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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r. Sam Lee/17_20세기100선

[Ⅰ] 문학 26.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1962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2. 10.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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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gZQNJKzu2C8

 

[Ⅰ] 문학 26.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1962 

 

 

026.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수용소 군도 (The Gulag Archipelago,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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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100 스물 여섯번째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수용소 군도 (The 굴락Gulag 아파칼라고 Archipelago, 1962) 시작합니다. 수용소 군도에는 1930년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카자흐스탄으로 혁명화 대상이 되어 추방된 한국인등에 대한 역사적 증언이 나오는 우리민족과 동아리줄로 연결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수용소 군도 (The Gulag Archipelago, 1962)속으로 빠져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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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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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이사예비치 솔제니친(Aleksandr Isayevich Solzhenitsyn, 1918.12.11~2008.8.4) 1918 12 11 러시아 카프카스 산맥의 작은 휴양지 키스로보츠크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홀어머니와 궁핍한 생활을 했습니다. 로스로프대학교에서 물리와 수학을 공부하여 이학사 학위를 받았고 모스크바대학교 문학과 통신과정을 이수했습니다. 1940 나타야 레시토브스카야(Natalia Reshetovskaya, 1919.2.26~2003.5.28) 결혼하고 이듬해 대학을 졸업한 그는 중등학교에서 천문 물리학 교사로 근무했습니다. 1941 나치 독일의 러시아 침공으로 군에 입대하여 포병장교가 되어 포병중대장으로 참전하여 1944 7 8 적성공로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27살때인 1945 2 포병대위로 복무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독재자 스탈린의 판단력을 의심하는 내용과 '콧수염 남자' 조롱하는 표현이 문제가 되어 방첩기관인 스메르시(SMERSH) 의해 동프로이센에서 체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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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7 7 내무인민위원회에 의해 '반혁명 활동' 했다는 이유로 강제 노동형 8년과 3년의 유형을 언도받고 카자흐스탄 예키바스루 룰락에 수용되었습니다. 그후 그는 굴락에서 일반 죄수들처럼 지내던 수학을 잘하는 것이 발견되어 모스크바와 근교에서 일하기도 하고 굴락내의 연구원 전용 과학연구소에서 죄수 수학자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수용소 당국과 마찰을 빚으면서 다시 굴락으로 복귀해 석방될 때까지 다시 수용소에서 중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1952 옥바라지하던 나타야 레시토브스카야는 결국 솔제니친과 이혼하고 다른 사람가 재혼하였습니다. 수감 생활이 끝난 1953 3 2, 카자흐스탄 남부 비를리크 마을로 추방된 나흘 스탈린 사망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러나 종양이 도져 이듬해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로 옮겨 치료를 받고, 1956년부터는 유형지 랴잔시 중학교에서 수학교사 생활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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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니키타 흐루시초프의 스탈린주의로 그는 1956년에 사면되었습니다. 1957 솔제니친은 잠시 다른 남자와 결혼해 살던 나타야와 다시 결혼했습니다. 이어 1962 '노비 미르'지의 '알렉산드르 트바르돕스키' 만나 시베리아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중노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반 데니소비치의 수용소의 하루 초안을 작성했습니다. '알렉산드르 트바르돕스키' 단편소설로 발표함으로써 문단의 대단한 호응을 받았습니다, 이어 소련의 관료주의를 비판한 유익한 사업을 위하여 발표하여 논란의 초점이 되었습니다. 번째 단편이 발표되면서부터 보수파 평론가들은 "역사적 진실을 잘못 이해한 작품"이라고 비난을 가했습니다. 이어서 스탈린 시대를 주제로 『암 병동』과 연옥 1번지 완성하였습니다. 작품 모두 출판이 금지되어 외국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소련의 어두운 과거를 폭로하고 자유와 빵의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 서방에서 출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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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정부와 작가동맹은 그에 대해 집중적인 공격을 퍼부었고, 역시 이에 맞서는 공개 서한을 번에 걸쳐 작가동맹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자유가 극단적으로 제약된 상황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얼마나 일그러뜨리고 있는가라는 것이 그의 문학적 주제였습니다. 