印尼 양민학살 다룬 다큐 ‘액트… ’ 20일 개봉
소병국 한국외대 교수가 본 영화속 현대사
동아 2014-11-19
“내가 정말…. 죄를 지은 건가요?”
20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액트 오브 킬링’은 적나라해서 난감한 영화다. 미국인인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40)이 연출한 이 작품은 1965년경 인도네시아 학살을 자행한 당사자들이 주인공. 그들이 공적을 자랑할 마음에 흔쾌히 당시를 재연하는 충격적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지난해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 관객상을 비롯해 세계 70여 개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국내엔 다소 낯선 인도네시아 현대사를 소병국 한국외국어대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 교수의 도움을 얻어 짚어봤다.
― 영화에 나오는 대로 당시 100만 명이나 학살당한 것이 사실인가.
그렇다. 학계의 공식 통계는 50만 명 안팎. 대략 확인된 수치가 그럴 뿐, 정황상 훨씬 많다. ‘공산주의 척결’을 내세웠으나 일반 양민도 마구잡이로 사살했다.
이 비극은 1965년 ‘9·30사태’가 발단이었다. 당시 군부와 대척하던 공산세력이 군부 장성 6명을 살해하고 정변을 일으킨 것. 훗날 대통령에 오르는 수하르토가 중심이 된 군부가 이를 응징하며 피의 참극이 벌어졌다. 영화에 등장하는 ‘패러밀리터리(paramilitary·불법무장단체)’의 학살 주도도 사실이다. 군부가 조직폭력배 같던 이들에게 민방위군 권한을 부여해 전위대로 이용했다. 주인공인 안와르 콩고와 밀접한 ‘판차실라 청년단’도 대표적 패러밀리터리다.
영화 ‘액트 오브 킬링’에는 1960년대 인도네시아 학살 당시 악명을 떨쳤던 가해자 안와르 콩고(오른쪽)와 그의 동료들이 나와 학살을 재연한다. 이들은 지금도 국가적 영웅으로 불리며 죄를 지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산다. 엣나인필름 제공
―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시도조차 없었던 것으로 나온다.
있긴 했지만 극소수였다. 수하르토 전 대통령은 1998년까지 30년 넘게 철권 통치했다. 집권 내내 과거의 치부를 ‘국가를 위한 정당방위’로 윤색해 선전했다. 학살주도 세력이 줄곧 나라를 지배해 희생자 유가족들은 침묵해야 했다.
특수한 종교적 상황도 작용했다. 인도네시아는 인구 2억5000여만 명이 대부분 종교를 가지고 있다. “사람과 짐승을 구분하는 척도는 신앙”이라고 말할 정도다. 종교와 대척점에 선 공산사상에 대한 혐오가 광범위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이는 고유한 민족성보다는 제도의 영향이 컸다. 1965년 정부는 6개 종교만 공인하고 이를 장려하는 법률을 만들었다. 정치가 국민 사상을 인위적으로 개조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 종교적 신념은 ‘반(反)공산당’ 정서를 정당화하는 무기가 됐다.
― 그렇다 해도 학살 당사자들이 너무 당당하다.
죄라는 의식조차 없었을 것이다. 지금껏 사회적으로 영웅 대접을 받는다. 영화에선 공영방송 토크쇼에 나가 “인도적으로 잘 죽였다”며 서로 격려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수하르토 전 대통령은 끝내 물러났지만, 군부 중심 집권층은 다져놓은 세력이 탄탄해 여전히 기세등등하다. 판차실라 청년단은 지금도 300만 명의 조직원을 거느리고 있다.
앞으로는 달라질지 모른다. 올해 7월 서민 개혁파인 조코 위도도가 수하르토의 사위인 수비안토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인도네시아의 오바마’라 불리는 그가 어떤 개혁정책을 펼치느냐에 따라 희생자 복권의 길이 열릴 수 있다. 영화에서 학살 당시를 재연하다 자책감이 든 행동대장 안와르는 후반부에 “내가 죄를 지은 것이냐”며 고통스럽게 구역질한다. 올바른 진상 규명은 그 어떤 처벌보다 묵직한 힘을 지닌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다큐 ‘액트 오브 킬링’. 엣나인필름 제공
다큐 ‘액트 오브 킬링’. 엣나인필름 제공
다큐 ‘액트 오브 킬링’. 엣나인필름 제공
다큐 ‘액트 오브 킬링’. 엣나인필름 제공
다큐 ‘액트 오브 킬링’. 엣나인필름 제공
32년 철권통치 수하르토 누구였나 / 2008-01-27
인도네시아를 32년간 철권 통치했던 수하르토(86)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독재자라는 비판 속에서도 인도네시아의 번영을 이끈 군사 정치 지도자였다.
