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펌] 남편 고승덕 변호사와의 불화설에 대한 박유아 의 심경고백/1999

忍齋 黃薔 李相遠 2014. 6. 1.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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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고승덕 변호사와의 불화설에 대한 박유아 의 심경고백

"이젠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라는 그늘에서 벗어나
나, 박유아로 살 거예요"

□글·변숙(여성동아 뉴욕 통신원)


박유아씨는 지난 6월23일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런데 오프닝 리셉션을 열자마자 곧장 뉴욕으로 돌아갔다. 결국 서울에서 만나지 못하고 뉴욕의 스튜디오로 찾아갔다.

박유아씨는 남매를 데리고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뉴저지 포트리의 아담한 이층집에서 살고 있다. 그리나 작업실은 복잡한 맨해튼에서도 가장 시끄럽고 분주한 차이나타운의 허름한 건물 2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잠긴 스튜디오 안에서 “후이짓?”하는 영어가 튀어나왔다.

그는 서른여덟의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앳되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여긴 에어컨도 없어요.”

핑크색 티셔츠와 짧은 팬츠차림으로 항아리 같은 그릇을 엎어놓고 종이찰흙 같은 허연 펄프를 붙이고 있는 중이었다.

“하던 작업마저 할게요. 안 그러면 얼룩이 져서…. 그런데, 왜 절 만나려고요?”

번잡스러운 서울을 피해 급히 돌아왔는데 뉴욕에서까지 누군가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하자고 하지 않을까 하는 경계심을 쾌활한 웃음으로 누르는 듯 보였다.

전시회도 끝나기 전에 뉴욕으로 돌아왔는데, 무슨 일이 있나요? 

“누구를 붙잡고, 설명하고 이해시키고 하겠어요? 사람 만나자면 한정이 없고, 애들 서머 스쿨도 6월28일부터 시작했고 해서 서둘러 왔어요.”

남편 고승덕 변호사 출마 파동에 대해 소문이 많았는데, 출마의사를 접게 된 진짜 이유는 뭐예요? 

“97년 인천 보궐선거때 국민회의로 출마할 뻔한 일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땐 출마를 적극적으로 심각하게 생각한 것 같진 않았어요. 한국 남자들은 궁극적인 목표가 국회의원 하는 것같이 누가 좀 잘 나간다 싶으면 ‘출마해도 되겠다’ 그러잖아요. 국회의원 출마가 성공의 좌표인양 말예요. 하지만 전 처음부터 절대로 안된다고 말렸거든요. 그래서 인천 보궐선거때도 말 나오기가 무섭게 잘랐어요. 도대체 정치하고 싶은 이유를 대라고 했죠. 정치보다 훨씬 좋은 일을 성공적으로 아주 잘 하고 있고, 변호사로서 평판도 좋은데, 좋은 직업을 왜 바꾸려고 하느냐고요. 제가 보기에 애들 아빠는 변호사가 적성에 맞아요.

그런데 이번에는 고변호사가 전화를 해서 말을 들어보니까 생각이 그전하고는 다르더라고요. 정치를 하고자 하는 이유가 확실하더라고요. 그동안 살면서 느낀 게 있다며 삶을 전환해보겠다고 그러더군요. 그 당시 제가 보기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어요. 지금 결과적으로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담은 꼴이 됐지만요. 그 당시에는 ‘이미 내 힘으로는 주워담을 수 없겠구나’하고 생각했어요. 사실 담을 수 있으면 주워 담고 싶었는데…

일이 자신의 뜻하고는 다르게 흘러가니까, 그대로 내버려두면 이상하게 될 것 같은 상황이 됐어요. 고변호사는 나갈 수도, 들어갈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그랬어요. 저는 어떻게 나갈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느냐, 들어갈 수도 있다고, 그리고 내가 보기엔 계속 나가는 것보다는 들어가는 게 덜 다칠 것 같다고요. 그런데 그렇게 이상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사람이란 게 한치 앞의 일을 모르잖아요.”

당시 부친 박태준 총재가 말 잘 듣는 딸에게 남편을 포기시키도록 압력을 가한 것은 아닌가요? 

“아니에요. 우리 아버지는 기본적인 것, 시간을 지킨다든지 약속을 지킨다든지 그런 부분에는 엄하시지만 그 틀만 벗어나지 않으면 다 큰 딸 의사에 맡겨주세요. 그리고 저도 낼 모레면 사십인데 그동안 혹독하게 트레이닝을 시키셨으니까 기본은 돼 있을 거라고 믿으실 거예요.”

고변호사는 내년 총선에 나갈 생각인가요?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저한테는 내년 총선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어요.”

남편이 정치에 나서는 것과 결혼 생활이 어떤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사생활을 완전히 포기해야 돼요. 저는 그것 때문에 정치하는 게 싫다는 거예요. 자기가 가진 능력을 더 많은 사람을 위해서 쓰겠다는 취지는 좋지만 첫째는 정치풍토상 그 능력을 쓸 수 있을지가 문제고, 또 그렇게 쓸 수 있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선 수많은 사람을 짓밟아야 되고, 일단 파워가 있어야잖아요. 아무 힘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능력을 쓸 수 있겠어요. 파워를 갖기 위해서는 누군가 희생돼야 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심하게 희생되는 게 가족이에요.