그의 작품은 모두가 스탈린시대의 소련을 무대로 하고 있어, 1969 11월에 소련 당국의 미움을 받아 작가동맹에서 반소 작품으로 비난 받으며 제명되어 발표 수단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심지어 솔제니친은 사실 죄수가 아니었으며 굴락에서의 노동을 통한 개화를 주장하는 작품은 조작되었다는 흑색선전까지 나왔습니다. 1970년에는 2 세계대전 당시 포병 대위로 근무하던 투옥돼 10년간 수용소에서 생활했던 경험을 그린 '수용소의 군도' 러시아 문학의 훌륭한 전통을 추구해 윤리적인 노력을 높이 평가받아1970 노벨문학상을 수상자로 결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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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나타야의 도움으로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등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솔제니친은 첫부인 나타야와 이혼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젊은 여자인 두번째 아내로 소련과학아카데미 소속의 과학자인 나타야 스베트로바(Natalia Solzhenitsyn, 1939.7.22~) 옮겨갔습니다. 나타야로 인해 솔제니친에게 버림받은 나타야는 자기중심적이고 냉혹했던 솔재니친을 향한 수치심과 배반감 속에서 비참하게 살다가 2003 5 28 84세의 나이로 모스크바 레닌 프로스펙트 거리에 있는 아파트에서 쓸쓸하게 사망했습니다. 나타야와 사이에 1970년생 에르몰라이 솔제니친, 1972년생 이그나트 솔제니친, 1973년생 스테판 솔제니친 3명의 아들을 두었습니다. 나타야가 데리고온 1962년생 양아들 드미트리 튜린은 1994 32살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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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정부와 작가동맹은 그에게 노벨상 포기 공개 전향이나 추방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했습니다. 솔제니친은 조국을 떠날 없다며 1958 노벨문학상을 거부한 보리스 파스케르나크와는 다르게 스웨덴으로 출국하여 노벨상을 수상했습니다.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솔제니친을 처리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유리 안드로포프는 솔제니친을 스웨덴에 보내서 노벨상을 받게 하고 대신에 소련 국적을 박탈해서 다신 돌아오지 못하게 하자는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내무장관 숄로코프가 추방에 반대했습니다. 1971 1 세계대전을 무대로 역사 소설 1914 8 파리에서 출판하여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습니다. 1972 9, 닉슨-브레즈네프 정상회담 개최 직전에 소련 정치국은 다시 솔제니친 문제를 논의했고, 안드로포프와 알렉세이 코시긴이 솔제니친 추방을 주장했으나 결국 정치국은 솔제니친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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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반 데니소비치의 수용소 하루 호응을 얻은 이후, 솔제니친은 굴락에서 자신이 겪은 일들과 수용소 당국의 현실, 재소자들의 사연과 증언들을 정리해 소련 수용소 시스템에 대해 구체적으로 저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원고를 지키기 위해 매우 조심했지만 결국 KGB 의해 발각되자 남은 원고들을 서방으로 밀반출 시켰습니다. 원고가 1973년에 발표된 유형지에서의 잔학상을 폭로한『수용소 군도』제1부였습니다. 소련 정치국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안드로프프는 다시 솔제니친을 추방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브레즈네프는 끝까지 이를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솔제치닌은 소련 지도부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버리고 러시아 정교회 신앙을 통해 나라를 다스리라는 서한을 보냈습니다. 소련 지도부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민겁니다. 수용소 군도의 존재는 1974년에 서방에까지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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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국은 분노했고 안드로포프와 그로미코가 솔제니친을 추방하자고 제안한 것에 대해서 소련 지도부는 너무 물러터진 조치라고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니콜라이 포드고로니는 마오쩌둥은 공개총살도 불사하는데 언제부터 소련이 이렇게 물러진거냐고 솔제니친을 체포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코시긴은 솔제니친을 조리돌린 시베리아 광산에 보내서 썩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서방 기자놈들은 추운 시베리아까지 가서 취재하진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안드로포프는 솔제니친을 이상 내버려뒀다간 국제관계가 아니라 국내가 끝장날 판이라고 브레즈네프에게 경고했고 재빨리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로부터 솔제니친을 받아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마침내 브레즈네프는 솔제니친의 추방에 동의하고 솔제니친을 서독으로 추방했습니다. 반체제 작품 때문에 추방의 형식으로 서독으로 망명한 피부에 염증이 나서 죽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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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위적인 독극물 중독 가능성이 큰데 때문인지 솔제니친 자신은 러시아에 귀환할 때까지 강박적으로 철저한 은둔 생활을 했습니다. 후일 공개된 KGB문서에 따르면 KGB 실제로 솔제니친이 누구도 믿지 않도록 철저히 고립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공작하여 성공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지 몰랐던 솔제니친은 그렇게 1974년에 반역죄로 소련에서 쫓겨나 2년간 스위스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마침내는 미국으로 건너가 버몬트 지역에서 18년간 칩거 생활을 했습니다. 1974 이후 무국적이었던 그는 1990 소련 국적을 회복했습니다. 냉전기가 종결되고 소련이 붕괴된 후인 1994년에 귀국하였는데, 미국 체류 중에도 미국의 천민자본주의를 강하게 비판한 일로 반공단체로부터 미움을 받았었습니다. 