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7_20세기100선

[II] 인문 27.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1978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2. 10.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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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인문


27.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1978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 1935년 11월 1일~ 2003년 9월 24일)는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난 미국의 영문학자·비교문학가·문학평론가·문명비판론자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현대 중동학에서 가장 인정 받고 있는 학자 중 하나로, 대표적인 저서 《오리엔탈리즘》으로 제국주의에 근거한 서양 위주의 사고방식을 비판하였다. 


그는 두 살 때 영어와 아랍어 문장을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영리했고, 산수와 음악에 뛰어난 호기심 많은 아이였다. 그러나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실현하는 카이로 내 영국 초등학교의 생활은 아랍인으로서 소수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를 ‘문제아’로 만들었다. 부유한 가정 환경에서 정치에 무관심했던 사이드가 팔레스타인의 정치 현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공교롭게도 마르틴 부버때문이다. 


미르틴 부버가 접수하여 산 집이 '에드워드 사이드 (Edward Said)' 의 집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늘 기회 있을 때마다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탄압의 예로 그 이야기를 하곤 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1935년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2003년에 백혈병으로 사망하기까지 프린스턴 대학을 나온 영문학자로서, 문학평론가로서, 음악비평가로서, 피아니스트로서, 그리고 어린 시절 이스라엘 병사에게 돌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전사로서 치열한 삶을 살았다.(http://blog.daum.net/enature/15852089) 1978년 제국주의적 서양 위주의 사고방식을 비판한 '오리엔탈리즘'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1978]의 내용 -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은 서양의 작가, 디자이너, 예술가들이 동양 문화의 여러 측면을 묘사하거나 모방하는 것을 이른다. "오리엔탈리스트"란 말은 이러한 활동을 하는 사람으로 볼 수 있으나, 동양을 연구하는 학자를 이르는 전통적인 용어이기도 하다. 오리엔탈리즘은 예술사에서 북아프리카나 근동(또는 서아시아)의 지중해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얻은 요소들을 이용한 내용, 색깔, 양식을 주제로 다룬 19세기 프랑스 예술가들의 작품을 이를 때 널리 쓰인다. 이러한 의미는 20세기 학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그의 논쟁적인 책 『오리엔탈리즘』을 내놓으면서 달라졌는데, 이 저서에서 사이드는 18~19세기에 유럽 제국주의적 태도로 형성된 동양에 대한 적대적이고 탄원적인 시각의 서양 예술 및 학술 전통을 이를 때 이 용어를 썼다. 이런 의미로 쓰일 때 '오리엔탈리즘'은 동양 문화와 사람에 대한 근본적이면서도 편향된 외부의 해석을 뜻한다. 사이드는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적 학술 전통을 비판하였으며, 현대 학자 특히 버나드 루이스에 대해서도 그러하였다. 반면 일부 현대 학자들은 '오리엔탈리즘'이란 말을 제국주의 시대에 非서구 문화를 무가치하다고 보는 사람에 반대하며 親동양적인 태도를 보였던 저자들을 이르는 말로 쓰기도 하였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주장한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인들이 동양을 볼 때에 선입견을 가지고 본다는 것으로,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억압하기 위한 서양의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동양이 서양인의 정체성을 확립해 주는 대상으로, 열등한 동양이 존재하기에 우월한 서양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서양인들은 동양인들이 열등하며 무능하고 게으르다고 생각하며, 자신들보다 두뇌나 신체 면에서 열등하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수많은 문화가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한꺼번에 동양이란 단어로 포함시킨다고 주장했다. 또한 쇠퇴하고 비참한 동양을 식민지화함으로써 동양을 구출해 내었다고 주장해 자신들의 식민지화를 정당화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서양이 바라보는 동양에 대한 시각은 이제 동양에서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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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순 연세대 연구교수·인도근대사 서평]  -  ‘동양 = 야만’ 서구의 지배논리 분석 /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비교문학자인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는 1978년 출간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에서 동양을 다룬 서구의 문학, 문화, 사상, 역사에 내재한 오리엔탈리즘, 곧 동양에 대한 왜곡된 관점을 비판하였다. 1935년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이집트의 영·미계열 학교와 하버드대 등 미국의 아이비리그에서 학위를 마친 그는 아랍 출신(동양)과 미국 학자(서양)로서의 내적 긴장을 소지한 이른바 경계인이었다. 그가 1967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났을 때 유럽과 미국의 언론이 아랍 사회를 반서구적·위협적 존재로 접근하는 방식에 주목하고 연구에 착수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이란 본래 산스크리트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등 동양의 언어와 문학을 연구하는 ‘오리엔탈리스트’의 연구업적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이 지난 2세기의 정치적 현실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간파한 사이드는 동양을 다루기 위해 기획된 체제와 이슬람에 대한 편견, 동양과 서양 간의 이분법적 사고방식과 유색인과 여성에 대한 정복을 정당화하는 이념 등을 예리하게 비판하였다. 20세기 최고의 인문서로 평가되는 ‘오리엔탈리즘’은 30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지성계에 새 물줄기를 열었고 지금도 여러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유럽이 세계를 이해함에 있어, 친숙한 ‘우리 서양’과 낯선 ‘그들의 동양’으로 이분했다고 파악하였다. 가장 큰 대비는 ‘서구=문명’과 ‘동양=야만’이었다. 낙후한 동양인은 비합리적이고 타락한 어린애로,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어른인 서양인에 비해 열등하다고 간주되었다. 유럽은 근대 서구인의 동질적 시선으로 동양을 파노라마처럼 바라보고 열등한 타자(他者)로 정형화한 것이다. 서양을 가치의 중심에 두고 동양을 ‘불완전한 동양’으로 여긴, 동과 서라는 인위적 경계와 구분은 힘센 서양이 서양을 위해 서양과의 관계에 따라 동양을 규정하는 ‘정치적으로 옳지 않은’(politically incorrect) 사고방식의 소산이었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몇 가지 주요한 사항을 주장하였다. 첫째, 오리엔탈리즘은 유럽의 정치적 목적, 즉 유럽의 비서구 세계에 대한 정복과 지배를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유럽 도서관에 있는 한 서가의 책이 인도와 아랍에 존재하는 모든 문학을 합친 것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하는 오만한 발언처럼 서양인은 동양 사회와 문화를 저평가하여 서구의 개입을 당연시하였다. 비합리적이거나 순진무구한 동양인은 이 잔인한 물질세계를 통치하거나 변화를 추진할 능력이 없고 따라서 아버지와 같은 서구의 도움으로만 진보와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겼다. 


