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5_80년5월18일

[허핑턴포스트코리아 인터뷰] 5ㆍ18 비밀문건을 폭로한 미국 기자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6. 18.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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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핑턴포스트 코리아, 작성자: 김병철, 2015년 06월 17일)



"5ㆍ18은 한국인이 한국인을 죽인 사건이다. 미국은 당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고, 이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없다"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다. 1989년 한국 국회가 5ㆍ18에 대해 진상조사를 할 때, 미 국무부는 이런 내용의 백서를 보냈다.


하지만 1996년 한 미국 기자의 탐사보도로 백서의 내용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당시 '저널 오브 커머스(Journal of Commerce)' 소속으로 워싱턴 D.C.를 취재하던 팀 셔록(Tim Shorrock)이 수년 간 미 정부의 기밀 문서를 수집해 공개한 '체로키 파일'을 통해서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후, 미국은 한반도의 유동적 상황을 공유하기 위한 특별 대화 채널(워싱턴D.C. ↔ 주한 미 대사관)을 만들었다. 일명 '체로키(Cherokee)'로 불렸던 이 문서에 접근 가능한 사람은 대통령(지미 카터), 국무장관, 주한 미 대사 등 극소수였다.



셔록이 공개한 기밀 문서에 따르면, 당시 크리스토퍼 미 국무부 차관은 1980년 5월8일 "미국 정부는 법과 질서 유지를 위한 한국 정부의 긴급 비상계획에 반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동의한다"는 문서를 주한 미 대사에게 보냈다. 이어 5월17일 전두환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고, 광주 전남대엔 7공수여단이 진주했다.


미국은 민간인 집회를 막기 위해 특수부대인 공수여단이 이동하는 것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다. 당시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는 '한국 정부, 특수 부대를 이동시키다'라는 제목의 기밀 문서를 워싱턴D.C.에 보냈다.



1980년 5월22일 백악관 정책검토위원회 회의록

(광주에 대해) 지금까지 미국이 취해온 태도 이상의 행동을 취할 필요가 없다는 데 모두 동의했다. 미국은 자제를 촉구했으나, 질서 회복을 위해 필요하다면 병력 사용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지난 5월21일, 광주시는 5ㆍ18의 진실을 밝힌 공로를 인정해 셔록을 초청해 '광주명예시민증'을 수여했다. 그는 "광주명예시민이 되어 굉장히 영광스럽다"며 "진실이 밝혀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지난 26일 그를 국회에서 만났다.



- 전두환 전 대통령이 회고록을 낼 예정이다.


그런가? 처음 들었다. 5ㆍ18과 미국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지 궁금하기는 하다.


- 처음 5ㆍ18 소식을 어떻게 접했나.


그때 나는 한국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1980년 미국 오리건 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의 정치와 경제에 대한 논문을 쓰는 중이었다. 한국보다 3일 늦지만 코리아헤럴드도 받아보고 있었다. 부모님이 선교사라 한국 내 기독교 단체를 통해 얻는 정보도 있었다. 80년대엔 기독교 단체들이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 당시 미국 사람들은 5ㆍ18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나.


CBS, 뉴욕타임스 등이 보도했지만, 기본적으로 미국은 한국에 관심이 없다. 많은 미국인들이 지도에서 한국을 찾아내지도 못한다.


- 1989년 미국의 해명(국무부 백서)은 거짓말인가.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다. 1996년 체로키 파일 보도 후, 국무부 정보기관에서 일했던 사람을 만났다. 국무부 백서의 대부분을 쓴 한국 전문가다. 그는 오직 국무부 자료를 기초로 백서를 작성했고, 군 부대 이동을 몰랐다고 말했다.


나도 특수부대(7공수여단)가 광주로 이동했다는 내용은 (국무부 문서가 아니라) 국방정보국(DIA) 문서에서 확인했다. 그는 자신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가 한정되어 있다고 말하는 건데, 미국이 광주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고 싶었던 것이다.


- 미국이 군 병력 이동을 승인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미국이 5ㆍ18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나.