이후 그는 그동안 정리한 수용소 군도를 4부로 출간하였고 필생의 꿈인 러시아 혁명사를 집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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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제니친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의 격변기 당시 러시아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것으로 기대하며 옐친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1992년부터 1993 즈음 러시아 정부에서 무리하게 추진한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이 실패해버렸습니다. 이에 대항해 일어난 시위를 유혈 진압하는 모습을 보면서 옐친에게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반 옐친파로 돌아섰습니다. 소련 붕괴 1994년에 러시아로 다시 돌아와 시베리아 과학 예술 아카데미의 언어, 문학 분과회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같은 러시아 채널1 TV토크쇼를 진행하고 '아르구멘티 팍티'라는 신문에 글을 기고하면서 옐친을 비판했습니다. 결국에 정부 비판적인 성향으로 옐친에게 밉보이면서 아예 프로그램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1998년에 옐친 정부가 러시아연방 최고 훈장인 '사도 안드레이훈장' 수훈도 거부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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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푸틴이 집권한 이후, 러시아의 물질주의 세태 비판과 전통적인 애국주의에 대한 회귀를 주장했습니다. 푸틴을 강력하게 지지했습니다. 2008, 그가 사망하자 러시아 언론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양심 1명이었으며, 조국 러시아를 향한 발걸음이 이제 멈추게 됐다." 라고 애도했습니다. 2008 모스크바의 "대공산주의자 거리" 그의 이름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거리" 바뀌었습니다. 솔제니친은 친소련적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조국의 어두운 점을 서방에 폭로한 "라고 미움받고 러시아의 좌파들에게는 소련의 부정적인 점을 터무니없이 과장하고 훗날 다른 권위주의 독재 정권을 지지한 위선자라고 미움받고 있습니다. 소련 시절에는 반소작가로서 명망이 높았지만, 어디까지나 폭압적인 사회주의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것이지 조국을 싫어한 아니었습니다. 소련 해체 이후론 러시아 민족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강하게 드러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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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제니친의 소련 붕괴 우파 민족주의적 행보는 프랑스의 중도좌파 성향 작가 베르나르 앙리 레비 다른 좌파 지식인들로부터도 자주 비판받았습니다. 더군다나 그가 권위주의적 푸틴 정권과 통합러시아당을 지지한 것은 그에 대한 비판을 가중시켰습니다. 특히 체첸전 당시 체첸 분리주의자들을 강경하게 진압할 것을 주장하기도 정도였습니다. 그의 작품 '수용소 군도' 따르면 비록 유형지였지만 카자흐스탄에서 그가 자유의 몸이 사회생활을 재개했습니다. 그때 체첸인 특유의 사소한 일로도 수틀리면 대뜸 흉기를 대동하고 죽이겠다고 덤벼드는 습성을 직접 목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체첸인에 대한 나쁜 인식을 가지기 충분한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체첸인은 역사적 이유로 인해 현재까지도 러시아에서 골치 아픈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레프 톨스토이를 상당히 존경해서 여러 작품에 오마쥬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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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수레바퀴 연작은 아예 전쟁과 평화에 바친다고 정도였고, 1부인 1914 8월에서는 아예 앞부분에 노년의 톨스토이가 나옵니다. 헨리 키신저는 사람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실리주의자였던 키신저는 소련을 나와 서구에서 반소련운동을 펼친 사람이 달갑진 않았습니다. 기껏 소련과 화해무드를 만들어놨는데 소련을 자극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의 정치적 노선과 행보를 떠나서, 그의 작품 수용소 군도 통해서 인류에게 자신이 경험하고 체험한 소련 시절의 굴락과 이로 대표되는 죄수들의 처절한 현실을 고발한 공로는 결코 무시될수 없는 사실입니다. 2007년에는 러시아 국가문화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2008 8 3 향년 89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타계했습니다. 러시아 언론들은 솔제니친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양심적인 지식인 가운데 사람이었으며 조국 러시아를 향한 발걸음이 이제 멈추게 됐다며 애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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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군도 (The Gulag Archipelago, 1962)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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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군도는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1973년부터 1978년에 걸쳐 소비에트 연방의 강제수용소에 대해 장편소설입니다. 솔제니친은 책의 출간을 계기로 소련에서 추방되었으며, 이후 2, 3부를 외국에서 출간했습니다. 11년간 수용소 생활을 해본 본인의 경험뿐 아니라,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모두 합해 227명에 달하는 사람들"로부터의 추억과 편지, 그리고 회상기와 소련 당국의 자료들 또한 참고하였다고 합니다. 작품은 3권의 책에 7개의 장으로 나와있습니다. 