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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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그날 '學兵(학병) 권유' 연설 직접 들었다… 나는 春園(춘원)의 고민을 느낄 수 있었다" [프리미엄조선 2014.10.20]

忍齋 黃薔 李相遠 2014. 10. 24.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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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신구문화사에서 나온 이광수 문학전집은 나에게 좋은 벗이었다. 소설 '유정'이며 '무정' 등 춘원의 소설을 읽으며 나는 성장해갔다. 어느날 미국에서 접한 운원에 대한 친일파 선정 소식에 마치 어린시절을 송두리째 누군가에게 빼았긴 심정이었다. 일제 36년과 구한말 일제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근 4~50년을 일제의 그림자 속에 살아온 분들에게 일희일비 할수 있는 친일의 굴레를 씨우는 것을 염려하지 않을수 없다. 이완용과 같은 대표적 역적들과는 구분했으면 한다.]]   


[춘원 이광수를 말하다… 92세의 김우전 前 광복회 회장]


"학병지원 권유했던 연설… 훗날 친일 죄목이 되었지만 조선 민족의 생존을 위한 춘원의 고민 느낄 수 있어"


"우리가 독립할 것이라고 당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해…

학병에서 탈출한 나는 광복군에서 사정 알게 돼"

지난주 이 지면에 '춘원 이광수의 딸' 이정화 박사의 인터뷰가 나가고 나서 김우전(92) 전 광복회 회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목소리가 또랑또랑 젊어서 비서가 대신 거는가 싶었다.


"내가 일본 교토(京都)에서 유학하던 시절 이광수가 와서 학병(學兵)을 권하는 연설을 했어요.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 연설을 들으면서 나는 이광수를 친일(親日)이니,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소. 오히려 그분에게 민족의식을 느낄 수 있었어요. 내가 이광수와 같은 고향(평북 정주)이라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춘원의 '친일' 죄목 중 맨 첫 줄에 올라 있는 '태평양 전쟁의 학병 지원'을 권하는 연설에서 오히려 민족의식을 느꼈다니…. 일반인도 아닌 전 광복회 회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 그렇게 말한 것은 낯설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시절 광복군(光復軍) 출신이고, 해방 정국에서는 백범 김구 선생의 비서로 활동했다.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2001년)과 광복회 회장(2003년)을 지냈다. '친일'에 관한 한 가장 엄격한 잣대를 가졌을 법한 인물이다.


다음 날 그는 본사 편집국으로 찾아왔다. 지팡이를 짚고 허리가 좀 구부정했을 뿐 건강했다. 내가 지금껏 만난 인터뷰 상대 중에서 90대(代)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고령(高齡)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이 분명하고 기억까지 또렷했다.


김우전 전 광복회 회장은“나는 춘원을 존경하고 그에 대해 재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이태경 기자


그는 신문에서 잘라온 '춘원의 딸' 인터뷰 면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볼펜으로 줄을 치면서 몇번이나 읽었던 흔적이 역력했다.


"인터뷰를 보니 이광수에 대해 내가 모르는 사실도 많이 있었어요. 나는 춘원 따님을 꼭 한번 만났으면 했어요. 미국으로 출국했다고 하니…."


―왜 만나고 싶은 거죠?


"그분을 존경했기 때문이죠. 소년 시절 춘원의 '흙'과 '그의 자서전'을 읽고 정말이지 감명받았기 때문이오. 지금은 내용을 다 잊었어요. 다만 '그의 자서전'에서 춘원이 오산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치타(시베리아 바이칼호 부근의 도시)로 떠나는 밤(1913년) 학교에 와서는 아이들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갔다는 구절이 기억나오."


―일본 유학 시절 춘원의 학병 권유 연설을 들었다고 했지요?


"내가 일본 리쓰메이칸대 법정과에 다니고 있을 때였어요. 1943년 11월 초 이광수가 학병을 권하러 왔어요. 아니, 종용하러 왔다고 해야 할지. 교토(京都)에 있는 '조일(朝日)회관'에서 연설회가 있었어요."