= 광주 시민들을 공격하라고 명령한 건 전두환 신군부다. 직접적인 책임은 그들에게 있다. 미국이 그 명령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국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팩트'는 미국이 학생, 노동자, 시민들을 공격하라고 전두환에게 일종의 승인을 해줬다는 거다.


만약 이런 일이 공산국가에서 일어났다면 미국은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며 난리를 쳤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5ㆍ18에 대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더 많은 것을 했어야 한다. (그런 일을 저지른)전두환 정부에게 왜 경제 지원을 했어야 하나.


- '체로키 파일' 공개 후 미국의 공식 입장은 어떻게 바뀌었는가.


= 별 다른 반응은 없었다. 미국은 그냥 넘어가고 싶어했다. 뉴욕타임스, 엘에이타임스도 보도하지 않았다. 심지어 전두환 전 대통령이 재판을 받을 때도 쓰지 않았다.


- 역사상 많은 독재자가 있었고, 학살도 많았다. 5ㆍ18이 이런 사건들과 다른 차별성이 있나.


= 5ㆍ18과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가 없다. 5ㆍ18은 군사 조직이 아니라 시민들이 힘을 합친 항쟁이다. 택시 운전기사, 평범한 노동자, 학생들이 무기를 들었고, 헌혈을 했고, 음식을 나누고, 도시를 직접 운영했다. 역사상 이런 일은 찾기 힘들다.


- 한국엔 5ㆍ18과 북한군 연계 가능성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체로키 파일 등엔 북한군에 대한 언급이 없나.


= 1980년대에도 미국의 도청 기술은 엄청나게 발전해 있었다. NSA(국가안보국)는 소련 고위 인사들의 통신도 다 듣고 있었다. 5ㆍ18 동안 “북한군의 특별한 움직임은 없다”가 체로키 파일에 나온 유일한 언급이다. 그런 말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전혀 근거가 없다.


셔록은 1981, 1985년 두 차례 한국을 찾아 광주 시민들을 취재했다. 그리고 1991년부터 미국의 각 정보기관에 5ㆍ18 관련 정보공개를 청구해서 기밀기간이 해제된 문서를 수집했다. 이렇게 수년 동안 조각을 모으는 과정을 통해 체로키 파일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1996년 체로키 파일을 보도할 때까지 그가 살펴본 기밀해제 문서는 3500장에 달했다.



- 5ㆍ18 취재는 언제부터 했는가. 취재 과정에 대해 설명해 달라.


= 1991년에 정보공개청구를 시작했다. 미 국무부의 백서(1989년)를 보고 모든 가능성을 하나씩 확인했다. DIA, NSA 문서 같은 건 구하기 어려웠다. 어떨 때는 봉투만 왔고, 박스째 온 적도 있다. 어떤 건 거의 10년이 걸리기도 했다.


- 지금도 정보공개를 청구하고 있나.


아니다. 아직도 읽지 못한 문서도 많고, CIA 문서에 대해선 아직 쓰지도 못했다. 문서가 너무 많아서 언론인, 학생, 학자들이 연구에 동참해주길 바란다.


- 더 밝혀질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나.


= 밝혀야 할 비밀은 언제나 있다.


셔록은 미국 정보기관의 비밀을 파헤치는 기자다. 2008년 그는 미국 정보기관들이 정보수집 업무를 민간 기업에 용역을 준다는 것을 폭로하는 책을 냈다. 'Spies for Hire: The Secret World of Intelligence Outsourcing'


- 정보기관을 취재하는데, 감시 당하거나 압력을 받은 적은 없는가.


= 사찰 당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미국 사람들은 모두 당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1980년에 한국 유학생 한 명이 나를 감시했던 건 알고 있었다. 한국 대사관 쪽 사람으로 아는데, 그 외에 심각한 감시를 받은 적은 없었다.


- 왜 이런 폭로를 하나.


미국 정부가 한 일에 대해 나는 책임감을 느낀다. 우리 정부가 뭘 했는지 한국인이 알아야 한다. 나는 미국 시민으로서 미국 정부가 말하는 대로 행동하기를 바란다.


