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5_80년5월18일

[스크랩] 박정희는 왜 좌빨 `빨갱이`가 되었나?

忍齋 黃薔 李相遠 2013. 2. 14.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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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왜 좌빨 '빨갱이'가 되었나?

[정운현의 역사 에세이 38] '좌파지식인' 친형 박상희 죽음과 군부 내 좌익 인맥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묻건대, 박정희는 왜 '빨갱이'가 됐을까?

비록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당시로선 수재들이 들어가던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문경에서 보통학교(현 초등학교) 교사로 3년 가량 근무하였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일제하에선 만주군 장교로, 또 해방 후에는 육사를 나와 장교로 근무하면서 엘리트의 길을 걸어온 그다. 그런 그가 대체 왜 '빨갱이'가 됐을까? 

 

 

 


뿌리 없는 나무가 없고, 샘이 없는 물이 없듯이 모든 일에는 시원(始原)이 있기 마련이다.

박정희가 '빨갱이'의 길로 들어선 데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시대적 배경, 개인적 성격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대체로 다음 세 가지를 든다.

첫째 사범학교 시절에 목격한 '현준혁사건',

둘째 바로 위 친형 박상희의 죽음과 분노,

셋째 춘천 8연대-육사 근무 시절 좌익 군인들과의 교류 등이 그것이다.

그 하나하나씩을 살펴보기로 한다.

대구사범 시절에 목격한 '현준혁 사건'

일제 당시 대구사범(5년제)은 서울의 경성사범, 평양의 평양사범과 함께 3대 사범학교로 꼽힌 명문이었다.

교사 대부분은 일본인이었으며, 이들은 한국인 학생들에게 모욕적 차별대우를 하였다.

그 와중에도 몇몇 한국인 교사들은 학생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었고 그 영향으로 일부 학생들은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기도 했다.

그 후 몇몇 학생들은 이른바 '독서회 사건'으로 체포되기도 했는데 이는 모두 현준혁(玄俊爀, 1906~1945)의 지도 결과였다.

 일제 당시 대구사범학교 교사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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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보통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1932년 4월 1일 제4기생으로 대구 사범에 입학했다.

바로 그해 4월 현준혁 교사는 학생들과 함께 항일 동맹휴교를 주도했다. 1932년 11월 10일 자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대구지방법원에서 "학생에 적화 선전한 적색 3대 결사 사건, 오는 14일에 공판 개정, 피고 현준혁 등 25명"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른바 '현준혁사건'으로 현준혁은 6년간 복역하였고, 교직에서도 파면되었다.

출옥 후 그는 노동운동을 하다가 재수감되었으며, 이후 조선공산당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해방 직후 평양에서 암살당했다.

박정희와 대구 사범 동기생인 언론인 황용주(전 부산일보 주필·부산문화방송 사장, 2001년 작고)는 99년 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가 펴낸 <격동기 지식인의 세 가지 삶의 모습>에서 "처음 좌파에 눈뜬 것은 대구 사범 재학시절에 발생한 '현준혁 사건'이 첫 계기였고, 이를 계기로 <공산당선언>, <자본론> 등의 서적을 '한 달 용돈을 다 털어서' 사서 읽곤 했다"고 증언했다.

좌파 지식인으로 불리는 황씨는 5·16 당시 민간인 신분으로 박정희를 적극 도운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황씨는 대구 사범 재학 시절 일본 교토대 좌익교수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가 쓴 <빈보모노가다리(貧乏物語)>(유물론과 맑스주의를 알기 쉽게 풀어쓴 해설서)를 읽고 감동받았다고 증언했다.

지난 97년 당시 분당 자택에서 가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황씨는 "당시 학생이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이 책을 읽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황씨와 동급생인 박정희도 이 책을 읽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박정희 역시 이때 처음 '좌파'를 접한 셈이다.

다만 이때 박정희가 '현준혁 사건'을 통해 접한 '좌파'는 이념적 성향보다는 민족적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일제하 민족진영 내에는 좌파계열도 있었고 이들의 투쟁은 반제(反帝), 반일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당시 지식인들 가운데 좌파 경향은 하나의 사조(思潮)였고, 시대적 울분을 표출하는 창구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대구 사범 '독서회사건' 연루자들은 모두 항일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박정희가 대통령 시절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았다.     