둘째, 오리엔탈리즘은 서구가 자기 이미지를 구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동양을 부정적으로 인식하여 상대적으로 우월한 서구의 정체성을 확인하였다. 본디 정체성의 구성은 반대쪽 타자의 창출과 관련되는 법이기 때문에 서양이 우수하면 동양은 열등하고 동양이 후진적이고 비합리적이면 서양은 진보적이고 합리적이 되었다. 동양인이 나약한 여성과 미숙한 어린애라면 서구인은 그들을 돌보는 강한 가부장적 성인 남성이었다. 이는 백색 피부의 우수한 인종이 열등한 유색인을 가르쳐서 문명세계로 이끈다는 제국주의의 논리로 작동했다. 


셋째,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거짓으로 기술하였다.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니, 그 둘은 영원히 만날 수 없네’라는 영국 시인 키플링의 시가 시사하듯 서구는 열등한 동양을 창조하여 본질적인 것으로, 영구불변의 것으로 박제하였다. 동양인은 본래 부정적이며 늘 그렇기 때문에 둘의 간격은 좁혀질 수 없었다. 수동적인 동양은 과학과 상업 분야 등 인류 진화의 주류에서도 고립된 변화의 무풍지대였다. 광대한 비서구세계를 단일한 ‘불변의 동양’으로 왜곡한 오리엔탈리즘은 영화, TV, 사진, 그림, 광고, 문학, 학술서적, 신문과 잡지 등을 매개로 반복적으로 재현되었다. 


‘오리엔탈리즘’에서 지적한 ‘발전한 서양과 낙후한 동양’이라는 식의 대비는 서구가 비서구 세계를 인식하는 고정불변의 공식이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이라크전(戰)에 대한 미국의 입장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일견 이라크인을 판단력과 자기운명을 결정할 능력이 없는 어린애로 여기고, 영원히 어른이 못되는 ‘피터 팬’을 대신해 무지몽매한 지도자 후세인을 심판해주는 정의의 ‘샘 아저씨’를 자처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라크의 테러와 무질서, 전근대성도 질서와 안정, 선진문명을 소지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는 상투적 표현이다. ‘미국이 미숙한 이라크인을 훈육하여 성숙한 어른으로 만든다’는 명제는 ‘우수한 인종인 서구인이 미개한 동양인을 지배하여 문명세계로 인도한다’는 19세기 서구 제국주의의 논리와 흡사하다. 오늘날의 대제국 미국이 가르쳐서 ‘어른’으로 키우려는 나라들이 아프가니스탄, 이란, 라이베리아, 북한 등 모두 비서구 국가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제국주의를 지지한 동양에 대한 서구의 차별적 인식, 곧 오리엔탈리즘의 유산이자 계속이다. 여기에 도전한 이가 에드워드 사이드이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쓴 목적이 서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 받는 아랍과 제3세계를 방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한 이 책의 출간 이후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과 비서구 문화의 상대적 진리에 주목하는 다양한 연구와 활동이 이어졌다. 특히 오리엔탈리즘이 제국주의의 정당화에 이용되었다고 밝힌 사이드의 통찰은 포스트콜로니얼(탈식민주의) 연구의 이론적 기반을 이루었다. ‘오리엔탈리즘’은 비서구인의 연구 활동, 하층민의 경험을 담은 역사서술, 페미니스트와 다른 마이너리티(소수자)의 담론에도 반영되었다. 