수하르토는 1967년 와병 중이던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으로부터 정권을 이양받는 방식으로 집권한 후 철권통치를 펼치다 1998년 아시아를 강타한 금융위기와 이어진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자카르타 자택에서 은둔생활을 해왔다.
그는 근년 들어 몇 차례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겨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병세가 악화됐고 새해 들어서는 불안정한 상태를 보인 끝에 지난 4일 입원, 여러 차례 위기를 넘기면서 수혈과 각종 의료장치에 의존해 생명을 이어왔다.
네덜란드 통치기였던 1921년 6월8일 인도네시아 자바섬 중부의 족자카르타에서 태어난 수하르토는 고교 졸업 후 네덜란드 식민지군에 입대, 부사관으로 출발했으나 일본군이 인도네시아 군도를 점령하자 일본군이 조직한 방위군에 재입대해 장교로 임관했다.
수하르토는 그러나 처음엔 다른 식민지인들처럼 일본군을 환영하다 1945년부터 항일투쟁으로 전향했다.
인도네시아 군도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후 신생 인도네시아공화국에서 계속 군인으로 복무하던 그는 1965년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쿠데타를 무력으로 진압한 후 1967년에 수카르노로부터 정권을 이양 받아 대통령에 취임했다. 대통령 취임 후 하야할 때까지 7선 대통령이었다.
수하르토는 재임 때 인도네시아를 공업국가로 이끌었으나 자녀들과 친인척으로 막강한 경제권력을 구축하는 등 오랜 장기집권에 따른 폐해도 컸다.
인도네시아는 1997년 외환위기가 촉발되기 전까지 석유와 가스산업의 수익을 이용 연평균 7%의 높은 경제성장을 이룩한 덕분에 '개발의 아버지'로 국민의 추앙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1997년 7월 루피아화 폭락과 그에 따른 물가폭등으로 경제위기를 맞으면서 폭동과 소요사태가 끊이지 않게 되고 재야세력과 학생들의 시위로 결국 1998년 5월에 하야하게 된다.
부패감시기구인 국제투명성기구는 2004년 수하르토를 '20세기 가장 부패한 정치인'으로 규정하고 그가 재임 때 국고에서 빼돌린 금액이 무려 150억~35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인도네시아 검찰은 각종 부패 혐의로 수하르토 전 대통령을 형사처벌할 계획이었지만 그의 병세 악화를 이유로 2006년 5월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검찰은 결국 수하르토가 대통령 재직 시 횡령한 자선단체 기금과 손실금 등 모두 15억4천만 달러를 청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선에서 그에 대한 '단죄'를 마무리했다. 검찰은 수하르토가 죽더라도 그의 가족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할 것이라는 의지를 지난 7일 밝힌 바 있다.
수하르토는 하야 후에 독재자의 신분으로 법의 처벌을 받지도 않고, 또 외국으로 달아나지도 않은 채 평온한 말년을 보냈는데, 이는 다른 국가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매우 이례적인 일로 간주되고 있다.
실제로 수하르토는 하야 후에도 그의 각료들 중 상당수가 새 정부에 잔류하면서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력을 계속 미쳐왔다.
지난 2006년 5월 여론조사기관 '서베이 인도네시아'가 수하르토 퇴진 8년을 맞아 실시한 조사 결과 인도네시아 국민 상당수가 수하르토의 부정부패와 인권유린에 대한 악명에도 불구하고 수하르토 정권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디지털뉴스팀
피의 독재자 vs 개발영웅…‘32년 철권통치’ 두 얼굴 / 2008-01-2
1921∼2008 수하르토 전 印尼대통령
6번 연임 - 30만명 학살 “최악 부패 정치인”
연평균 7% 경제성장 이뤄 생활수준 개선도
27일 타계한 수하르토(사진)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개발의 아버지’와 ‘철권 독재자’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아 왔다.
