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나누리/세계는 지금 2010/01/28 16:01
임 용근 전 미 오리건주 상·하원의원
세계한인정치인협의회 회장
2010년 재외동포 참정권 시대 원년을 맞아 700만 재외동포사회를 촘촘히 묶는 네트워크 강화 논의가 활발하다.
특히 각 국에서 활동 중인 한인 정치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동포사회와 모국을 연결하는 통합 네트워크의 구축이 시급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에 국회보는 해외에서 맹활약 중인 재외동포 정치인들의 칼럼을 연재, 한인 동포 정치인 소개와 함께 동포사회와 모국의 유대 강화, 동포사회의 권익과 정치력 신장을 위한 방안 등을 모색하고자 한다. 재외동포 정치인의 생생한 원고가 글로벌 코리아를 향한 의미있는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한다.
(편집자 주)
나는 일제치하인 1935년 경기도 여주에서 부친 임은규 씨와 모친 정서녀 씨의 둘째로 태어났다. 이후 여주유치원 (당시 여주감리교회)에서 시작해 여주초등(국민)학교, 여주중학교, 여주농업고등학교 등 줄곧 여주에서 학교를 다닌 여주 토박이다. 초등학교 때는 운동만 좋아하고 공부는 등한시해 여주중학교 입학시험에서 낙방했
고, 보결로 겨우 입학할 수 있었다
6·25전쟁 후 외국에서 새 인생 개척 꿈꿔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행복했던 가정생활은 그러나 중2 때 발발한 6·25 전쟁으로 끝이 났다. 소방대장으로 계셨던 아버지는 인민군 치하에서도 복무하셨고, 9·28 서울 수복 후 국군이 들어오며 3개월간 소방서에서 인민군한테 ‘부역’했다는 이유로 자택에서 여주경찰서 요원에게 체포됐다. 그리고 수감된 지 1주일 만에 여주 사직당 뒷산에서 다른 여러 수감자들과 함께 처형을 당하셨다. 잡혀가시기 일주일 전쯤 큰아버지인 임일규 씨가 아버지께 잠시 피신할 것을 권했으나 아버지는 “나는 아무 잘못을 안 했고 내 소방서 임무를 수행했을 뿐인데 왜 피해야합니까?”라며 거절했고, 결국 세상을 뜨셨다.
이후 우리 집안은 ‘빨갱이 가족’이라는 법적인 ‘누명’에 씌워진 채 살았으며, 연좌제가 풀린 이후에도 우리를 대하는 시선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이처럼 확실한 죄목도 없이 총살을 당하신 아버지의 한과, 그리고 이후 우리 집안이 겪은 정신적 고통과 피해는 6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나의 뇌리에 남아있다. 그래서 2007년 3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부친의 처형에 대한 진상을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고, 현재 실태를 조사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가족사적 배경으로 인해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한국에서는 성공하기 힘들겠다고 생각했고, 외국에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해야겠다고 자연스럽게 마음을 먹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폐결핵까지 앓았다. 공부와 투병을 병행해야만 하는 상황. 하지만 가난한 살림에 약을 살 돈이 없어 큰아버지가 준 고등학교 등록금으로 약을 사 먹어야했다. 그 결과 등록금을 못 내게 됐고,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지 못한 채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이후 나는 어머니가 주신 암탉 2마리를 팔아 교통비를마련, 포천 근교 미 9군단 본부의 노무자 겸 하우스보이로 취직하기 위해 집을 떠났다. 그 이유는 첫 번째, 영어를 배우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는 미군부대에서 잘 먹고 몸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였으며, 세 번째는 등록금을 벌어 학교로 가 고등학교 졸업장을 타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1년 간 미군부대에서 노무자로 일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고등학교 졸업장을 타고 서울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공부하던 중 폐결핵으로 각혈을 일으키며 고향집에 돌아와 요양을 해야 했다.
이후 교회에서 활동을 하던 중 또 각혈, 도합 9차례에 걸쳐 각혈하며 사경을 헤매는 중에 이웃들이 잡아다주는 뱀으로 탕을 만들어 먹었다. 당시 6개월간 요양을 하며 병이 완쾌돼 지긋지긋한 6년여의 투병을 마치고 건강을 되찾아 일흔 넷인 지금까지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투병하는 동안 죽음에 직면하며 하도 답답해 어느 날 속옷만 입고 여주시내를 한 바퀴 돌았는데 그것이 계기
가 돼, “예수를 믿더니 병들고, 이제 정신까지 이상해졌다”며 여주에서 ‘미친 사람’으로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6년간의 투병생활이 결코 헛되지는 않았다.
투병 중에 영어단어 7천500개를 암기했으며, ‘죽음의 경지’를 경험하면서 인생의 허무함과 가치관을 재정립했고, 담력과 결심을 심어주는 계기로 만들었다. 완치 후 나는 25세의 나이로 다시 신학교에 복학해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여주고아원 봉사에서 만난 미군 장교의 부탁으로 여주 미군 유도탄부대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예배에서 설교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후 5년간을 미군 군목으로 일하면서 많은 월급을받고, 영어실력을 키웠으며 성경지식도 실천해나갔다.
이를 통해 나는 “기회는 준비한 사람에게 항상 주어진다” 라는 말을 더욱 믿게 됐다.
