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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이씨 인재공파·고양향교, 목은 이색 아들 인재공 사적비 / 고양신문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4. 29.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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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0년전 조상 추모하며 사적비 세우다
한산이씨 인재공파·고양향교, 목은 이색 아들 인재공 기려

[1097호] 2012년 10월 24일 (수) 13:29:29                                                                                               이옥석 시민기자  los1007@naver.com



▲ 사적비를 세우기위해 거창군을 찾은 한산이씨 인재공파 종친들과 고양향교 회원들.

13일 경남 거창군 남상면 무촌리 마을회관 앞에 고양시와 서울, 충청남도 한산 등에서 내려간 200여 명의 한산이씨 인재공파 종친들과 고양향교 회원들, 그리고 남상면장, 문화관광과장, 거창향교 전교, 거창군의회 의원, 무촌리 이장과 부녀회원들이 모였다. 10월 청명한 가을하늘을 이고 선 수령 천년이 넘은 은행나무 아래 평상에는 무촌리 마을 주민들이 오랜 만에 사람구경 나온 듯 반가운 미소를 건내었다. 

이날은 무촌리 마을회관 앞에 고려말의 유학자인 목은 이색의 둘째 아들 인재공 이종학의 사적비를 세우는 날이다. 620년이 지났음에도 후손들은 선조를 기리기 위해 몇 년을 준비해 세우게 된 것이다. 멀리서 이곳까지 온 한산이씨 종친들뿐만 아니라 거창군 남상면 면장과 문화관광과, 무촌리 부녀회에서도 이 행사를 위해 며칠전부터 분주했다.

정도전에 의해 유배지서 살해돼
고려말 ‘차마설’, ‘죽부인전’, ‘공녀제 금지상소’ 등으로 유명한 가정 이곡을 조부로, 고려말  충신이었으며 ‘목은집’, ‘목은유고’ 등으로 유명한 목은 이색을 부친으로 둔 인재공 이종학은 14세에 성균시에 합격했다. 
이후 16세에 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한 후 28세 때인 1388년 정3품 우대언(右代言)이 되었고, 이성계 등이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출정할 때 군대를 돕는다고 여겨졌던 육정육갑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을 주관할 만큼 빠른 출세를 했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1388년 위화도 회군을 시작으로 조선개국의 방향으로 흘렀고, 1390년 고려의 무신 윤이(尹彛)·이초(李初)가 명나라에 찾아가 주원장에게 이성계가 명나라를 치려한다고 무고한 사건을 기회로 삼아 조선을 개국하려는 이성계, 정도전 등은 반대파인 목은, 이숭인, 권근, 이종학을 청주의 옥에 가두고 고문을 했다. 무고가 알려져 석방되었지만 1392년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한 후 다시 탄핵을 당해 함창으로 유배되었다. 이종학, 이숭인등과 동문수학했던 정도전은 조선건국의 주도세력이었기에 조선개국을 반대했던 이종학과 이숭인을 유배보내고, 그들에게 자신의 심복을 보내 직접 살해했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에서 천리도 더 떨어진 곳에서의 무참한 죽음이었기에 그의 시신을 제대로 수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후 후손들은 특별한 사정에 의해 유골이 없을 경우에 평소에 입던 옷이나 신발 등을 활용해 장례를 지내는 방법인 의리장(衣履葬)을 지냈다는 기록에 의지해 제를 지내왔다. 그런데 몇 년전부터 함양군 유림면 국계리에 오래된 봉분을 마을 주민들이 목은의 묘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재공 22대손 이세준 전교
그 묘에 대한 발굴조사가 필요하지만 한산이씨 문중에서는 우선 사적비를 세우기로 결정해 거창군 남상면의 협조하에 이번에 이러한 큰 행사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인재공의 22대손인 고양향교 이세준 전교는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에서도 공께서는 끝까지 고려를 지키고 싶었고 지극한 효심으로 섬겼던 부모님과 사랑하는 부인 그리고 어리고 귀여운 여러 자녀들 모두를 자신의 가슴에 한과 응어리로 묻은 채 세상을 떠나셨기에 저희 후손들의 마음은 더욱 쓰라립니다”라며“이 사적비를 보시는 모든 분들께서 가슴 아픈 역사의 주인공을 조금이나마 더 생각하는 계기가 되고, 역사의 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620여 년이 지난 일이다. 요즈음같이 빠름빠름을 외치는 시대에 620여 년이라는 시간은 피부로 느껴지기도 어려울 것 같다. 잊고 살아도 아무 지장이 없는 이 시대에 그 먼 과거의 선조를 위해 가슴아파하며 사적비를 세우는 모습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런데 무촌역에 모여 사적비를 세우는 백발의 노신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620년 전 역사의 수레바퀴에 의해 아무 연고도 없는 이 곳 무촌역에서 3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했던 선조의 비참한 삶을 자신의 일처럼 느끼며 진정 가슴아파했다. 선조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서글픈 삶이 느껴졌을 것 같다. 이 날의 행사는 한산이씨 인재공파 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음 깊은 곳에 그윽한 감동을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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