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1_韓山 李氏

우리나라 성씨(姓氏)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8. 28.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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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성씨의 유래와 보급


성(姓)은 혈족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이것이 언제부터 발생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미 인류사회가 시작되는 원시시대부터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원시사회가 혈연을 기초로 해 모여 사는 집단체로 조직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를 낳은 모(母)만 확실히 알고 부(父)는 알 수 없었다. 이처럼 인류 사회는 혈연에서 출발하고 혈연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했기 때문에 원시 시대부터 씨족에 대한 관념이 매우 강했다. 자기 조상을 숭배하고 동족끼리 서로 사랑하고 씨족의 명예를 위하여 노력했다. 그리고 각 씨족은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하여 각기 명칭이 있었을 것이며, 그 명칭은 문자를 사용한 뒤에 성으로 표현되었다.


동양에 있어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었으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명인 산명(山名), 강명(江名)으로 성을 삼았다.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강씨(姜氏)라 하고, 황제의 어머니가 희수(姬水)에 살았으므로 성을 희씨(姬氏)라 하였으며, 순(舜)임금의 어머니가 요허(姚虛)에 있었으므로 성을 요씨(姚氏)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성은 모두 한자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중국 문화를 수입한 뒤에 사용한 것임은 틀림없다.


우리나라에 성씨가 최초로 발생한 것은 삼국시대로 보인다.


먼저 고구려를 살펴보면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건국 시조 주몽(朱蒙)은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기에 고(高)씨라고 하였으며, 주몽은 충신들에게 사성(賜姓)했는데, 재사(再思)에게 극(克)씨, 무골(武骨)에게 중실(仲室)씨, 묵거(黙居)에게 소실(小室)씨를 하사했다고 전해온다.


또 유리왕이 사성하였다는 위(位), 우(羽)씨, 또 대무신왕이 사성하였다는 낙(絡), 부정(負鼎), 대실(大室)씨 등이 나온다. 또 제 3대 대무신왕 때의 을두지(乙豆支), 송옥구(松屋句)를 비롯하여 이후 재상급만도 목도루(穆度婁), 고복장(高福章), 명림답부(明臨答夫), 을파소(乙巴素), 고우루(高優婁), 명림어수(明臨於漱), 음우, 창조리, 을지문덕, 연개소문 등의 이름이 있고, 왕비나 왕모의 성으로 예(禮), 송(松), 우(于), 연(椽), 주(周)씨 등이 나오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성씨 중에서 고구려에 연원을 두는 성씨는 극히 드물다. 고(高)씨는 고주몽의 후손이 강원도 횡성 지방에 약간 산재한다고 전해지고, 그 외의 고씨는 모두 탐라, 즉 제주 고씨계이다. 오직 강(姜)씨가 고구려의 장군이었다는 강이식(姜以式)을 시조로 하고 있다.


백제는 왕실의 성을 처음엔 우씨(宇)에서 여(余)라 했다가 뒤에 여씨(餘氏) 또는 부여씨(夫餘氏, 扶餘氏)로 썼다. 이는 시조인 온조왕(溫祚王)이 고대 국가인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이라 한다.


백제 초기에 왕권은 이른바 8대 성의 귀족에 의해 크게 제약을 받았다. 그 8대 성이란 사(沙), 연(燕), 이, 해(解), 진(眞), 국(國), 목(木), 백 백제8족을 말한다. 이외에 백제에는 '흘(屹)'씨가 있었고, 목리만치, 조미걸취, 제증걸루, 고이만년, 흑치상지 등의 이름이 보인다. 그런데 중국의 여러 역사서, 특히 후한서, 삼국지, 진서 등에는 백제의 왕명을 쓸 때 모두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하다가 13대 근초고왕부터 27대 위덕왕까을 말여(餘)씨로, 29대 무왕부터 부여(扶餘)씨로 기록하고 있다.


현재에 남아있는 백제 계통의 성씨로는 온조(溫祚)를 따라 남하하여 백제 건국에 공을 세우고 십제공신(十濟功臣)이 되었다는 전섭(全攝)과 마여(馬黎)가 있다. 또 개루왕 때의 인물인 도미(都彌)를 선계로 하는 성주 도씨(星州都氏)가 있으며, 백제가 망하자 당나라로 망명하여 당고종으로부터 서(徐)씨로 사성(賜姓)받고 웅진도독이 되어 귀국했다는 부여융(夫餘隆)을 시조로 하는 부여 서씨(夫餘徐氏)가 있다.


한편 이 외에 백제 8대 성과 같은 성으로 진씨,연씨,국씨가 현재도 있기는 하나 그 연원이 분명치 않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은 아무래도 통일국가인 신라에서 연원한 것이 많다. 신라계통의 대표적인 성은 박(朴), 석(昔), 김(金) 3성과 이(李), 최(崔), 손(孫), 정(鄭), 배(裵), 설(薛)의 6촌성이다. 그러나 3성과 6촌성이 처음부터 이러한 한자식의 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후대에 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 중국식 성을 사용하게 되면서 각각 계보를 소급하여 붙인 것이라고 한다.


