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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작은책
입력 2005-08-11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반드시 달달 외워야 하는 내용이 있다. 최초의 서사시는 김동환의 <국경의 밤>, 최초의 자유시는 주요한의 <불놀이> 하는 따위다. 여기에 이인직의 <혈의 누>(血の淚:피 눈물)는 최초의 신소설로 암기해야 했다.
요즘에는 사극 영화 제목으로도 쓰였던 ‘혈의 누’. 그러나 최근 연세대 국문과 설성경 교수는 <혈의 누>보다 8년 앞선 1898년 《한성신보》에 연재된 ‘토소자’의 <엿 장사>를 최초의 신소설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만간 교과서도 바뀔 처지다.
여하튼 이인직은 ‘혈의 누’ 덕분에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문학인으로 알려져 있어 생각보다 이인직의 극악한 친일 행위는 가려져 있기도 하다. 지금도 그이의 고향인 경기 이천 설봉산 자락에 있는 도자기 공원에 가면 이인직을 기리는 문학비가 큼지막하게 서 있기도 하다.
1862년 경기 이천에서 태어난 이인직은 초기 친일파에 속한다. 다섯 살에 친아버지를, 열여덟에 친어머니를 잇따라 여의고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지냈던 이인직에게 1900년 일본 유학은 자신의 불행했던 삶을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 두 번 다시 없을 신분상승의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이 앞에 서서히 열리고 있는 기회는 반대로 대한제국의 멸망을 의미하였다.
일본 유학 시절 이인직의 스승은 고마츠. 고마츠는 1906년 통감부의 외사국장으로 조선에 나와 한일병탄 조약의 실무자로 설친 자이니 이인직의 친일은 어쩌면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1904년 일 본의 대륙 침략에 자신감을 완전히 얻게 되는 러일전쟁 때 이인직은 일본 육군에 배속되어 통역을 담당하면서 친일의 길로 들어선다.
이인직과 혈의누
1906년에는 송병준이 주도하는 친일 단체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의 주필이 되면서 국내에서 본격적인 친일 활동을 벌인다. 한일합병 당시 일제와 합병을 앞장선 양대 세력이 있었는데, 바로 송병준의 일진회와 이완용이 이끄는 내각이었다. 이인직은 처음에는 송병준 계열의 《국민신보》 주필로 활동하다가 1907년 이완용의 후원으로 이완용 친일 내각의 기관지인 《대한신문》 사장에 취임하면서 이완용 내각과 관계를 맺어 나간다.
1910년 경술국치 이전까지 이완용의 비서로 활동한 이인직은 경술국치 이후에 ‘경학원 사성’이라는 직위를 얻는다. ‘경학원’은 조선 왕조의 정신적 기관인 성균관을 격하하여 유림들을 친일로 전향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이인직이 합방 조약 때 활약상에 견주어 생각보다 낮은 직위인 경학원 사성밖에 오르지 못한 것은 의문점으로 남는데, 아마도 정치적 수완은 조금 약했던 모양이다. 합병 때 이인직은 이완용의 밀사로서 자신의 유학 시절 스승이자 합방 조약의 실무자였던 고마츠와 자주 내통했다고 한다. 송병준 세력을 견제하면서 자기 세력을 중심으로 합방 조약을 체결하려는 이완용으로서는 고마츠의 제자인 이인직의 활용 가치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뒤에 고마츠는 《조선병합의 이면》이라는 책에서 이완용의 밀명을 받고 자신을 찾아온 이인직과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한일 합병’에 앞장 선 그이가 꿈 꾼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대표 작품인 <혈의 누>가 아마도 그 해답이 되지 않을까 싶다. 작품은 청일전쟁 때 청군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하면서 여주인공 옥련을 구해 주는 일본군 군의관을 등장시킨다. 이는 조선이 그동안 청나라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현실과 함께 조선을 구해줄 구원자는 바로 일본이라는 암시이기도 하다.