'좌파지식인' 친형 박상희의 죽음과 분노

박정희는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여러 형제 가운데서도 바로 위의 박상희(朴相熙, 1906~1946)를 유독 존경하고 따랐다.

구미 보통학교를 졸업한 박상희는 구미지역에서는 유지급에 속하는 인물이었으며, 일제하 좌우합작 민족단체인 신간회에 참여하였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 구미지국장, 1935년에는 <동아일보> 기자 등 언론인으로도 활동하였고, 일제 말기에는 비밀결사 단체인 '건국동맹'에도 가담하였다.

그의 딸 박영옥은 김종필(JP) 전 총리와 결혼해 그는 JP의 장인이기도 하다.

좌파 지식인이자 민족적 의기를 갖고 있었던 박상희는 당시 구미 지역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8·15 해방 무렵 구미보통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박상희를 따랐던 송재욱의 증언에 따르면, 박상희는 구미 선산경찰서에 예비검속(혐의자를 미리 잡아 놓는 일) 돼 있다가 유치장에서 해방을 맞았다고 한다.

해방 이튿날 박상희는 마을청년들을 이끌고 일본인이 경영하던 통운회사 건물을 인수하여 '건국준비위원회 구미지부' 간판을 내걸고는 당시 구미보통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무장해제도 지휘했다고 한다.

 좌파지식인이자 박정희의 친형인 박상희
ⓒ 박준홍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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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에서 2기생으로 한창 훈련을 받고 있을 무렵인 1946년 9월 말 대구에서 좌익들의 주동으로 대규모 파업사태가 발생했다.

10월 1일, 이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군중데모가 발생하자 경찰은 총을 쏘며 맞섰고 성난 군중은 경찰서를 습격하면서 '폭동'으로 발전했는데 이 사건이 이른바 대구 10·1항쟁이다.

'폭동'은 이후 경북 전역으로 확산됐으며, 구미에서도 10월 3일 2000명가량의 군중이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경찰서를 습격하여 경찰관들을 불범 감금하였으며, 경찰관 및 관리들의 집 86채를 박살냈다. (미군 방첩대 보고 참조)

구미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박상희는 군중을 지휘하여 선산경찰서와 면사무소를 점령하고는 '구미 좌익정권'을 세웠다.

그리고는 구미면장을 비롯해 의용소방대장, 이승만계 독립촉성회 간부 등 관내의 우익 유지들을 붙잡아 들였다. 그러나 이들 대다수는 박상희의 지인들이어서 별다른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오히려 박상희는 구미 경찰관들을 피신시켜 주었는데, 구미사람들은 박상희가 덕분에 유혈사태가 빚어지지 않았다고 얘기하고 있다.

다만, 박상희가 '구미폭동'을 기획했는지, 아니면 사건 수습 과정에서 저절로 지도자가 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런 박상희가 경찰관 총에 맞아 죽은 건 다분히 '우연'이었다는 주장이 정설이다. '구미 폭동' 이틀 뒤인 10월 5일 새벽, 대구에 파견되었던 충청도 경찰 병력이 구미로 쳐들어왔다.

이들은 도중에 경찰관들이 무참하게 학살된 것을 목격하고는 몹시 흥분된 상태였다.

이들이 총을 쏘며 구미로 들어오자 경찰서를 지키던 폭도들은 달아났고 박상희도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

그러자 하루 전에 석방된 백철상 서장이 그에게 "자네는 우리 생명을 구해준 사람이니까 우리가 보증을 서 겠네"라며 안심시켰다.

그러나 경찰이 총을 쏘며 경찰서로 진입하자 박상희는 경찰서 인근 논두렁으로 몸을 숨겼다.

그 순간 서장실로 밀려든 경찰관들은 박상희를 '좌익 폭도'로 오인하고 그를 향해 집중사격을 가했다. 주변 사람들이 모포를 들고 황급히 뛰어가 보니 박상희의 가슴과 배에서 피가 솟아나고 있었다.

