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펌] "한국인 처음 印度에 살게 된 건 운명… 이를 '카르마'라고 하지요"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6. 22.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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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21  / 최보식


[南도 北도 아닌 '중립국'을 선택해 떠났던 '인민군 포로'… 현동화씨]


"인천 부두에서 반공단원들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라'

배를 향해 외치는 모습에 모포 뒤집어쓰고 누웠어요"


"인도 방문해 공식석상에서 '내 핏속에는 인도 피가 절반 섞여있다'고 

말했던 JP… 허황후 기념비문을 직접 써"


때 이른 무더위에 상의를 벗는 게 어떤가 권하니, 현동화(83)씨는 옷깃을 여미는 시늉을 해보였다.


"인도(印度)가 워낙 더운 데라 여기 기후가 딱 좋습니다. 내가 인도에 간 지 62년이 됐지 않습니까."


6·25 때 인민군 포로였던 그는 휴전협정과 함께 포로 석방 과정에서 남과 북 양쪽을 모두 거부하고 '제3국'을 선택한 인물이다. 사업차 방한한 그의 얼굴에는 뚜렷한 상흔이 남아있었고 오른쪽 눈은 의안(義眼)이었다.


"평양 사동군관학교에 다니다가 6·25가 터져 인민군 중위 계급장을 달았어요. 그때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38선 부근 방어여단에 배치받고 내려가던 중 미군 B24기의 폭격을 받았지요. 곁에 있던 연락병은 즉사했고, 내 얼굴과 등에는 포탄 파편이 박혀 피가 흘러내렸어요. 그 뒤 정신을 잃었어요. 부대원들은 나도 죽은 줄 알고 파묻으려고 했는데 움직이더라는 거예요."

그가 국군에 귀순한 것은 얼마 안 돼 방어선이 무너졌을 때다. 그는 숨은 패잔병들을 설득해 귀순시키는 임무을 부여받고 국군과 함께 원산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상처 부위 악화로 서울로 후송된 뒤 '인민군 포로'로 분류됐다. 그는 거제도의 장교용 포로수용소(66수용소)로 옮겨졌다.


"포로수용소는 미군 통제하에 한국군들이 경비를 맡았어요. 하지만 인력이 턱없이 부족해 포로들에게 관리를 맡기는 식이 됐어요. 그러다보니 '친공(親共) 포로'와 '반공(反共) 포로'로 나눠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연일 린치와 살상이 반복됐죠. '친공 포로수용소'에서는 인민재판까지 열렸지요."


현동화씨는 “어려웠던 시절에 나만 살겠다고 고국을 등졌다는 ‘콤플렉스’가 있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선생이 수감된 장교용 수용소의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인민군 장교 출신들이라 완전히 '친공'이었죠. 한번은 밤중에 건물 밖으로 나가보라고 했어요. 반공 성향의 포로 한 명이 목이 졸려 죽어 있었어요. 나는 본마음을 안 들키기 위해 '그 새끼 잘 죽었구먼' 했어요."


―그 안에서 선생은 무사했습니까?


"수용소에서 늑막염에 걸렸어요. 군의관 포로가 주사기로 늑막의 물을 빼주면서 운동을 하지 말라고 했어요. 나는 밤중에 '변소 간다'고 나와서는 평행봉 운동을 했어요. 더 악화시킨 거죠. 열흘이 지나도 안 나으니까 수용소 바깥 병원으로 보냈어요. 병원 치료를 받은 뒤 나는 반공 포로 장교들이 수용된 부산수용소로 갈 수 있었어요."


포로 처리 문제가 휴전 협상의 테이블에 올랐다. 당시 공산군(북한+중공) 포로는 13만2000여명, 국군(한국+유엔) 포로는 1만1000여명이었다. 제네바 협약에는 전쟁 종료 시 포로들은 본국으로 송환하기로 되어있다. 그런데 상당수 공산군 포로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걸 거부했다. 이는 공산 진영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데올로기 체제의 비교로 비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산 진영에서는 제네바 협약을 내세워 포로 전원 송환을 요구했고, 유엔 측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포로들의 자유의사를 존중해야 한다고 맞섰다. 하지만 이 문제로 휴전 협상이 막혀버리자, 미국 내에서도 공산군 포로들을 모두 송환해주고 빨리 전쟁을 끝내자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시일이 갈수록 송환 거부 포로들은 '골칫거리'처럼 돼갔다.