이는 당시 개화 사상을 갖고 있던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의식 구조이다. 즉 조선의 근대화는 덩치만 크고 무능하며 시대에 뒤떨어진 청나라가 아닌 서구의 근대 문물을 빨리 받아들여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 또는 미국, 영국 같은 서구 열강을 통해서 이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지식인들의 눈과 마음은 이미 자신이 개화를 통해 발전시켜야 할 조선에서 떠나 오히려 그 나라들을 흠모하게 되어 버렸다. 마치 없는 살림에 농사지어 서울로 고생고생하며 유학을 보낸 자식이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오히려 자신의 고향을 도시와 견주면서 천하게 여기는 경향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다시, 주인공 옥련은 일본에서 구완서라는 조선 청년을 만난다. 구완서는 조선을 업신여기면서 자신은 일본과 만주를 합하는 대연방을 건설하겠다고 말한다. 구완서의 꿈은 정확히 26년 뒤인 1932년 일본이 건국한 꼭두각시 국가인 만주국의 출현으로 실현되있다. 이인직이 <혈의 누>에서 말하고 있는 꿈은 본디 자신의 꿈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스승인 고마츠를 비롯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꿈이었을 것이다.
구한말 조선에서 어떠한 희망도 찾지 못한 청년 이인직이 선택한 것은 자신의 새로운 조국 일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제국 일본의 성공을 곧 자신의 성공으로 맞바꾸고자 했던 이인직.
1916년 이인직의 장례식은, 이미 정신마저 완벽한 일본인인 데다 일본 신도의 한 분파인 천리교 신자였으므로 천리교 식으로 치러진다. 문학뿐 아니라 연극 따위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했던 이인직. 그이는 태어날 때는 조선인이었지만 죽을 때는 이미 완벽한 일본인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인직의 소설 <혈의 누>는 바로 자신의 조국이 희망을 주지 못할 때 그 조국을 등지게 되는 과정을 피눈물로 보여 주는 것은 아닐까.
(출처: http://www.vop.co.kr/A0000002803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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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직 [李人稙, 1862.7.27~1916.11.1] 경기 이천(利川)
신소설가·언론인. 호 국초(菊初) 활동분야 문학
주요저서 《혈의 누》 《귀(鬼)의 성(聲)》
본문
호 국초(菊初). 경기 이천(利川) 출생. 일본 도쿄[東京] 정치학교를 수학한 뒤 1906년에 《만세보(萬歲報)》 주필이 되면서 신소설 《혈(血)의 누(淚)》를 동지에 연재, 계속 많은 작품을 썼다. 1908년에는 극장 원각사(圓覺社)를 세워 자작 신소설 《은세계(銀世界)》를 상연하는 등 신극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국권피탈 때 이완용(李完用)을 돕고 다이쇼[大正] 일본왕 즉위식에 헌송문(獻頌文)을 바치는 등 철저한 친일행동을 하기도 했으나 한국에서 처음으로 산문성(散文性)이 짙은 언문일치의 문장으로 신소설을 개척한 공로는 크다.
《혈의 누》 외에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귀(鬼)의 성(聲)》, 그밖에 《치악산(雉岳山)》 《모란봉(牡丹峰)》 등이 있고, 단편으로 《빈선랑(貧鮮郞)의 일미인(日美人)》이 있다. 한국 최초의 신소설가로서 개화사상을 고취하고 갈등과 성격 묘사, 그리고 사실적 문장을 처음으로 구사하였다.
친일문학의 선구자 李人稙, 1862~1916
1904년 러일전쟁시 일본군의 조선어통역관으로 종군
1906년 『국민신보』주필
1907년 『대한신문』사장
1911년 경학원 사성
● 신소설의 개척자
이인직이라는 이름은 아직도 우리 근대문학사의 서장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신소설의 개척자로서 우리는 아직도 『혈(血)의 누(淚)』(1906)를 최초의 신소설로 신주단지처럼 모신다.
그런데 조금만 주의하면 이 작품은 제목부터 일본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일본어에서는 명사와 명사 사이에 꼭 'の'(의)가 끼어 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우리식 어법이라면 이 제목은 그냥 '혈루'이거나 '피눈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목뿐만 아니라 그 문체도 희한하다.
