶과 사랑, 운동가로서의 그의 족적을 밝히는 일은 상당히 지난한 과정이었다. 그는 아버지 이동하와 함께 만주에서 활동했고, 국내에서는 교육운동을 펼쳤다. 사회주의자, 좌익, 빨갱이로 투옥되기를 여러 차례, 고문으로 인해 젊은 나이에 치근(齒根)이 몽땅 빠져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 해방 후에는 건준위에서 활동한 경력으로 인해 보도연맹 가입을 강요받았고, 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경산코발트광산에서 학살당했다. 사회주의자 항일운동가이자 보도연맹원인 그는 잊혀진 채로 50년간 땅 속에 묻혀 있었다. 이 책은 그 이야기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이병기는 독립운동가였다. 그러나 독립유공자 추인은 요원하다. 보훈처는 그가 “보도연맹 사건으로 죽었기 때문에” 독립유공자가 될 수 없다고 했다. 그의 아내 오묘연은 가끔씩 찾아오는 기자들에게 말하곤 했다. “그보다 더한 좌익 활동을 했어도 보도연맹으로 죽지 않았으면 복권될 수 있지만, 보도연맹으로 죽은 사람은 복권이 안 된다데예. 자기네가 인정한 전향자들은 안 되고 끝까지 공산주의 운동을 한 사람은 독립운동가로 인정하고, 이기 대체 무슨 경우인지 모르겠어예.” 역사는 연약하다. 이념은, 그 자체로만 보면 지극히 부질없다. 그렇다면 역사의 파란과 이념의 질곡에서 자신의 한 목숨을 버렸거나 혹은 반평생을 감옥에서 보낸 이들은 대체 무언가? 지하에서 살다가 그것도 부족하여 죽어서 뼈조차 추리지 못한 이들은 그야말로 혁명의 환상에 젖은 과한 이상주의자였을 따름일까? ‘이병기’는 조선 독립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기꺼이 바치며 그 시대의 과업에 충실히 임했고, 해방 후에도 살 만한 세상을 위해 고군분투, 분투노력 하였다. 사람은 죽어서 ‘의미’를 남긴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병기는 진실로 ‘의미의 혁명가’라 할 만하다.
“독립운동 3代, 그건 숙명이었어”…89세 오묘연 할머니 ‘파란만장 일생’ [경향신문] 2008.02.29
“독립운동, 그건 숙명이었어요.”
3대(代)에 걸친 독립운동가 집안의 아내이자 며느리로 한 평생 고난의 삶을 살아온 오묘연 할머니(89·대구 수성구 황금동). 그의 인생에는 파란만장한 한국의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18세 꽃다운 나이에 신랑 얼굴도 못 본 채 혼례식을 올렸던 할머니는 결혼하고 나서야 남편 이병기 선생(1906~1950)이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자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시아버지 백농 이동하 선생(1875~1959)은 만주신흥무관학교 전신인 신흥강습소 설립자로서 당시엔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자금을 마련,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시조부 이규락 선생(1850~1929)은 1905년 항일 언론투쟁단체인 충의사 회원으로 활동했고 시숙인 이병린 선생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일가족이 처형당했다.
4남1녀 중 외동딸로 곱게 자란 할머니의 삶은 신혼 초부터 시련의 연속이었다. 신접살림을 차린 곳은 대구 중구의 하해여관. 여관 간판을 내걸었지만 이곳은 시아버지가 동지들의 도움으로 마련한 독립운동가들의 연락장소였다.
할머니는 그곳을 드나들던 애국지사들의 의식주를 챙기며 독립운동을 소리없이 도왔다.
지금도 ‘그때 그분’들의 인상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대종교 단애 종사인 윤세복 선생은 풍채가 훤한 데다 흰수염을 길게 늘어뜨려 마치 산신령 같았어요. 주머니에 늘 솔잎과 콩가루를 간직하고 다니면서 생식을 즐겼지요. 대동청년당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펼친 동암 서상일 선생은 당당하면서 언변이 무척 좋았어요.”
할머니는 결혼한 지 1년여 만에 남편과 생이별을 했다. 이병기 선생이 경북 왜관에서 야학당을 개설, 일제만행을 성토하다 1939년 적발돼 1년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남편은 고문으로 치근(齒根)이 모조리 빠지고 몸도 가누지 못했어요. 면회갔다 와서 갓 돌 지난 큰아들을 안고 얼마나 울었던지….” 이병기 선생은 결국 일제의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1950년 44세 때 세상을 떠났다. 30세에 청상이 된 할머니는 시아버지를 모시며 2남3녀를 키워야만 했다.