미국은 민주주의를 지원한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행동도 그렇게 해야 한다. 한국에서 박정희 정권의 18년 독재는 엄청나게 길었다. 고문, 납치 등 민주주의 탄압이 만연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미국의 방조, 지원 아래 이루어졌다는 것에 화가 난다. 그 동안 미국은 "기다려라"라는 말만 반복했다.



셔록은 지난 5월26일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가했다. 5·18을 다룬 최초의 기록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판(Kwangju Diary)의 재출판 지원을 촉구하기 위해서다. 셔록은 1999년 미국에서 출판된 이 책에 체로키 파일을 요약한 내용을 기고했다. 박원석 정의당 의원이 제안하고, 광주 지역구 의원들이 동참한 기자회견 공동성명서는 기사 아래에 첨부했다.


- '넘어넘어' 영문판 재출판은 어떤 의미가 있나.


= 일단 한국 사람들이 5·18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알아야 한다.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은 미국이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아니었다.


미국 사람들도 1980년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한다. 미국 사람들은 한국전쟁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미국을 다 좋아하는지 안다. 그리고 한국 기사는 잘 안 나와서 현실을 잘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이 중요하다.


부모님이 선교사였던 셔록은 유년기를 일본과 한국에서 지냈다. 그가 9살이었던 1960년 한국에선 4·19 혁명이 일어났다. 초등학생이었지만 4·19는 그의 기억 속에 크게 자리잡았다.


- 4·19 혁명 당시 무엇을 보았나.


= 신문을 통해서 4·19 소식을 들었다. 당시 모두가 부정선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트럭에 태워진 채 투표하러 가는 것도 봤다. 모두 이상해 보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돈을 받고 투표한 것도 알고 있었다.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시내에서 배치된 탱크와 군인은 봤다. 아버지의 사무실이 명동 성당 근처였는데 총성을 들어 깜짝 놀랐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신문을 읽었는데, 코리아헤럴드, 코리아타임스의 4·19 혁명 기사도 스크랩해놨다.


- 당시 언론이 4·19에 대해 보도했나.


= 하기는 했다. 그런데 지워진 기사도 많았다. 원래 학생 50명이 죽고, 경찰 3명이 죽었다는 제목에서 학생 수는 지워져 있었다. 경찰 숫자만 온전했다. 스크래치 되어서 무엇인지 볼 수 없는 사진도 있었다.


정부는 희생자를 가리려고 했다. 그 스크랩북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PDF 파일로 만들어서 블로그에 올릴 계획이다. 지금 블로그 사진도 4·19 때 사람들이 뛰어나오는 사진이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판 재출판을 위한 국회의원 공동성명


35년 전인 1980년 5월 대한민국 광주에서 전두환 신군부의 총칼에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수백 명의 시민들이 죽거나 다치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부끄러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오늘날 그 희생은 고통과 절망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한국의 민주주의가 꽃피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한국인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5.18 민주화운동은 우리가 민주주의와 국민을 위한 정치를 펴는 데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일찍이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대통령 취임 뒤 처음으로 지난 1998년 8월 광주 망월동 묘역을 찾으셔서 “나는 광주 시민들과 5.18 영령들을 배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독재자들의 살해 협박에도 결코 굴할 수 없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이처럼 중대한 의미를 지닌 5.18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가장 생생하게 기록한 기록물입니다. 특히 이 책의 영문판인 'Kwangju Diary: Beyond Death, Beyond the Darkness of the Age'(이하 ‘Kwangju Diary’)는 지난 1999년 미국에서 출판되어 전 세계에 5.18 민주화운동과 한국의 민주주의를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대가 없이 ‘Kwangju Diary'의 출판을 위해 수년 동안 애를 쓰신 설갑수(Kap Su Seol)님, 닉 매머타스(Nick Mamatas)님, 그리고 ‘Kwangju Diary’에 훌륭한 글을 써주신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시카고대학 교수님과 팀 셔록(Tim Shorrock) 님에게 존경과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최근 우리는 ‘Kwangju Diary’가 10여 년 전 절판되었다는 안타까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민주화, 인권운동사에 남는 역사적 ‘사건’인 5.18 민주화운동의 가장 중요한 기록물 중 하나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유일한 공식 영문판인 ‘Kwangju Diary’가 절판되었다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에 우리는 대한민국 정부와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공적 기관이 ‘Kwangju Diary’의 재출판을 위해 나서도록 할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빠른 시일 내에 ‘Kwangju Diary’가 재출판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관련 기관이 하루 속히 예산을 확보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2015년 5월 26일