어제아침 이방 피난 때
昨日朝에 此房에서 避難갈 時에는
한자어에 토를 달았는데 그 방식이 일본식의 후리가나이다. 이 번거로운 일본식 문체는 이미 봉건시대부터 한글전용의 전통을 견지하고 있던 우리 소설 문체에 대한 일대 후퇴인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 작품의 시각이다. 청일전쟁(1894)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작가는 청군의 부패를 맹렬히 규탄하면서도 일본군의 만행에는 짐짓 눈감고 고난에 빠진 여주인공 옥련을 일본 군의관으로 하여금 보호하게 함으로써 일본이야말로 조선의 구원자라는 의식을 교묘하게 심어 주고 있는 것이다. 옥련은 일본에서 다시 조선 청년 구완서에 의해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이 청년 또한 수상하다. 비스마르크를 흠모하며, 우리나라를 야만으로 은근히 멸시하는 이 민족허무주의자는 일본과 만주를 합하여 대연방을 건설하겠다고 꿈꾸는데, 그 꿈은 만주침략(1931)에서 실현되었던 것이다. 이 작품이 발표되었던 1906년에, 조선인으로서 이미 1931년의 사태를 예견하고 있는 구완서는 일본 군국주의의 첨병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친일문학 하면 일제 말기만 생각하기 쉽다. 천만의 말씀이다. 친일문학자는 이미 우리 근대문학 초기부터 암약하고 있었으니, 이인직과 최찬식(崔瓚植 : 1881~1951)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완용의 비서로 매국협상을 배후에서 주도했던 이인직과, 일진회 총무원 최영년(崔永年)의 아들로 이인직의 뒤를 이어 1910년대에 대표적 친일문학자로 떠오른 최찬식. 우리는 이인직․최찬식을 중심으로 구성된 근대문학사의 서장을 새로이 고쳐 쓰지 않으면 안 된다.
● 고마츠의 제자에서 이완용의 비서로
이인직은 1862년 음력 7월 27일 경기도 음죽(陰竹), 오늘날의 이천(利川)에서 부 윤기(胤耆)와 모 전주 이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이후 백부 은기(殷耆)의 양자로 들어갔다. 본은 한산(韓山), 명문에 속하지만 그의 직계 집안은 한미해서 아마도 서계(庶系)가 아닌가 추측된다. 그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5세에 생부를, 11세에 양모 남원 윤씨를, 18세에 생모를 잇따라 여의어 고아와 진배없었던 것이다. 일찍이 동래 정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자녀를 두었다.
그런데 그는 1900년 2월 장년의 나이에 문득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같은 해 9월 도쿄정치학교에 입학하여 이듬해 7월에 졸업하게 되는데, 그는 이 학교에서 앞으로의 매국활동을 위한 중요한 인연을 맺게 된다. 조중응과 함께 열국(列國)의 정치제도와 국제법 강의를 담당한 고마츠(小松綠)의 제자가 된 것이다.
고마츠는 1906년 통감부의 외사국장으로 조선에 나와 소위 '합방'의 실무자로 활약한 자이고, 이인직의 둘도 없는 친구 조중응은 매국노였다. 조중응은 유생 때에 이미 일본과 내통한 죄를 지어 오랜 유배생활을 하다가 갑오경장 때 관리로 발탁되었으나, 1896년 아관파천으로 일본에 망명하였다. 그는 1906년 특사로 귀국하여 일약 법부대신․농상공부대신에 올라 매국칠적(賣國七賊)의 하나로 드디어 '합방' 후 자작의 칭호까지 얻은 자인데, 유학생 이인직과 망명객 조중응이 도쿄정치학교를 매개로 결합하였던 것이다.
당시 유학생과 망명객의 교류는 매우 골치거리여서, 대한제국 정부는 1903년 2월 유학생 소환령을 내렸다. 물론 이인직은 이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미야코(都) 신문사의 견습생으로 일하는 한편 고국의 아내를 버리고 일본 여자와 동거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의 일본인 아내가 우에노(上野)에서 '조선루'라는 한국식 요정을 경영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유학 시절의 이인직은 견습생으로 신문일을 배우면서 망명객 조중응과 함께 고마츠의 제자가 되어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에게 귀국 기회는 왔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1904년 2월에 일본 육군성으로부터 제1군사령부 소속 한국어 통역으로 임명되어 종군하게 된다. 제1군은 2월 16일 인천에 상륙, 3월 중순에는 평양으로, 4월 하순에는 압록강 우안(右岸)에 집결하여 5월 1일 강을 건너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5월 11일 봉황성으로 진격하였다. 여기서 이인직은 통역에서 해고된다.