박상희의 장례는 3일장으로 치러졌다.

평소 그의 명망을 생각하면 문상객이 줄을 이을 법도 했지만, 그가 경찰관 총에 맞아 죽은 탓에 문상 오기를 꺼린 사람들이 많아 장례식은 쓸쓸한 가운데 치러졌다.

육사에서 훈련 중이던 박정희는 형의 피살 소식을 접했으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고, 그 며칠 뒤 조용히 다녀갔다고 한다.

박정희는 대통령 시절 한 측근에게 "형이 피살된 사정을 알아보려고 장교 복장으로 고향에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숙군 때 김창룡으로부터 그 점을 추궁당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평소 가장 따르고 존경했던 형 박상희의 죽음은 박정희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또 이 일로 박정희는 형을 죽인 경찰과 그 배후인 미군에 대해 분노와 증오심을 품게 되었고, 또 반체제적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춘천 8연대 - 육사 근무 시절 좌익 군인들과의 교류

1946년 말 육사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한 박정희가 처음 배치받은 곳은 춘천 8연대(연대장 원용덕 대령)였다. 그런데 이곳 8연대는 당시 '좌익 소굴'이라고 불릴 정도로 좌익 군인이 많았다.

박정희와 신경군관학교 2기 동기생인 이상진(8연대 부연대장) 소령은 연대 내 총책이었는데 박정희는 이 이상진과 자주 어울리면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박상희의 친구이자 당시 남로당 군사부 총책이었던 이재복이 박정희에게 접근해 남로당 가입을 권유한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8연대에서 9개월간 근무한 박정희는 중위를 거치지 않고 대위로 승진해 그해(1947년) 9월 27일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제1중대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육사에는 좌익 군인이 더 많았다.

제1중대 2구대장 황택림 중위, 제2중대장 강창선 대위, 제2중대 2구대장 김학림 대위 등이 그들인데 모두 박정희와 친한 사이였다.

김학림은 3기 때부터, 강창선은 4기 때부터 육사에서 생도들을 대상으로 포섭활동을 벌였는데 '여순사건'에 가담한 홍순석과 김지회, 동해안 일대의 좌익 총책 강문영 등이 모두 3기생 출신이었다.

 육사 제1중대장 시절의 박정희 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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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정무관으로 근무했던 그레고리 핸더슨이 63년 초에 작성한 문건에 따르면, 남로당 조지부장 이중업(李重業)이 군부 내 인사들을 '접촉'하면서 박정희를 만난 것으로 나와 있다.
핸더슨은 이 문건에서 이중업이 박정희를 '접촉'한 시기를 박정희가 중국서 귀국한 1946년 5월 직후로 보고 있으며, 그 후 박정희는 춘천 8연대 근무 종료시점인 1946년 12월부터 1947년 2월 사이에 육사 제1중대장으로 근무하면서 사관생도들을 포섭하는데 열중했던 것 같다고 기록하고 있다. (3기생은 47년 3, 4월에 졸업함)

그 무렵 박정희 주변에는 좌익성향의 일본 육사 및 만주군관학교 선후배들이 많았다. 일본 육사 출신으로는 오일균(일본육사 61기), 김종석(56기), 조병건(60기), 김학림(60기) 등,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는 최남근(봉천 6기), 이상진(신경 2기), 이병주(신경 2기) 등이 그들이었는데 대개 숙군 때 처형되었다.

 

친형 박상희의 죽음으로 이미 '왼쪽'으로 기울어 있던 그를 공산당 조직으로 이끈 것은 친형 친구들(이재복과 황태성)과 만군·일본군 출신 좌익 인맥이었다. 급기야 박정희는 1948년 11월 특무대에 체포됐고, 군사재판에 회부돼 중형을 선고받았다.