―당시 조선유학생들은 춘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선망의 대상이고 저주의 대상이었지요. 어쩌면 우리 대부분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을 거요. 춘원이 왔다고 하니 많이 몰려갔으니까요. 그날 조선유학생 100여명쯤 참석했을 겁니다."


―춘원의 연설에서 어떤 대목이 기억납니까?


"그 연설 중에 '당신들이 희생하고 공을 세워야 우리 민족이 차별을 안 받고 편하게 살 수 있다. 조선 민족을 위해 전쟁에 나가라'고 했어요. 학병을 종용하러 온 것은 틀림없는데, 내게는 좋은 면으로 들렸어요."


―좋은 면으로 들렸다는 것은?


"이분이 역시 민족의식이 있구나, 민족을 사랑한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어지간하면 저 양반이 저 얘기를 하겠나, 민족의 장래에 고민이 많구나를 느꼈지요."


―일제를 위해 싸우러 나가라는 학병 권유 연설에서 왜 그런 느낌을 받았지요?


"글쎄, 어려서부터 이분의 책을 읽어왔고 이분의 사상을 알고 있었기에 그랬을 거요. 학병 지원은 일제 치하의 조선 민족 생존을 위한 것이다, 조선 민족이 살아남으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고민이 담겨 있었어요. 나는 그렇게 느꼈지만, 당시 다른 학생들은 어땠는지 몰라요."


김우전 前 광복회 회장(오른쪽).


―이광수의 친일에는 민족을 위한 '고민'이 있었다는 겁니까?


"있었겠지요. 나는 그런 고민을 봤던 거지요."


―그런데 뭔가 이상합니다. 광복회(光復會)는 '친일파'에 대해 단호하지 않은가요?


"단호하지만, 이광수에 대해서는 내가 겪은 것이기에…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물론 이는 독립운동가 전체의 의견은 아닙니다."


―이광수에 대해 어떻게 봐야 합니까?


"친일파이지만 민족을 생각 안 한 것은 아니라는 거죠."


―'대표적 친일 문인'이라는 이광수를 복권해야 한다고 봅니까?


"글쎄, 그건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답변하기가 불편하신가요? 춘원이 어둠 속에서 잊히는 게 옳다고 봅니까?(아직껏 이 땅에는 춘원 기념관과 문학관조차 없다.)


"내가 말한 것은 사실이고, 개인적으로 춘원에 대해 재평가를 해야 한다고 봐요."


―동시대의 최남선(崔南善)에 대해서는?


"나는 최남선을 만난 적이 없기에 뭐라고 말할 수 없어요."


―다른 친일 인사들도 불가피하게 현실과 타협했을 수 있겠지요?


"그건 나중에…, 나는 광복회 회장을 지냈고 지금은 고문인데, 친일파 문제 전반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가 없어요. 다만 내가 겪은 이광수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을 뿐…. 춘원은 학병 종용을 한 게 친일의 큰 죄목인데, 내가 직접 그 연설을 들었기에 그렇지만 않다고 말하는 거요."


―다른 친일 인사들도 춘원처럼 고민하지 않았을까요?


"그런 사람들도 있었겠지요. 내가 춘원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누군가가 증언하면 되겠지요. 하지만 친일파에 대한 내 기본 입장은 분명합니다. 우리 현대사가 왜곡된 것은 정부 수립 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데 있어요. 이들이 기득권을 갖고 계속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개인 얘기를 하죠. 춘원의 학병 권유 연설을 듣고 학병에 지원했습니까?


"아니오. 학병 지원 기한이 1943년 11월 20일까지였어요. 그 날짜가 지나니 학교가 문을 닫았어요. 일본 학생들은 모두 태평양전쟁에 나갔기 때문이죠. 학교에는 몇몇 식민지 학생만 남았어요. 나는 뒤늦게 학교 측에 학병에 지원하겠다고 하니 날짜가 지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귀국한 뒤 일본군 사령부까지 찾아가 지원서를 냈어요."


김구가 써준 임명장.

―학병에 지원 안 할 수는 없었습니까?