송환 거부 반공 포로 문제는 중립국에 맡겨 나중에 결정하고, 휴전 협정을 매듭짓자는 타협안(案)이 제시됐다. 휴전 반대 입장인 이승만 대통령은 반발했다. '1953년 6월 18일 0시를 기해 우리 경비병들은 반공 포로 수용소의 철조망을 끊어라.' 국제사회를 놀라게 한 '포로 석방 작전'이 감행된 것이다. 그때 반공 포로 중 2만7000여명이 탈출했다.


―선생이 있던 포로수용소는 어떠했습니까?


"그날 아침 옆에 있는 사병 수용소가 텅 비었어요. 우리가 수용소 소장에게 항의하자 '연락이 잘못 됐다. 휴전협정이 되면 당신들은 남한에 남을 수 있게 된다'고 달랬어요. 그 뒤 모든 포로들이 판문점에 설치된 포로수용시설로 옮겨졌어요."


휴전 협정이 체결됐고(1953년 7월 27일),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양쪽 포로들은 맞교환됐다. 송환 거부 포로 2만2604명만 남게 됐다. 이들 처리 문제를 위해 인도(회장국)·스위스·스웨덴·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등으로 중립국송환위원회가 구성됐다.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에 대해 공산군이 90일간 직접 면담해 설득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 뒤 포로들의 개별 의사를 묻는 심사가 이뤄졌다.


"나는 그런 심사를 안 받았어요. 일일이 개별 심사를 다 할 시간이 없었어요. 수용소 철조망 바깥에 대형 천막을 몇 개 쳐놓고 북한·남한·중립국(인도)에 갈 사람은 어느 천막으로 들어가라고 했어요. 저는 중립국을 택했지요. 일단 인도로 간 뒤 멕시코행(行)을 신청할 작정이었습니다.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밀입국하겠다는 계획이 서있었지요. "


―그때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들은 얼마나 됐습니까?


"88명이었어요(당시 공문서에는 86명으로 나옴). 1954년 1월경, 우리는 인도군과 함께 판문점에서 열차를 타고 인천에 도착했고 거기서 2만4000t급 수송선 '아스토리아호(號)'를 탔어요. 인천 부두에서 반공청년단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외쳤어요. 그 모습을 보고는 선실로 내려와 모포를 뒤집어쓰고 누웠어요."


―어떤 심정이었습니까?


"어려웠던 시절에 나만 살겠다고 고국을 등졌다는 '콤플렉스'가 있지요. 나는 애국자가 아니에요."


―지금으로 보면 일종의 '이민'인데. 만약 지금이라면 다른 선택을 하겠습니까?


"… 역시 같은 선택을 할 거예요. 수용소에서 나와봐야 설 자리가 없을 것 같았어요. 가족도 다 죽은 줄 알았어요."


1954년 인도에 도착했을 때(선글라스를 쓴 인물).


―이 소재를 다룬 최인훈의 소설 '광장(廣場)'에서는 좌우 이데올로기에 대한 환멸로 주인공 이명준이 선상(船上)에서 투신하는 걸로 끝나지요.


"그 작품은 중립국으로 간 반공 포로들을 잘못 인식시켰어요. 우리는 사상적 갈등 때문이 아니라 절망적인 현실에서 자신의 장래를 위해 떠났던 겁니다."


인천항을 출발한 수송선은 홍콩과 싱가포르를 경유해 인도까지 가는 데 열흘이 걸렸다. 인도 마드라스(현재 첸나이항)에 내리자 인도 정부의 환영을 받았다.


"우리는 인도를 잠깐 경유지로만 생각했어요. 모두 멕시코행(行)을 신청하자, 주(駐)인도 멕시코대사가 찾아와 '멕시코는 당신들을 환영한다'고 했어요. 하지만 돌아간 뒤로 소식이 없었어요."


