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10_禹長春博士

월간조선 2016년 9월호 - “우장춘 박사는 찰스 다윈에 비견될 만한 세계적인 석학”

忍齋 黃薔 李相遠 2018. 12. 27. 03:37
반응형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우장춘 박사 알리기 나선 세계적 육종학자 한상기
“우장춘 박사는 찰스 다윈에 비견될 만한 세계적인 석학”

월간조선 2016년 9월호
글·사진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 명성황후 시해 가담한 우범선의 아들
⊙ 홀어머니 밑에서 온갖 차별 겪으며 유전육종학 연구
⊙ 그의 도쿄대 박사학위 논문 ‘종의 합성’은 영국 케임브리지 우수생 졸업선물
⊙ 광복 후 홀로 귀국해 한국 원예의 기초 닦아
⊙ 감자·배추·무·고추에 제주도 밀감과 유채꽃도 그의 손 거쳐


한상기 박사가 과거에 출간된 《인간 우장춘》이라는 책을 들고 우 박사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비극은 1895년 10월 7일 시작됐다. 그날 명성황후(明成皇后)는 훈련대의 해산과 무장해제를 명했다. 대대장 우범선(禹範善·1857~1903)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1857년 5월 충청북도 단양에서 태어난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무인의 맥(脈)을 이었다. 우범선 자신도 1881년 별기군(別技軍) 참령(參領)으로 조상이 걷던 길을 따랐다.
그는 처음엔 김옥균(金玉均)이 주도하는 개화파였다. 훗날에는 흥선대원군파로 몰려 평안북도로 귀양갔다. 평안감사 민병석에 의해 장위영(壯衛營) 영관으로 재발탁된 후 1894년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 의원이 됐고 갑오개혁에 가담했다. 2대대장으로 임명된 것은 1895년 일본 주도로 훈련대가 창설된 뒤의 일이다.
우범선은 명성황후가 사라져야 조선이 산다고 믿었다. 다음날인 10월 8일 우범선은 이두황(李斗璜)과 함께 휘하 장병을 이끌고 일본군 수비대 및 낭인(浪人)들과 함께 궁궐에 침입했다. 명성황후를 참혹하게 시해한 을미사변에 가담한 것이다. 그는 황후의 시신에 석유를 부어 태우는 처리 과정에도 가담했다고 한다.
우범선과 일본 여인 사이의 장남이 우장춘

우장춘 박사는 영국의 찰스 다윈에 비견될 만한 식물유전학자였다.

