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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원선생 친구분 시리즈 8] 방원 이성찬 선생과 조동화 선생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10. 10.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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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조동화 1세대 무용평론가 춤 잡지발행인

[명복을 빕니다]국내 첫 무용 전문 월간지 ‘춤’ 창간 조동화 선생

동아일보입력 2014-04-25

무용 비평 기틀 다진 한국 무용계 큰별

1976년 ‘춤’을 창간해 국내 무용평론의 토대를 마련한 고 조동화 선생. 동아일보DB


한국 무용평론계의 대부이자 국내 첫 무용 전문 월간지 ‘춤’을 창간한 조동화 선생이 24일 서울 종로구 충신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고인은 1922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약대를 졸업한 후 동아방송 제작부장과 편성부장을 지냈다.

1960년대부터 월간 ‘신동아’에 16년간 무용평론을 기고한 1세대 무용평론가로 1964년 신인 무용수들의 산실이 된 동아무용콩쿠르 창설에 큰 역할을 했다. 1976년 창간한 ‘춤’은 한국 무용에 대한 평론이 거의 없던 시절 무용 비평의 토대를 만들었다.

배정혜 전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은 “무용계에 조동화 선생 같은 큰 인물은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며 “한국 무용가 대부분이 고인의 날카롭고도 정확한 평론을 통해 발전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날 빈소를 찾은 국수호 디딤무용단 예술감독은 “고인은 기록으로 순간의 예술인 춤을 영원의 예술로 바꾼 분”이라며 애도했다. 최청자 세종대 석좌교수는 “고인은 현대무용과 한국무용, 발레 할 것 없이 무용계의 아버지였다”며 “개인적 능력을 간파한 적절한 비평과 조언은 무용수들에게 금과옥조가 됐다”고 말했다.

‘춤’은 1976년 3월 창간호부터 이달 통권 458호를 낼 때까지 38년간 열악한 재정과 어려움 속에서도 단 한 호도 거르지 않았다. ‘춤’은 해외 논문과 춤 관련 정보를 번역 게재해 해외 무용계 동향을 소개하는 거의 유일한 창구 역할을 했다. 1986년부터 1997년까지 ‘춤’ 편집장을 지낸 김경애 댄스포럼 발행인은 “누적된 적자로 발간이 어려워질 때마다 소장하고 있던 이중섭, 박수근의 그림을 하나씩 팔면서 잡지를 펴내셨다”며 “발행을 멈추면 안 된다는 의지가 워낙 강해 주변에선 한 달만 쉬자는 말도 꺼낼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현재는 며느리 조은경 씨가 편집장을 맡고 있다.


24일 빈소에는 이병옥 전통예술평론가회 회장, 박명숙 경희대 무용학부 학부장, 남정호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최태지 전 국립발레단장, 안애순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 등 무용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2006년 고인은 평생 수집한 춤 자료 16만 점을 기증해 춤 자료관 연낙재 개관에 기여하기도 했다. 한국 무용평론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출판문화대상(1985년), 중앙문화대상(1988년), 옥화문화훈장(1990년), 월남장(2004년) 등을 수상했다.

유족으로 부인 전상애 씨와 아들 유현(세명대 교수), 딸 유미·유진 씨와 사위 박태식(대한성공회 신부)·팀 매디건(샌프란시스코 도서관 관장), 며느리 조은경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종로구 대학로 서울대병원, 발인은 26일 오전 7시. 장지는 경기 일산 기독교 공원묘지다. 02-743-7784

김정은 기자 kimje@donga.com


조동화 趙東華

1922. 7. 12 함북 회령~2014. 4. 24 서울 종로


무용 평론가.

1953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했다. 1946년 함귀봉의 조선교육무용연구소에서 문철민으로부터 새로운 무용 이론을 접하고, 김경옥·차범석·최영봉 등과 어울리면서 무용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6·25전쟁 때는 서울에 잔류한 무용가 20여 명을 규합하여 한국무용단을 결성하고 1·4후퇴 때 대구로 집단이동시키는 데 큰몫을 했다. 1953년 11월 〈연합신문〉에 송범의 서울 데뷔 공연에 대한 무용평문을 쓰게 되면서 입문, 그후 〈새벽〉·〈조선일보〉 등에 기고하면서 본격적인 무용평론가로 활동하면서 당시 미개척분야인 무용비평계를 이끌어나갔다. 조동화는 1954년 〈꽃과 소녀〉를 출간했는데 이 책은 당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63년 동아방송 제작편성부장을 역임했고, 1966년 7월 〈춤〉을 창간했으며, 1972년 무용용어통일원 결성을 주도했다. 1976년 3월 국내 유일의 무용전문잡지인 〈춤〉을 재창간하여 매월 발간하면서 강인한 집념과 날카로운 안목으로 무용의 대사회적 위상을 정립하고 젊은 무용비평가를 발굴했다. 그는 무용비평계뿐 아니라 한국 무용계를 안정적 기반 위에 꽃피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82년 1월 무용비평계에서 처음으로 무용 펜클럽(후에 한국무용평론가회로 개칭)을 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조동화는 춤 선구자의 업적을 기리는 활동에 많은 기여를 했다. 자신이 발행하는〈춤〉지에서 발의하여 1996년 신무용의 대가 조택원의 춤 조각상을 국립극장 앞마당에 세웠고, 2001년에는 무용가들의 모금을 통해 안성 태평무전수관에 근대 전통춤의 대가 한성준의 춤 조각상을 세웠다. 이에 인간문화재 강선영은 그동안 한국 무용계를 위해 헌신한 조동화의 공로를 기리며 2006년 그의 흉상을 태평무전수관에 세웠다. 1958년 한국출판문화상, 1981년 예술평론상, 1988년 중앙문화대상, 1990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춤 - 월간 잡지.

1976년 3월 창간되었고 1993년 10월 현재 통권 212호를 펴냈다. 발행 겸 편집인은 조동화이다. 이 잡지는 춤에 관한 기사, 평론문을 소개하는 등 한국무용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창작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 또한 무용계의 일반적 흐름을 기록으로 정리해야 할 필요성이 커가던 시기에 창간되면서부터 권위있는 춤 잡지로 자리잡았다. 창간 이후 1980년대 초반까지 박용구·강이문·정병호·이순열·김영태·채희완 등이 평론가로 적극 참여했고 1980년대 중반 이래 이종호·김태원·김채현·김경애 등이 이 잡지를 통해 춤 평론가로 배출되었다. 1988년 중앙문화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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