1권은 1부에서 2부를, 2권은 3부에서 4, 3권은 5부에서 7부까지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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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무소 기업이라는 부제가 달린 1부는 12장으로; 영구 운동이라는 부제가 달린 2부는 4장으로; 박멸.노동 수용소이라는 부제가 달린 3부는 22장으로; 영혼과 가시철조망이라는 부제가 달린 4부는 4장으로; 도형(徒刑)이라는 부제가 달린 5부는 12장으로; 유형이라는 부제가 달린 6부는 12장으로; 그리고 스탈린 사후이라는 부제가 달린 7부는 3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소련에서는 1990년에야 이 작품이 단행본으로 출판되었으며, 문학 잡지였던 노비 미르 처음 실렸습니다. 이후 2009년에는 러시아 고등학교 교과서 과정에 일부가 실리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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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군도 (The Gulag Archipelago) 1부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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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무소 기업이라는 부제가 달린 1부는 12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수용소에 들어가기 이전에 벌어지는 일들을 다룹니다. 모든 것은 체포 시작됩니다. 이러한 체포와 신문 과정을 주관하는 것은 소련의 사찰기관으로 GPU, NKVD, KGB 등으로 변화하면서 끊임없는 감시와 첩보 활동을 통해 수용소군도에 죄수들을 공급했습니다. 솔제니친은 『러시아 일보』 사건, 산업당 사건 유명한 재판들을 사례로 들며 부당한 재판은 강도보다 흉악하다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1918 10 혁명에서부터 강제수용소가 생기기까지의 역사를 그렸습니다. 대숙청의 과정과 모스크바 각본 재판을 다루면서 강제수용소가 어떻게 체계화되고 관료화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체포에서는 체포의 분류, 수색의 지식학문이라고 있을 정도의 방대한, 기발한 체포 방법 체포에 관한 모든 것을 여러 명의 체포된 자들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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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은우리 하수도의 역사입니다. 체포된 사람들은, ‘이라 불렀고 체포를 통해 청소, 정화를 한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솔제니친은 하수도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1917 레닌은 해충박멸로 러시아 땅을 청소하자고 선언했습니다. 1919 농산물 징발때는 농민이, 1922년부터는 교회가 표적이 되었습니다. 3조사20세기에 제58조를 통한 조사는 가장 잔인하고 정밀한 고문을 사용했습니다. 4파란 색줄, 푸른 곳의 조사관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지시된 사항을 정확하게 시행하고 고통에는 무자비해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5 감방, 첫사랑은 그곳에서 자신과 같은 운명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의 인생을 이전과 이후의 삶으로 분리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6 , 1945 러시아 포로들은 국가로부터 3번씩이나 배신을 당했습니다. 번째 배신자는 전쟁패배를 자초한 전쟁터의 국가 지도자들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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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째 배신자는 그들을 포로로 죽도록 방관한 국가입니다.마지막 번째 배신자는 전쟁 가장 비열한 방법으로 조국이 신의 병사들을 배신하였지만 반대로 그들이 조국을 배신한 배신자라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7엔진 에서OCO는 재판의 판결 없이 자유롭게 인간의 재산, 직위, 칭호와 표창 그리고 거주등록권리까지 박탈해 갔습니다. OCO 내무부 스탈린과 사탄에게만 복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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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군도 (The Gulag Archipelago) 2부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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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 운동이라는 부제가 달린 2부는 4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수용소로 향하는 과정을 항해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과정조차도 얼마나 열악하고 비인간적이었는지, 호송이라기보다는 죽음으로의 한단계라고 하는 편이 옳을 정도였습니다. ‘죄수들은 로 지칭한 철도 차량을 타고 3~5개의대규모 항구로 불리는 중계 형무소나소규모 항구로 불리는 중계 수용지점을 거쳐 수용소에 도착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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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군도 (The Gulag Archipelago) 3부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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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멸.노동 수용소이라는 부제가 달린 3부는 22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부는『수용소군도』의 핵심입니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소련 수용소의 실상을 다룹니다. 솔제니친과 다른 죄수들은 파시스트들이 실려 왔다!라는 함성을 들으며 기나긴 수용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소련 전역에는 다양한 형태의 수용소가 있었습니다. 운하 건설에 집중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과학자 죄수들을 모아 연구를 시키는 곳도 있었습니다. 