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8_黃薔(李相遠)

[위문편지와 군사우편]

忍齋 黃薔 李相遠 2014. 5. 5. 15:24
반응형

내가 사는 근처에서 대학을 다니던 조카가 미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때에 위문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두 장이나 왔었다. 주위 일가친척에게 훈련소 주소도 알리고 위문편지 쓰기를 독려했지만, 이 작은 아빠 외에는 편지를 받지 못했다 한다. 30여 년 전 한국에서의 나의 3년간의 군대 생활과 그때 받았던 유일한 위문편지가 생각난다.

논산훈련소의 6주간 훈련을 마치고 배치된 곳은 후방의 한 전투공병대대였다. 하지만 토요일 오전 일과가 끝나면 태백공사 사무관이라는 자들이 지프를 몰고 와 솔개 병아리 체가듯 데려가 녹화사업(?)을 실시했다. 수많은 살아온 삶에 대한 반성문(?)과 그들의 회유는 집요했다. 사복 입고 학교로 돌아가 '빨갱이 한상열 (통일 운동 하시는 한상열 목사님이 전북농대 선배다) 선배'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며 편하게 군대 생활을 하라는 둥. 

자대에서는 보안대 백으로 매주 졸병이 외박 외출을 한다고 오밤중 빰빠라에 지옥이 따로 없었고, 사무관들의 제안을 거부한 결과는 참혹했다. 무르팍이 엉덩이만큼 부어 자대배치 6주 만에 대구통합병원 정형외과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었다. 몸 망가지는 걱정은 뒤로하고 보안대의 사슬에서 벋어나는 기쁨도 잠시. 병원에도 보안대는 있었다. 작업 중 다쳤다고 말하라는 교육도 받아가며 시달리고 있었다.

사랑을 언약하며 앞날을 다짐하던 여인은 한 번만 면회라도 와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뒤로 한 체 연락을 두절해 버렸다. 곡절을 모르는 나의 작은형은 '남들 다 가는 군대를 꾀병을 피어 통합병원에 후송되었다'고 소문을 냈다. 산다는 게 이리도 너절한가를 절감하던 시절이었다. 몸도 망가지니 마음도 망가져서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이기 시작했다. 살인마 전두환의 잔혹한 고문과 구타 속에서도 살아난 불사조인데, 삶의 끈을 놓아 버리기 일순간이란 생각이 들던 때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한 통의 위문편지가 날아들었다.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로, 제주도 경찰청 보안과장 조기준 총경의 사모님으로 사는 두 살위 누나가 뜬금없이 보내온 특별한 내용 없는 말 그대로 위문편지였다. 이런저런 사사로운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결론은 '주위의 날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기억하고 몸조리 잘하고 무사히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누나 본인도 기억 못 하는 그 위문편지가 그때 '삶의 좌절'에서 벗어나 마음을 고쳐먹고 지금의 나를 있도록 만들었다는 고백을 한다. 나의 조카가 그런 처지도 아니고 즐거운 마음으로 미국시민권을 받아가며 콧노래를 부르며 간 행복과 희열의 군대이긴 하지만 내가 보낸 위문편지가 조카의 삶 속에 진하게 작용하여 줄 것이란 믿음을 조카의 답장에서 느껴본다.

비록 개발 소발 알아보기 힘들게 적어 보낸 답장의 군사우편이긴 하지만 말이다.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