"당시 대학생이나 전문대생치고 학병에 빠진 사람은 거의 드물었어요. 일제는 고향에 있는 부모들을 압박했고, 우리에게는 '학병에 지원 안 하면 부모들이 고통받는다'고 했었지요. 그러니 가족이나 편하게 살도록 하자며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간 거죠."


―학병으로 들어가 어디에서 근무했습니까?


"당시 학병이 4500명 있었는데 2500명가량 중국으로 갔어요. 나는 장쑤(江蘇)성 쉬저우(徐州)에 있는 '치중(輜重·군수품 수송)부대'에 배치됐어요. 거기서 내가 운전을 배웠어요. 부대에는 조선인 학병이 50명쯤 있었는데, 이 중 약 20명이 탈출했어요. 당시 장도영(5·16쿠데타 당시 육군참모총장)과 장준하도 같은 부대에 있었어요. 이들은 다른 부대로 옮겨가 탈출했어요."


―왜 탈출할 마음을 먹었지요?


"형님이 조선일보 정주지국장을 했어요. 사상 문제로 경찰에 끌려갔지요. 고문을 당한 형님을 면회하면서 내게는 반일 감정이 생겼지요. 학병에 입대하기 전날 밤 평양의 한 지인 집에 묵었는데 거기서 '가정부(假政府·임시정부)'를 알게 된 겁니다. 집주인이 장롱에서 태극기를 꺼내 보여줬어요. 그러면서 '3·1운동 때 이걸로 만세 운동을 했네. 자네가 중국으로 가게 되면 거기에 가정부가 아직도 있을지 모르니 찾아가보게'라고 했어요."


그는 1944년 5월 28일 부대에서 탈출했다. 대담하게 일요일 오후에 철조망을 넘었다고 한다. 그는 충칭(重慶)에 있는 광복군 군관학교로 찾아갔다. 거기서 우리말 구령으로 된 제식교련과 군사 기초과목, 독립정신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졸업식 때는 장제스(蔣介石·중국 국민당정부 주석) 명의로 된 졸업장과 중국군 육군소위 임명장을 받았다.


―광복군은 규모와 체계에서 군대라고 하기에는 어떠했습니까?


"임정도 그랬어요.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지 못했고, 독립운동이 어려웠던 거죠."


―당시 광복될 것으로 봤습니까?


"우리가 독립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는 장준하도 마찬가지였을 거요. 특히 국내에서는 일본이 망한다고 생각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거요. 이광수 같은 국제적 감각이 있던 사람들은 알았을지 모릅니다. 나는 학병에서 탈출해 광복군에 들어간 뒤에야 '일본이 패전하고 있구나'를 알았지요. 일본의 패전은 우리의 해방이니까요."


―김구 선생 밑에서 일했지요?


"광복군 부대에 편성돼 있었는데, 어느 날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이 따로 불렀어요. '항일 전쟁을 치르려면 국내와 연계해야 한다. 국내에서는 우리 광복군의 활동 상황을 모르고 있다. 자네가 국내에 잠입하는 임무를 맡아달라'고 했어요. 명주천에 임명장을 써줬어요. 국내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거는 행위였어요. 나는 중국 쿤밍(昆明)에 있는 미국 CIA의 전신인 OSS로 파견돼 잠입 훈련을 하던 중 광복을 맞았어요."


―직접 겪어본 김구는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아량과 과단성이 있는 인물이었지요. 또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고 잘 대접했어요."


귀국한 뒤 그는 김구 선생의 비서로 활동했다. 하지만 김구가 암살된 뒤에는 그쪽 세계를 떠났다.


"김구 선생 장례식을 치르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했어요. '당장 원수를 갚아야 하나, 자살을 해야 하나, 몰래 산에 가서 숨어 살아야 하나….' 그러다가 김구 선생의 비서로서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지 않도록 살자고 마음을 정했어요. 제 밥벌이도 못하는 녀석이라는 소리는 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항만 하역업 사원으로 들어갔다. '어려서부터 근로정신이 투철했다'는 그의 표현대로 열심히 일했던 것 같다. 나중에 그는 해운회사와 건설회사를 운영했다.


[출처는 프리미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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