우리 아버지가 당했던 것처럼 무슨 정치 보복을 당해서 눈에 보이게 핍박을 당하는 것만 희생이 아니라 잘 나가는 정치인이라 하더라도 그 잘 나가는 명성을 지켜주기 위해서는 가족들은 없어져야 하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더 나를 없애란 말이에요. 저는 나라는 존재를 없애는 것에 대해서 피해의식이 있어요. 그리고 나는 나라고 치고, 자식들은 어떻게 하고요.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런 부모 만나게 됐는데,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우리 자식들의 인생은 지켜주고 싶어요.”

아버지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나요? 

“우리 아버지의 의식 속에 가족들은 멀리 있어요. 그런 상황에선 가족들이 소외되거나 자식들은 아버지 사랑을 못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지요.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랑 손잡고 놀이터에 간다든지, 얼굴을 비빈다든지 그렇게 못해봤어요. 큰바위 얼굴같이 우리 아빠는 그러니까 우리 모델이었어요. 다행히 어머니가 현명하게 잘 이끌어주셔서 아버지로부터 아무것도 못 받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을 더 큰 것을 받을 수 있게 했어요.

아버지하고 비교해서 말하면 남편이 기분 나빠할지 모르지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 아버지는 정치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그 사람의 능력이 월등하냐 아니냐를 떠나서 사람마다 가진 성격이고 성향의 문제예요. 우리 아버지는 사람을 몰고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는, 이른바 리더로서 카리스마가 있거든요. 애들 아빠를 말하자면 그 사람은 능수능란한 수완가는 못돼요. 물론 우리 아버지도 수완가는 아닌데, 그것 대신에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어떤 능력을 갖고 계시거든요. 다리가 길어서 성큼 진흙탕물을 건널 수 있는 능력 말예요. 하지만 애들 아빠는 작은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자리까진 가는데, 그 험난한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려워요. 그 험난한 길을 가자면 말도 못하게 다칠 텐데…. 우선 얼마전에 벌어진 일만 봐도 그렇잖아요. 정계에서 자기 뜻을 펴려면 일단 국회의원은 돼야 한단 말예요. 그래야 마이크를 잡고 무슨 말을 하든지, 말을 하다가 혼나든지 할 거 아녜요 그런데 거기까지 가는 데도 그렇게 난리가 났잖아요. 그리고 결국은 좌절이 됐잖아요.”

박유아씨의 그같은 의견에 대해 고변호사는 뭐라고 해요? 

“그 사람 외곬이에요. 무슨 일을 한번 하겠다고 하면 돌아보지 않아요. 성격이 원래 그래요. 정치하겠다고 결심을 한 것도 본인이 수많은 생각을 한 끝에 한 것이기 때문에 결론이 내려진 다음엔 못 바꿔요. 그리고 제가 정치인의 가족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는지 말하면 다른 사람들은 잘 와닿지 않는 것 같아요. 애들 아빠 역시 그렇고, 하지만 전 남들에게 어떻게 들려지든지 상관없이 얘기해요. 어차피 남의 말은 듣는 사람 각자의 필터로 걸러서 듣는 거니까.”

고변호사에 대해 박태준 총재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글쎄요. 아버지는 사람에 대한 코멘트는 거의 없어요. 우리 아버님은 사람을 참 좋아해요. 저도 사람을 참 좋아하거든요. 성격도 그렇고 외모도 그렇고 어머니는 제가 딸들 중에서 아버지를 제일 많이 닮았다고 하세요. 아버지는 다른 사람에 대해 절대로 부정적으로 말씀하시는 법이 없어요. 하다못해 신문지상이나 TV에 나오는, 보통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사람조차 나쁘게 말씀하시는 법이 없어요. 그리고 사위를 자식같이 생각하세요. 언니 시집보내고 어머니가 무척 서운해 하셨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낳지도 않고 아들을 얻었다며 어머닐 위로하셨는데, 저도 결혼하고 보니까 사위들을 정말로 아들들처럼 귀하게 아끼셨어요.”

소문에 의하면 두 사람이 이혼 직전인데 내년 총선을 준비 중인 고변호사가 그때까진 이혼을 미뤄달라고 하는 상황이라던데요? 

“그런 얘긴 한 적 없는데… 저하고는 내년 총선 얘기는 한 적 없어요. 하긴 그때 가서 봐야 알겠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럴 것 같지는 않아요. 이번에 너무 혼이 나서. 그 일이 있고 나서 고변호사가 제가 한 말이 무슨 얘긴지 알겠더라고 하더군요. 건너야 할 강이 너무 많다고, 그리고 너무 섣불리 덤볐던 것 같다고 그런 얘길 했거든요.”

남편과 자주 만나나요? 

“자주는 못 봐요. 전화 통화는 자주 해도.”

언제부터 그런 상태인가요? 