그 예로 네 곳의 진흥왕의 순수비 비문에 기록되어 있는 수행자 명단을 보면 이름만 기록되어 있고 성이 없으며, 대신에 그 사람의 출신부명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진지왕 때 세워진 대구의 무술오작비(戊戌塢作碑)나 진평왕 때 세워진 경주의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으로 신라에서 7세기 초까지만 해도 아직 성씨가 쓰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 왕실에서는 24대 진흥왕 무렵부터 김씨라는 성을 사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중국 ≪양서(梁書)≫의 <신라전(新羅傳)>에는 "신라왕 모태(募泰)가 처음 사신을 보내왔다"고 기록되어 있는 데, 모태란 23대 법흥왕을 가리킨다. 그러다가 ≪북제서(北齊書)≫에 진흥왕을 김진흥(金眞興), 진평왕을 김진평(金眞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밖의 6촌성들은 이보다 훨씬 뒤인 중기에야 비로소 등장하며,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러서야 많은 새 성의 등장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이 삼국 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다시 추정해 보면 고구려는 장수왕시대(413~490)부터, 고(高), 을(乙), 예(芮), 송(松), 목(穆), 간, 주(舟), 마(馬), 손(孫), 동(董), 채, 연(淵), 명림(明臨), 을지(乙支) 등이 사용되었으며, 백제는 근초고왕시대(346~375)부터, 여, 사, 연, 협, 해, 진, 국, 목, 의 팔족과 왕, 장, 사마, 수미, 고이, 흑치등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진흥왕시대(540~576)부터 성을 쓴 것으로 기록에서 추정한다.


박, 석, 김 3성과 이, 최, 정, 손, 배, 설의 육부의 6성과 장, 비 등이 있고, 왕실의 성인 고(高),여(餘),김(金)을 쓴 사람이 가장 많았다. 삼국시대에도 성이 없는 사람이 더 많았고,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신들과 유학자와 장보고와 같이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을 쓰지 않았다.


성씨의 이러한 변천과정을 지켜볼 때 우리나라의 성씨는 고려시대부터 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말기 후삼국의 대동란을 당하여 평민으로서 각지에서 일어난 상주의 원종(元宗) 애노(哀奴), 죽주(竹州),죽산의 기명(箕蓂), 북원(原州)의 량길(梁吉)-良吉, 태봉왕 궁예의 부장인 홍언(弘彦) 명귀(明貴), 후백제왕 견명(甄蓂)의 부장인 관흔(官昕) 상귀(相貴) 상달(尙達) 웅환(熊奐), 고려 태조 의 부장인 홍술(弘述), 백옥(白玉), 삼웅산(三熊山), 복사귀(卜沙貴)등은 모두 성을 쓰지 않았다.


이 중에 고려 태조의 부장인 홍술, 백옥, 삼웅산, 복사귀는 고려 태조를 추대한 개국공신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의 초명으로서 그들이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으로 개명한 것은 고려 건국 후 그들이 귀의하게 된 뒤의 일이며, 아마 태조로 부터 사성되었을 것이다.


고려 태조는 사성한 예가 많이 있다.


지금의 강릉지방을 관장하고 있던 명주장군 순식(順式)이 귀순하자 태조는 왕(王)씨의 성을 주고, 발해 태자(渤海太子) 대광현(大光顯)이 귀순하자 또한 왕(王)씨의 성을 주고 있다. 신라인 김신(金辛)이 태조를 보필하여 공이 많음에 권씨(權氏)의 성을 주어 안동권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또 ≪동국흥지승람(東國興地勝覽)≫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개국한 뒤 목천(木川) 사람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키므로 태조는 이를 미워하여 우(午), 마(馬), 상(象), 돈(豚), 장(獐), 과 같은 짐승의 뜻을 가진 성(姓)을 주었는데, 뒤에 우(午)는 우(于), 상(象)은 상(尙), 돈(豚)은 돈(頓), 장(獐)은 장(張)으로 고쳤다는 설이 있다.


이는 어찌 됐든 고려 초기부터 성을 쓰는 사람이 많이 나타나 귀족, 관료 계급은 성을 쓰지 아니한 사람이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고려 중기 문종(文宗) 9년(1055)에 성을 붙이지 아니한 사람은 과거에 급제할 자격을 주지 아니하는 법령을 내린 것을 보면, 문종시대까지도 성을 쓰지 않던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종 9년의 이 법령은 실로 우리나라 성의 한 시기를 긋는 것으로서, 이때부터 성이 보편화 되었으나, 노비 등 천인 계급에 이르러서는 조선 초기까지도 성을 쓰지 않았다.


조선초기 성은 양민에게 까지도 보편화 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 등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09년 새로운 호적법이 시행되면서 어느 누구라도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을 취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를 기회로 성이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을 담당한 동(洞)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 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문집안의 성씨를 모방하여 성을 정했다.


따라서 성씨의 종류와 수가 더욱 늘어나게 됐다.


1930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성씨는 많아 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성의 수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있다.


1486년(성종)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277성

영조대에 편찬한 도곡총설(陶谷叢說)에는 298성

1908년(고종)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496성

1930년 국세조사에서는 250성

1960년 국세조사에는 258성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74성

2000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86개의 성씨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일제식민 통치하에서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일환으로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도록 한 1939년의 창씨개명은 1945년 해방과 1946년 10월 23 일 미군정이 공포한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에 따라 우리나라 성씨 역사의 가장 큰 수난기였다.


이후에도 국제화 시대를 맞아 외국인의 귀화 등으로 새로운 성씨와 본관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첨부한 파일 참조


a12.pdf


a12.pdf
3.14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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