수용소 내에서도 여성과 미성년자, 흉악범과 밀고자 죄수들의 삶은 서로 달랐습니다. 경비병, 호송병, 보안 장교와 같은 수용소 당국은 물론 수용소 근처에 사는 자유인들까지도 모두 수용소군도라는 거대한 세계를 이루고 있는 일원이었습니다. 5 군도의 기반의 내용은 하나하나의 속임수와 편법이 모여 거대한 속임수를 이루고 그것이 군도를 떠받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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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내에서 여성과 미성년자 죄수들의 삶이 어땠는지 보여주는 8 수용소의 여자들 17 연소자들 등의 놀라운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소련 정권이 수용소 내에서 정치범들을 통제 억압하는 강도나 강간범들 같은 일반 형사범들을 이용하여 당국의 묵인 아래 정치범들의 모든 소지품을 빼앗고, 신체를 유린하고, 노동력까지 착취하면서 특별대우를 받았고 일종의 중간 관리자 역활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반혁명 분자들을 교화시킨다 거창한 명분을 소련당국으로 부터 부여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19 민족으로서의 제끄들에서 제끄는 죄수를 뜻하는 수용소의 은어로 제끄를 하나의 민족으로 보고, 파니치라는 가상의 인류학자가 그들을 관찰하고 연구했다는 실험적인 텍스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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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군도 (The Gulag Archipelago) 4부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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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과 가시철조망이라는 부제가 달린 4부는 4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4부는 수용소의 중에서도 내면적인 부분을 다룹니다. 수용소 생활은 육체적으로도 고되지만 정신적으로도 험난한 일입니다. 수용소에서의 정신적 타락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이는 비단 수용소만의 문제가 아니라 소비에트 사회, 소비에트 인간의 내면과 밀접히 연관된 문제라고 솔제니친은 설명합니다. 그는 자신의 종교적 믿음을 내비치기도 하며 우리는 어떻게 것인가, 또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수용소와는 관계없이, 알고 있어야 한다라고 역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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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군도 (The Gulag Archipelago) 5부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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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형(徒刑)이라는 부제가 달린 5부는 12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5부가 시작하기 전에 솔제니친은 서문을 통해 앞부분의 어둡고 고통스러운 내용을 견뎌 만큼 정신적으로 강인한 독자들을 위해 자유와 투쟁을 보여 것이라고 말합니다. 1940년대 후반부터 정치적인 이유로 잡혀 죄수들만을 격리시키는 특수 수용소가 만들어졌고, 솔제니친 역시 에끼바스뚜스 수용소로 가게 됩니다. 그는 그곳에서 독특한 암기 방법을 고안해 작품 활동을 이어가지만, 나중에 암으로 밝혀진 종양이 발견되어 입원하게 됩니다. 그런데 스탈린의 의도와 달리, 흉악범이나 일반 형사범들에게 탄압받던 정치범들이 곳에 모이자 분위기가 바뀌면서 항쟁의 여지가 생겨났습니다. 그중에서도 탈옥을 그린 7 하얀 고양이 폭동을 그린 12 껜기르의 40 『수용소군도』 전체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이라고 있습니다. 7 하얀 고양이에는 쩬노라는 죄수가 1인칭으로 자신의 탈옥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단편소설로 독립시켜도 만큼 극적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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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군도 (The Gulag Archipelago) 6부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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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이라는 부제가 달린 6부는 12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6부는 유형 생활을 다룹니다. 소련에서는 형기를 마친 죄수를 자유롭게 풀어 주지 않고 유형지에서 당국의 감시하에 살게 했습니다. 솔제니친은 까자흐스탄으로 유형을 가게 되는데, 그가 유형을 시작하자마자 스탈린이 사망합니다. 솔제니친은 꼬끄-쩨레끄 지구 교육부로 가서 교사가 되고 싶다고 요청했습니다. 처음에는 거절당했으나, 결국 수학과 물리 교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몰래 작품 활동을 계속하던 스탈린 격하 운동의 영향으로 1956 석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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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군도 (The Gulag Archipelago) 7부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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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사후이라는 부제가 달린 7부는 3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7부는 스탈린 사후를 다루고 있습니다. 스탈린 시대를 비난하는 여론이 높아지고 『이반 제니소비치의 하루』가 발표됩니다. 그러나 솔제니친은 나쁜 과거를 들춰서 무엇 하겠느냐, 당시 실무 직원들은 규칙에 따랐을 뿐이다, 모든 것은 스딸린 개인의 잘못이다라는 식의 반응을 듣습니다. 위정자는 바뀌었지만 수용소군도는 남았습니다. 