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6.25가 한창에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1.4 후퇴가 시작되었던 시점이었습니다. 한국군과 UN군이 다시금 남으로 밀리기 시작하니 간신히 위로 올라갔던 이승만 정부는 똥줄이 타기 시작했습니다. 밀리는 것은 밀리는건데 국군 인적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어찌 해보기도 전에 남으로 또 밀려내려가 전쟁초기처럼 서울의 장정들이 인민의용군에 편입되어 되려 적군이 되어버리는 사태가 생길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국방부장관 신성모의 지휘하에 이 병력을 국군 자원으로 돌려두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군경과 공무원을 제외하고 17세 부터 40세까지 장정들을 제 2 국민병에 편입시키고, 그 중에서 학생을 제외한 나머지를 "자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시킨 다음, 이 병력을 국방부장관 지휘하에 육군으로 활용한다는 법령이 50년 12월에 공포됩니다. 사실 여기까지는 전시에서 별 문제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헌데 이 다음부터 삽질이 시작되었어요.
<나름 국가와 민족을 생각해 모였습니다>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이 국민방위군 사령관에 대한청년단 단장인 김윤근을 준장으로 임관시키고 지휘관으로 앉혀 버립니다. 대한청년단은 이승만 친위 우익단체 였었는데 (이승만이 총재) 자원자들 다수가 이 대한청년단 소속이었죠. 헌데 아무런 군사적 소양이 없는 자를 무려 50만 대군 (아직 예비라 할지라도)을 지휘하는 자리에 올렸으니 시작부터 삐꺽거릴 수 밖에 없었죠. 이미 이전 대한청년단이 전국 200만 회원을 가진 조직체였으니 50만 정도라면 쉬울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민간 조직하고 군사 조직은 그 특성이 달라도 너무 다른데 당시 정부의 삽질 인사를 보여주는 상황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총재 이승만 박사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우리는 피와 열과 힘을 뭉치어 남북통일을 지급(至急)히 완수하여 대한민국의 국위를 천하에 선양하기를 맹세한다. 민족과 국가를 파괴하려는 공산주의의 도구배(徒狗輩)를 남김없이 말살하여버리기를 맹세한다."
- 대한청년단 선언문 -
어쨌거나 시간이라도 있으면 나름대로 실패를 경험하면서 조직을 다져 나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전시 상황은 그런 여유를 주지 않았습니다. 중공군의 공세가 격해지면서 서울이 위태로워 지자 정부와 조직들을 모두 다시 후퇴시킬 수 밖에 없었고 국민방위군 또한 이동을 해야만 했죠. 헌데 정식 편제된 군대도 아니고 당시 군대가 여유가 있을리도 없으니 이 국민방위군은 "걸어서" 대구와 부산 등지로 이동해야만 했습니다.
이들은 군번도, 군복도, 장비도, 식량도, 지급되지 않은 상태에서 50만이 450km 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이동해야 했고 숙박은 민가나 학교 건물 등지에서 2인당 1장의 거적으로 해결해야 했으며 하루 식사는 주먹밥 2개를 주는데 아침과 점심에 딱 주먹만한 맨 주먹밥을 주었습니다. 문제는 이때가 한겨울이라는 거였고 이런 상황에서 건장한 청년들이 다 죽어가는 상황이 되는건 빠르냐 늦느냐의 차이 뿐이었습니다.
거기다 이들 국민방위군은 군대인 만큼 정식 훈련을 받아야 했는데 이들을 교육시킬 기간 요원들은 이들을 뻉뺑이 돌리기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서울에서 김해로, 김해에서 진주로, 진주에서 마산으로 각종 이유들을 (수용 공간이 부족하다, 교육 인원이 부족하다, 장비가 없어 열악하다 등등) 붙여 돌렸던 것입니다. 그냥 내려가도 힘든 길을 뺑뻉이 돌려지며 굶어가며 걸어서 움직였으니 50만 인원 중에서 무려 100일동안 5만명의 자원병이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굶거나 얼어 죽었던 것이었습니다.