개인적인 경사도 찾아왔다. 28세 때인 1963년 여주중·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아내 박영희를 교회에서 만나 결혼에 성공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46년을 함께 지내며 슬하에 세 명의 자녀와 4명의 손주를 두고 있다. 결혼 당시 해프닝도 있었다. 약혼을 하자 아내의 반 학생들이 반대를 한 것이다. 학생들은 하늘처럼 존경하고 좋아하는 선생님의 배필로 같은 고장에서 잘 알고 있는 시골 출신의 내가 결정되자 무척 실망스런 모양이었다. 당시에는 당혹스러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도 순수하고 예쁜 마음씨가 아닐 수 없다.
후일 나는 고향을 방문하는 기회에 당시 ‘결혼반대’를 외친 학생들을 초청, 서울의 한 호텔에서 과거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결혼반대에 가장 앞장섰던 학생으로부터 40여년 만에 정중한 사과(?)를 받기도 했다.
55살의 늦은 나이에 정계 입문, 새로운 도전 시작
학창시절 꿈꿔왔던 미국행은 우연하지만 필연적으로 찾아왔다. 손수 초석을 놓고 벽돌을 쌓아올리며 여주에서 능서성결교회를 개척하던 1966년, 서울의 스완슨 자선단체에 있던 모건 목사를 만났고, 그의 주선으로 ‘고아 4중창단’을 인솔해 도미(渡美), 3개월간의 순회공연을 마치고 미국에 눌러 앉아 지금까지 44년째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살고 있다.
나는 오리건주에서 신학석사를 마치고 1988년 인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신학교를 졸업했음에도 교파를 바꾸지 않아 목사 안수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낙담하지 않고 무일푼으로 학교에 다니면서 청소, 정원사, 페인트공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이후 식품점 운영, 부동산 매매알선, 선박용품 조달업, ARJ건강비타민회사 등을 운영하며 부동산에 투자, 재정적인 기반을 이룬 뒤 사회봉사에 나서기 시작했다.
30대 학문에 정진했다면, 40대에는 재정적인 자립을 했고, 50대에 들어 사회봉사라는 새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봉사활동 중 단체도 많이 맡아 지역 한인회 회장과 상공인회 회장을 비롯해 미주한인회총연합회 회장, 미주상공인총연합회 회장, 미아시안시민협회 회장 등 관련 단체를 이끄는 동시에 임용근장학회를 설립해 장학사업을 벌였다. 그 시절 자녀들은 대학에 다녔고 아내는 집안 살림을 도맡는 등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나의 사회봉사 활동에 헌신적인 지지를 보냈다.
1990년 나는 55세의 나이로 미국 정계에 도전장을 던졌다. 그것도 파격적인 방법으로, 아무도 생각지 못한 오리건주 주지사 선거에 나선 것이다. 이로 인해 ‘돈키호테’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7명의 후보 가운데 두 번째로 많은 표를 받았다. 주지사 당선에는 실패했지만 낙선을 통해 미국의 현실 정치에 대해 잘 알게 됐으며 이름을 알리는데도 성공했다. 그로 인해 나는 “세상은 도전하는 사람의 편이며, 도전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있다”는 말을 새삼 확신하게 됐다.
오리건주지사 출마, 미국 정치에 새바람 일으키고파
2년 후 이 말은 현실이 됐다. 1992년 오리건주 상원의원에 공화당 후보로 도전, 4켤레의 운동화가 닳도록 선거유세를 한 결과로 민주당 텃밭에서 59대 41의 완승을 거둔 것이다. 이후 현재까지 상원 3선, 하원 2선 등 도합 5선으로 계속 의정활동을 펼치고 있다. 주 상원과 하원에서 무역, 경제 분과위원장과 원내 부대표직을 수행한 한국계 유일한 5선 의원이기도 하다.
주 의회에서 의정 활동을 하며 나는 민사소송법 개혁, 복지제도 개선, 소수민족보호법 등 수많은 법을 통과시켰다. 또 법으로 아시안위원회를 만들어 아시아 소수인종의 권익을 향상시키고, 특히 2008년에는 오리건주 ‘한국의 날’을 법제화해 한인 동포들의 지위를 크게 강화했다.
최근에는 아시안 시민권협의회와 미국 내 한인정치인 포럼, 세계 한민족대회, 세계 한민족 상공인 대회, 세계 해외한인정치인 협의회 등을 주최하거나 설립했고, 특히 지난해까지 3회의 한인동포정치인 포럼을 개최했다.
나는 어린 시절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난 이후 7전8기의 불굴의 의지를 항상 마음속에 품고 있다. 여기에 부족한 것도 많지만 사람들이 인정해준 덕분에 포용력과 지도력을 키웠고, 미국에 온 뒤 특히 겸손하면서도 유머러스한 태도를 갖추게 됐다.
나는 새해인 2010년 다시 도전에 나선다. 오리건 주지사 출마가 바로 그것이다. 마침 2010년은 내가 오리건 주지사 선거에 나오며 정계에 입문한지 꼭 20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번에는 떨어졌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주지사에 당선돼 처음 목표로 세웠던 정치가의 꿈을 기필코 이루고자 한다. 다양한 사회 경험과 풍부한 의정 경험을 토대로 오리건주에 정치혁명을 일으키고, 미국정치에도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고자 한다.
수십 년 전 사람들은 나의 ‘아메리칸 드림’을 허황되다고, 불가능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충실히 이행했으며, 인생의 역경과 고난을 통해 큰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아메리칸드림을 조금씩 실현시켜온 것이다. 주지사는 바로 그 최종 단계다. 나는 해외의 많은 동포들이 나보다 더 큰 꿈을 품고 그 꿈을 실현하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평소 암송하는 문구를 들려주며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꿈을 다 이룰 수는 없을지라도 꿈이 없으면 대업을 이룰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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