솔제니친은 내가 책의 집필을 끝낸 것은 책을 완성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삶의 시간을 이상 책에 쏟을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라는 말과 함께 작품을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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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군도 속에 나타난 고려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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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군도가 한국인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일 것이라는 편견과 달리, 『수용소군도』 속에는 한국인에 대한 언급이 등장합니다. 솔제니친의 설명에 따르면 극동 지방의 한국인들을 카자흐스탄으로 추방시킨 것이 민족적 혈통에 따라 사람들을 체포한 최초의 케이스였습니다. 놀랍게도 스탈린은 히틀러가 인종 청소를 생각해 내기 이전에 먼저 그러한 구상을 했습니다. 소련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스탈린은 마음에 들지 않는 민족들을 혁명화라는 미명아래 통째로 강제 이주시키고, 추방했습니다. 소수 민족에 대한 탄압의 흐름 속에, 패권을 잡기위해 유태인 코민테른 간부의 유도하에 자유시사변을 일으켜 같은 한인독립군을 몰살했던 연해주 일대에 거주했던 한국인들 역시 포함되어 3만의 한인들이 아사하고 동사하여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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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죄수들은 전쟁이 소련에 변화를 가져오기를 바랐습니다. 아니면 세상이 핵전쟁으로 멸망해 버리기를 바라기도 했습니다. 작품 속에서 한국인이 언급된 부분을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독서 포인트가 있을 것입니다. " 다음엔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된 극동 지방의 한국인들. 이것은 민족적인 혈통에 따른체포의 케이스였다." 솔제니친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었던 한국인들이 러시아 횡단 화물열차를 타고 혁명화를 위해 중앙아시아로 이주했는지에 대해 '민족적 혈통에 따른' 체포였다고 위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솔제니친의 표현에 의하면, ‘간접 망상증 걸린 스탈린의 광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스탈린의 눈에는 자기 나라가 온통 간첩으로 들끓고 있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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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유태인 코민테른 간부의 모략에 넘어간 일부 소수의 한인 사회주의 패권주의자들이 일으킨 자유시 사변등을 구실로 극동에 있는 한국인들을 혁명화 대상과 간첩으로 몰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켜 그 과정에 3만의 목숨을 죽음을 당하게 했습니다. 러시아는 이후 스탈린의 이같은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시인하였지만 이미 시간이 흐른 뒤여서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고스란히 피해는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한국인만 당했던 것입니다. "수십만 명의 한국인들 역시 같은 혐의로 까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솔제니친은 한국인을 대신하여 이처럼 수용소 군도에서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물론 한인뿐만 아니라 러시아 자국민에 대한 대우도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스딸린식 논법에 의하면 외국에 체류한 일이 있는 소련 사람은 예외 없이 감옥에 들어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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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전쟁에서 패한 러시아 군인들도 간첩 혐의로 몰아 최저 10년형, 20년형, 총살형을 당했습니다. 솔제니친 본인이 그런 피해자였습니다. 한때 러시아 포병중대 장교로 근무했던 그가 친구와 스탈린을 비방하는 편지를 썼다는 이유로 하루 아침에 방첩대원들에게 불려가 계급장을 떼이고 죽음의 수용소인 감옥에 갇혀 8 동안 수형 생활을 했던 것이 증거인셈입니다. " 전쟁에서 우리가 발견한 가지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러시아인인라는 것보다 불행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스탈린이 지배하던 러시아 당시에는 징벌 불가능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법이 있는 곳에는 범죄는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투옥의 참다운 법칙은 할당된 인원수를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무더기로 감옥에 잡혀 들어가 군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형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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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스탈린은 대대적인 유태인 학살도 계획하고 있었던 것으로 솔제니친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계획은 스딸린의 죽음으로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수용소군도 광기에 빠진 사형집행인들의 모습이 어떤지 과감없이 그려내고 있습니다. 소련 비밀경찰들이 작품이 서방 세계에 알려지지 않기 위해 집요하게 수색했는지 있습니다. 소련의 비참한 광경을 솔제니친에 의해 공개되었고 그는 동안 살인의 위협으로부터 도망쳐야 했습니다. 인간의 권력욕이 얼마나 피해를 주는지, 인간의 양면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배고픈 이들이 끼의 식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 감옥 안에서 목숨을 지탱하기 위해 어떻게 몸부림치는지 솔제니친을 통해 있습니다. 