“해방 소식을 접한 부자가 감격에 겨워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선합니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도 집안의 시련은 끝나지 않더군요.”
1951년, 시아버지가 ‘이승만 대통령 하야문’을 발표하면서 집안은 또 한 번 소용돌이쳤다. 시아버지를 정적으로 지목한 자유당 정권의 냉대와 감시가 이어지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이후 1959년, 믿고 의지했던 시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오 할머니는 홀로 모진 세파에 맞서야 했다. 시장을 돌아다니며 참기름·비누·뻥튀기를 팔아 아이들을 먹이고 키웠다. 강냉이죽과 삶은 감자…, 그나마도 없으면 물배를 채워야 했다.
할머니는 작은 다세대 주택(54㎡)에서 혼자 지낸다. 자녀들이 모시려 해도 고집을 꺾지 않는다. “그분들의 바른 삶, 옳은 길을 따르는 데 거처는 중요하지 않다”며 “독립운동가 집안의 여인으로 한 점 후회없이 살아왔다”고 했다.
그러나 딱 하나, 할머니는 마음의 짐이자 소원을 안고 있다. 남편이 아직 독립유공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것이다. “남편이 공로를 인정받는다면 지금 죽어도 한이 없겠네요….”
하해여관(김성희, 사회평론. 315쪽. 1만5천원) [연합뉴스] 2012.01.06
항일단체 충의사를 설립한 이규락(1850-1929), 만주에서 학교설립운동을 주도한 이동하(1875-1959), 독일운동가 이병기(1906-1950) 등 안동의 이씨 집안 3대 이야기를 그린 소설.
특히 보도연맹 사건으로 죽은 탓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도 못한 채 잊힌 이병기의 생애를, 그의 아내와 아들의 증언을 통해 되살린다.
작가는 "이병기는 조선 독립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기꺼이 바치며 그 시대의 과업에 충실히 임했고 해방 후에도 살 만한 세상을 위해 고군분투했다"며 "이 책이 묻히고 버려지고 잊힌 그와 그들의 영전 앞에 한 꽃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 하해여관 >김성희 씀, 사회평론 펴냄, 2012년 1월, 316쪽, 1만5000원 [오마이뉴스/최규화] 2012.01.05
이병철, 이건희, 이재용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삼성 재벌 삼대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것이다. 하지만 이규락, 이동하, 이병기라는 이름을 듣고 이들이 누군지 알아차릴 사람은 몇이나 될까. 이 책은 안동의 명문가이자 독립운동가 집안인 이씨 집안의 삼대를 소설 형식으로 재조명했다.
아버지 이동하와 함께 만주와 국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한 이병기는 좌익으로 몰려 투옥되고 고문으로 폐인이 된다. 한국전쟁 때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학살당한 그는 50년간 뼈조차 추려지지 못했다. 몸소 실천하는 명문가의 존재와 이병기가 남긴 '의미'를 통해 '의미의 혁명가'란 무엇인지 자문하게 하는 책. 제2회 고루살이문학상 수상작이다.
독립운동가 아내의 한맺힌 삶… ‘하해여관’ [국민일보] 2012.01.05
하해여관 / 김성희 / 사회평론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시집 온 오묘연 할머니(92·대구 황금동). 18세 꽃다운 나이에 신랑 얼굴도 못 본 채 혼례식을 올렸던 할머니는 결혼하고 나서야 남편 이병기 선생(1906∼1950)이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자손임을 알게 된다. 시아버지 백농 이동하 선생(1875∼1959)은 만주신흥무관학교 전신인 신흥강습소 설립자, 시조부 이규락 선생(1850∼1929)은 1905년 항일 언론투쟁단체인 충의사 회원으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신접살림을 차린 곳은 대구의 하해여관. 간판만 여관일 뿐, 사실상 독립운동가들의 연락장소였다.
