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7_芳園(李盛粲)

나의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을 살려준 덴마크 병원선 유틀란디아(Jutlandia)호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1. 28.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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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은 6․25 전쟁 지원을 결정합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16개국이 유엔의 기치아래 전투 부대를 파병하여 북한 침략군과 싸웠습니다. 하지만 가장 먼저 인도적인 의료지원을 하겠다고 나선 나라가 있었습니다. 바로 덴마크입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덴마크의 동아시아 선박회사는 자사가 소유하고 있는 8,500톤 크기의 유트란디아(Jutlandia) 호를 제공 합니다. 이 배는 1934년 덴마크의 나크스코프 조선소에서 화물과 여객 겸용으로 건조되었습니다. 


6·25전쟁에 전투병력이 아닌 의료지원단을 파견한 나라는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등(참전 일자 순) 5개국입니다. 이들 의료지원단은 의료시설과 기술이 열악했던 당시 상황에서 우리 군병원에서 치료 불가능한 중환자나 재수술이 필요한 환자 등을 선별해서 치료함으로서, 이들의 활동이 오늘날 한국이 세계 유수의 의료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전투병력 참전국 못지않게 높이 평가되야 합니다.



유틀란디아 병원선은 1951년부터 1953년까지 3차례에 걸쳐 임무를 수행했는데, 당시 전투병력 대신 높은 수준의 의료진들을 한국에 보내 국군과 유엔군을 도왔습니다. 그 시기에 유틀란디아 호는 최첨단 병원선이었고, 실제로 제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처럼 온몸이 수류탄 파편으로 폐까지 손상당한 한국군 병원에서는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한 군인들을 치료하여 완치시켜주며 인도주의 정신을 실천하였습니다. 


http://blog.daum.net/enature/15852876


실제로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물 관리번호 AA0000430인 1951년 12월 19일 대통령비서실에서 생산한 것으로, 국방부 장관을 경유하여 육군총참모장, 해군총참모장, 공군총참모장에게 보낸 "외국병원선 한인 상이군인 수용에 관한 건"이라는 문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덴마크는 1951년 초 의료진과 의료장비를 갖추고 부상병 치료와 한국인 구호를 목적으로 '유트란디아'적십자 병원선을 파견하였다. 병원선은 부산항에서 부상자와 환자를 치료하고 본국으로 돌아 갔으나, UN군사령관의 요청에 의해 다시 환자 300명을 치료할 준비를 갖추고 부산항에 돌아왔다. 이 중 100명은 외국인 장병환자, 200명은 한국인 환자를 무료로 치료해 준다고 하니 우리 군병원에서 치료 불가능한 중환자나 재수술이 필요한 환자 등을 선별해서 병원선으로 후송할 것'을 지시하였다."


부산에 도착한 유트란디아 병원선


이 배를 건조했던 나크스코프 조선소에서 3개월만에 356침대를 갖춘 네 개의 큰 병실과 수술실, 엑스선 촬영 실과 치과 시설을 갖춘 아주 현대적인 해상 종합병원선으로 탈바꿈하여 선체는 하얀 색이 칠해지고 선명한 적십자가 양현에 그려졌습니다.



병원선 유트란디아의 파견 대장은 이 배의 유일한 현역 군인인 해군 대령으로 덴마크 적십자사 총재였던 카이 함메리히 씨가 임명되었습니다. 그 외 병원장인 모건스 빙게 박사, 선장 크리스턴 콘드럽 등 나머지 선원은 모두 민간인이었습니다. 또 놀라운 사실은 당시 유틀란디아 병원선에 탑승했던 승무원들은 엄청난 경쟁을 뚫고 선발된 최정예요원들이었습니다. 42명의 간호사를 선발하는데 무려 4천명이나 지원하여 간호실력은 물론이고 환자에게 언제든 수혈할 수 있도록 혈액형까지 고려해 선발되었습니다. 



유틀란디아 병원선은 1951년 1월 23일 한국으로 출항해 45일째 되던 날 부산에 도착하여 의료 지원활동을 펼치게 됩니다. 연합군 부상자의 본국 귀환과 의약품 조달 등을 위해 한국과 덴마크를 왕복하며 3차에 걸쳐 의료지원 파견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부산항에서 수시로 전방을 이동하며 환자진료를 하였지만 1952년 가을부터는 인천항으로 옮겨 의료지원 활동을 하였는데 999일 동안의 참전기간 동안에 연인원 630명이 근무하면서 24개국 4,981명의 외국인과 한국 민간인 등 15,000명을 치료했습니다.


유틀란디아 호는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보유 중이던 의약품과 의료기재들을 유엔 한국재건단(UNKRA)을 통해 각 민간병원에 기증하고 8월 16일 인천항을 통해 본국으로 다시 출항하였습니다. 한편 덴마크는 6․25전쟁에서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 환자들까지 치료하고 또 배 안에서 전쟁 고아를 위한 정규교육까지 펼쳤던 유틀란디아 호의 인도주의정신을 ‘유틀란디아’란 노래로 만들어 자랑스러운 역사로 간직하며 모든 학교에서 이 내용을 교육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때 한국에 전쟁이 있었지 / 유틀란디아라는 이름의 배가 전쟁에 참여했지 / 병원으로 쓰기 위해 항구를 나섰지 / 헤이! 유틀란디아를 위해! / 전쟁이 부르자 배는 떠났지 / 그곳에는 사냥꾼들이 우글거렸지만, 선원들은 바다에서 돌아왔지.’ 덴마크의 국민 가수 ‘킴 라르센’이 불렀는데, 1986년 발표된 후 많은 국민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노래입니다. 킴 라르센이 발표한 이 노래는 멜로디도 편해서 전 국민의 애창곡이 되었고, 라르센은 단번에 국민가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유트란디아의 봉사 정신이 탄생의 기초가 되어 1958년 스칸디나비아 3국이 세운 서울 메디칼 센터(국립의료원)라는 첨단 의료 시설을 갖춘 종합 병원이 건립됩니다. 1968년 병원을 한국 정부에게 기증하고 떠나기 전까지 메디칼 센터는 덴마크 의료진들을 통해 유트란디아의 봉사 정신이 이어졌습니다. 



유틀란디아 호는 세계의 이목이 쏠릴 뻔했던 일도 있었지요. 1951년 6월 30일 유엔군사령관이 이곳을 휴전협상 장소로 할 것을 제안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산군의 거부로 성사되지 못하고 협상장은 판문점으로 정해졌습니다. 



유틀란디아호는 덴마크로 돌아간 후에 여객선으로 개조되어 운항되다가 1964년에 그 수명을 다해 해체되었습니다. 유틀란디아 호가 정박해 있던 덴마크 코펜하겐 랑에리니에(Langeliniekaj) 부두에는 1990년 6월 15일 한국 참전용사회가 제작해 기증한 기념비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 기념비는 한국전 기간 동안 유엔에 기여했던 덴마크에 감사하기 위해 한국 참전용사들이 기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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