현역 언론인 시절 박정희의 삶을 다방면으로 취재했던 조갑제(조갑제닷컴 대표)씨는 박정희의 전반부를 다룬 <박정희-불만과 불운의 세월>에서 "박정희가 남로당에 들어가게 된 데는 그의 성격에서도 찾을 수 있다"며 그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대구사범 재학 시절, 문경보통학교 교사 시절, 만군 장교 시절, 그리고 해방 뒤인 청년장교 시절에 걸쳐 일관되게 발견되는 박정희의 성격은 현실에의 불만, 기성질서에의 반항, 외세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사회에 대한 개혁의지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한 박정희에게 남로당은 하나의 유혹이었다. 진보적 성향, 독립운동의 전통, 그리고 반외세를 상징하고 있던 남로당에 들어간 것은 박정희의 사상적 표현이라기보다는 그의 기질에 맞는 선택이었던 것 같다."

정운현(jwh59) 2012.06.18 19:28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진실의 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백선엽, 5·16 때 박정희 사상 의심했다?

[역사 에세이 54] 5·16 쿠데타 직후 미국대사에게 '사상 검증' 권고 문건 발굴

 

이승만 정권 시절 육군참모총장을 지냈으며 군 원로로 불리는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 5·16 직후 미국 대사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당시 최고회의 의장) 등 쿠데타 주도세력 일부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뒷조사를 해봐야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예상된다.

백 장군은 박 전 대통령이 좌익에 연루돼 재판을 받을 때 구명해준 '은인'으로 알려져 온 인물이다.

재미 탐사전문 블로거인 안치용씨는 3일 미 국무부의 비밀전문을 한 통 공개했다.

이 문건은 5·16쿠데타 발생 8일 뒤인 1961년 5월 24일 작성된 것으로, 작성 주체는 중화민국 주재 미국대사 에버렛 드럼라이트였다.

2쪽 짜리의 이 비밀전문은 드럼라이트 대사가 하루 전(5월 23일) 중화민국 주재 백선엽 한국대사를 만나 대화를 나눈 기록이다. 1960년 5월 31일 예편한 백 장군은 한 달 뒤인 그 해 7월 주 중화민국 대사로 부임해 이듬해 7월까지 근무했다.

 5.16 직후 중화민국 주재 미국대사가 백선엽 대사를 만나 대화한 내용을 본국에 보고한 '비밀전문'의 첫 장
ⓒ 재미 안치용 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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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쿠데타 직후 미국은 친미성향의 장면 정부를 무너뜨린 박정희 소장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 박정희 소장은 군부 내에서 두각을 나타낼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이에 미국 정부는 재외공관에 5·16 쿠데타의 지도자인 박정희 장군이 누구인지 파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드럼라이트 미국대사가 백선엽을 만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백선엽은 박정희의 군 선배여서 박정희를 잘 알고 있는 인물로 알려졌던 것 같다. 

두 사람 중에서 나이는 백선엽(1920년생)이 박정희보다 세 살 아래이나 경력 면에서 둘은 공통점이 아주 많았다. 우선 두 사람은 모두 보통학교(초등학교) 교사 출신이다.

평남 강서 출신인 백선엽은 평양사범학교를, 경북 구미출신인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했다.

두 사람은 사범학교를 마치고 교사로 있다가 군에 입문한 것도 똑같다. 백선엽은 만주 봉천(현 심양)에 있던 봉천군관학교 9기로, 박정희는 신경(현 장춘)에 있던 신경군관학교 2기로 입교했다.

백선엽의 '봉천 9기'는 박정희의 1기 선배인 '신경 1기'와 같은 셈인데, 나이가 적은 백선엽이 박정희보다 군관학교 입교가 빠른 데는 이유가 있다.

박정희는 사범학교 졸업 후 '의무복무기간'을 다 마치고 입교한 반면 백선엽은 의무복무 도중에 입교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총독부에서 이를 문제 삼자 그때 백선엽을 도와준 사람은 만주 군의학교 출신의 군의장교 원용덕이었다. 원용덕은 이승만 정권 시절 '정치군인 제1호'로 불린 사람이다.  

백-박 두 사람 모두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박정희는 본과 2년은 일본 육사를 다님) 둘 다 만주군에서 복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박정희는 만주군 보병8단에서 단장 부관으로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백선엽은 자무쓰(佳木斯)부대를 거쳐 '간도특설대'에 배속돼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당시 두 사람의 계급은 모두 만주군 육군 중위였는데,

이때의 경력으로 두 사람은 모두 '친일군인'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한국군에서도 출발은 백선엽이 빨랐다.