전기 작가 김성희(43)의 첫 장편 소설 ‘하해여관’(사회평론)은 오 할머니와 아들 이효철씨의 증언을 토대로 탄생한 작품이다. 소설의 걸개상 주인공은 ‘이씨 3대’일 수 있지만 그 내용은 오 할머니의 눈물 어린 시선에 맞춰져 있다. 남편은 일제의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1950년 7월 경산코발트광산에서 국군에 학살당했다. 남편은 독립유공자 명단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하고 있다.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게 이유이다. 소설은 그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아들이 공터 안쪽에 있는 갱의 입구를 가리켰다. 오묘연의 시선이 좁고 까만 입을 벌리고 있는 수평갱 입구에 꽂혔다. 옆으로 젖혀진 철문에는 노란 리본과 꽃다발들, 현수막이 매달려 있고, 굴에서 흘러나온 물은 바깥 바닥까지 흥건히 적셔놓고 있었다. 어두운 굴속을 바라보는 오묘연의 눈빛이 순간 아득해졌다.” (11쪽)
다음 장면은 오 할머니의 회상으로 이어진다. 1937년 퇴계 후손인 안동 명가로 시집가 신접살림을 차린 곳이 하해여관 19호실이었다. 할머니는 결혼한 지 1년여 만에 남편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남편은 경북 왜관에서 야학당을 개설, 일제 만행을 성토하다 1939년 적발돼 1년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오묘연은 포대기를 싼 아들을 안고 면회실로 들어갔다. 창살이 없이 개방된 면회실이었다. 이병기는 설렘과 기대에 들뜬 채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얼마 만에 보는 건지, 정확한 세월을 계산하기도 힘들었다.”(174쪽)
일제의 고문으로 치근(齒根)이 모조리 빠져버린 남편은 갓 돌 지난 큰아들을 안고 눈물을 흘렸다. 게다가 1951년, 시아버지가 ‘이승만 대통령 하야문’을 발표하면서 집안은 또 한 번 소용돌이친다. 시아버지를 정적으로 지목한 자유당 정권의 냉대와 감시가 이어지면서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급기야 시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오 할머니는 홀로 모진 세파에 맞서야 했다. 오 할머니는 지금도 대구의 좁은 다세대 주택에 혼자 거주하고 있다.
해방후 좌우익 대립에 희생된 이병기 [매일경제] 2012.01.06
하해여관 / 김성희 지음 / 사회평론 펴냄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뼈조차 추리지 못한 억울한 주검이 수없이 많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걸고 투쟁했지만 광복 후 좌우익의 대립에 희생된 사람들이 한반도 곳곳에 묻혀 있다.
작가 김성희 씨(43)는 독립운동가 이동하(1875~1959)와 사회주의자였던 그의 아들 이병기(1906~1950)의 영혼을 소설 '하해여관'으로 불러들였다. 남도 북도 아닌 오직 해방된 조국만을 소원했던 그들의 순정한 삶을 입체적으로 복원했다. 안동의 명문가이자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이씨 집안을 통해 굴곡진 한국 현대사를 들여다볼 수 있다. 이동하의 부친 이규락(1850~1929)은 항일단체 충의사를 설립했다. 이동하는 교육자로 만주에서 학교설립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이병기는 한국전쟁 직후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학살됐다. 이승만 대통령이 좌익 사건 관련자들이 인민군을 도와 후방을 교란시킬 것을 우려해서 몽땅 죽이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하해와 같이 넓은 마음으로 좌우 이념을 화합하려 했던 이병기의 사심 없는 애국 열정은 무참히 짓밟혔다.
작가는 "묻히고 버려지고 이름조차 잊힌 그들 앞에 한 송이 꽃이 되기를 바란다"며 독립운동가들의 참담한 최후를 위로하듯 소설을 써내려갔다.
소설가 김성동 씨는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고민에 침잠된 근래 한국문학에서 보기 드문 귀한 역작"이라고 평했다.
하해여관(김성희 지음, 사회평론, 1만5000원) [세계일보] 2012.01.06
항일단체 충의사를 설립한 이규락(1850∼1929), 만주에서 학교설립운동을 주도한 이동하(1875∼1959), 독일운동가 이병기(1906∼1950) 등 안동의 이씨 집안 3대 이야기를 그린 소설. 보도연맹 사건으로 사망한 탓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도 못한 채 잊힌 이병기의 생애를, 그의 아내와 아들의 증언을 통해 되살린다. 작가는 “이병기는 조선 독립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기꺼이 바치며 그 시대의 과업에 충실히 임했고 해방 후에도 살 만한 세상을 위해 고군분투했다”며 “이 책이 묻히고 버려지고 잊힌 그와 그들의 영전 앞에 한 꽃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하해여관 [한겨레] 2012.01.13
안동의 명문가이자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이씨 집안 삼대가 굴곡진 현대사를 살아간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 항일단체 충의사를 설립한 이규락(1850~1929), 만주에서 학교 설립 운동을 주도한 이동하(1875~1959), 그리고 그 자손인 이병기(1906~1950) 등. 김성희 지음/사회평론·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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