이듬해 그는 조중응과 함께 동아청년회에 가입하였는데, 이 단체는 "지식과 사교에 의해 동아인의 단결을 이루고 동아의 전국면에 문명의 보급을 꾀"한다는 취지에서 보듯이 일본의 지배를 동아시아 전체로 확대하려는 제국주의적 의도를 가진 첨병적 모임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본, 조선, 만주를 포함한 연방을 건설하겠다고 기염을 토한 『혈의 누』의 남주인공 구완서가 바로 이인직의 분신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인직은 1906년 2월 일진회의 기관지 『국민신보』의 주필이 됨으로써 국내에서 본격적인 친일활동의 발판을 마련한다. 어떤 연줄로 그가 이 신문사에 관계하게 되었는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아마도 이 신문의 창간인 송병준과 연관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일본에 망명해 있던 송병준도 이인직처럼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통역으로 귀국하여 일본 군부의 조종 아래 일진회를 통해 맹렬하게 매국활동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개월만에 그는 『만세보』의 주필로 자리를 옮긴다. 1906년 2월에 손병희(孫秉熙)의 발의로 창간된 이 신문은 『국민신보』의 대항지였다. 일진회는 원래 일본에 망명해 있던 손병희가 국내의 이용구를 내세워 벌인 동학의 반정부운동단체였다. 그러나 이용구가 일본 군부의 조종을 받는 송병준과 야합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1906년 망명지 일본에서 귀국한 손병희는 천도교를 창건하고 일진회에 대항하는 사회활동의 일환으로 『만세보』를 창간하였던 것이다.
이인직은 이 신문에 유명한 『혈의 누』를 연재함으로써 일약 문명(文名)을 얻고 이를 발판으로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더구나 이 시기에 도쿄정치학교 시절의 인연은 막강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니, 그의 은사 고마츠는 통감부 외사국장으로 부임하고 친구 조중응도 통감부 촉탁으로 귀국하였던 것이다.
드디어 이인직은 이완용의 후원을 얻어 『만세보』를 인수하여 1907년 7월 『대한신문』을 창간한 후 사장 자리에 앉는다. 이완용 내각의 기관지 역할을 한 이 신문을 통해 그는 본격적인 암약에 들어가게 되니, 친구 조중응은 이 때 법부대신이었다. 당시 정계는 친일활동의 주도권을 놓고 이완용파와 일진회가 격렬한 항쟁을 계속했는데, 이인직은 전자에 가담하게 되었던 것이다.
1908년 이후 그는 연극시찰이니 종교적 목적이니 하는 명목으로 일본을 뻔질나게 드나든다. 실제로 그는 천리교(天理敎) 신자였다. 일본 여자와 재혼했던 이인직은 종교마저 일본 신도(神道)의 일파인 천리교에 귀의했으니 참으로 철저한 자다. 그러나 이런 명분보다도 이완용의 밀사로서 일본 정객들과 매국의 막후공작을 위해서 일본 나들이에 나섰던 것이다.
1910년 8월 초순, 이완용은 '합방'운동을 맹렬히 전개하고 있던 일진회에 대해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심복 이인직을 고마츠에게 보내 결정적인 비밀접촉에 들어간다. 고마츠는 1910년 무더운 여름밤 이인직의 돌연한 방문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이인직-인용자)는 양미간에 찬 빛을 띠우며 우선 근본문제부터 말하기 시작하였다.