월남 후 1945년 12월 5일 설립된 군사영어학교(군영) 1기생으로 입교한 백선엽은 이듬해 2월 26일에 임관하여 국방경비대 육군 부위(중위)가 되었다.

반면 박정희는 일제 패망 후 북경으로 나와 '해방 후 광복군'에 잠시 몸담았다가 1946년 5월 귀국했다.

고향에서 넉 달간 휴식을 취한 박정희는 그 해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2기생으로 입교하여 단기과정을 마치고 1946년 12월 졸업, 소위로 임관했다.

박정희가 한국군 소위로 임관할 무렵 백선엽은 국방경비대 5연대장을 맡고 있었다.

그때까지 두 사람은 이렇다 할 만한 인연이 없었으며, 백선엽은 박정희의 군 선배이자 상급자였다.

그러다가 두 사람이 '극적인 조우'를 하게 된 것은 1948년 10월 발생한 '여순사건'이 계기였다. 당시 군부 내 좌익분자 척결을 위한 숙군(肅軍)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는데, 백선엽은 당시 숙군 최고 책임자인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다.

당시 좌익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던 박정희가 어느 날 백선엽을 찾아와 선처를 호소했다.

백선엽의 회고록 <군과 나>에 그 내용이 나와 있다.

 백선엽 회고록 <군과 나> 표지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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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군 과정에서 중형이 선고된 군인 중 구명된 유일한 케이스가 있었다. 그는 박정희 소령이었다.

방첩대(CIC)의 수사반은 남로당 군사책인 이재복이 육군사관학교에 조직을 침투시켜 일부 중대장을 통해 생도들까지 좌익활동에 가담시킨 사실을 포착했다.

사관학교의 좌익조직 수사에서 용의자의 한 사람으로 체포된 사람은 육사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했고 당시 육본 작전교육국 과장이던 박정희 소령이었다.

숙군 5단계 작업이 완결될 즈음인 49년 초 어느날 방첩대의 김안일 소령이 나에게 "박정희 소령이 국장님을 뵙고 꼭 할 말이 있다고 간청하니 면담을 해주십시오"라고 전했다.

김 소령은 아울러 박정희 소령이 조사과정에서 군내 침투 좌익조직을 수사하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점을 들어 꼭 만나봐 줄 것을 요청했다. 김 소령은 나의 승낙이 있자 곧 박정희 소령을 나에게 데려왔다.

내가 박 소령을 면담한 곳은 정보국장실이었다. 박 소령은 한참을 묵묵히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를 한 번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작업복 차림의 그는 측은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면담 도중 전혀 비굴하지 않고 시종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평소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약간 알고 있었으나 어려운 처지에서도 침착한 그의 태도가 일순 나를 감동시켰다.

"도와드리지요."

참으로 무심결에 이러한 대답이 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약 20분간의 면담을 마치고 그를 돌려보냈다.

당시 숙군작업은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로버츠 군사고문 단장도 간여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정보국 고문관인 리드 대위로 하여금 참모총장 고문관 하우스만 대위와 로버츠 준장에게 박 소령의 구명에 관해 양해를 구하도록 했다.

동시에 이 문제를 육군본부에 넘겨 재심사를 요청했다. 육본은 채병덕 총장에 의해 형 집행정지 조치가 취해졌고, 이에 불명예 제대시키는 선에서 일이 마무리됐다.

나는 정보국 김점곤 소령과 유양수 대위에게 얘기해 군인 신분이 박탈된 박정희 소령을 문관으로 정보부에 근무토록 배려했다.

(중략) 58년 그의 이름이 소장 진급 대상자 명단에 끼여 경무대에 올려졌을 때 당시 참모총장이던 나에게 경무대로부터 연락이 왔다.

곽영주 경무관(당시 대통령 경호담당)은 "박 장군의 신원조회 결과 과거 좌익활동을 했다는 기록이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나는 "박 장군에 대해서는 내가 보증한다"고 회신했다. 그는 무난히 소장에 진급했다."