<삥땅의 본좌들. 국민방위군 간부 사진>
이런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었는데 아무리 이승만 정부가 막장이기로서니 아무런 지급도 없이 이들을 돌렸을까요? 그건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들에 대한 기본적인 지원금은 나왔었고 교육비가 나왔지만 "간부들이 빼돌려 술파티"를 벌이는데 쓰고, 자기집 마누라 입속에 넣어버리고, 자기 월급 대신에 착복하고... 한마디로 비리로 인해 작살이 난 상황이라는 것이었죠. 물론 국민방위군에 대한 기본적인 급여 비용등이 책정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전시 상황에 지원병이라는 것을 감안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이 국민방위군 간부들은 도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짓을 하고 있었던거죠.
거기다 돈 좀 있으면 이 국민방위군 윗선이나 군 상부에 뇌물좀 찔러 넣으면 이런 상황에서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었고, 이들을 교육할 교육대에서는 이들을 수용했다고 뻥치고 이들에게 돌아갈 각종 지급품이나 식량등을 삥땅쳤습니다. 이리하여 후일 국회에서 이들이 얼마나 삥땅쳤는가를 살펴보니 인원조작등으로 현금 23억원과, 쌀 5만 2천섬. 국민방위군 부사령관의 삥땅이 3억 1천 가량, 그리고 "당연하게도" 삥땅은 혼자 먹나? 에 의거해 국회쪽으로 1억 가량이 흘러 들어갔습니다. 더 웃기는건 김윤근은 국민방위군 병사들에게 먹이겠다며 "쩰리공장" 을 짓는다고 돈을 타내고, 정부는 동계피복비 50만벌을 구할 수도 없는데 책정해서 뭐하냐며 삭제해 버리고... OTL
<사진 오른쪽 마이크 잡고 있는 국방장관 신성모>
이 당시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해 야당 의원들이 비상대책위를 세우고 진상 조사에 나서니 국민방위군 김윤근 등은 이들을 두고 불순분자와 제5열의 책동 이라며 비난했습니다. (제5열은 스파이를 의미합니다) 거기다 국방장관 신성모는 이 문제가 불거지면 당연하게도 청년단의 총재로 되어 있는 이승만에게도 직격탄이 갈 것을 염려해 사건을 은폐하려고 하지만 집요한 사건 추적과 여론 악화로 인해 결국 사건의 주모자 김윤근등 6명에게 군사법원에서 사형이 내려지고 51년 8월 12일 공개총살형에 처했습니다. 그리고 51년 4월 30일 국민방위군은 이미 해체되었고요.
<처형당하는 국민방위군 간부들>
사실 이 뒤에도 이들을 급히 처형한 것은 이승만 정부에 들어간 비리자금등을 감추려고 한거다 라는 식의 이야기들이 많습니다만 어쨌거나 정확하게 증거가 나와 밝혀진 것은 여기까지. 아무리 전시 상황이라지만 자국민을, 그것도 자원병을, 비리로 인해, 단 몇달만에 몇만을, 아무 활용도 못하고, 사리지게 해 버린 희대의 블랙코메디자 당시 정부의 총체적 난국인 사건이었지요.
PS : 재미있는(?) 추가 이야기.
1. 당시 국민방위군에게 지급된 식량은 하루 4홉, 빨갱이 포로들에게 지급된 식량은 하루 5홉 5작.
2. 사령관 김윤근과 부사령관 윤익헌의 전직은 씨름꾼, 군사교육? 그런게 뭔가요 우걱우걱.
3. 김윤근은 국방장관 신성모의 사위.
4. 식량지급 없는 자원병들은 어떻게? ... 당연히 약탈. 당시 마을에서는 국민방위군들이 밥 얻어 먹으러 몰려 다니는데 멀리서도 이들을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아냐면 오기도 전에 바람에 구린내가 퍼져 나왔다고 하는군요. 이건 아르마다의 노젓는 노예병들 수준입니다.
5. 더 웃기는건? 이렇게 쳐들어가서 얻어먹으면 배 두들기며 잘 잤을까요? 아뇨... 못 먹은 위장에 갑자기 음식이 들어가니 장이 꼬여 죽었습니다.
6. 얼마나 열악하면 한겨울에 장티푸스가 유행해서 막사에 들어가면 설사똥 냄새가 가득했다고 함.
[출처: http://idealist.egloos.com/53275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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