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6월 샌프란시스코의 이대위 선생이 브라이언 미 국무장관에게 전보서한을 보내, 대한인국민회가 한인들의 가정부(假政府)임을 위임받아 1928년 선생이 과로로 인한 폐병으로 돌아가실때까지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는 나라 잃은 미주 조선인들의 망명정부였고 영사관이었습니다. (참고1:http://blog.daum.net/enature/15852021, 참고2:http://blog.daum.net/enature/15851235)
미국무부에서 샌프란시스코의 이대위 선생이 획득하신 대한인국민회의 영사업무 덕분에 공식적으로 국적을 "KOREA"라고 표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대위 선생이 획득하신 대한인국민회의 영사업무 덕분에 2차세계대전당시 일본계 집단수용에서 한국계는 피해갈수 있었습니다.
초기 미주 한인들은 망국의 설움 속에 자녀 교육에 힘쓰고,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냈습니다. 190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된 공립협회가 1909년 2월 대한인국민회로 이름을 바꾸어 을사보호조약 폐기운동, 국권회복 및 동포의 안녕과 복리신장을 목적으로 미주 최초의 한인 단체로 발전했습니다.
대한인국민회는 기관지 신한민보를 발행하여, 당시 미국, 멕시코, 중국, 유럽 및 러시아 등지의 해외 한인들의 독립운동과 애국심을 고취시켰습니다. 특히 1908년 3월 23일 아침 9시 30분 샌프란시스코의 페리 빌딩에서 의거한 장인환, 전명운 두 분의 더함 스티븐스 저격 사건이 대한인국민회 발족의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의거는 조국의 국권이 기울어져 가던 때, 미주에서 일어난 최초의 항일의거였습니다. 이 의거는 바로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으로 이어졌고, 1910년 조국이 일제에 강점되면서 대한인국민회는 미국 정부로부터 ‘임시정부’의 자격을 획득했습니다.
1913년 남가주 지방 헤밑(Hemit)의 미국 농장에 한인 11명이 노동자로 일하던 중, 일본인 노동자로 오해를 받아 현지 주민들에 의해 축출 당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당시 일본 영사는 축출당한 한인들을 방문하고, 한인 노동자들을 대신하여 미국 정부에 배상을 받아 주려하자 한인 노동자들이 이를 완강하게 거절하게 됩니다.
이후 대한인국민회가 나서 적극적으로 현지 주민들에게 일본과 조선이 다르며, 일본이 조선을 침탈한 사실을 설명하여 오해를 풀고 손해를 배상받고 취업의 자유를 보장받습니다. 이어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이대위 선생은 다음과 같은 전보를 미국정부에 발송해 한인과 일본인간의 대우를 달리 해줄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다음은 당시 이대위 국민회 총회장이 보낸 전보의 전문입니다.
“상항(샌프란시스코) 발 전보”
수신: 미국정부 국무장관 Bryan귀하
<근일 한인 11명이 Hemit지방에 일하러 갔다가 그곳 주민들에게 축출 당하였는데 이 사건을 일본영사가 간섭하려고 하나 우리가 일본관리의 간섭을 원하지 않는 이유는 귀국의 법률 밑에 사는 한인들은 대개 한일 합방 전에 한국을 떠난 사람들이고 한일합방을 반대하며 일본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을 것이니 전시나 평시를 막론하고 한인에 관한 문제는 한인 사회에 교섭하기 바랍니다.
1913년 6월 30일,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 이대위 >
이에 미국무부의 윌리엄 브라이언 국무장관이 아래와 같은 회신을 보내왔습니다.
“미국 국무성 성명”
<한인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의 전보를 받았다. 그 전보에 말하기를 재미 한인은 대개 한일 합방 전에 한국을 떠난 사람들이고 한일 합방을 인정하지 않으며 일본 정부와 관계가 없고 일본관리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 하니 이제부터 재미한인에게 관계되는 일은 공이나 사를 막론하고 일본정부나 관리를 통하지 말고 한인 사회를 통하여 교섭 할 것이다.
1913년 7월 13일 미국 국무장관 William J. Bryan >
미 국무장관의 성명으로 인해 대한인국민회는 미국에서 재미 한인을 대표하는 정부로서 독립운동을 벌일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김규식 선생을 비롯한 한일합방 후 중국으로 망명하였던 우국인사들 중 541명이 여권도 없이 대한인국민회의 보증서만으로 미국유학의 꿈을 이룰수 있었고 70여명의 사진신부가 미국 이주를 할수 있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 조국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미주 한인들은 대한인국민회가 중심이 되어 동참하기로 결의했고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습니다. 1928년 이대위 선생의 서거와 이승만의 집요한 대한인국민회의 와해 공작만 없었다면 미주 한인의 입지는 오늘과 달랐을겁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대한인국민회는 조국이 독립된 1945년까지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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