현재 내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속으로 들어가는 톨이 얼마나 소중한 새삼 깨닫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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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튼의 전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솔제니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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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의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로 뛰어났던 코튼 펠트라는 유대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열렬한 공산당원으로 스탈린을 섬겼습니다. 그러다가 정치범으로 몰려 시베리아 수용소에 수감되어 병든 죄수들을 치료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어느 환자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열렬한 공산당원이었던 그는 냉정하게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에 코튼은 모진 고문 끝에 죽은 어떤 사람이 죽기 직전에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우리에게 지은 자를 용서하오니, 나를 받아 주시옵소서. 그리고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코튼에게는 기도가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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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사람을 미워하여 한을 품는 것이 역동적인 힘의 근원인데, 죽어가면서도 다른 사람을 용서한 그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얼마 전에 환자로부터 받은 전도가 생각나서 죽은 사람이 두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코튼은 환자들에게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환자들에게 돌아갈 음식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바람에 환자들이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여 영양실조에 걸린 것을 보고 비리를 고발하며 불의와 싸웠습니다. 이에 앙심을 품고 그에게 협박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전혀 굴하지 않고 성심껏 환자들을 돌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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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그가 장암 환자를 수술하는데 마취제도 없이 수술을 하다 보니 환자가 무척 고통스러워하였습니다. 그는 환자를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날 새벽 환자를 돌보고 자기 막사로 돌아가는 길에 코튼은 살해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누군가 코튼의 머리를 망치로 때려 머리가 완전히 부서져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코튼이 예수를 전한 환자가 바로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로 추앙받는 솔제니친이었습니다. 코튼의 전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솔제니친은 후에 포로 수용소의 만행을 책으로 세상에 드러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용소 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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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코튼의 전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솔제니친] 이야기에 대해서는 리처드 닉슨대통령의 특별보좌관으로 재직(1969-1973)했던 찰스 콜슨(Charles Wendell Colson; 1931 10 16 -2012 4 21) 1983 발간한 "Loving God" 나오는 내용입니다. 찰스 콜슨는 1974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 수감되엇지요. 1973년에 동료 백악관 직원들의 기도와 도움에 감동받고, 복음주의기독교로 전향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감옥 선교(Prison Fellowship) 결성하여 수감된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시작했지요. "Loving God" 1984 Gold Medallion Book Awards Winners 선정된바 있습니다. 목사들의 설교에 단골로 나오는 소재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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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알렉산드르 이사예비치 솔제니친(Aleksandr Isayevich Solzhenitsyn, 1918 12 11 ~ 2008 8 3) 수용소 군도 (The Gulag Archipelago, 1962) 살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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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100 스물 일곱번째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ía Márquez, 1927 3 6 ~ 2014 4 17) 백년 동안의 고독(One Hundred Years of Solitude, 1967)편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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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ksandr L Solzhenitsyn - The Gulag Archipelago.pdf

 

Gulag Archipelago.pdf

 

Medvedev on Gulag Archipelago Pt. Two.pdf

 

Pipes THE GULAG ARCHIPELAGO.pdf

 

THE GULAG ARCHIPELAGO masterplots_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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