1966년 수카르노 전 대통령에게서 권력을 이양 받은 수하르토 전 대통령은 1998년 축출될 때까지 30여 년간 장기 집권했다. 그는 ‘개발과 안정’이라는 기치 아래 인구 2억3000만 명의 대국(大國) 인도네시아의 경제성장을 이끌며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재임 시절 각종 비리에 연루됐고 철권 독재정치로 반발을 샀다. 결국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로 민심을 잃은 뒤 이듬해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물러났다.
수하르토 전 대통령이 축출된 뒤에도 재임 시절 그가 임명한 각료들은 정부에 그대로 남았다. 그는 이를 이용해 정계에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11일 그가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을 때 유숩 칼라 부통령이 급히 병실을 찾은 것도 그가 정치적으로 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27일 수하르토 전 대통령을 애도하기 위해 일주일간 전국에 조기를 게양한다고 발표했다.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글로리아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 케빈 러드 호주 총리 등 주변국 정상들도 애도를 표했다.
수하르토 전 대통령은 1921년 자바 섬의 욕야카르타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세 때 네덜란드 식민 치하의 동인도회사 군에 입대했고 일본 군정 아래에서 장교를 지냈다. 1945년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뒤에는 욕야카르타의 연대장 등을 지낸 뒤 1960년 육군참모차장에 올랐다.
수하르토 전 대통령은 1965년 9월 수카르노 당시 대통령의 친위대가 일으킨 쿠데타를 진압하면서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그는 반란군의 배후로 인도네시아공산당(PKI)을 지목하고 당원 50만 명 이상을 처형했다.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그는 6번 연임하면서 네덜란드의 식민통치와 일본의 수탈로 쇠락한 경제를 되살려 ‘개발의 아버지’로 불렸다. 수카르노 전 대통령이 ‘건국의 아버지’로 불린 것에 빗댄 표현이다.
그는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를 중시한 전임자와 달리 ‘반공(反共)’과 ‘친(親)서방’ 정책을 펼치며 미국과 유럽 선진국으로부터 막대한 투자를 이끌어 냈다. 이 자금을 발판으로 제조업을 발전시키고 석유와 가스 수출을 늘려 연평균 7%라는 경이로운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피로 얼룩진 철권 독재가 자리 잡았다. 수하르토 전 대통령은 재야 세력과 언론 등 반대파를 잔혹하게 탄압했다. 1975년에는 자원을 노리고 동티모르를 침공해 30여만 명의 희생자를 냈다고 AFP통신이 전했다.
그는 자식과 친인척을 정재계 요직에 등용해 ‘족벌체제’를 구축하기도 했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도 자신의 권력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제개혁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따라 권력형 비리와 부패가 끊이지 않았다.
수하르토 전 대통령은 유엔과 세계은행이 지난해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파렴치한 횡령범’ 명단의 맨 위에 이름을 올리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 부패감시기구인 국제투명성기구도 2004년 그를 ‘20세기 가장 부패한 정치인’으로 선정했다. 수하르토 전 대통령이 국고에서 빼돌린 돈은 150억∼35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2000년엔 재직 중 부정축재 혐의로 가택연금을 당했다. 인도네시아 검찰은 여러 차례 그를 부패 혐의로 형사처벌하려고 했으나 병세 악화를 이유로 2006년 5월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검찰은 지난해 7월 그가 대통령 재임 중 횡령한 자선단체 기금 등 14억 달러의 반환을 위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그의 사망이 임박하면서 인도네시아 일각에선 ‘동정론’이 대두됐고 검찰도 12일 민사소송 건에 대해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가족과 법정 밖 화해에 합의했다. 그러나 그의 재임 시절 정치범 등 희생자 100여 명은 “죽기 전에 그를 법정에 세우라”며 시위를 벌였다.
생전에 수하르토 전 대통령은 ‘개발독재 지도자’라는 공통점 때문에 박정희 전 대통령과 종종 비교 대상에 오르기도 했다. / 남원상 기자 surre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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