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10_禹長春博士

우장춘 박사가 한국에 영구 귀국한 이유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2. 17.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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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 박사와 김철수 선생

좌로부터 제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 농진청 원예과장 고병민 선생,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 원예가 최영전 선생, 중앙 우장춘 박사


가끔 우장춘 박사를 아는 일본 학자들은 우장춘 박사를 ‘페이빠 독터’라고 합니다. 정식 대학원 과정을 다니지 않고 전문대학과정인 동경제국대학 농과 실과과정을 마치고 농사시험장에 근무하던 중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의 성과를 인정받아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 일본 학자들이 우장춘 박사님의 대단한 연구성과를 잘 모르거나 시셈하여 하는 이야기입니다. (http://blog.daum.net/enature/15850383)

지운 김철수 선생


1950년 우장춘 박사는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한국의 육종연구와 농업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합니다. 과연 한국말도 못하는 우장춘 박사를 한국에 영구귀국하게 만든 이유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배경에는 지운 김철수라는 애국지사가 있습니다. 1912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과 실과에 유학한 김철수 선생은 1915년 ‘귀곡단’, ‘열지동맹’ 그리고 1916년 ‘신아동맹단’을 만들어 독립운동에 뛰어듭니다. 


1916년 동경제국대학 농학과 실과에 입학한 우장춘은 조선의 도지사가 방일하여 조선계 학생들을 대상으로 친일연설을 하는 강당에서 유학생 김철수가 단상에 뛰어올라 그 도지사의 멱살을 잡고 항의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습니다. 이 자리에는 의제 허백련 화백도 유학생으로 그 장면을 보고 후일 여러 차례 증언합니다. 

대학 신입생 우장춘은 김철수를 수시로 만나게 됩니다. 김철수는 우장춘에게 ‘너의 부친 우범선이 매국한 것에 대해 속죄하려면 조선의 독립과 조선을 위해 네가 배운 바로 봉사해야 되고 절대로 너의 조선인의 성을 갈아서는 않된다’는 의식을 심어줍니다. 지운 김철수 선생과 의제 허백련 화백 그리고 우장춘 박사는 그분들이 작고할 때까지 오랜 우정을 유지합니다. 

지운 김철수 선생은 독립자금을 지원하던 제 외증조부 배보할아버지와 제 조부님의 인연으로 제 아버님과 어머님을 소개하여 혼인하게 한 장본인입니다. 그리고 우장춘 박사가 원장으로 있던 국립원예연구소의 청량리 서울 분원장으로 원예를 전공한 제 아버님을 임명하여 일본어 통역과 조교역을 시키셨습니다. 

두서는 없지만, 생전에 뵈었던 지운 김철수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이 이야기들이 막연한 옛날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의 근대사를 관통하는 역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더 기억이 무뎌지기 전에 이 사실들을 기록으로 남겨두고자 합니다.


지금은 옥정호 밑으로 수몰된 전북 임실 운암 내맛에서 축음기를 배경으로 좌측부터 어머님의 외조모, 어머니, 외삼촌, 나의 외조모


1. 전북 임실 운암면 내맞리는 제 어머님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배보할아버지’로 불리던 외증조부님(보굉 이봉욱 선생)은 만석 지기로 일제강점기 때 독립군 군자금을 보태며 독립지사 김철수 선생과 친분을 나누셨습니다. 큰 아드님인 제 외조부님(이현정 선생)은 고창고보를 다니시다 광주학생의거에 관련되어 제적을 당하셨습니다. 배보 할아버지의 여러 아우분 중에 한 분은 모스크바 육군사관학교를 나오신 분도 있습니다.

좌로부터 독립지사들에게 군자금을 조달하던 만주국 농림국 미곡검사관 조부 이성구, 조모 조언례, 부친 방원 이성찬

 
2. 만주국의 수도 신경 (지금의 장춘)은 11살 어린 나이로 부친을 여의고 홀로 수원 농림을 나와 만주국 농림국 미곡검사관으로 살면서 만주를 오가는 독립지사들에게 군자금을 조달하던 제 조부님이 해방 전까지 사셨던 곳입니다. 그곳에서 소학교를 다니시던 제 아버님은 한양 봉래 고등소학교로 유학을 오셔서 경성원예학교를 졸업하십니다. 해방되던 해 창경원 식물원 초대원장을 지내십니다. (http://blog.daum.net/enature/15852876)  

나라 망할 것을 예견하고 명석한 자제들의 유학을 촉구한 구한말 내장원경을 지낸 제 고조부 이명직 대감

 

3. 나라 망할 것을 예견하고 명석한 자제들의 유학을 촉구한 구한말 내장원경을 지낸 제 고조부 이명직 대감이 돌린 사발통문을 본 청년 김철수는 1912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과 실과로 유학을 나가 이명직 대감이 의문의 죽임을 당한 1915년 죽어 귀신이 되어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울자며 ‘귀곡단’과 ‘열지동맹’을 결성했습니다. 1916년 ‘신아동맹단’을 결성하여 독립지사의 길에 들어섰던 지운 김철수 선생은 해방되어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 14년을 옥살이했습니다. (http://blog.daum.net/enature/15851789, http://blog.daum.net/enature/15851471, http://blog.daum.net/enature/15851480, http://blog.daum.net/enature/15852869)

우장춘 박사


4.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하고 일본으로 도망간 우범선과 일본인 부인 사이에 태어난 우장춘은 1916년 동경 제대 농과 실과에 입학합니다. 1919년 농사시험장에 취직한 우장춘은 원예육종학의 시작을 알리는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을 1935년에 발표하고 1936년에 그 성과를 인정받아 동경제국대학으로부터 농학 박사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의 농업발전에 여생을 받치겠다는 심정으로 한국으로 향하는 귀국선에 몸을 싣고 영구귀국하여 돌아가실 때까지 한국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http://blog.daum.net/enature/15850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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