우범선은 1년 뒤 일본 도쿄로 건너가 일본인 사카이(酒井仲)와 결혼했다. 그는 아들 둘을 낳았다. 그 가운데 장남이 우장춘(禹長春·1898~1959)이다. 우범선은 히로시마 인근 구레시(吳市)에서 일본 정부의 후원을 받으며 살다가 일본으로 건너온 고영근(高永根) 등에게 암살당했다. 1903년의 일로, 우장춘이 다섯 살 때였다. 지금도 우범선은 한국에선 친일파, 일본에선 지사(志士)로 불린다.
내가 느닷없이 우범선과 우장춘의 삶을 돌아보게 된 것은 한 노인 때문이었다. 올해 86세인 노인은 경기도 수원에서 《월간조선》이 있는 서울 마포구 상암동까지 책 보따리를 들고 왔다. 하필이면 기온이 섭씨 36도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이글이글 타고 있을 때였다. 노인이 건네준 명함을 훑어보다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가 바로 세계적인 식물유전육종학자 한상기(韓相麒) 박사였던 것이다.
— 왜 선생께서 우장춘 박사의 일대기를 재구성하십니까.
“우장춘 박사는 영국의 찰스 다윈에 비견될 만한 세계적인 학자입니다. 한때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는 졸업식 때 우수상 수상자들에게 우 박사의 논문을 주기도 했습니다.”
— 선생이 직접 우장춘 박사의 지도를 받았습니까.
“제가 식물육종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 대전고등학교를 다닐 때였어요. 우장춘 박사님 이야기를 듣고 난 뒤였습니다. 그래서 1953년 서울대 농과대 농학과에 들어갔지요.”
—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요.
“1957년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해 당시 농학과 과장님이던 고 지영린(池泳鱗·전 수원고등농림학교 교수, 충북대 학장 역임) 선생님께 인사를 갔어요. 그때 선생님이 당신의 연구실 열쇠를 주시면서 ‘이걸 자네에게 맡기겠네’라고 하셨습니다. 그 뒤 줄곧 연구실에 머물며 잡초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 그럼 우장춘 박사를 직접 뵌 적은 없다는 말인가요.
“부산으로 졸업여행 갔을 때 원예시험장에 계시던 우 박사님을 찾아간 적은 있습니다. 우 박사님은 제가 대학원을 졸업한 1959년 돌아가셨습니다.”
— 1960년 미국으로 가셨네요.
“지영린 선생님께서 절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식물육종 및 유전학과(Department of Plant Breeding and Genetics)에 유학 보내주셔서 식물육종학과 유전학을 공부했습니다. 1년 뒤 귀국해 서울농과대 전임강사로 일하다가 1965년 다시 미국 미시간주립대 작물학과로 유학 가서 1년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67년 귀국해 서울농대 조교수가 됐고요.”
— 박사학위 연구 주제가 뭐였나요.
“보리의 내충성(耐蟲性)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과 나이지리아에서 동시에 제안 와
— 그런데 그 좋은 서울대학 교수 자리를 3년 만에 때려치우셨네요.
“두 가지 솔깃한 제안이 한꺼번에 왔어요. 하나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식물육종학 연구소에 가서 연구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미국 포드 재단과 록펠러 재단이 아프리카 식량 안전을 위해 나이지리아 이바단에 설립한 국제열대농학연구소(International Institute of Tropical Agriculture·IITA)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 저 같으면 영국에 갔을 텐데.
“1970년 나이지리아 이바단 IITA에 가서 인터뷰를 했어요. 인터뷰 뒤 영국에 가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곧바로 한국에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1971년 5월 나이지리아로 갔습니다.”
— 거기서 뭘 하셨습니까.
“구근작물개량(球根作物改良) 부장으로 아프리카 사람들의 주식(主食)인 카사바(cassava), 얌(yams), 고구마를 개량했습니다.”
— 카사바를 어떻게 개량했는데요.
“카사바와 그의 야생종을 종간교배(種間交配)시켜 나이지리아에만 400만 정보를 심었습니다. 제가 만들어낸 것이 박테리아병에 강했어요. 그 공로로 영국 기네스 과학상도 받았고요.”
얌을 세계 최초로 인공교배

한상기 박사는 아내가 치매로 고생하는 와중에도 잊힌 우장춘의 삶을 세상에 알리는 데 열심이다.

— 얌을 최초로 인공교배시킨 것도 박사님이지요.
“그렇습니다. 거기다 고구마도 바이러스와 해충에 강한 품종을 만들어냈고요. 이후에는 식용 바나나도 개량해 벨지움 보드윈왕상(The King Baudouin Award of Belgium)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 거의 ‘한국판 슈바이처’ 같은 분이네요.
“IITA에서 23년간 일했어요. 제가 지도한 아프리카 농업인도 700여 명이 넘고요. 그중에는 석사·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도 40여 명이나 됩니다. 다 우장춘 박사님의 발자취를 따라간다는 마음을 갖고 일했던 결과입니다.”
— 박사님이야 신나게 일하셨겠지만 부인이나 가족들은 괴로웠겠네요.
“(갑자기 얼굴이 어두워지며) 아내가 5년 전부터 치매를 앓고 있어요. 처음에는 막 절 의심하다가 이제는 알아보지도 못해요. 절 보고 ‘할아버지 누구세요’라고 한다니까.”
— 어휴, 치매 참 큰 문제입니다. 장경순 헌정회 원로회의 의장 같은 강골(强骨)도 부인의 치매 때문에 고통이 크시답니다. 절 보고 ‘차라리 죽고 싶다’고 할 정도였어요.
“그래도 불쌍해서 어떻게 시설에 보내겠어요. 내가 있는 힘껏 돌봐야지.”
한상기 박사는 정말 아내를 위해 장수(長壽)하고 싶은 듯했다. 넥타이 대신 보이스카우트들이나 착용하는 노끈 비슷한 걸 매고 있었는데 거기 목숨 수(壽)자가 새겨져 있었다. 대화의 시작은 활력이 넘쳤으나 늙은 아내의 치매로 인해 분위기가 우울해졌다. 우리는 다시 대화를 우장춘 박사로 돌렸다.
— 우범선은 한국인 입장에선 일본에 동조해 명성황후를 살해한 죄인입니다.
“우범선이 별기군에서 조교를 했습니다. 그때 생도들이 중인 출신인 우범선에게 ‘너’라고 했고 우범선은 생도들을 ‘도련님’이라고 불렀대요. 우범선이 이런 일을 교련소장인 민영익에게 고하자 민영익은 위로해 주기는커녕 곤장을 쳤습니다.”
— 그런데 일본 군대는 신분의 차이 없이 상관 명령에 절대복종했다?
“그의 눈에 비친 일본 군대는 ‘이상의 세계’ 아니었을까요?”
— 박사님의 사견(私見)입니까.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라는 일본인이 쓴 《나의 조국(祖國)》이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된 겁니다.”