식민지가 모두 사라진 오늘날에도 지구상의 절반을 ‘저주받은 자들’로 여기는 서구의 편견은 잔존한다. 무슬림은 여전히 잔인한 테러리스트로 인식되고, 인도는 늘 역동성이 부족한 신비한 나라이며, 일본은 가라테와 동일시된다. 사실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은 많지만 그것을 전복할 방법은 마땅치 않다. 사이드의 말처럼 되돌릴 수 없는 경계를 만들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어떤 사회가 다른 사회보다 우수하다고 믿는 건 누가 누구보다 행복하다는 주장처럼 어리석다. 글로벌화와 사람들의 교류와 이동이 활발해진 오늘날, 서양의 지배적 위치를 탈중심화하고 비서구 세계를 응시하며 오리엔탈리즘을 경계할 필요성은 그래서 한층 유효하다.


“…오리엔탈리즘은 유럽인의 경험 속에 자리하는 동양의 특별한 위치에 근거한, 동양과 타협하는 한 방식이다. 동양은 유럽에 인접할 뿐 아니라 유럽의 가장 크고 풍요하며 오래된 식민지였던 곳이고 유럽 문명과 언어의 근원이자 그 문화적 경쟁자이며, 유럽의 가장 짙고 가장 빈번히 재발하는 타자(他者)의 이미지들 중 하나이다. 나아가 동양은 유럽이 그 대조적 이미지, 사상, 성격, 경험으로 스스로를 정의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본문 중에서)


이옥순 연세대 연구교수·인도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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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영남대 법대 교수, <오리엔탈리즘> 번역자의 에드워드 사이드 인물 추모평, 2003년 9월 30일 시사저널 728호]


<오리엔탈리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의 삶과 사상 /

타계한 <오리엔탈리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의 삶과 사상


20세기 최대의 사상가인 에드워드 사이드가 죽었다. 물론 일각에서는 그를 20세기 최대의 사상가는커녕 ‘103인의 현대 사상’(민음사, 1996년)에도 넣지 않는 경우가 있다. 


사실 우리 나라에서 사이드는 무시되었다. 민족·민중·제3 세계·제국주의·반미 구호가 그렇게도 요란했던 1980∼1990년대에, 20세기를 살았던 어떤 누구보다도 그 이념들을 철저히 사색하고 온몸으로 실천했던 사이드가 그토록 무시된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한국 밖에서는 사이드가 그 누구보다도 중요한 인물이었는데도 우리 나라에서는 왜 그토록 무시되었을까? 


우리 나라에서 그런 구호들은 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회자되었기에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이유에서 그가 무시되었을까? 사이드가 마르크스주의자기이기는커녕 마르크스주의조차 동양을 경멸한 서양주의라고 비판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아시아인이 아닌 팔레스타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그가 주로 중동에서 벌어진 제국주의를 비판해서였을까? 국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비판한 제국주의는 일본과 미국이고, 마르크스가 태어난 유럽은 제국주의가 아니라고 보는 기막힌 마르크스주의 내지 유럽주의 세계사관 때문이었을까?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사이드가 1978년에 써서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가 된 <오리엔탈리즘>이 국내에 소개되기를 기다리다가, 그 책과는 전혀 무관한 법학도였던 내가 직접 번역에 나섰지만,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그렇게 고생했던 1980년대 말의 일을. 그래서 몇 년 만에 겨우 출판되었으나 여전히 실천과는 동떨어진 채 회자되던 일을. 하지만 더욱 안타까운 점은, 그의 책이 번역되어 나온 지 10여 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그의 사상이 국내에서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나는 어느 외국 문학 전공 교수가 <오리엔탈리즘>을 동양중심주의의 책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이드가 비판한 서양에서의 오리엔탈리즘이다. 

