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 1일자 미주 한국일보 신용일 기자가 작성한 기사를 올린다.]
미 입국심사 기록문서 발견
고종황제 특사 이상설. 이위종 열사
본보 '1892~1924년' 외국인 입국심사기록 자료 입수
입력일자: 2002-10-01 (화)
1905년 11월30일 을사 5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에 일본통감부가 설치되자 일본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 독립운동가 이상설(사진·1870∼1917년), 이위종(1887∼?) 열사의 미 입국심사 기록문서<사진>가 처음으로 발견됐다.
본보가 외국인들의 미국 이민 초창기 이민 및 방문자 입국 심사소 였던 뉴욕 엘리스 아일랜드의 '1892년∼1924년' 외국인 입국심사기록 자료를 검토한 결과, 고종(1852∼1919년) 황제의 밀사로 1907년 7월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이상설·이위종 열사가 현지에서 숨진 이준(1859∼1907년) 열사의 장례식을 치룬 뒤 영국을 경유해 배로 같은 해 8월1일 뉴욕에 도착한 기록을 찾아냈다.
뉴욕 엘리스 아일랜드의 '아메리칸 가족 이민 역사 센터'가 보관하고 있는 미국 정부의 이민기록에 따르면 당시 39, 23세였던 이상설, 이위종 열사는 1907년 7월24일 영국 사우스햄턴항을 떠난 화물 및 여객선 '매제스틱호'에 탑승, 8월1일 뉴욕항에 도착했으며 엘리스 아일랜드에서 미 입국 심사를 받았다.
당시 미국 이민법에 따라 엘리스 아일랜드에 입항하는 배의 선장이 작성, 이민 심사관에게 제출한 '미국 이민 심사관을 위한 외국인 승객 명부'를 토대로 이뤄지는 입국심사에서 심사관은 이상설·이위종 열사의 방미 목적을 '황제의 특사'(Imperial Mission)로 최종 목적지를 워싱턴DC로 기록했다.
입국심사시 신장, 피부색, 눈·머리색깔 등 신체사항과 건강상태, 사회 및 정치적 사상 등 29개 질문에 답변하는 절차를 밟은 두 열사는 입국시 각각 50달러를 소지하고 있었으며 이위종 열사 경우 1896년에 워싱턴DC를 방문했던 사실을 보고한 것으로 드러났다.<■자료: '엘리스 아일랜드 아메리칸 가족역사센터'>
이위종 열사는 1882년 조미우호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1896년 7월 주미 공사로 임명된 부친(이범진, 1852∼1910년)을 따라 함께 미국에 입국했던 사실을 입국 심사관에게 신고한 것으로 보인다.
심사관은 두 사람을 공무수행 방문으로 인정, 다른 입국자들과는 달리 기록부에 '비 이민자'(Non Immigrant)라는 도장을 찍고 입국을 허용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외에도 '아메리칸 가족 이민 역사센터'가 보관하고 있는 외국인 2,200만명의 입국심사 기록은 이상설·이위종 열사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지원했던 윤평구(당시 29세), 제임스 송(당시 26세·Lee, Paul Pang), 폴 리(당시 22세·Song, James H.) 등이 영국발 여객선을 타고 1908년 2월27일 입국한 사실도 알리고 있다.
국적을 '꼬레아'(Corea)로 밝힌 이들은 학생신분으로 뉴욕 브루클린 소재 '한국 대표부'(Korean Mission) 방문하기 위해 왔다고 입국 목적을 적고 있다.
이외에 뉴욕에 도착, 뉴저지주 프린스턴에 있는 친구 이승만(초대 대통령)을 방문하러 독일서 왔다며 1913년 2월24일 입국심사를 받은 학생 Kim, Tuk(당시 19세) 등이 포함돼 있다.
한편 엘리스 아일랜드 입국심사 기록에는 수십명에 달하는 한인들이 등록돼 있으나 대다수가 국적을 일본, 중국, 아시안으로 표기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상설 1905년 미 입국심사 기록문서
<신용일 기자>
yishi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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