우범선은 메이지유신 성공시킨 일본지사처럼 되려 했다

왼쪽부터 우범선, 우장춘, 우장춘 박사의 어머니다.

— 그럼 우범선이 혹시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일으킨 지사처럼 될 생각을 했나요.
“앞서 말한 책에는 우범선은 일본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등박문(伊藤博文)을 비롯한 메이지유신파들은 대부분 상류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도 하급 무사 주도로 이뤄진 메이지유신 같은 것을 꾀한 게 아닐까요.”
— 명성황후를 암살할 때 훈련대의 역할은 뭐였습니까.
“왕이 머물던 경복궁을 호위하는 것이었지요.”
— 어쨌든 명성황후 암살 뒤 김홍집 친일내각이 들어서고 이후 대한제국이 멸망의 길을 걸었으니 우범선은 역사의 죄인이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요.”
— 이후 우범선은 어떻게 됐나요.
“왕궁에서 도망쳐 이두황 등 훈련대 간부 몇몇과 부산으로 간 뒤 일본으로 가는 배에 탔습니다. 아무래도 일본이 주선해 준 거겠지요.”
— 우범선을 암살한 고영근이 우범선과는 매우 친했다면서요.
“거의 같이 생활하다시피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선 수원군수 등을 지낸 정교(鄭喬)의 《대한계년사》에 기록이 남아 있어요. 고영근이 윤효정(尹孝定)과 함께 조선으로 귀국하기 위해 우범선 살해를 모의했다고. 그런데 윤효정이 고영근의 여자와 사통(私通)해, 화가 난 고영근이 이런 사실을 일본 경찰에 고발하면서 틀어졌습니다. 이후 윤효정은 청나라의 연태(煙臺)로 떠났고 고영근은 1903년 12월 24일 밤 술자리를 마련해 우범선을 부른 뒤 단도로 그의 목을 찔러 살해했습니다.”
— 졸지에 아버지를 잃은 우장춘 박사는 어려운 소년시절을 보냈겠네요.
“우 박사는 종종 어렸을 때 일본 친구들로부터 받은 따돌림과 구박을 잊을 수 없다고 술회한 적이 있습니다.”
홀어머니가 포목행상으로 살림 꾸리며 맹모삼천
— 우 박사는 이후 어떻게 살았습니까.
“하루하루 먹고사는 게 힘들었습니다. 어머니가 포목행상을 해 번 돈으로 겨우 연명했습니다.”
— 우 박사의 어머니가 대단한 분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아들의 교육을 위해 도쿄에 있던 남편 우범선의 묘지까지 팔았다고 합니다. 아들에게는 항상 ‘너의 아버지는 조선의 훌륭한 무관이셨다. 너는 그런 분의 아들임을 자랑으로 여겨라. 그러니 너도 훌륭한 사람이 되어 조선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거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 묘지를 팔았으면 시신은 이장한 건가요?
“그건 저도 몰라요.”
— 우 박사는 이후 교토로 갔지요.
“히로시마 구레시에서 소학교와 구레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어머니가 우 박사를 교토(京都)대학 공학부에 입학시키려고 교토대 부근에 가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교토대는 떨어지고 도쿄대 농학부 실과에 합격했습니다. 이후 집도 도쿄로 옮겼지요.”
— 거의 맹모삼천(孟母三遷) 같은 얘기입니다. 교토대 떨어지고 도쿄대에 합격했으면 더 잘된 거 아닙니까.
“우 박사는 전후(戰後)에 자녀들에게 ‘사람을 죽이는 병기를 만드는 공학부에 들어가지 않고 먹거리를 만들어 배불리 먹여 생명을 지키는 농학을 하게 돼 아주 좋았다’고 했습니다.”
— 우장춘 박사도 일본 여성과 결혼했지요.
“와타나베 고하루(渡邊小春)라는 초등학교 교사와 결혼했습니다. 두 분 사이에는 2남 4녀가 있고요.”
— 장춘(長春)과 소춘(小春)이라는 이름이 재미있네요.
“날줄과 씨줄인 셈이지요.”
— 대학 졸업 후에는 뭘 했습니까.
“도쿄대학 농학부가 아니라 농학실과였기 때문에 1919년 일본 농림성 농업시험장 고원(雇員)으로 취직했다가 1920년 기수(技手)가 됐습니다.”
— 그런데 승진이 안 됐죠.
“1937년까지 장장 17년간 그 낮은 직책에 줄곧 머물러 있다가 1936년 도쿄대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은 다음해인 1937년에 비로소 기사(技師)로 승격됐습니다.”
일본 농업시험장에서 17년간 승진 못 해
—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명분은 우 박사가 농학부 출신이 아니라는 것이었지만 아무래도 차별대우였을 겁니다.”
— 앞서 말한 책에도 이런 내용이 나옵니까.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독립적인 연구를 농업시험장이 허락한 것은 우 박사의 특별한 인품과 뛰어난 연구 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쓰노다는 이렇게 기술했어요. ‘우 박사가 일본에서 많은 수모를 당하면서 살았으니 일본인들에게 은혜를 갚기는커녕 위해(危害)를 주거나 무례한 짓을 하지 않았을까’라고. 그런데 쓰노다가 우 박사의 셋째 딸을 만났을 때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 뭡니까, 그게.
“그런 일이 절대 없었다고.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일본은 결코 우 박사를 부당하게 냉대한 게 아니에요. 주변 일본 학자들이 우 박사가 뛰어난 분이라고 인정했고 동료들도 가능한 한 우 박사를 도와줬다고. 무엇보다 우 박사의 성격이 너무 좋아 사랑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고요.”
— 우장춘 박사가 농업시험장을 떠난 게 1937년입니다.
“도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농업시험장에서는 더 이상 발전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교토에 있는 다키이종묘(瀧井種苗)라는 회사의 농장장으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거기서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곧바로 사직한 뒤 한국으로 귀국하려 했지요.”