19세기 서양은 동양을 침략하면서 동양 취향이나 동양학을 연구한다는 뜻으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것이 1978년 사이드에 의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곧 서양이 만든 동양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예술과 학문으로 제도화해 서양의 동양 지배를 정당화하는 권력 장치로 기능하는 과정이라고 오리엔탈리즘을 분석한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서양과 동양이라는 구별 자체가 서양에서 만든 학문과 권력의 기초였다고 하는 점이다. 그것은 문명과 야만, 선진과 후진이라는 구별과 마찬가지이다. 그런 구별 밑에 학문과 권력의 야합이 있음을 사이드는 비판한다.


사이드의 이러한 사상은 그의 기묘한 생애와 결부된다. 사실 그의 이름부터 그렇다. 에드워드 사이드라는 그의 이름은 그가 태어났을 때 대영 제국의 왕세자 에드워드(심프슨 부인과 사랑해 왕관을 던진 사람)를 딴 것과 아랍인 성으로 되어 있다. 이 기묘한 합성 이름은 그의 68년 생애를 상징한다. 왜냐하면 그는 동서양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그 언저리에서 둘 사이의 진정한 통합을 모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1935년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 영국이 지배한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1947년 열두 살 때 이집트에 망명했다. 또한 사이드는 아랍인이면서 기독교도, 그것도 극소수인 영국 성공회 출신이고, 미국 국적을 가졌으며, 예루살렘과 카이로의 일류 영어학교를 다녔다. 당시 이집트도 영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영국 식민지 두 군데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사춘기 시절 겪은 현실과 학교에서 영어를 배운 경험은, 뒤에 그로 하여금 평생 오리엔탈리즘을 연구하고 그것과 투쟁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그 자신이 오리엔탈리즘이 초래한, 철저히 구조화한 식민주의적 억압을 피부로 느꼈음을 뜻했다. 그가 열두 살 때 그의 조국은 없어졌다. 이어 열다섯 살 때인 1950년 미국에 건너가 프린스턴 대학과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하고, 영국의 제국주의 소설가 콘라드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컬럼비아 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 무렵 그는 팔레스타인인이라는 자각을 한다. 그 계기는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으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아랍통일운동과 구분되어 독자 노선을 걷게 되면서였다.


그 후 사이드도 변했다. 그는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팔레스타인인이 나라 없는 ‘난민’이자 테러리스트로 불리고, 자신을 주장하기는커녕 언제나 비난받는 존재로 왜곡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런 운명이 팔레스타인만이 아니라 동양 전체의 것임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19세기에 서양 제국주의 침략으로 식민지가 된 동양은 자신을 주장하기는커녕 서양에 의해 자신이 표현된다는 점에서 팔레스타인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서양인에 의해 동양에 대한 이야기가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을 보았다. 그것이 오리엔탈리즘이고, 그 학자나 예술가가 오리엔탈리스트들이라는 것이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 갖는 인식론적 폭력성에 전혀 무감각한 오리엔탈리스트들을 식민주의자라고 규탄했다. 

사이드는 1977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국회 격인 PNC의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1978년 <오리엔탈리즘>을 발표했다.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고 억압하기 위해 조작한 스타일인 오리엔탈리즘의 역사·정치·학문·예술·문학 등 서양 문화 전반을 비판한 이 책은, 그때나 지금이나 20세기 최대의 사상서이다. 이어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활동하면서 그는 1988년 알제리에서 열린 PNC에서 팔레스타인 국가 독립이 선언될 때 영어판 독립선언문을 기초했다. 그러나 그 후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테러 노선을 걷게 되자 그는 그것을 철저히 비판하고 돌아섰다. 민족주의가 지나쳐 인종적 특성을 강조하고 민족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어 1993년 <오리엔탈리즘>의 속편인 <문화와 제국주의>를 발표한 데 이어 <지식인론> <자서전> <음악론> 등 20여 권에 달하는 저서를 냈다. 


1992년부터 그는 백혈병에 걸려 고통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최근 부시가 발표한 팔레스타인 평화안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다가 과로로 죽었다. 그의 평생은 오리엔탈리즘에 대항한 투쟁의 삶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사상가였다. 그는 평생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었다. 그 자신이 지식인의 본분이라고 주장한 다양한 분야의 아마추어로서 망명자·고향상실자·아웃사이더로 자기 사회를 냉정하게 관찰하는 비판적인 소수자로 살았다. 그리고 그는 모든 인간과 민족, 그리고 문화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다문화주의에 의한 인류 통합과 공존, 유연과 관용을 주장했다. 21세기는 과연 사이드가 꿈꾼 그러한 시대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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