여러 증언과 문건을 통해 볼 때 박정희는 남로당에 가입해 좌익으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김창룡의 특무대에 끌려가 모진 고문도 받았으며, 군사재판에 회부돼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2심격인 고등군법회의에서 그는 '징역15년'으로 감형과 동시에 형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백선엽의 증언대로 중형이 선고된 피의자 가운데 구명된 케이스로는 박정희가 유일하다. 그를 구명한 사람은 백선엽을 비롯해 정일권, 채병덕, 원용덕, 이응준 등 만주군 및 일본군 선배들이었다.

이후 박정희는 백선엽의 '배려'로 잠시 육본 정보국에서 문관으로 근무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군에 복귀했고, 좌익 전력에도 불구하고 이후 승승장구했다.

박정희는 1953년 11월 준장으로 승진, 장군이 되었으며 2년 뒤 55년 7월 5사단장으로 나가면서 '은인' 백선엽을 다시 만났다.

당시 백선엽은 육참총장을 마치고 1군사령관을 맡고 있었는데, 5사단이 1군 예하에 있었다. 그 해 '탄신 80회'를 맞은 이승만 대통령이 전국 시찰을 하면서 5사단에도 들러 박정희 사단장과 악수를 나누기도 했다.

▲ 박정희와 백선엽 1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백선엽 대장(왼쪽)이 5사단장으로 부임한 박정희 준장(왼쪽 세번째) 등 예하 사단장의 보직신고를 받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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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번에 공개된 비밀전문에 따르면, 백선엽은 숙군 대상이었던 박정희의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로도 박정희의 사상에 대해 '의심'을 떨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5·16 직후 드럼라이트 주중화민국 미국대사와 만난 자리에서 "쿠데타 세력 중 청년장교 일부가 공산주의자일 가능성이 있다"며 "미국이 이들의 백그라운드를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쿠데타에 참가한 청년장교 가운데는 좌익 전력자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백선엽은 쿠데타 주동자인 박정희에 대해서도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는  박정희 소장에 대해 "강직하고 청렴하다는 평판을 얻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비밀리에 공산주의자들과 커넥션을 유지하고 있는지는 판단할 수 없으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미국이 이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말했다.

이 '전문' 대로라면 백선엽은 1961년 당시에도 박정희의 사상에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전문'에 나타난 박정희 등과 관련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박정희는 여순반란사건 때 공산주의자 간첩단에 중간수준 가담사실 밝혀졌다'
'박정희가 어떻게 육군에 복직했는지 자세히 모른다'
'박정희는 좌익과 공산주의자들의 온상인 대구 출신이다'
'박정희는 강직하고 청렴하다는 평판을 얻고 있다'
'박정희가 비밀리에 공산주의자들과 커넥션을 유지하고 있는지 판단할 수 없으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미국이 염두에 둬야 한다'
'쿠데타 가담 젊은 장교 중 일부는 공산주의자들과 연관됐을 수 있으며 미국은 그들의 백그라운드를 조심스럽게 조사해야 한다' 

백선엽은 이날 미국대사에게 자신이 쿠데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신문에 보도된 정도로 제한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자신이 박정희에 대해 아는 것은 "의례적인 것일 뿐"이라며 박정희는 '여순사건' 때 '중간 수준(MIDDLE-LEVEL)'으로 가담했으며,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린 대구 출신(경북 구미 출신)이라는 점을 언급했다. 특히 자신은 박정희의 재판을 관할한 군법회의의 멤버가 아니었다며 박정희가 어떻게 한국 육군에 복직했는지 상세한 내용은 잘 모르며, 그저 박정희의 경력 정도만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백선엽이 미국대사에게 건넨 말 중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하나 있다.

'박정희가 어떻게 육군에 복직했는지 자세히 모른다'고 한 대목이다. 왜냐하면 박정희가 풀려난 후 육본 정보국에 문관으로 근무하도록 배려하고, 또 한국전쟁 발발 후 군에 복귀토록 주선한 사람이 바로 백선엽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평소 백선엽의 주장대로라면 박정희의 좌익 혐의와 숙군 재판과정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임에도 5·16 당시 미국 측에는 그런 사실을 자세히 모른다고 한 것은 왜일까? 