2차대전 끝나자 한국행 결심

영구 귀국한 직후 우장춘 박사(가운데 앉아 있는 이)를 중심으로 환국추진위원회 멤버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설명이 잘못되었다. ( 서울 청량리 국립원예연구소 서울분원에서 연구소장 우장춘 박사와 함께 좌로부터 서울 분원장 방원 이성찬 선생, 농진청 원예과장 고병민 선생,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 원예가 최영전 선생, 중앙 우장춘 박사) 나는 방원 선생의 아들로 이사진의 원본 소유자로 인터넷에 여러차례 이 사진의 사연을 사진과 함께 소개한바 있다. 조선일보에서 무단으로 사진을 사용하며 이 사진의 배경인물과는 무관한 환국추진위원회 멤버들과 찍었다고 사실을 왜곡하여 설명하고 있다.

— 그런데 귀국하는 데 5년이나 걸렸습니다.
“우리나라에 한국농업과학연구소가 생긴 게 1949년입니다. 그때 연구소 설치 예산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이에 우 박사께서 귀국을 서둘렀는데 문제가 생겼어요.”
— 무슨 문제였습니까.
“일본 정부가 출국 허가를 내주지 않은 거지요.”
— 왜요.
“당신은 엄연히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는 일본인이니 출국을 허락할 수 없다는 거였습니다.”
— 우 박사는 창씨개명도 안 한 조선인인데도요.
“일본 정부로선 우 박사 같은 대단한 과학자를 한국에 그냥 내보낼 수 없었을 겁니다.”
—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우 박사는 ‘우 박사 환국(還國)추진위원회’를 만들어 활동하던 분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서울 중구 저동 2가 71번지에 본인의 호적이 있으니 호적등본을 몇 통 떼어 보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호적등본을 떼어 보니 틀림없는 우 박사의 것이었대요.”
— 어떻게 그런 일이
“우 박사의 아버지 우범선은 우 박사 출생 후 ‘성은 우(禹)요 이름은 명전(命傳)이며 광무2년 3월 19일 자정에 출생했다’는 것을 글로 남겼습니다. 그 후 우 박사의 어머니 사카이 여사의 주소지 히로시마현 안예군 화암정의 호적리에게 출생신고를 제출하면서 명전이라는 이름을 장춘(長春)으로 바꿨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임을 증명하는 일본 호적리의 증명서를 첨부하여 서면으로 본적지에 부 우범선(禹範善), 모 사카이 나카(酒井仲), 장남 우장춘(禹長春)으로 신고한 겁니다. 이렇게 빈틈없는 절차를 밟아놓았던 거지요.”
— 우 박사의 모친이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어렸을 적 우 박사는 동물을 아주 좋아했대요. 어디선가 동물을 데려와서 항상 당신의 이불 밑에 재우거나 카나리아와 같은 새들도 사육했는데 어느 날 한 어린아이가 카나리아를 만지다 한 마리가 날아갔어요. 그때 우 박사가 크게 화를 냈는데 어머님이 우 박사가 출근한 틈을 타 카나리아를 모두 새장 밖으로 날려보냈습니다. 어이없어하는 우 박사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새를 아껴 기르는 것이 하나의 취미일 순 있지만 어린아이에게 그렇게 죄를 짓도록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래서 내가 그 새들을 다 날려보냈으니 이제 아무도 꾸중 듣지 않아도 될 것이다’라고요. 그 후부터 우 박사는 새를 기르지 않았습니다.”
— 꼭 무슨 위인전기를 읽는 것 같습니다.
“그것뿐이 아니에요. 우 박사는 당신의 어머니와 함께 연인처럼 목욕탕에 들어가 서로 몸을 씻어주곤 했습니다. 그만큼 어머니를 사랑한 거지요.”
— 어머니만 사랑하면 부인이 화낼 텐데.