―그러는 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뉴델리의 군(軍) 기지에서 숙식했고, 유엔에서 한 달 용돈 50루피씩 줬어요. 제법 큰돈이었어요. 2년쯤 지나도 소식이 없어 멕시코 대사관에 찾아가니 '당신들 문제는 유엔에서 결정할 사안'이라고 했어요. 우리를 받아들일 의사가 없다는 걸 알았어요. 그 무렵 브라질에서 우리를 받겠다고 했어요. 인도 생활에서 지친 상태라 55명이 신청했어요. 아르헨티나에서도 받겠다고 했을 때 26명이 갔어요."


―인도에 남은 사람들은요?


"나를 포함해 3명만 남았지요. 인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 한 명이 마음을 바꿔 북한으로 돌아갔고, 두 명은 현지에서 죽었고, 한 명은 병에 걸려 한국으로 돌아갔어요."


―남은 사람들은 멕시코행을 끝까지 기대했습니까?


"인도 정부에서 '계속 기다려도 되지만 그러는 동안 무엇을 하는 게 좋지 않겠나'라고 했어요. 우리는 인도 정부로부터 1만 루피를 빌려 양계장을 했어요. 1년 반 만에 정부 돈을 모두 갚았고 인도에 눌러 살게 된 겁니다. 당시 함께 남았던 동료 2명은 지금은 저세상 사람입니다."


1962년 인도에 한국 총영사관이 설치되자 그는 대한민국 여권을 받고 '재외국민'이 됐다. 그는 무역회사를 차려 가발용 인모(人毛)를 한국에 수출했고 중동 붐이 일어났을 때는 한국 기업에 인도 노무자들을 송출했다. 인천항에서 수송선을 타고 떠났던 그는 1969년 비행기로 한국에 돌아왔다.


"김포공항에 내려 택시 타고 오는데 인분(人糞) 냄새가 났어요. '최고급'이라는 반도호텔은 침대 스프링이 튀어나오고 마루는 삐거덕거렸어요. 그때의 한국은 정말 형편없었어요.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가족들이 살아있었어요."


―가족은 어떻게 찾았습니까?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이 외교부 국장 시절에 남북적십자 회의로 뉴델리로 온 적이 있었어요. 나중에 그분이 한 잡지와 인터뷰를 하면서 내 얘기를 했어요. 그 기사를 가족이 보고는 연락이 된 겁니다."


그는 인도 한인회 회장으로 30년간 일했고, 뉴델리의 명문 골프클럽 회원이 될 만큼 기반을 잡았다. 또 88 서울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인도인 IOC 부회장을 우리 편으로 끌어오는 데 숨은 역할을 했다.


―원치 않게 인도에 남아 살게 됐는데, 돌아보면 어떤가요?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1997년 인도를 방문한 김종필 총리가 공식석상에서 '내 핏속에는 인도 피가 절반 섞여있다'고 했어요. 김해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를 염두에 둔 겁니다. JP는 내게 '허황후 기념비를 인도에 세우고 싶은데 당신이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JP가 까만 대리석에 비문을 직접 썼어요. 2001 년 인도 중부에 있는 허황후의 고향인 아요디아시에 허황후 기념비를 세우게 된 겁니다."


―한 달 전 방한한 나렌드라 모디 총리도 허황후를 언급해 화제가 됐지요.


"인도인들은 2000년 전 허황후가 한국으로 건너가 결혼한 사실을 대부분 믿고 있어요. 그전에 인도의 한 장관이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와서는 신문에 '재외 인도인 6백만명이나 된다'라는 글을 썼어요. 허황후의 후예 김해 김씨와 허씨를 말하는 것이지요. 인도와 혈연적으로 연결됐음을 보여주는 것은 외교적으로 의미가 있어요."


그러면서 그는 "인도인 허황후는 김해 김씨 시조가 됐고, 나는 한국인으로 처음 인도에 정착했어요. 이런 걸 인도에서는 '카르마'라고 하지요"라고 말했다.


그는 첫 한국 방문 때 지금의 부인을 만나 1남 1녀를 뒀다. 아들은 고려대를 나왔고, 딸은 미국인과 결혼해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다.



[출처: 프리미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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