이와 관련해 해당 문건을 발굴, 공개한 안치용씨는 "백선엽 장군이 현재 생존해 있기 때문에 백 장군은 과연 1949년에 박정희를 석방한 것이 잘못된 것인지, 1961년에도 박정희의 사상에 진실로 의심스러운 점이 있었는지, 아니면 박정희가 다시 한 번 좌익으로 몰릴 가능성이 보이자 자신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미국 측에 박정희에 대한 거짓 주장을 하는 기회주의적 행동을 했는지, 도대체 무엇이 진실인지를 국민 앞에 낱낱이 밝혀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박정희와 장도영 5.16 후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왼쪽)과 박정희 부의장이 계엄사무소 앞에서 발표를 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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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백선엽은 문건에서 박정희 일파가 주도한 군부정권에 대한 평가와 당시 군부 거물들에 대한 인물평도 곁들였다.

그는 "군사정부는 쉽게 권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정치적, 개인적 자유는 앞으로 오랜 기간 동안 심각하게 축소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며 "미국정부가 방향을 바꾸게 하지 않거나 혁명적 모멘텀을 중단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는 견해를 표명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쿠데타 지도자가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쿠데타 세력 내에서 내분이 발생, 서로 싸우게 된다면 심각한 위험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하고 "문민정부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군사혁명을 통제할 문민지도자는 없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에 대해 미국대사는 마지막 부분에 코멘트를 통해 "장면 정부가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문제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강력한 정부의 출범을 반기기는 하지만 혹시라도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을) 전복할 길을 열어주게 될까봐 우려하고 있다"고 썼다. 

인물평과 관련해 백선엽은 최고회의 의장을 맡아 쿠데타 세력의 '얼굴마담' 노릇을 한 장도영 참모총장에 대해 "영리하고 능력도 있지만 때때로 용기와 결단력이 부족하다"고 평가하고는 "장도영이 혁명을 이끌거나 컨트롤하거나 또 쿠데타 그룹을 장악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밝혔다.

또 독립운동가 출신의 김홍일 장군에 대해서는 "애국적이고 철저한 공산주의자이기는 하지만 지력과 통찰력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는데 드럼라이트 주중화민국 미국대사도 이같은 평가에 동의했다고 전문은 기록했다.


 

정운현(jwh59) 2013.01.06 16:30l 최종 업데이트 13.01.08 10:50
 
 

[백승종의 역설] 뻔뻔한 박정희

[한겨레] 1948년 10월 국방부는 여수순천사건에 관련된 장교 및 사병 1천여명을 검거하였다. 조사는 3개월 이상 지속되었고, 1949년 2월8일부터 군법회의가 열렸다.

그해 2월13일까지 이어진 군사재판에서 총 73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제15연대장 최남근에게 총살형이 선고된 것을 필두로, 김학휴, 조병건, 박정희, 백명종 등 4명에게는 무기징역형이, 그밖에는 15년부터 5년까지의 징역형이 선고되었다.(<경향신문> 1949. 2. 17.) 그러나 중죄인 박정희는 무사하였다.

직속상관인 육군본부 정보국장 장도영이 정일권, 백선엽 등 만주군 출신들과 작당하여 구명운동을 벌였다.

박정희 역시 만주군 출신의 수사관 김창룡에게 옛 동지들, 즉 군 내부에서 암약하던 남로당원의 명부를 넘겨주고 목숨을 구걸하였다.

피값으로 되살아난 박정희는 5·16쿠데타를 일으켰다(1961). 군복을 벗은 그는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었다(1963). 경쟁자인 윤보선이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좌시하지 않았다.

그러자 박정희는 자신이 이끄는 ‘국가재건최고회의’와 ‘민주공화당’의 이름으로 윤보선을 고소했다. 있지도 않은 허위사실을 윤보선이 유포했다는 것이다.(<동아일보> 1963. 9. 26.) 박정희와 그 휘하세력인 민주공화당 의장 윤치영, 공보부 장관 임성희, 민주공화당 선전부장 서인석, 정치군인 원용덕 등은 여순사건 또는 남로당과 관련해 박정희가 형을 선고받은 적이 없었노라는 거짓말을 일삼았다.