“우 박사의 부인이 불평한 적이 있어요. 고부갈등 때문이 아니라 ‘우 박사가 집을 나서 한 발짝만 나가면 자기 집도 아내도 자식도 완전히 잊어버린다’고 자주 불평한 겁니다. 그만치 우 박사는 당신이 맡으신 소임을 온전히 한 거지요. 그분의 좌우명이 농업전심(農業專心) 원칙재천(原則在天)이었습니다.”

우 박사 귀국에 전 국민이 환영

원예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우장춘 박사.

— 명성황후 살해범의 아들인데도 당시 환영 열기가 대단했지요.
“초대 농지국장이셨던 강진국(姜辰國)씨는 우 박사가 서거한 후 《조선일보》 1959년 8월 13일자에 ‘애도 우장춘 박사-그의 위업중절을 애달파하며’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예산을 얻기 위해 내가 이시영(李始榮) 부통령에게 직소하였을 때 부통령께서는 그가 혁명가 우범선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하시며 노구임에도 불구하시고 정열적으로 격려해 주셨고, 드디어 우 박사가 돌아올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1700만원의 예산이 대통령 특명으로 확정되었다’고요.”
— 이시영 부통령이면 조선 말기 한성재판소장 고등법원 판사를 역임하시고 을사조약 후 만주에서 군관학교를 설립한 분 아닙니까.
“이승만 대통령과 활동하신 우국지사 이시영 부통령께서 우범선을 혁명가라 칭한 것은 큰 의미가 있지요.”
— 호적등본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겁니까.
“환국추진위원회가 우 박사의 호적등본을 일본으로 우송하자 우 박사는 오무라수용소로 들어갔어요.”
— 오무라수용소가 뭐하는 곳입니까.
“일본에 머무는 한국인들 중 결격사유가 있는 사람들이나 일본이 싫어하는 사람들을 수용했다가 강제로 한국으로 송환하는 곳이었습니다. 우 박사는 가족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수용소 정문 앞에서 작별하고 단신으로 들어가 호적등본을 내밀고 한국으로 송환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한 달 동안 그곳에 머물다 드디어 1950년 3월 8일 부산항을 통해 귀국한 겁니다.”
— 우 박사가 홀로 귀국했으면 일본에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원래 환국추진위원회에서 성금을 모아 우 박사에게 보냈어요. 가족의 생활비로 쓰라고요. 그런데 우 박사는 그 돈을 몽땅 현미경을 비롯한 실험기구와 책을 사는 데 써버렸어요. 이렇게 가족의 안일보다 조국을 우선으로 한 분입니다. 게다가 우 박사가 귀국한 뒤 얼마 안 돼 6·25가 터졌고요.”
— 부산 동래에서 우 박사 환영회가 열리기도 했지요.
“당시 우 박사는 환영 인파에게 짤막하게 답사를 했어요. ‘환영해 주셔서 고맙다. 나는 어머니의 나라인 일본을 위해서는 일본인 못지않게 일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 나라인 나의 조국을 위해 일하겠다. 뼈를 조국에 묻을 것이다.’ 이렇게요.”
— 그런데 박사님은 이런 내용을 어찌 그리 소상히 아십니까.
“김태욱(金泰昱)씨가 쓴 《인간 우장춘(人間 禹長春)》을 보고 안 겁니다. 그 책에는 우 박사의 성품도 나와 있어요.”
— 어땠습니까.
“우 박사는 주저 없이 한국을 조국으로 택했고 그의 어머니도, 부인도 그걸 당연하게 인정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조선인으로 길렀고 그의 부인은 그가 조선인임을 알면서도 결혼을 했던 겁니다. 이런 내용도 있어요. ‘우 박사는 일본 농학도 사이에 신(神)으로 여겨졌었지만 딱딱하지 않았고 꾸미지 않고 솔직했으며 위대한 학자의 거만함을 볼 수 없었다. 사리사욕도 없었다. 공과 사의 구별이 엄격했다’고요.”