“애들 데리고 뉴욕으로 온 다음부터예요. 작년 2월에 왔으니까 그때부터죠.”

뉴욕에서의 생활은 어때요? 

“서울에선 누구를 위한 일인지도 모른 채 바빴어요. 물론 여기서도 똑같이 바쁘지만 여기서는 아침이 되면 신이 나요. 정말 잘 왔구나 싶어요. 서울선 제가 말이 참 없었어요. 그래서 더 작업에 매달렸던 것 같아요. 주변에선 왜 그렇게 죽기 살기로 하느냐고 하는데 저한텐 종이가 친구고 정신과의사예요. 서울에선 박유아로 살면 안되니까 스튜디오에 가면 작업을 하기 전에 변신을 하느라 두 시간 이상 걸릴 만큼 힘들었어요. 하지만 여기선 그냥 박유아로 살면 되니까 편해요.”

박유아씨는 1984년 이화여대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그해 12월 중매로 고승덕 변호사와 결혼했다. 결혼생활을 하며 대학원을 졸업한 후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에서 1년간 미술사를 공부했다. 1년 만에 고변호사가 뉴욕 컬럼비아대로 옮기는 바람에 다시 뉴욕에 와서 드로잉을 공부했다. 박유아씨는 그때 마침 첫아이를 가져서 학위는 아예 생각도 못했지만 자유롭게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이 참 좋았다고 회상한다.

“결혼이란 게 자신의 모든 개인적 욕심을 접을 수 있는 사랑이 없다면 힘들겠죠. 하지만 남편이 잘 해줬고 좋았어요.”

뉴욕은 현대미술의 중심지인데, 작품활동은 잘 되고 있나요?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어머니의 권유로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동양화를 했던 게 행운이에요. 서양 사람들도 이젠 서양식 해석 방법에 싫증이 나서 동양적인 것을 많이 도입하는데 이런 트렌드까지 맞아 떨어져요.”

주로 뭘 표현하죠? 

“사람이에요. 제가 사람 좋아한다고 말했잖아요. 사람에 자꾸 끌리는데 연민인지… 사람도 자꾸 그리고, 또 속을 그리려다 보니까 그려 놓으면 이게 사람인지 말인지, 자는 건지 춤추는 건지 모르게 간결하게 돼요. 속을 그리다보면 복잡하게 그릴 게 없잖아요. 그리고 평면에서 자꾸 나오고 싶어요. 우리가 사는 공간이 입체잖아요. 저 허연 종이를 발라서 그릇 모양으로 만드는 것도, 사람을 말할 적에 그릇이 크다 작다 그러잖아요. 그동안 미뤄오다가 이번에 서울에서 전시를 했는데, 큰 그릇 작품을 설치했어요. 이왕 사람을 만들려면 간장 종지같이 작은 사람말고 큰 그릇을 만들자고 생각했어요. 이 종이가 다 마른 다음에는 반투명해요. 빛을 받으면 욕심쟁이같이 그 빛을 다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밖으로 나눠 줄 수 있는 ‘큰 사람’을 하나 만든 거예요.”

발상부터 가진 자의 여유에서 비롯된 것 아니냐고 하자 그는 스튜디오가 깨지도록 웃어댔다. 그는 참 잘 웃었다. 그것도 아주 크고 유쾌하게….

“그전에는 저렇게 사람인지 뭔지 모르는 저 판 있죠. 제가 모델을 써서 만든 거예요. 이만한 종이를 많이 놓고 재빨리 붓으로 스케치를 하는데, 우리는 사실대로 묘사하는 교육을 받았잖아요. 그 테크닉을 버려야 되는데, 그건 쌓는 것보다 버리는 게 훨씬 더 힘이 들어요. 이미 받은 교육, 훈련된 테크닉이 이미 무의식에 들어 있기 때문에 붓만 잡았다 하면 그려대는 거예요. 묘사를 하다보면 그게 다 군더더기잖아요. 핵심을 볼 수 없어요. 그걸 떼버리기 위해서 제가 그렇게 인위적으로 만들었어요. 모델한테 춤을 추고 있으라고 하고 순간의 동작을 빨리빨리 그리다보면 눈 코 입을 그릴 시간이 없잖아요. 핵심밖에 볼 수 없고 핵심밖에 그릴 수 없는 장치를 만들었죠.”

사람들이 그 핵심을 봐주길 바라는 건가요? 

“예술작품이란 보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르게 보일 수 있잖아요. 내가 힘들어보니까 세상에 나만 빼고 남들은 다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잖아요. 작가가 혼자 작업하다보면 내가 뭘하고 있는지, 잘 하고 있는지 어떤지 모른다고요. 하지만 보는 사람이 뭔가 공감하고 친근하게 받아들일 때 작가의 존재가 사는 거죠.”

박유아씨는 이제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라는 그늘에서 벗고 세상에 자신의 정신을 뿌리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딸, 남편의 아내에서 ‘자신을 위한 삶’을 선택하는 데 징검다리 건너듯 오랫동안 조심스레 망설였다고 했다. 그러나 이젠 박유아로 살 것이라고 여러차례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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