"일진회가 합방론을 제창하고 또한 일본에서는 병합설이 대단하여졌다는 사정 등을 합쳐보면, 오늘날 무엇인가 대변혁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저희들은 깨달았기 때문에, 최근 저는 이수상(李首相 : 이완용-인용자)을 만나서 빨리 거취의 각오를 결정하시도록 근고(謹告)해 보았습니다. 2천만 조선 사람과 함께 쓰러질 것인가 6천만 일본인과 함께 나아갈 것인가, 이 두 길밖에 따로 수상의 취할 길은 없습니다. 어느 쪽 길로 나가시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수상은 잠깐 침음하다가 서서히 말씀하시기를, 5적 또는 7적이라고 불릴 정도의 현내각이 와해된다면 현내각 이상의 친일파 내각이 새로 될 수 있을 것인가 참으로 통심할 일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이와 같은 이인직의 말을 듣고서 이것은 참 좋은 문제를 가져온 것이라고 내심 기뻐하였다. 나는 유달리 하하 웃으면서 손수 맥주를 따라서 그에게 권하고 나도 마셨다. 넓은 응접실에는 단 둘뿐 다른 누구도 있지 않았다.(小松錄, 『朝鮮倂合之裏面』)
이를 기틀로 협상은 급진전, 마침내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이완용파의 주도 아래 멸망하였던 것이다.
● 장례도 일본식으로
이처럼 혁혁한 공으로 이인직은 1911년 경학원 사성(司成)이 되었는데, 연봉이 900원이었다. 이완용이 2000원, 조중응이 1600원이었던 데 비하면 낮지만 꽤 높은 금액이 아닐 수 없다. 경학원은 일제가 조선 왕조의 정신적 권위인 성균관을 격하하여 설치한 기관으로, 전국의 유림을 선무하는 공작을 가장 중요한 임무의 하나로 삼았던 곳이다.
이인직은 이미 1909년경 대동학회(大東學會)에 은밀히 관여한 바 있다. 이 회는 원래 1907년에 '유교를 유지코자 하는 대목적' 아래 조직되었는데, 유교를 빙자한 매국 단체였다. 헤이그 밀사사건이 나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사죄문을 보내고, 의병을 '철부지의 불장난'으로 매도하고, '우리나라의 위기를 평안으로 전환시킬 유일한 길은 오직 일본과 결합하는 한 가지 일'임을 천명하면서 전국에 22개의 지회를 두어 유림의 친일화를 기도하였던 것이다. 대동학회는 1909년 공자교회로 전환하였는데, 이인직은 간부로 참여하여 지방조직 건설에 몰두한 바 있었다.
아마도 이 같은 경력이 그를 경학원 사성으로 발탁되게 하였을 것인데, 그의 정력적 친일활동은 맹렬하기 짝이 없다. 전국을 순회하며 유림을 선무하는 한편, 1913년에는 『경학원잡지』를 창간하여 유림에 대한 회유와 협박을 더욱 조직적으로 수행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 활동 가운데 절정은 다이쇼(大正)의 즉위 대례식에 헌송문을 지어 바친 일이다.
이처럼 견마지로를 다하던 그도 1916년 11월 21일 신경통으로 총독부 의원에 입원, 나흘만에 허무하게 이승을 하직하게 되는데, 총독부는 죽기 하루 전 그의 연봉을 1000원으로 특별 인상한다. 당시 신문은 그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인직 씨의 장의 - 천리교식의 장의
경학원 사성 이인직 씨의 장의는 본월 28일에 고양군 용강면 아현화장장에서 거행하였는데, 장의의 제반의식은 동씨의 평일 신앙하던 바 천리교식으로 행하였는데, 당일 참회한 회원은 경학원 부제학 박제빈남(朴齊斌男) 이하 경학원 직원 일동과 천리교 신도 다수와 이완용백(伯), 조중응자(子), 유성준 제씨와 총독부의 다수한 관리가 호종하였으며, 씨의 평일 공로를 위로하기 위하야 당국에서는 상여금이라는 명목으로 450원의 금액을 하부하였고, 대제학 자작 김윤식 씨는 부제학 자작 이용직(李容稙) 씨를 대리로 명하여 일반직원을 대동하고 제권을 행하였더라.(『매일신보』, 1916. 12. 2)
■ 최원식(인하대 교수․국문학)
- 주요 참고문헌 『국민신보』 『매일신보』
이인직, 『혈의 누』, 1906.
小松綠, 『朝鮮倂合之裏面』, 中外新論社, 1920.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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