"우장춘 박사가 한국에 영구귀국한 이유"는 2015년 2월 19일 오마이뉴스에 "우장춘 박사와 김철수 선생"이라는 부제를 달아 기사(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83319)로 올린바있다. 참고하여 조선일보가 그 사연을 왜곡하지 못하도록 독자들이 지켜주길 바란다.
우장춘 박사는 일본 농학도 사이에서 신으로 추앙돼
— 진짜 그렇게 소박했습니까.
“이태우 동래원예고등학교 교장에게 우 박사가 난(蘭)을 기르라고 하면서 하신 말씀이 있어요. ‘인간은 먹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꽃은 사람의 마음을 온화하게 하여 주니 꽃을 사랑으로 기르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요. 우 박사는 한 번도 자기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고 농장에 나가 농군 같은 차림으로 일하다가 찾아온 사람들이 ‘우 박사 어디 계십니까’하고 물으면 ‘내가 우장춘이요’하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 우 박사가 진짜 천재입니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 박사는 화투(花鬪)를 만든 사람이 천재였다고 하면서 화투를 깊이 연구했어요. 그래서 한때 농업시험장 상관인 데라오(寺尾) 박사라는 분에게 화투 책을 쓰자고 제안했다가 혼이 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한때 유행한 ‘고스톱’, 그게 우장춘 박사가 개발한 겁니다.”
— 우장춘 박사가 남긴 업적은 어떤 것입니까.
“한국 원예연구의 기초를 닦았고 이 분야에서 학문을 발전시킬 후진을 양성했으며 민간 육종(育種)의 기틀을 만드신 분입니다. 그분은 대관령에서 무균종서, 즉 씨감자 채종을 시작한 뒤로 여러 채소의 종자를 개량했어요. 지금 대한민국이 고추, 배추, 무 등의 우량종자로 세계 종자시장의 패권을 잡고 있는 것이 다 그분 덕택입니다.”
— 우리나라 종자산업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세계적이지요. 특히 고추·배추·무는요.”
— 우장춘 박사 하면 ‘씨 없는 수박’ 이야기가 제일 유명합니다.
“씨 없는 수박은 원래 일본에서 개발한 교배술입니다. 우 박사가 한국에 와 육종학을 설명하자 모든 이가 그게 무슨 소리인지 잘 몰랐어요. 뭔가 놀라운 것을 보여줘야 그들이 따라온다는 생각에 씨 없는 수박을 만들어 보인 겁니다. 그때부터 우 박사의 말을 사람들이 믿기 시작했습니다.”
우장춘의 무덤은 수원과 일본 도치기현에 있어

우장춘의 삼각형(Triangle of U). 우장춘 박사는 십자화과 배추속에 속하는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해 얻은 식물체가 유채와 같음을 증명하고 이 현상을 ‘종의 합성’이라고 이름지었다. 그 뒤 배추속 식물 6종의 연관성이 밝혀졌는데 이를 도식화한 것이 우장춘의 삼각형이다.