국회의원 강기정, 권은희, 김동철, 박원석, 박주선, 박혜자, 장병완, 천정배



*도움 주신 분 : 박원석 의원실 조태근 비서관


관련자료:

팀 셔록 블로그

5·18 타임라인

미 5·18 비밀문건 폭로자 "북한군 개입 내용은 없다"

광주의 진실, 미국인들의 심장에 새길 수 있을까?


5.18기념재단

대형태극기를 앞세우고 민족민주화대성회 참석을 위해 교문을 벗어나 금남로로 향하고 있는 전남대학교 교수들, 이들 뒤를 학생들이 따르며 민주주의를 위한 구호를 외치고 있다.


5.18기념재단

전남 도청 앞 광장에서는 분수대를 중심으로 2만 여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열고 대대적인 횃불행진을 벌였다.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촉발된 5ㆍ18민주화운동

5.18기념재단

학교정문에서 전경과 대치하고 있는 전남대생들.


.18기념재단

+(십자)완장을 찬 위생병마저 페퍼포그 차량 옆에서 저항의지도 없는 학생을 곤봉으로 힘껏 내려치고 있다.


5.18기념재단

젊은 부부가 금남로2가를 지나다 공수부대가 휘두른 곤봉에 머리를 맞아 피흘린 채 끌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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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병력이 시위군중에 밀리기 시작하자 금남로에 재투입된 계엄군이 양손에 진압봉을 받쳐들고 시위군중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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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후3시경 계엄군들이 금남로와 충장로로 출동, 전 지역을 들쑤셔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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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7시경 무등경기장을 출발한 200여대의 차량시위는 계엄군의 만행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격한 운전기사들의 용기있는 행동이었으며 5월 항쟁의 최대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계엄군의 집단 발포, 시민군의 등장, 철수하는 계엄군

5.18기념재단

계엄령 철폐를 외치는 시민들이 광주 동구 금남로 가톨릭센터 앞에서 공수부대원 및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19회 전라남도민 체육대회 아치가 당시를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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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들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시내를 질주하자 시민들이 박수치며 격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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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내 각 동마다 부녀자들이 쏟아져나와 주먹밥을 만들거나 음식을 만들어 시민군들에게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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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자들로 초만원을 이룬 광주시내 각 병원에서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광주시민들이 팔을 걷어부치고 헌혈에 앞장섰다.


5.18기념재단

항쟁 당시 광주는 무정부상태였지만 시민들이 구성한 수습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광주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키고 어려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지혜와 용기를 모아내고자 했다.


5.18기념재단

항쟁기간 전남도청앞 광장은 사태의 추이를 알고자 하는 시민들로 가득 메워졌고, 항쟁지도부는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 통해 사태의 본질을 알리는 한편 시국을 성토하였다.


전남도청을 지켰던 사람들과 계엄군의 재진입 그리고 15년간의 5·18정신 계승투쟁

5.18기념재단

시내를 재장악하기 위해 화정동에 위치한 ‘돌고개’를 넘고 있다.


5.18기념재단

1980년 5월 29일 망월동에서 일제히 진행된 1백 29구의 장례식, ‘폭도’라는 이름으로 진실이 왜곡되고 통제되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유족들의 슬픔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5.18기념재단

독일 ‘슈피겔’지에 실린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든 아이 사진은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를 절묘하게 대비함으로써 광주의 아픔을 전 세계인에게 전해준 5·18의 상징적인 사진 중 하나이다.


[출처: http://www.huffingtonpost.kr/2015/06/17/story_n_760057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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