특히 윤치영과 서인석은 박정희 찬양으로 도배된 <민주공화보>를 작성해 전국의 가가호호에 뿌렸다.

박정희 추종세력은 지금까지도 역사적 진실을 외면한다. ‘그분이 남로당의 중책을 맡았던 것처럼 이름이 올라 있었으나, 당원으로서 활동은 없었다.

인간관계상 최남근 등과 친하게 지내다가 그들의 포섭공작에 휘말려 술 몇 잔 얻어먹은 것뿐이다.’ 박정희는 이 거짓말쟁이들 앞에 ‘반인반신’의 성인이 되어 황금빛 동상으로 서 있다.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백승종의 역설] 배신자 박정희

[한겨레] 1963년 3월 박정희 일파는 장도영 예비역 중장 등 13명에게 ‘반혁명’ 혐의를 씌워 중형에 처했다.

 장도영이 누구인가. 박정희에게 그는 생명의 은인이었다. 남로당 프락치 박정희를 죽음에서 구하는 데 일조했고, 현역에 복귀시키는 데도 앞장섰던 그였다.

또한 그는 박정희의 쿠데타 음모가 사전에 발각되자, 이를 극구 변명해 주어 5·16쿠데타를 성사시켰다.

미국은 쿠데타 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하고자 하였는데, 이를 만류한 사람 역시 그였다. 그럼에도 박정희는 장도영을 숙청하였다.

처음에는 그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임명하는 호들갑을 떨며 우대하였다. ‘군사혁명 선포문’조차 그의 명의를 빌렸다. 하지만 이것은 미국과 국군 내부의 저항을 줄이기 위한 박정희의 기만술책이었다.

상대가 설사 자신의 은인이라 해도 박정희는 권력을 나눌 뜻이 전무했다. 그리하여 장도영에게 두 가지 죄목을 옭아맸다.

첫째, 쿠데타 전야 한강다리에 헌병 50명을 파견해 혁명군의 출동을 저지했다고 몰아붙였다. 둘째,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이 정한 최고회의 의장의 겸직 금지 조항을 반대한 것도 민족 배신 행위로 매도하였다.

결국 장도영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가 형 집행 면제를 받고 미국으로 떠나갔다.

박정희는 일생 동안 배신을 일삼았다.

‘천황’에게 혈서까지 쓰고 일본군 장교가 되었던 그. 일제가 패망하자 잽싸게 광복군에 몸을 맡겼다. 곧 국군장교로 변신하더니 남로당에 가입해 국가전복을 꾀했다. 그 사실이 들통나서 위기가 닥치자 이른바 명단을 팔아먹었다. 결국은 은인까지 해치웠다.

일제와 히틀러를 모방한 군국주의자 박정희는 권력욕의 화신이었다. 무소불위에 가까웠던 그의 권력은 기실 계엄령의 총부리와 밀실의 고문에서 나왔다.

집권 18년 동안 목숨을 잃은 시민들도 많았다. 하건만 그의 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이라고 떠벌이며 독재자를 우상화하는 작태가 여전히 되풀이된다. 박정희와 그 추종자들은 시민사회의 배신자다.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노회찬 "원조 종북은 남로당 핵심당원 박정희 장군"

 
아주경제 김유경 기자= 통합진보당 노회찬 의원이 정치권의 종북(從北) 논란에 대해 "원조 종북이라면 박정희 장군"이라고 지적했다.

노 의원은 11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나와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의 부친인 박 전 장군이 남로당 핵심당원으로 가입한 죄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까지 받고, 1949년에 군에서 파면된 사람 아니냐"며 이같이 말했다.

2012-06-11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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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뜻(유신)에 반대하는 자들은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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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타깝다.결국 앞의 기록(글)에서 본바와 같이 원래

공산당=좌익=빨갱이=항일투사 아니던가?

출처 : 5.18 민주화운동 - 80518
글쓴이 : 희래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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