— 그런데 귀국한 지 9년 5개월 만에 세상을 떴습니다.
“안타깝지요. 그분의 무덤이 두 군데에 있어요. 시신은 우리 농업의 본산이었던 수원 옛 농촌진흥청 구내 여기산(麗岐山) 기슭에 있고요, 그분의 머리카락과 손톱·발톱을 잘라 만든 묘가 일본 도치기현(板木縣 佐野市)에 있습니다.”
— 그분의 자손들은 지금 뭐하고 지냅니까.
“아들 두 분 가운데 한 분은 의사고, 둘째 따님 마사코(昌子)의 남편은 니세키(新關) 박사라고 벼의 약배양(葯培養)을 처음으로 한 분입니다. 셋째 따님 요코(葉子)의 남편 가네다(金田) 박사는 일본생물자원연구소 소장을 지냈고, 넷째 따님 아사코(朝子)의 남편은 일본 대기업 교세라의 창업주로 일본항공(JAL) 총수였던 이나모리(稻盛) 회장입니다.”
— 우 박사는 ‘우’씨 성을 지켰는데 자손들은 스나가(須永)라는 성을 씁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나가모도(須永元)라는 대지주가 계셨어요. 그분이 우 박사와 부인의 양부(養父)가 돼 두 분을 아들과 딸로 호적에 입적했습니다. 일제 말기 모든 재일 조선인에게 창씨개명의 압력이 가해졌어요. 우 박사는 스나가(須永)라는 성으로 창씨개명할 수 있었지만 자기 생부의 성을 써 우장춘(禹長春)이라고 했습니다. 부르기는 ‘우 나가하루’라고 했고요. 우 박사는 자신은 유전적으로 50% 한국인 피를 갖고 있지만 자녀들은 75% 일본 피를 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자녀들의 성을 스나가로 한 것입니다. 장남은 ‘須永元春’ 차남은 ‘須永季春’이라고 지었습니다.”
— 따님들의 이름에도 다 사연이 있다면서요.
“1931년 우 박사는 나팔꽃에 관한 연구를 완성하고 다음날 도쿄대에 박사 논문을 제출하려 했어요. 그런데 그날 밤 시험장에 불이 나 논문이 완전히 소실된 겁니다. 그해 나팔꽃에 관한 연구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를 접고 다행히 유채의 연구를 새로이 시작했습니다. 1936년 도쿄대 박사학위 논문이 바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종(種)의 합성(合成)’이었습니다. 그래서 셋째 따님의 이름(葉子)을 유채의 연구를 시작한 해를 기념하려고 유채의 엽(葉)을 쓴 것이고 넷째 따님(朝子)은 나팔꽃(일본어로 朝顔)과 관계가 있는 겁니다.”
‘종의 합성’은 다윈의 ‘종의 기원’을 입증한 쾌거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으로 진화론에 불을 붙였다.

— 우장춘 박사의 ‘종의 합성’이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대단하지요. 찰스 다윈이 펴낸 ‘종의 기원’을 실증해 낸 거니까요. 그분의 업적은 그뿐이 아닙니다. 제주도 유채꽃밭 가본 적 있습니까.”
— 들어가는데 1인당 1000원씩 받더군요.
“1951년 10월 우장춘 박사가 최정일 박사와 함께 채소 원종과 일반보급종자 대량 생산의 장소를 선정하러 제주도에 갔어요. 부산에서 출발한 배가 도중에 고장 나기도 했답니다. 하루 밤낮을 시달려가며 제주도에 도착하니 수많은 인파가 기다리고 악대(樂隊)까지 동원됐대요. 우 박사는 ‘제주도는 한라산 자락을 제외하고는 평지여서 채소를 격리 재배하기 어렵고 채소의 개화결실기에 장마가 지기 때문에 채소 종자 생산에는 부적합하다고 판단했어요. 게다가 섬이어서 운송 문제도 있었고요.”
— 제주도 사람들이 크게 실망했겠네요.
“대신 남국적인 기후에는 유채꽃이 안성맞춤이었지요. 무엇보다 유채꽃을 개량하고 밀감 재배에 최적지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 밀감도 우 박사가?
“제주도 해안선을 따라 죽 돌아다니다가 남부의 홍리(洪里)에 이르렀는데 해방 전 일본인이 소유했던 3ha 정도의 동양농원에 밀감나무가 산재해 있었다고 합니다. 수령이 30년은 족히 된 것들이었는데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아 방치된 채 쇠약한 모습이었습니다. 열매 껍질은 더뎅이병에 찌들어 있었고 잎에는 패각충이 가득했습니다. 우 박사는 제주도의 기후조건이 밀감 재배에 충분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관계당국에 온주밀감과 같은 품질이 좋은 묘목을 도입해 재배기술을 지도하도록 요청했습니다. 그것이 제주도가 귤의 왕국이 된 시발점이었습니다.”
제주도에 귤 심고 유채 개량한 것도 우 박사

우장춘 박사 기념관에 있는 우 박사의 동상.

— 대단합니다.
“우 박사는 일본 오키쓰(興津)시험장과 기타큐슈(北九州)의 밀감재배 중심지로부터 품종을 도입해 시범재배 한 다음 오키쓰조생, 마쓰야마조생 등 몇 가지 품종을 심어 한해(寒害)에 버틸 수 있는지를 조사했어요. 이후로도 우 박사는 일본에 갈 때마다 밀감 품종을 한국에 도입해 제주도 남부 서귀포 동홍리(東洪里)에 1500평의 시험지를 만들어 품종 선정 시험을 했습니다. 그 뒤 제주도에는 많은 밀감 과수원이 생겼는데 김종필(金鍾泌)씨도 이때 30정보의 땅에 밀감재배를 했습니다.”
— 그런 우 박사를 이승만 대통령도 매우 아끼셨지요.
“1952년 정전(停戰)회담이 계속되던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이승만 대통령이 동래 원예시험장에 오셨습니다. 이 대통령은 ‘전시(戰時)하에 예산도 부족한데 당신에게 많은 일을 시켜둔 채 지원하여 주지 못해 미안하게 생각하오’라고 하면서 특별예비비로 8000만원을 주기도 했습니다.”
— 한 박사님께서 이렇게 우장춘의 생애를 재조명하는 이유가 뭡니까.
“1980년대로 기억하는데 마쓰시마(松島省三) 박사라는 일본 육종학자가 제가 일하던 IITA를 방문했어요. 그분에게 저녁을 대접했는데 우장춘 박사님의 인품과 학문 그리고 후진농학자들을 격려하신 것에 대해 많이 말씀해 주셨어요. 그분 스스로도 우 박사님 그늘 밑에서 성장하셨다고, 우 박사님은 고노스 농업시험장 설립 이래 가장 뛰어난 농학자라고.”
— 오호~.
“저는 그분을 대학 학부시절 대학원생들에게 강의하는 걸 창 너머로 본 것과 대학 졸업여행 때 동래 원예시험장에 가서 뵌 적밖에 없지만 아프리카에 있을 때 늘 그분을 동경하며 그분이 하던 학문을 계속하는 걸 행복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1972년 우장춘 박사님께서 연구하셨던 고노스 농업시험장에 가보기도 했지요.”
— 어땠습니까.
“당시 고구마 생리로 유명한 후지세 박사님과 훗날 나이지리아 IITA에 온 호조 박사님을 만났습니다. 후지세 박사님께서 친절히 제게 고구마 육종에 대해 지도해 주셨고 고구마 종자까지 줬어요. 그분이 절 도쿄농업기술연구소로 데려가 나가이 선생님을 소개해 주셨는데 그분은 수원고등농림학교 출신이었습니다. 나가이 선생님께서 우에노(上野) 농업시험장에서 벼의 약배양을 처음으로 성공하신 니세키 박사님을 소개해 줬는데 그분이 앞서 말한 대로 우장춘 박사님의 사위입니다. 그때 도쿄농업기술연구소에 계신 우 박사님의 막내 사위인 가네다 박사님도 만났고요.”
— 한 박사께서는 미국 코넬대 농생물대학 식물육종학 및 생물통계학과의 명예교수이자 미국 조지아대 원예학과 명예교수이신데 한국으로 오신 게 부인 때문입니까.
“2014년 수원에 아파트를 얻어 들어왔지요. 종종 강의도 합니다.”
— 나이지리아 이키레읍 추장을 할 때가 그립습니까.
“말이 추장이지 ‘농민의 왕’이라는 명예고요, 열심히 일했다고만 말씀드릴게요.”
— 앞으로 하실 일은.

“2013년 제주대 농생물대학에 가서 우장춘 박사님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제주도의 명물 유채가 우 박사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렸습니다. 전 제주도에 마땅히 우 박사님의 기념비가 세워져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 젊은이들이 우장춘 박사님을 잘 모르는데 이렇게 위대한 분을 알리는 일도 해야지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